꽃동네
강 문 석
야트막한 야산을 병풍처럼 뒤로 두른 작은 마을은 늘 평화로워 보였다.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쪼이는 겨울날의 양지바른 부락을 바라볼 때가 더욱 그러했다. 반백년 넘게 남녘 항구도시에 몸담아 고향이나 그 위쪽으로 향할 때면 달리는 열차 안에서 바라본 마을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오곤 했다. 가을이면 마을 앞 넓은 평야에 넘실거리는 황금물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봄꽃잔치가 열린다는 신문기사를 잊지 않은 아내가 산책을 나가자고 했다. 4월 첫 주말 오후였다. 천지사방에 기화요초 피어나는 계절은 금년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봄꽃잔치는 낙동강 둔치에서 열린다. 오랜 세월 동안 비닐하우스가 불법 점유하여 불결하고 볼썽사납던 고수부지를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말끔하게 바꿔 놓았다. 그 결과 인구 30만이 넘는 도시에서 주민을 위한 공간으로 황산공원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다.
주말을 맞아 부산을 비롯하여 김해 등 인근 도시에서 온 캠핑마니아들까지 공원 캠핑장을 차지했고 그들이 타고 온 캠핑카도 보인다. 사는 집에서 봄꽃잔치 행사장까지는 시오리쯤이고 십리쯤에 위치한 마을을 지나야한다. 손아랫동서의 고향마을이다. 오래전 동서의 부친상 때 찾았을 때와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마을에선 낙동강이 가깝고 강과 마을 사이엔 경부선 철길과 이차선 지방도가 평행으로 달린다.
화사한 꽃을 피운 벚꽃나무 가로수가 도로를 따라 끝도 없이 이어져 뻗어나갔다. 어찌된 일인지 마을은 거의가 빈집들이지만 대문은 잠기지 않았다. 숫제 대문을 달지 않았던 탐라 제주의 마을 풍경이 연상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주도는 도둑이 없어서 그랬지만 이곳 마을은 갑작스런 신흥도시에 편입되면서 엄청나게 치솟은 땅값이 만든 결과였다. 모두들 온라인에 ‘촌집 전세 놓는다’는 광고만 올려놓고 떠난 것이다.
“전세 2억5천, 전철역과 1킬로미터 거리”를 알리면서 전원생활 경험해 볼 사람을 찾는데 빈집이 많은 걸로 봐서 아직은 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모양이다. 부산지하철 2호선 건설 때 이곳 전철역사는 미리 들어섰다. 하지만 경기침체로 주택건설이 오륙 년 늦어지는 바람에 역사건물엔 먼지만 쌓이다가 작년에야 영업을 시작했다. 주인이 떠나간 걸 모르는지 꽃들은 예년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나 향기를 발하고 있었다.
8년 전 봄 ‘물금勿禁’으로 이주했을 때 그 지명이 낯설고 의아스러웠다. 지명에 붙은 ‘금할 금’자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공소公所로 시작하여 백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성당에서 펴낸 책을 통해서 그 궁금증이 풀렸다.
그 옛날 지금의 양산 땅인 신라와 김해 땅인 가야가 강을 국경으로 교역을 하면서 잦은 무역충돌을 일으켰더란다. 그래서 양국 간 분쟁을 금하고 무역을 통해 더욱 우호를 증진하기 위해서 '물금'이라고 했단다.
하지만 그 책임이 신라 쪽에만 있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찌 한쪽 지명에만 禁자를 붙였을까하는 의문은 남았다. 현재의 물금역 일원이 양국 간 교역은 물론 나라 밖에서 들여온 수입품이나 해산물을 싣고 안동 등지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화물선까지 심하게 단속하던 관문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하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악행의 역사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 수가 있다.
부락에 앉은 집들의 정원마다 봄꽃들은 죄다 피어 수목원을 방불케 했다. 수선화 개나리 동백 자목련 홍매화 산수유 벚꽃과 배꽃 복숭아꽃까지 망울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 꽃들을 카메라에 담기가 만만치 않아 고역이었다. 사진에 담지 않아야할 농기구나 가재도구들은 물론 플라스틱 물통까지 꽃 가까이 붙어 있고 황성옛터처럼 쇠락한 담장이나 헛간들이 무대의 세트 장치처럼 버티고 섰기 때문이다. 바람에 날려와 붙은 비닐만 걷어내고 셔터를 눌렀다.
다행인 것은 근년에 현대식으로 들어선 서너 채의 양옥이 있었지만 건축허가조건에 고도제한이 있었는지 단층 이상은 올리지 않아 전통마을의 이미지를 그대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고 무엇보다 조용해서 좋았다. 열흘 앞으로 닥친 총선이지만 적막이 흐르는 부락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입후보자들의 얼굴이 새겨진 그 흔한 선거홍보 포스터나 현수막은 물론 전단 한 장 길거리에 굴러다니지 않아 깨끗했다.
3십만 3천 인구의 도시에 이애란이 노래한 '백세인생' 숫자가 궁금했다. 아흔부터 살펴보자. 아흔 중반까진 547명이나 되지만 백세까지는 85명으로 크게 낮아졌다. 110세까진 27명이고 그 이상은 총 12명으로 급격하게 하향곡선을 그렸다. 역동적으로 도시 발전을 주도한다고 떠드는 인구 7만3천의 물금읍도 살펴봤다. 백세까지는 각각 74명과 12명에다 110세까진 3명에 그쳤고 그 이상은 달랑 2명으로 드러났다. 아직은 초로와 같은 인생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