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0년까지 세계는 안전하다. 최후의 심판이 그보다 더 늦어질 수는 있겠지만, 더 빨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작 뉴턴 경(영어: Sir Isaac Newton 1643년 ~1727년)
<뉴턴의 종말론>
18세기 초에 쓰인 이 ‘종말론’은 영국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이 구약성서 다니엘서를 근거로 내린 결론이다. 낡은 양피지 신학, 고대문학, 역사 솔로몬 성서를 연구하기도 했다. 성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연구했다고 적었다. 구약 다니엘서를 도대로 지구 종말의 날을 1260년+카를로스 대제가 황제에 오른 서기 800년을 계산의 시점으로 정하고 2060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가설을 세웠다. 자세한 설명이 쓰인 것이 사라져 지금으로선 추측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종말론(終末論)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사이비 교주를 떠올릴 것이다.
인류 최고의 천재가 예언한 그날이 다가온다. 그의 직업은 물리학자, 역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조폐공사장, 탐정, 정치인, 연금술사.... 이 마지막 르네상스인은 심지어 귀족 같은 풍모를 지니고 있다. 세상의 많은 이치를 깨닫고 신의 신비를 풀고자 한 아름다운 도전자는 명함을 만든다면 도대체 몇 개나 될까? 가끔 그의 사인을 받고 싶어서 서명을 흉내 내서 그려본다. 난 나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그의 서명을 거의 완벽하게 그릴 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나다. 그의 서명을 빙자해 금전적으로 착취를 하려는 목적은 전혀 없으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인 같은 사람이다. 가끔은 궁금하다.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해 시계, 물시계, 나침반, 망원경을 사랑했던 아름다운 금발의 남자는 무인도에 남겨진다 하더라도 모래 위에 나뭇가지로 끝없이 계산을 하면서 혼자만의 극한의 외로움을 즐겼을 것이다. 그의 고독과 사색으로 인류는 자연을 증명하는 많은 방법을 갖게 되었다. 그를 숭배하는 많은 과학의 광신도들이 나타났으니 우리의 뉴턴 경은 어디로 홀연히 여행을 떠난 것일까? 잘 있다는 안부만이라도 알고 싶다.
다음 생이 있다면 이 영국 남자의 일상을 취재해 보고 싶다. 그가 진정 하늘이 내린 예언자라면 적어도 자신이 어디로 향해 갈지에 대해 지도라도 남겨 두었더라면 인류의 불안감은 많이 줄었을 것이다. 세기의 지성도 자신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 죽기 전 손에 실 꾸러미를 쥐여줄 걸 그랬나 보다. 아님 주머니에 자갈이나 바둑알을 가득 넣고 가는 길마다 떨어뜨려달라고 약속할걸! 천재는 길을 잃지 않을 테니까!
1680년대 천재 과학자 뉴턴이 지구 최후의 날을 계산했다. 피라미드와 성경의 비밀을 풀려고 노력했다. 모든 게 심란한 요즘, 지구 종말론에 관한 노트와 세기말적 예언들이 넘쳐나면서 과거를 돌아본다. 3차 대전에 관한 예언과 온갖 재앙에 관한 이야기들이 세상에 넘쳐난다. 인간은 언제나 불안했다. 과거엔 관대하지만 미래는 늘 불확실한 인류 최고의 천재인 그의 기이함은 미래 예측까지 시도했다. 그의 상상을 초월한 호기심은 피라미드까지 손을 뻗는다. 그는 인류 최후의 날을 알고자 했다. 인심은 말라가고 삶의 질이 점점 떨어져 가고 공감력이 휘발돼 가는 게 느껴진다.
미셀 노스트라다무스
<종말론의 범람>
세기 종말론자들의 신명 넘치는 놀이가 시작되었다. 2032년 화성 충돌설이 있다. 운이 좋아 좀만 더 살고 이 예언이 맞는다면 난 색다를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세차 운동에 의해 화성이 가까워지면서 달과 충돌한다는 설이다. 2100년 해수면이 올라와서 지구가 물에 잠겨서 멸망한다는 종말론은 현재 초등학생 미만인 아이들이 장수할 경우만 겪게 될 우리와는 먼 이야기이다. 불교는 열반(涅槃, Nirvana)을 기독교는 천국을 회교는 육적인 낙원을, 인디언들은 행복한 사냥터를 말한다. 난 인디언들의 종착역이 가장 맘에 든다. 지금도 상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종말론은 로마시대에도 있었고 우리가 네안데르탈인과 씨름하던 그 시절에도 나뭇잎 어딘가에 기록해 두었을지도 모른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은유법이 넘치고 틀린 것들도 많다. 지금부터 나도 아무 말이나 잔뜩 떠들고 하나라도 우연히 맞아 내가 죽고 없는 세상에서 유명해져 있을 수도 있다. 내 사생활이 맨살처럼 드러나 만천하에 벌거벗길 것이 두려워 그냥 예언서는 남기지 말아야겠다.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언젠가 인류는 이슬 위에 영롱하게 빛나는 태양을 보며 최후의 아침을 조우하겠지! 마지막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불을 뿜는 용이 나타나 역동적 초월의 힘으로 지구를 휘감아 태울지도 모른다.
세상의 수많은 예언가들은 셀 수 없이 많은 말들을 쏟아내거나 돌려 까기 식으로 얘기한다. 그들은 겸허한 사람들이다. 점술가들도 물욕이 없는 분들만 있다. 나 같음 차라리 6자리밖에 안 되는 쉬운 복권 번호나 맞추어서 물질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로또를 연달아 10번만 맞추어도 세기의 예언가보다 더 유명해질 것이다. 예언자들은 모두가 무소유인가 보다. 돈에 관심이 없어서 물질과 관련된 것은 일부러 피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그냥 알면서도 슬쩍 넘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님 스스로 무소유임을 암시하고자 일부러 로또번호 예언은 경박하고 천박한 우리에게 양보했을 것이다.
뉴턴은 물리학이나 수학보다 연금술이나 성서에 더 많은 공을 들였다. 수은을 금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했다. 위대한 천재의 광기 어린 최후는 아이러니했다. 주식에 실패한 후, 인간의 광기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말을 했다. 말년엔 정신착란증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마태오복음서 24장 36절
대체 불가능 천재의 계산이 맞는 날인지를 내가 확인할 가망성은 전혀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세기의 종말보다는 내 종말이 훨씬 더 빨리 오기 때문이다.
세기말적 슬픔이나 광란은 1999년에 이미 예행연습을 해 보았다. 코믹 연기를 보는듯했다. 죽음 앞에 초연한 자는 잘 살아온 사람들일 것이다. 언제나 준비는 해도 허둥 버둥거리진 말자. 묵시(默示, Απōκάλυψις, apocalypsis) 문학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언제든 존재해 왔다. 이 세상과 저세상의 이분법적 논리는 수많은 인간들을 매혹시켜 왔다. 두려워하진 말자. 난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언제든 같은 모습으로 살아왔으니 어떤 형태의 모습의 삶도 두렵지 않다. 자명한 실패도 수십 차례 맛보았으니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행복과 불행의 기준도 없어서 새로운 세계의 동경도 없다. 죽어가는 꿈을 여러 번 꾸어 봤으니 싯다르타가 손을 내민다 하여도 얼른 잡을 것이다.
위대한 예언가는 역대에 사실 없었다. 그냥 수많은 두루뭉술한 말들을 잔뜩 남기고 몇 개 맞추면 대 예언가가 되도록 후대인들이 판을 깔아 주었다. 뉴턴이 세기말의 예언을 하고 주식이나 복권을 못 맞췄다는 것은 이해불가이다. 내가 없는 수백 년 후,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내가 환생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일 뿐일까? 종말론이 판치는 요즘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살고 싶다. 오늘 하루 잘 살면 된다.
종말의 종소리가 들려온다면 누군가는 기도를 하고 누군가는 잠을 청할 것이며 누군가는 사랑을 나누겠지. 기다리지 않아도 종말의 순간은 올 것이다. 추수를 마친 농부가 황금빛 들판을 보며 붉은 노을 아래 오랫동안 잘 살아온 늙은 아내의 거친 손을 잡고 기도하듯 삶을 정리하고 싶다. 수십 년간 함께 해온 짝이 사라진다는 건 충격일 것 같다. 아내의 죽음에 북 치고 노래한 장자의 경지엔 절대로 도달하지 못하리라! 극한의 슬픔을 초월할 순 없으리라! 매일 술 없지 살 수 없는 알코올중독자 남편과 정신과 약 없이 살 수 없는 금치산자가 오늘도 하루를 버티고 있다.
예배당의 종지기처럼 날마다 성실하게 내게 주어진 일 열심히 하고 그냥 버텨낼 것이다. 어떻게 눈치챘는지 모르지만 어린 송아지가 코뚜레를 하러 끌려가던 날 발악하던 모습에 뒤돌아서서 울었던 날들이 종종 떠오른다. 문득 지구의 마지막 날이 온다고 해도 난 아무렇지도 않게 흔들림 없이 종을 치러 갈 것이다.
만종, 1857-1859년. Musée d'Orsay, 파리.
대전쟁과 바이러스가 또다시 창궐할 것이라 했다. 아모스, 호세아 뉴턴이나 노스트라다무스, 현대판 구루라고 자칭하는 자들에겐 사실 아무 관심도 없다. 하지만 우리들의 종말이 언제인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적들 앞에서 서로에게 칼날을 벼리던 그 시절이 종말의 시작이었다. 종말은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
언제나 플러스(+) 또는 긍정(양성 positive)의 삶만이 최고인 줄 알았다. 마이너스(-1) 또는 네거티브(음성 negative)의 삶을 극도로 경멸하고 냉소했던 내 삶이 음을 가슴 시리도록 온전히 원했던 순간이 있었다. 신세 한탄을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어린 시절 얻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밤새도록 울어서라도 부모님께 반드시 뜯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아직도 남아있으니 나와 지인들이 지난 정부로부터 사과를 받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코로나 피해자 협회에 치킨값만큼의 돈을 후원했다. 열심히 싸우는 그들에게 항상 미안하다.
사람들은 백신이나 코로나 피해자들이 시위를 하면 알려고 하지 않고 돈만 받으려 한다고 손가락질한다. 그들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저렇게 몇 년째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싸우지 못한다. 그들은 진정한 사과나 적극적인 해명과 우리 모두의 공생, 상생할 수 있는 미래의 발판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딸을 잃은 아버지는 그녀의 억울함을 자신이 풀어야 할 오늘의 실타래라 생각하고 모든 게 해결되면 다 버리고 떠날 거라 했다. 그의 숭고한 종말이 위대한 예언서처럼 느껴졌다. 난 그 통곡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그들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저토록 간절하게 피의 노래를 부르진 못하리라! 종말을 알려고도 떠벌리려고도 설레발치지 말라! 내가 떠나는 날이야말로 종말의 날인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 종은 당신을 위한 것일 뿐이다.
하늘의 태양은 무슨 벌을 받아 저토록 오랜 세월을 불타는 가슴을 품고 있는 것일까?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