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 - 159. 영락제는 왜 몽골원정에 집착했나? ②
▶다섯 차례 몽골 원정
자금성의 건설 시작과 정화함대의 대규모 출항으로 주변의 시선을 돌려놓은 영락제는
정통성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는 방법을 몽골에서 찾았다.
북으로 밀려갔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세력으로 남아 있는 몽골을 완전히 제압해 복속시킴으로써 민심을 돌려놓자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시작부터 엇나갔다.
[사진 = 고비사막]
10만 명에 이르는 영락제의 명군(明軍)이 고비사막을 넘어 최초로 몽골 원정에 나선 것은 1409년이었다.
이 때 동몽골은 칭기스칸 혈통을 이은 울제이 테무르칸, 불교식 이름으로는 명사(明史)에
푼야시리라고 부르는 인물이 끌어가고 있었다.
서몽골은 오이라트의 지도자 마흐무드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사진 = 케룰렌강]
몽골 케룰렌 강변까지 진출한 명나라군은 초원 깊숙한 곳에서 동몽골군의 기습을 받았다.
[사진 = 몽골의 기마병]
비록 초원으로 쫓겨 간 몽골이 어지러운 정세 속에 놓여 있다고는 하지만
전투에서 발휘되는 몽골 기마병의 위력은 여전히 대단했다.
10만 명에 이르는 명나라 대군은 지휘관을 포함해 거의 모두 전멸했다.
▶명군 오논강․ 다달솜까지 진격
[사진 = 다달솜(칭기스칸 탄생지)]
몽골을 제압해 위신을 세우려 했던 영락제는 크게 격노했다.
그래서 영락제는 다음해부터 죽을 때까지 15년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몽골초원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게 된다.
이듬해 원정에서 영락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몽골의 북부 오논강 상류와 칭기스칸의 고향인 다달솜 근처까지
진격해 동몽골의 군대를 격파했다.
[사진 = 몽골의 군영]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비틀거리던 동몽골에 이번에는 오이라트의 마흐무드 군대가 밀어닥치면서
사실상 동몽골은 초원의 지배권을 거의 상실하게 된다. 오이라트는 그때까지 영락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관계는 적(敵)의 적(敵)은 아군(我軍)이라는 등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칭기스칸의 가문이 다시 일어서는 것은 명나라에게 가장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멀리 있는
오이라트를 도와 동몽골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다.
오이라트의 서몽골도 쿠빌라이 가문이나 동몽골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명나라의 지원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몽골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상황에서 오이라트는 구태여 명나라와 손을 잡을 필요가 없었다.
마흐무드는 곧바로 명나라와의 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영락제의 목표물은 당연히 오이라트로 바뀌었다.
▶방향 가늠 어려운 초원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 한 가운데 서면 방향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 몽골 동부의 넓은 평원의 한 가운데 놓였을 때 그 것을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방향이나 목표물을 찾을 수 있는 지형지물 하나 없이 사방이 넓은 쟁반처럼 펼쳐져 있는 초원에서는 길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사진 = 동몽골 대평원]
그래서 현지 지형에 밝은 유목민들도 구릉 조차 없는 대평원에다 게르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일은 가급적 피한다.
사람도 사람이지만 길을 잃은 가축을 찾을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동몽골의 끝에 있는 도시 초이발산에서 보이르 호수에 이르는 광활한 초원지역에서는 몇 시간을 차로 달려도 게르 하나,
가축 한 마리 구경하기 어려웠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차가 다닌 길이 여기 저기 나있고 드문드문 전신주가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큰 낭패를 보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과거에 유목민이 아닌 외부의 사람이 초원을 가로질러 다니는 일은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고초 겪은 영락제 초원원정
[사진 = 초원의 길]
영락제는 다섯 번에 걸쳐 초원원정을 감행했다.
아마도 나침반도 없이 밤에 별자리만 바라보며 방향을 잡아야했을 것이다.
또 표지물 하나 찾기 어려운 들판을 지나야 했던 명나라 군대의 고초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이 현지에서 거의 아무 것도 구할 수 없어 식량과 모든 전쟁 물품을 직접 조달해야 하는 상황에서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겪게 되는 곤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 = 영락제의 몽골 원정]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락제는 계속적으로 초원 정벌 모험에 나섰다.
1414년 단행된 원정에 동원된 기병과 보병은 모두 50만 명에 이르렀으니 엄청난 군대가 참여한 대 원정이었다.
이 때 격파해야할 대상은 관계 단절을 선언한 오이라트였다.
초원으로 밀려간 명나라 대군은 헨티지역에서 오이라트군과 동몽골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후 명나라군은 東西몽골군의 빈번한 기습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몽골의 군대는 이미 주원장의 군대에게 밀려 쫓겨 가던 과거의 군대가 아니었다.
한 때 중국 생활의 편안함에 젖어 용맹성을 잃어버리고 나약해졌던 유목민들은
원래 자신들이 살던 초원으로 돌아와서는 잃었던 과거의 강인함을 거의 되찾았다.
특히 주력군인 오이라트는 삼림지대에서 살았던 용맹스런 종족이었다.
이들은 몽골 세계제국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과거 방식대로 살면서 고유의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초원에서 치고 빠지는 이들의 신출귀몰한 전술에 명나라 군대가 고초를 겪은 것은 당연했다.
공격을 가한 뒤 달아나는 몽골군을 추적하던 명군은 이내 사정권 밖으로 벗어나 버리는 이들을 놓치고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기가 일쑤였다.
전투를 완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철수했던 영락제의 군대는 한동안 원정에 나서지 않았다.
▶오이라트 도와 마지막 원정
[사진 = 오이라트군 전투]
영락제는 1424년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마지막 원정을 단행한다.
그 사이 몽골의 정세도 변해 있었다.
오이라트는 지도자 마흐무드가 1416년 죽고 그의 아들 토곤 테무르가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동몽골쪽은 칸 자리를 둘러싼 혼란이 거듭된 뒤 오고타이계 또는 칭기스칸의 동생 가문인 호르친부 출신으로
주장이 엇갈리는 아다이라는 인물이 칸 자리에 올랐다.
[사진 = 아다이 칸]
아다이칸(Adai Khan, 阿岱汗)을 받치고 있던 인물은 이란계인 아수드족의 아룩타이(Arughtai)라는 인물이었다.
이 두 인물에 대한 설명은 몽골의 연대기와 명나라의 기록에서 혼돈을 빚고 있지만
아무튼 이 두 인물이 주축이 돼 오이라트의 주도권 행사에 저항하며 별도의 세력을 형성했었던 것 같다.
오이라트가 다시 영락제에게 접근해 아다이칸의 세력을 제압하는 일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던 것을 보면 그렇다.
▶회군 길에 숨진 영락제
영락제는 오리라트가 관계를 단절하고 저항했던 것을 생각하면 괘씸했다.
하지만 영락제의 기본 정책은 쿠빌라이 가문을 몰락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성장을 시작한 신생세력을 도와 쿠빌라이, 나아가서 칭기스칸 가문이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오이라트를 지원해줬다. 1424년 영락제의 몽골 친정은 그래서 감행된 것이다.
하지만 오이라트에게 힘을 보탠 영락제의 마지막 원정도 아다이칸 세력을 완전 제압하는 데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그 원정의 최대 피해자는 영락제 자신이 됐다.
원정을 마치고 북경으로 돌아가던 영락제는 도중에 숨을 거두고 말았기 때문이다.
64살의 노구를 끌고 초원 원정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죽음의 원인은
지나친 모험의 결과가 거의 확실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