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1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아침기도
7월 11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저녁기도
7월 11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끝기도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 480년경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교육받은 후 수비야코에서 은수 생활을 시작하고 자기 주위에 제자들을 모았다. 그 다음 몬테 카시노에 가서 여기에다 유명한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 규칙을 썼다. 이 수도 규칙이 널리 전파되어 '서방 수도 생활의 사부'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547년 3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8세기 말부터 여러 지방에서는 7월 11일에 그 축일을 기념해 왔다. 1964년 10월 24일 교황 바울로 6세가 유럽의 수호 성인으로 선언하셨다.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수도 규칙]에서 (Prologus, 4-22; cap. 72,1-12: CSEL 72,2-5. 162-163)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다 우선 무슨 선행을 시작하든지 그것을 마치기 위해 주님께 간절한 기도로써 청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당신의 아들로 삼으신 주님께서 우리의 악행 때문에 한 번이라도 상심하시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우리 안에 주어진 선에 따라 그분을 섬겨, 아버지께서 분노하시어 당신 아들에게서 상속권을 박탈할 뿐 아니라 우리 악행 때문에 격분한 무서운 주인으로서 당신 영광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극악한 종들에게 영벌을 주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침내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하신 성서의 말씀에 자극을 받아 일어나도록 하자. 우리는 하느님의 빛을 향해 눈을 뜨고 주의를 다하여 하느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외치시며 훈계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이니, "그분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하시고, 또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성신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신 바를 들어야 한다."고 하신다. 그러면 (성신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아이들아, 와서 내 말을 듣거라. 주님의 두려우심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겠노라. 너희는 빛이 있는 동안에 달려, 죽음의 암흑이 너희를 덮치지 않도록 하여라." 주께서 이 말씀을 백성의 무리에게 외치시고 그들 가운데서 당신 일꾼을 찾으시며,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냐?"고 말씀하신다. 만일 내가 이 말씀을 듣고 "저로소이다."라고 대답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만일 네가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원하거든, 네 혀는 악을 피하고 네 입술은 거짓된 말들을 삼가라. 사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아서 뒤따라가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이대로 행한다면 내 눈은 너희를 바라보고 내 귀는 너희의 기도를 들을 것이며, "너희가 나를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친애하는 형제들아,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의 이 말씀보다 우리에게 더 반가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보라, 주께서 당신 자애로써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신다. 우리는 신앙과 선행의 실천으로 허리를 묶고 복음 성서의 인도함을 따라 주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우리를 당신 나라로 부르시는 주님을 뵈옵도록 하자. 만일 우리가 그분 나라의 장막 안에서 살고자 한다면, 선행으로 달리지 않고는 결코 그 곳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께로부터 분리시켜 지옥으로 이끄는 쓰고 나쁜 열정이 있듯이, 악습에서 분리시켜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좋은 열정도 있다. 그러므로 수도자들은 지극히 열렬한 사랑으로 이런 열정을 실천할 것이다. 즉,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복종하고, 아무도 자기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이며, 자기 아빠스를 진실하고 겸손한 애덕으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교부들의 가르침 :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도 모든 시대를 위한 하느님의 사람 고성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이연학 신부 성 베네딕도(480?~547?)는 사실상 가리워진 인물이다. 천생 수도승인 그는 자기 업적의 뒤편으로 물러서서 자기를 가리는 데 상당히 성공한 편이다. 그렇다고 우리 눈에 완전히 숨어 버리지는 못했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540~604)이 남긴 전기 때문이다(「대화집」 제 2권). 그리고 스스로 남긴 유일한 작품인 「수도 규칙」 역시, 깊은 눈매를 지닌 이들에게는 그의 웅숭깊은 사람됨을 엿보게 해 준다. 출세 수단으로서의 학문 거부 어려서부터 「노인의 마음」(cor senile)을 지녔던 베네딕도는 이탈리아 중부 누르시아의 넉넉한 집안 출신으로, 젊어서 공부를 위해 로마로 떠났다. 그러나 일체의 학업에 몹시 환멸을 느낀 그는 중도에 공부를 작파한다. 출세와 향락의 수단으로서의 학문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참된 출세, 즉 「출세간(出世間)」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는데, 그레고리우스는 이 대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분은 유식한 분이시면서도 무식한 사람이 되셨고, 지혜로운 분이시면서도 무지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은둔하셨다"(「대화집」 2, 1). 세상 지식을 초월하여 사람들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는 신령한 지혜의 길, 이른바 「절학무우(絶學無憂, 「노자」 20)」의 영적 여정에 접어든 것이다. 이어지는 「대화집」의 이야기는 수많은 기적들로 가득 차 있어 자칫 현대인의 눈에는 가소롭게 여겨지기가 십상이지만, 성서와 고대 교부들의 어법에 밝은 사람이면 그 기적 이야기들이 깊은 속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하느님의 말씀은 신약 시대에서는 성인들을 통해 현현(顯現)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 말씀의 현현이었듯,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신비의 현현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몸과 삶이다. 그레고리우스에게 있어서 베네딕도는 바로 그런, 하느님 말씀의 투명하고도 빛나는 반영이었다. 그래서 그는 베네딕도를 「하느님의 사람」(vir Dei)라고 부르며, 그가 행한 수많은 기적 이야기를 통해 구약과 신약 성서의 말씀이 어떻게 면면히 한 인간의 삶에 육화되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첫 기적은 로마에서 물러나 유모와 함께 한적한 마을에 정착하여 살 때 생겼다. 유모가 빌려온 체가 떨어져 두 조각으로 부서지고, 유모의 눈물에 측은지심이 북받친 베네딕도가 기도로써 체를 원상복귀 시킨 것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마을 사람들의 찬사를 받게 된 베네딕도는, 이 찬사를 피해 본격적으로 수행자의 길에 접어든다. 독살 음모, 사랑으로 감싸 수비아코 골짜기의 한 동굴에서 3년간 은수 생활에 정진하며 가혹한 영적 투쟁 끝에 마침내 믿음직한 영적 스승으로 드러난 그는 인근 수도원의 아빠스로 불려간다. 그러나 느슨한 생활에 익숙해있던 그곳 수도승들은 자기들이 모셔온 새 아빠스의 복음적 긴장과 활력을 견딜 수 없어 독살 음모를 꾸미게 된다. 독을 탄 포도주 잔이 그의 강복으로 깨어져 고약한 음모가 백일하에 드러난 순간에도 그는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온화한 얼굴과 평온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서, 『하느님 안전에서 당신 자신과 함께 홀로 지냈다』. 그러나 이렇게 공명심(체의 기적으로 말미암은 찬사), 육욕, 그리고 분노와 공격성이라는 내면의 적을 극복한 베네딕도 곁에는 이내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고, 그는 수비아코 골짜기에 열두 수도원을 짓고 형제들의 안내자가 된다. 그러나 시기심에 불탄 인근의 한 사제가 그를 독살하고 형제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기에 이른다. 베네딕도는 다시금 맞은 이 시험에서 이전 보다 월등히 큰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니, 독살 음모가 탄로난 후에도 『자기 자신보다 그 불행한 사람을 위해 더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베네딕도가 마침내 몬테 카시노로 옮겨와서 「산 위의 마을」과도 같은 대 수도원을 짓게 된 때는 이렇게 악습과 싸우는 시기가 모두 끝나고 영적인 절정기를 맞았을 때였다. 「대화집」은 이후에도 여러 기적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누이 스콜라스티카 일화는 참으로 아름답다. 인근 수녀원의 책임자로 있던 누이가 찾아와, 둘은 수도원 밖의 한 집에서 밤이 이슥해지도록 거룩한 대화로 시간가는 줄 모른다. 가지 말고 밤새 이야기를 계속하자고 청하자 펄쩍 뛰는 오빠 앞에서 누이는 천연스레 기도를 바치고, 그러자 마른하늘에 난데없이 천둥 번개와 함께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이리하여 거룩한 오누이는 밤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레고리우스는 스콜라스티카가 베네딕도보다 『더 강했다』고 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맺고 있다. 『더 많이 사랑하였으므로 더 능했도다』. 복음적 강조가 묻어나는 의미심장한 유머가 아닐 수 없다. 규칙서에 임시성 부여 그레고리우스는 「베네딕도의 규칙서」를 두고 그 단순명쾌한 필치와 함께 무엇보다 「훌륭한 분별」을 상찬한다. 사실 그의 규칙서는 많은 부분 「스승의 규칙서」(익명의 「스승」을 일인칭 주어로 하고 있는 작품이라 그리 부른다)의 발췌 요약이다. 그리 길지도 독창적이지도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베네딕도는 수도 생활의 모든 면을 세세히 규정하려 든 「스승」과 달리, 자기 규칙서에 일종의 임시성을 부여했다. 큰 줄기만 규정하고, 나머지 세세한 부분은 다양한 지역 수도원의 아빠스들 재량에 맡긴 것이다. 사실 타인의 분별력을 신뢰해 주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큰 분별력일 것이다. 바로 이런 「임시성」으로 말미암아 「베네딕도 규칙서」가 가장 널리 그리고 오래 지속된 규칙서가 되었다는 점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얼굴없는 성인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 흩어져 다양한 모습으로 베네딕도의 정신과 규칙을 살고 있는 수많은 베네딕도회원들의 삶이야말로 「얼굴없는 성인」인 베네딕도의 얼굴을 가장 잘 비추어주는 거울인지도 모른다. [가톨릭신문, 2003년 11월 23일]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38. 수도회 창설자편 (1) 베네딕토(하)
베네틱토 성인은 양팔을 높이들고 기도하는 가운데 선채로 선종했다.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기도하고 일하라’ 정신 강조 순명 침묵 겸손을 기본 덕으로 기도 독서 노동으로 일과 구성 유럽 수도원 생활의 규범이 되었던 베네딕토의 규칙서는 성인의 유일한 저서인데 정확한 저술 시기는 알 수 없고 다만 생애 후반기(530∼540)에 마무리 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규칙서는 수도 생활에 관한 이론 뿐 아니라 비코바로(Vicobaro), 수비아코(Subiaco), 몬테카시노(Monte Casino)에서의 수도 경험과 체험들이 녹아있다는 면에서 이론과 규율이 잘 조화돼 있으며 또한 수도 생활에 요구되는 핵심 사항들이 체계적으로 서술돼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토는 뛰어난 분별력과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저술하였다. 그분의 성품과 생활을 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분이 행동으로 가르친 모든 내용을 이 규칙서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이 직접 생활하셨던 것과는 다른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대화집」에서 베네딕토 규칙서에 관한 내용을 이같이 소개하고 있는데 당시 여러 수도 규칙들이 있었던 상황에서 베네딕토 규칙서가 명성을 지니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내용적인 면에서 우월성을 인정받은 것과 함께 그레고리오 대교황이 베네딕토를 서방 교회의 가장 뛰어난 수도승으로 소개한 것도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그같은 배경에 앞서 베네딕토 규칙서가 베네딕토 수도회 담을 넘어 인근 다른 수도원들에 퍼져 가게 된 것은 그만큼 성인의 사상과 영성이 복음의 정신을 따르고 있음을 수도자들이 공감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갈리아 남부 지역에서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 지역으로 퍼져 독일에 전해졌던 규칙서는 카롤링 개혁 이후 중세 모든 수도원들이 베네딕토 수도 규칙을 따를 만큼 광범위하게 퍼져나갔고 수도자가 된다는 것은 곧 베네딕토 회원이 되는 것을 의미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베네딕토 규칙서는 머리말 부분의 「수도이상」이나 71∼72장의 「형제적 사랑」에 관해 서술한 내용 등을 통해 성인의 영성과 진 면목을 살펴볼 수 있다는 면에서도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베네딕토는 여기서 윤리적인 영성을 설파하는 것만이 아닌, 초기 수도회 정신을 이어받아 하느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는데 모든 영적 행위들의 최종 관건은 하느님을 찾는 것, 종교적 그리움을 채우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학자들은 성인의 또 다른 영성을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Menschenfreundlich keit)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규칙서 전면에 깔려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신학자 요셉 봐이스마이어는 『사람이 자신의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 그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 그가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발견하고 유지해 나가는 것, 자신의 능력의 가능성과 한계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알고 자신과 함께 있는 것 등이 수도 규칙에서 관심을 가지는 부분들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성인은 규칙서에서 「수도승」(monacus)은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며 수도원은 「주님을 섬기기를 배우는 학원」으로 칭했으며 수도 생활의 기본적인 덕을 순명과 침묵과 겸손으로 제시했다. 예루살렘의 초대 공동체 생활에서 수도 생활의 이상을 찾았던 베네딕토는 수도자의 일과를 기도와 독서, 노동으로 구성하였고 성서 독서를 수도 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규정, 공동 기도와 함께 수도자들의 영성 생활을 이루는 기초로 설명했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의 정신은 기도와 노동의 조화를 꾀했던 성인의 정신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베네딕토회 회원들은 그같은 기도와 노동의 균형 정신을 바탕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학교를 세우며 서방 세계안에서 영적 문화적 종교적 삶의 중심을 이뤄갈 수 있었다. 수도 서원 부분의 「정주」와 「수도승다운 생활」에 대한 개념은 베네딕토가 처음 도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정주 서원은 실제 수도원 안에 머물러 살아야 한다는 외적인 정주의 의미도 있지만 하느님을 향해 항구히 정진해야 한다는 내적 정주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형제적 공동체와 관련해서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은 공기와 같이 중요하고, 형제적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이어야 하며,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표현되어야 할 것」으로 설명한다. 성인은 수도 공동체의 근본적 바탕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보았다. 형제들간에 나누는 모든 인간적인 감정들 보다 그리스도를 더 높이 세워야 할 것으로 보았으며, 또 그리스도는 지속적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의 기초로 보았다. 이러한 베네딕토 규칙서는 현대 교회에서도 대표적인 수도 규칙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베네딕토 이후에 생겨난 서방 교회 규칙서 대부분이 영향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인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베네딕토 수도회 활동은 세계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주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 삶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만 한편 지역 교회의 필요성에 따라 교육, 학문, 선교 등 다양한 활동에 종사한다는 이념은 수도회의 학교 운영이나 신학, 철학, 과학 등 학문 연구를 가능하게 했고 예술 활동을 꽃피게 했기 때문이다. 발터 닉(Walter Nigg)에 따르면 베네딕토 성인은 「건설하는 사람」이었다. 많은 요구 사항들로 사람들을 억누르려 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건설하려 했으며 모든 종류의 슬픔과 싸워 나갔다. 성인은 죽음을 맞기 6일전 자신의 무덤 문을 열어놓게 하고 사망 당일에는 성체를 영한 다음 두 수도자 팔에 의지해 양팔을 높이들고 기도하는 가운데 선채로 선종했다.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가톨릭신문, 2004년 11월 14일, 이주연 기자] 베네딕도 패 : 성 베네딕도의 메달(The medal of St.Benedict) 성 베네딕도 탄생 1400, 1500주년을 기념하여 여러 수도원에서 다양한 모양의 메달이 만들어졌다. 이 메달은 1880년 몬떼까시노 수도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 성인이 오른손에는 십자가를 그 아래 독배, 그리고 왼손에는 성규를 들고 있다. - 성인의 좌우에는 "CRUX SANCTI PATRIS BENEDICTI" (사부 성 베네딕도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 성인의 발 아래에는 "EX S M CASSINO MDCCCLXXX" (1880년 거룩한 까시노 산에서)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 가장자리에 "Ejus in obitu nostro presentia muniamur" (우리 임종때에 성 베네딕도께서 함께 하시어 보호하소서)라고 되어 있다. 성인은 성체를 모시기 위하여 일어서서 기도하시면서 선종하셨다.
- 십자가 안에 수직으로 "CSSML = CRUX SACRA SIT MIHI LUX" (거룩한 십자가가 나의 빛이 되소서)라는 기도가 새겨져 있고, 수평으로는 "NDSMD = NON DRACO SIT MIHI DUX" (악마가 나의 인도자 되지 않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이 새겨져 있다. - 십자가의 네 모서리에는 "CSPB = CRUX SANCTI PATRIS BENEDICTI" (사부 성베네딕도의 십자가)라고 되어있다. - 십자가 위에는 "PAX"( 평화)라는 모든 베네딕도회의 모토가 새겨져 있다. - 가장 오른쪽 위에서부터 아래로, 왼쪽 아래에서 위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들어 있다. "VRSNSMV : SMQLIVB = Vade Retro Satana Numquam Suade Mihi Vana : Sunt Mala Quae Libas Ipse Venena Bibas." (사탄아 물러가라. 헛된 생각을 하게 하지 말고 네가 마시는 것은 악이니 네 독이나 마셔라) - 성 베네딕도의 "십자가 메달"은 빠스카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하게 십자가의 구원적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코이노니아 제 9집. 한국 베네딕도수도회 연합. 1984년 겨울호.118쪽 참조)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사 - 은수자들과 수도원 설립 6) 성 베네딕도 서방 교회 수도원 제도의 시조와 입법자라고 할 수 있는 베네딕도 성인(480~546)의 생애에 대해서는 대 그레고리오 성인이 전하는 "대화집"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이탈리아 중부 누르치아의 명문가 출신이고 로마에서 교육을 받던 중 비윤리적인 분위기에 환멸을 느껴 로마 북쪽 수비아꼬로 물러가 수행생활을 하자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추종자들이 되었다. 그리하여 단기간 내에 빠코미오와 비슷하게 조직적인 수도원을 시작하여 12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각 수도자는 원장에게 순명하였으나 수도 규칙은 없었다. 로마 남쪽 몬떼 까씨노로 이주하여 수도원을 세우고 규칙서를 썼다. 이 규칙서는 빠코미오, 바실리오, 까씨아노, 아우구스띠노 성인들과 스승의 규칙(RM)을 근거로 하며 로마 시대의 가부장적 제도를 도입하여 만든 것으로서 서방 교회의 모든 수도원에 영향을 끼쳤다. 817년에 개최된 엘라샤뻬르 공의회는 다른 규칙서들 보다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서를 수도생활의 기본 규칙으로 제의하였다. 이리하여 이 규칙서는 수도생활의 전통과 실천을 충실히 계승하게 되었다. 교황 바울로 6세는 1964년 10월 24일 위대한 이 성인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공포하였다. 황폐하고 야만적이었던 유럽을 신앙 정신으로 교화시킨 공로를 생각하면 베네딕도 성인과 그 유예들의 공로는 당연한 것이며 그 칭호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합당하다고 여겨진다. 베네딕도 성인의 위대한 규칙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서문에서 7장은 영성 훈화로서 수도원은 '주님을 섬기는 학교'라는 것과 공동생활(정주)을 중심으로 하여 순명, 침묵, 겸손을 강조한다. 8~73장은 수도생활과 수행에 관한 규정을 제시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성무일도, 공동체와 형제들과의 관계, 처벌, 아바스와 여러 직위에 필요한 덕행, 식사 규칙, 보속, 사순절 수행, 노동, 입퇴회 절차, 손님 접대 등 수도원과 수도자에 필요한 여러 가지 사항들이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다. 몇 가지 규칙들을 보면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 수도자들의 일상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8일,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원은 "주님을 섬기기 위한 학교"라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규칙서를 끝맺고 있다. "우리가 이 규칙서를 쓰는 것은, 수도원들 안에서 이것을 지킴으로서 어느 정도 품행을 올바르게 하며 수도생활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하늘의 고향을 향해 달려가려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초보자를 위해 쓴 이 최소한의 규칙을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 완수하여라. 그리하면 마침내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위에 언급한 교훈과 덕행의 더욱 높은 절정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아멘"(73장). 중세기에 생긴 많은 수도원들은 모두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라 수도생활을 하였다. 16세기에 예수회를 창설한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 자신이 세운 수도회를 두고 겸손하게도"가장 미소한(minima) 수도회"라고 칭한 것은 베네딕도회를 염두에 두고 한 표현이다.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서를 사용하는 수도회 가족은 카롤링 왕조 이전에 남부 이탈리아와 로마를 제외하고 앙글로 삭손 영국 지역, 남부 갈리아 지역, 갈리아 지역 북부와 중부 꼴룸반 베네딕도 수도회들, 성 보니파씨오의 독일 선교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근대 이후에는 베네딕도회 총연합과 시스떼르시안의 두 지류로 되어 있으며 수도회 총연합에 속하지 않는 수도회들도 이 규칙서를 사용하고 있어 그 가치와 무게를 능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15일,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베네딕도(상)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 본당 주임) 서방 수도제도의 입법자 또는 수도생활의 사부(師父)라 불리는 성 베네딕도(480-547)는 시대가 요청했던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모범적 삶을 살았으며 영적으로 절도와 조화를 이루는 훌륭한 수도 규칙서를 썼다. 그의 규칙서는 당시와 중세기의 수도생활 뿐 아니라 교회 및 사회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크게 기여하였고 오늘날도 그러하다. 우선 성인의 생애와 영성사 안에서의 역할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생애 베네딕도의 삶과 행적에 관해 전해주는 역사적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그에 대한 출전은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쓴 '대화집' 제 2권 뿐이다. 이 책은 베네딕도 사후 50년이 채 안되던 539-544년 사이에 그의 제자들의 증언에 근거하여 쓰여진 것이다. 저자는 베네딕도를 하느님의 사람의 전형, 백성을 위해 그리고 수도회를 위해 크게 기여하며 봉사한 카리스마적 인물로 묘사한다. 베네딕도는 480년경에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노르치아(Norcia)의 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년기에 수사학과 문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로마에 갔다. 그는 그 도시에서 사회적 퇴폐와 동료들의 방종을 목격하면서 환멸을 느껴 그가 추구하던 학문에 회의를 갖게 되었으며 한편 영적 생활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강하게 감지하게 되면서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로마에서 70여 km 지점에 있는 수비아코(Subiaco)라는 한적한 산골로 들어가 한 동굴에서 은거하며 3년간 독수생활을 하였다. 이곳은 영성의 대가가 될 그가 회심의 초기를 지낸 뜻깊은 연고지이다. 그곳은 기도와 묵상, 극기 중에 성령께로부터 양성되던 수련의 장이었으며 하느님과의 진정한 친교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곳이었다. 한편 어느 때보다 맹렬한 유혹과 투쟁하면서 시련의 수행 여정기간을 지낸 곳이기도 하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의 덕망이 점차 널리 알려져 많은이들이 지도를 받으러 왔다. 어느날 비코바로(Vicovaro)에 있던 수도원의 수사들이 찾아와 세상을 떠난 선임 원장을 이어 후임원장을 맡아주길 간청하였다. 그들의 간곡한 청원을 받아들여 원장으로 부임한 베네딕도는 규율이 문란하고 무질서한 그 수도원의 제도를 철저히 개혁하고자 하였다. 엄격한 규율을 요구하는 그에게 불만을 품은 수사들은 그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다. 황당한 사건을 겪은 후 그는 동굴로 다시 돌아와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많은 구도자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을 위해 수비아코 산 주변에 12개의 수도원을 세워 각 공동체에 12명씩 분산 배정하여 생활하게 했으며 그는 중앙 수도원에서 수련자들을 지도하였다. 이것은 공동체적 행동양식에 잘 맞는 공생(共生)수도생활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 지역 사제 플로렌시오와의 갈등으로 수비아코를 떠나야 했다. 평신도 신분의 베네딕도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지도를 받는 데에 대한 그의 질투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529년경 베네딕도는 로마에서 약 140km 떨어져 있는 카씨노 지방의 웅장한 산악 높은 지대에 정착하였다. 거기에 세례자 요한 성당, 성 마르티노 성당과 함께 새 수도원을 세웠는데 그곳이 오늘 성베네딕도 수도회의 본부가 있으며 역사적 명소가 된 몬테카시노(Montecassino)이다. 이 수도원에 점차 수도자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베네딕도는 생활의 지침이 될 규칙의 필요성을 느꼈고 결국 수도생활의 규범이 될 역사적인 규칙서를 작성하였다. 이 규칙은 공동생활을 명백히 규정하고 순명을 최고의 덕으로 삼으며 재물의 사유(私有)를 금지하고 평생 한 수도원에 머무를 것(定住)과 특히 전례를 중요시하고 성교회의 가르침에 성실히 따를 것을 명하고 있다. 그는 몬테 카시노에 정착한 후엔 테라치나(Terracina)에 수도원 설립의 임무를 맡은 수도자들을 돕기 위한 단 한번의 방문 외에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수도원 근처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던 여동생 스콜라스티카와 그 동료들에게 수도규율을 만들어 주었으며 영적 및 경제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스콜라스티카가 죽은 지 얼마 안되는 547년에 세상을 떠났다. 2.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 1) 베네딕도는 서방 수도원 제도의 시조 또는 입법자로 불린다. 그것은 그가 수도생활을 처음 고안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동방에서 시작되어 서방에 들어온 수도생활을 뿌리 내리게 한 분으로서 잘 정립된 수도규칙서를 작성하여 수도생활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뜻이다. 베네딕도 이전에 12개의 수도 규칙서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니 그것들이 베네딕도에게 도움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중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수도 규칙서, 체사리오의 두 개의 규칙서 그리고 '스승의 규칙서'(Regula magistri)가 미친 영향은 현저하다. 체사리오의 둘째 규칙서는 베네딕도의 과업을 예시하고 준비시킨 역할을 했다고 본다. 예를 들면, 수도자들의 재산 공유와 정주를 엄격히 요구한다는 점이다. 베네딕도가 제일 많이 활용한 자료는 '스승의 규칙서'이다. 특히 베네딕도의 규칙서 제 1부의 많은 부분은 그 규칙서의 내용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베네딕도는 규칙서를 창안한 것이 아니며 기존의 다양한 자료들의 본질적인 요소들에 그의 고유한 카리스마적인 견해들을 첨가하여 종합하면서 모범적 규칙서를 만든 것이다. 그의 규칙서는 실로 교회 역사 안에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온 전형적인 것이다. 2) 베네딕도는 규칙서를 작성할 때 은수생활의 전통 및 동.서방 공동생활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한편 전통적 수덕의 지나친 엄격성을 피하며 절제와 중용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의 규칙서에 의한 수도자들의 침묵과 고독을 겸한 공동생활은 영적 자유를 누리기 위한 세상으로부터의 은둔과 그리스도교적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한 형제적 친교라는 두 가지 이상을 조화롭게 묶었다. 3) 베네딕도의 규칙서는 서방사회의 생활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수도생활 뿐 아니라 교회 및 사회생활에까지 크게 기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 비오 12세는 베네딕도를 '유럽의 아버지'라 불렀으며 바오로 6세는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6세기 중엽부터 그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는 수도자들이 점점 늘어났으며 9세기 초 부터는 그들이 전 유럽에 퍼져나갔고 또한 많은 선교사들이 배출되고 파견되어 유럽의 새로운 문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특히 베네딕도의 기도와 노동의 일치 및 조화에 대한 가르침은 경제 생활 뿐 아니라 영성적 차원에서도 그리고 인문주의 문화 및 교육적 차원에서도 중요성을 갖는다. 이미 동방의 수도자들도 사막이나 수도원 안에서 노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노동은 오직 한 가지 주요한 과제인 기도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에 그 여가를 메꾸기 위한 수단 또는 불가피한 경제 생활의 방편 정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베네딕도에겐 노동이 기도 옆에 놓인 다른 하나의 주요 과제로 고려되었으며 따라서 노동은 기도와 함께 매일의 시간표에 배정되어 부과되었다. 기도와 노동의 조화에 대한 가르침은 하느님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일치, 관상과 활동의 일치를 실현하도록 깨우쳐 주었으며, 노동의 가치를 과소 평가하던 시민들의 개화를 촉진했고 중세기 새로운 문화의 토대를 준비하며 박차를 가한 저변 쇄신운동이기도 했다. 4) 베네딕도는 시대적으로 요청되던 성령의 도구로서 뛰어난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다. 그는 철저한 쇄신을 주도하던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수도원 장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보다 오히려 행동으로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면서 완덕에 나아가는 데 있어 사람들 각자의 특성에 따라 식별하여 적절한 방법으로 지도해 주던 권위있는 영적 아버지로서의 원장이길 원했다. 과연 그는 탁월한 영적 식별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규칙서는 당대 뿐 아니라 오늘까지 영적 식별을 위해 탐구해야할 소중한 고전이다. [가톨릭신문, 1999년 10월 31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성 베네딕도(하) 3. 3 세가지 서원 성 베네딕도가 수도자들에게 요구한 서원은 세가지로 순명, 정주(定住), 수도자다운 생활의 전향이다(수도규칙 58, 17 참조). 그리고 겸손은 그의 가르침의 요약이다(수도규칙 7장 참조).
그에 의하면 수도자는 생활 전향이라는 철저한 회심을 통해 침묵, 고독, 절제 등 전통 은수자적 요소를 보존하면서 공동체에 정주하여, 겸손되이 규칙과 아빠스에 순명하면서 기도, 독서(lectio divina) 그리고 노동을 실천하는 중에 하느님을 찾는데 전념하는 사람이다. 3. 3. 1. 순명 수도자는 성서 말씀과 전통이 요구하는 것들과 공동체의 규칙,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원장에게 순명해야 한다(수도규칙 2, 1; 63, 13 참조). 이 순명은 불순명으로 인해 범한 죄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께 되돌아감을 뜻하는 것이다(수도규칙 서론 2 참조). 그리스도께서 성부께 순명하셨듯이 그분을 본받아 수도자는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장상에게 순명해야 한다(수도규칙 서론 3; 5, 7, 13; 7, 34 참조). 베네딕도에 의하면 순명은 겸손에서 나오는 기본적인 덕으로서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이것은 어느 것도 그리스도보다 더 소중히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알맞는 일이며, 장상으로부터 명령받을 때 그것을 하느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 지체없이 실행하는 자세이다(수도규칙 5, 1-4 참조). 수도자는 힘든 일이나 불가능한 일을 명령받았을 경우 일단 순종의 자세로 받아들일 것이며 적절한 때에 불가능한 사유를 장상에게 설명한다. 그렇게 한 후에도 장상이 이미 결정한 명령을 고수할 경우엔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한 줄 알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사랑으로 순종해야 한다(수도규칙 68, 1-5 참조). 순명은 장상에 대해서 뿐 아니라 형제들 사이에서도 서로 요구되는 것이다(수도규칙 71, 1-2 참조). 3. 3. 2. 정주(定住) 베네딕도는 그의 '수도규칙'에서 '정주'라는 낱말을 '항구심', '인내심'이라는 낱말과 같이 사용한다. 정주는 정해진 곳을 떠나지 않고 머무른다는 하나의 규칙대로 살기로 서원한 수도원에 일생 동안 거주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해진 장소에 신체적 머물음이란 국한된 개념이 아니고 한 번 정한 마음을 끝까지 바꾸지 않는 내적 견실성과 항구성을 포함한다(58, 9 참조). 베네딕도는 수도자들이 정주 서원으로 공동체에 견고히 결속되어, 공동 생활의 부담을 벗어버리려는 자세의 이기주의적 수도자(sarabiata)나 떠돌아다니는 방랑수도자(gyrobagus)(수도규칙 1장 참조)가 되지 않도록 예방하고자 한다. 수도자들은 정주 서원을 통해 완전히 공동 생활에 자신을 위탁하며 절박하거나 중대한 이유를 제외하고는 일생을 그 수도원 안에서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정주를 통하여 가정을 이룬다. 가정 정신은 참다운 겸손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서로간의 염려와 기쁨에 찬 형제애이다. 수도자들은 정주로써 일생 동안 한 수도원에서 규칙을 철저히 따르고 그들을 보살피는 아빠스에게 순종하면서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 겸손되이 봉사하면서 생활한다. 베네딕도는 수도자들이 충일하고 보람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공동체가 진정으로 수도원다운 분위기를 이룰 필요가 있다고 보면서 봉쇄와 정주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봉쇄의 목적은 세상을 수도원 안에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것이며 한편 정주의 목적은 수도자들을 수도원 안에 머무르게 하여 그들의 임무인 수덕과 마음의 순결보존에 정진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봉쇄적 정주 생활은 수도자들이 악습을 고치고 덕을 닦는 봉헌생활에 전념하도록 기여하는 것이다. 3. 3. 3. 수도자다운 생활의 전향 수도자다운 생활 전향은 수도생활의 직접적인 목표 곧 마음의 순결과 관계를 갖게 되며 또한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필요한 수단들과 관련을 맺게 된다. 수도자는 이 서원을 통해 수도생활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또한 '수도 규칙'이 요구하는 생활 방식을 따르면서 자신을 교정하고 개선할 임무를 스스로 부과하는 것이다. 이 서원의 내용은 수도자다운 생활로서 '규칙에 따라 사는 생활'이며 '수도원에서 공동으로 사는 생활', '수도원 안에서 규칙과 아빠스 밑에서 사는 생활'을 포함한다. 베네딕도 수도자는 '수도규칙'의 규정과 지침에 따라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고 전향할 것을 서원한다. 그것은 성격상 전적으로 회수도적이며 정주 중에 공동체의 이상을 구현하면서 규칙과 아빠스 밑에서 사는 공동생활에 일생을 바치는 베네딕도회 특유의 수도생활 형태인 것이다. 수도적 생활 전향의 서원에 충실한 베네딕도 수도자의 본질적이며 진정한 하나의 표지는 완성을 추구하는 열정이다(수도규칙 72장 참조). 이 열정은 사랑이며, 사랑은 마음의 순결이다. 3. 4. 겸손 '겸손'은 베네딕도의 전체 가르침을 요약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영성 생활에 관한 그의 모든 가르침은 '수도규칙'의 제 7장 '겸손에 대하여'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겸손은 성성(거룩함)을 추구하는데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자세이다. 베네딕도는 야곱이 꿈에서 본 '층계'에서(창세 28, 12 참조) 수도자가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연상한다. 그는 그 층계를 하느님께 도달하도록 하는 겸손의 단계로 보며 12단계로 나눈다. 겸손의 첫 단계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잠시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분의 현존 앞에서 경외심을 가지고 언제나 죄와 악습, 이기적 욕망에서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한다. 둘째 단계는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행동으로 본받아야 한다. 셋째 단계는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듯이, 장상에게 순명하는 것이다. 넷째 단계는 순명 중에 겪게 될 어려움과 시련 중에 닥쳐오는 고통을 참아내는 인내를 요구한다. 여섯째 단계는 자신을 낮추어 모든 것과 온갖 여건에 만족하는 평온함이다. 일곱째 단계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로 표현할 뿐 아니라 마음으로 확신하는 자기 낮춤이다. 여덟째 단계는 공동체와의 일치이다. 공동규칙이나 장상들의 모범이 권고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다. 아홉째 단계는 혀를 억제하며 절도를 지키는 침묵의 자세이다. 열 번째 단계는 감정의 조절이다. 열한번째 단계는 지혜롭고 절도있게 말하는 것이다. 열두번째 단계는 마음과 행동으로 언제나 겸손을 드러낸다. 베네딕도에 의하면 수도자는 겸손의 이 모든 단계를 오르면서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완전한 사랑의 단계에 이르는 이는 공포심 때문에 지켜오던 모든 것을 이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덕행에 대한 기쁨에서 기꺼이 실천하게 된다. [가톨릭신문, 1999년 11월 21일]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서방교회 수도원의 시작과 성 베네딕도 (사진말) 몬테카시노 수도원. 베네딕도 성인이 529년에 창건한 몬테카시노 수도원. 베네딕도회의 모원인 이 곳에 성인과 그의 누이 스콜라스티카 성녀가 잠들어 있다. [이탈리아=김상재 기자] 예로니모는 "나에게 도시는 감옥이고 고독은 낙원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수도승들에게 사막은 고독의 표시이자 하느님만을 생각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절대적인 고독은 절대적인 자유를 낳는 법이다. 세상과의 격리를 의미하는 사막은 거주하는 곳을 떠나는 지리적 사막과 다른 생활 방식, 즉 금욕, 절제, 결혼의 포기와 같은 사회적 사막이 있다. 동방교회에서의 수도생활이 이 두가지 사막의 특징 안에서 철저히 이뤄졌다면 지리적 여건이나 사회적 여건이 달랐던 서방교회는 인위적 고독을 만들어가며 수덕생활을 영위해 갔다.
서방에서의 수도원은 주로 가정에서의 고행수덕생활을 통해 발전했다. 그리고 먼저 발달한 동방의 수도생활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동방의 수도생활은 너무 엄격한 것이어서 가정고행수덕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주로 부녀자들이었던 서방에서는 순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필요성에 의해 서방의 고행수덕생활이 수도원의 형태로 변해갔다.
교외에 별장을 짓고 전원생활을 즐긴 로마인들의 생활 풍습 속에 수덕생활이 받아들여지면서 별장생활이 수도원형태로 변해간 것이다. 즉 개인 집이 수도원으로 변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서방교회에서는 도시 한가운데서 '인공적인 사막'을 발견했고 도시 속에서 수도원의 역사가 시작됐다.
서방의 수도원은 동방의 수도원과 다른 몇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이는 서방교회의 수도원이 빨리 받아들여지고 발전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첫째는 수도원 생활을 후원한 사람들이 로마의 귀족들이라는 점이다. 이미 제국전체가 그리스도교화된 상태에서 귀족들은 정계은퇴 후에 별장에서 지내던 생활을 수도생활과 연결시켰다. 또 실제로 수도원의 창설자들은 대부분 돈많은 평신도들이었다.
둘째는 유명한 주교들이 수도원의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서방교회의 특징중 하나인 교회와 수도원 사이의 확고한 관계가 맺어졌고 수도원은 지역사회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셋째는 초기 수도원의 자의식이었다. 비록 로마제국이 공적으로는 그리스도교화됐지만 대부분의 개종자들은 아직도 미신과 옛 관습에 젖어있던 상태에서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수도자들이라는 의식이 팽배했다. 그래서 4세기부터는 '회개한다'란 말이 개종만을 의미하지 않고 수도원 입회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런 의식들은 수도자들에게는 자긍심을, 일반인들에게는 수도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 일으켜 수도원의 입지를 강화시키는데 큰 도움이 됐다.
4세기부터 6세기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보인 수도원 제도는 그 양적 성장과 맞물려 개인주의나 극단적 고행생활과 같은 폐해를 극복해야 할 과제를 낳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해 5세기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수도원 규칙서들이며 그중에서도 베네딕도가 쓴 규칙서는 서방교회 전체의 규칙서가 됐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있다고 생각하는 베네딕도에 대해 사실은 역사적으로 고증된 것이 별로 없다. 480년경 누르시아에서 출생해 로마서 공부를 하다 수비아코의 한 동굴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한 후 그의 명성을 듣고 제자들이 모여들자 이것이 수도공동체가 됐고 이후 몬테카시노로 옮겨 후대 베네딕도회의 모원이 되는 수도원을 설립했다는 사실 정도와 그에 따르는 전설에 가까운 일화들 뿐이다. 베네딕도회라는 조직도 19세기 말에 생겨난 것이다.
베네딕도의 역사적 중요성은 수비아코나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세운 것이 아니라 그가 남긴 '수도승들의 규칙'(Regula Monachorum)에 있는 것이다. 베네딕도의 규칙서는 고대에 생긴 수많은 규칙서들 중의 하나로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 당시까지의 수도원 규칙 양식들을 한데 모아 새롭게 구성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딕도 규칙서의 탁월함은 시대를 넘어 사회제도와 문명의 연계를 가능하게 해준 중용의 정신에 있었다.
베네딕도는 이론과 이상을 내세우기 보다 현실을 감안하여 지극히 실제적인 법규를 정했다. 지나친 엄격성을 피하고 평범한 신자로서 할 수 있는 수도생활 제도를 실시했다. 베네딕도는 세상과의 격리를 위해 광야나 사막의 고독이 없던 유럽에 봉쇄구역을 설정했고 사막의 수도자들이 육체적 요구를 최소화 한 것에 대해 넉넉한 수면과 음식, 의복을 제공하면서 철저한 공동소유를 규정함으로써 청빈의 삶을 구현했다. 이처럼 동방의 수도전통을 손상되지 않게 서방의 조건에 맞게 적응시킨 것이 성인의 위대한 업적이다.
뿐만 아니라 베네딕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같은 수도원 안에 머물 것을 요구하는 정주의 의무를 요구했다. 당시 유럽은 아직 게르만족의 이동이 끝나지 않은 시기였고 수도자들도 방랑생활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불안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수도원의 정주생활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그 유용성이 대단히 컸고 후에 중세기의 첫 문명화라는 전원정착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정주의 약속으로 베네딕도 공동체는 가정처럼 친밀한 공동생활을 하게 되는데 베네딕도는 이 공동체의 일과를 공동기도와 거룩한 독서 그리고 노동이라는 세가지 요소로 조화시켰다. 이러한 규정으로 인해 베네딕도회의 정신인 "기도하며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모토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베네딕도 규칙서는 영국을 필두로 전 유럽에 전파되는데 특히 칼대제 시대에는 서방세계 수도원의 유일한 규칙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방에 세워진 수도원은 그 지역의 선교활동과 문화 활동의 중심지가 돼 교회의 중심이자 나라를 발전시키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칼대제는 미개발 지역이나 변방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자들에게 그 지역을 개발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처럼 베네딕도의 규칙은 중세의 사회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서양의 9세기부터 12세기까지를 베네딕도적 세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탈리아 중부를 떠난 적이 없고 두세개의 수도원을 설립하고 작은 책 한권을 쓴 것외에는 다른 것이 없는 소박한 사람이 폭력과 미신으로 얼룩진 암울한 중세초기의 새지평을 연 등불이 됐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들고픈 신앙 하나로.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19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34) 성 베네딕토 ① 초기 교회 수도자와 하느님의 중재자 정영식 신부 ·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 엘리사벳 · 선교사 그리스도의 얼굴을 직접 바라본 사도들과 바오로 사도를 제외하면, 베네딕토 성인(st. Benedictus, 축일 7.11)은 성인 중의 성인이다. 대 성인(大 聖人)이다. 베네딕토는 수도회 공동생활의 규정을 처음으로 틀을 지은 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인을 수도회의 시조(始祖)라고 부른다. 물론 안토니오가 베네딕토보다 먼저 이집트에서 흩어져 있던 독수자와 은수자들을 모아 공동 수도생활을 했지만, 그때는 아직 공동생활 규칙이 명문화 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후 안토니오의 모범에 따라 많은 이들이 사막이나 산으로 가서 수도생활을 했는데, 정해진 규칙이 없다보니 생활이 중구난방으로 제각각 이었다. 일부 수도자들의 경우, 애초의 결심을 잊고 타락의 늪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뒤(해방된 뒤) 광야에서 우왕좌왕했을 때 하느님께서 십계명을 내려주신 것처럼, 수도자들에게도 법이 필요했다. 수도생활을 통해 일상에서 탈출은 했지만 나약한 인간인 만큼 마음을 바로잡아 주는 틀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처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중재자가 모세였다면, 초기 교회 당시 수도자와 하느님의 중재자는 베네딕토였다. 성인은 480년경 이탈리아 중부의 농촌도시 누르시아(Nursia)에서 태어났다. 농촌이긴 했지만, 성인 가정은 약간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수도 로마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로마로 향하는 베네딕토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학문과 신앙의 중심지 로마에서 많은 것을 얻고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열의는 로마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실망감으로 바뀌게 된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도 500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조선왕조도 그렇지만 500년이라는 시간은 자칫 나태와, 이로 인한 쇠퇴를 불러올 수 있는 긴 시간이다. 당시 로마도 그러한 경향이 팽배했다.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나태와 향락의 기풍이 만연했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 베네딕토는 절망했다. 환경만큼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인 것도 없다. 4년 전쯤 한 교우와 상담을 한 일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딸이 학교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원하지 않는데도 강제로 노래방 등을 데리고 다녔고, 술을 마시게 하고 심지어 환각제까지 먹였다. 아이를 만나 보았더니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래서 분위기를 바꿔 보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서울에 가서 다른 공부 환경에서 잠시 지내보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아이는 이후 서울에서 학원과 독서실을 오가며 한달 동안 지냈다. 한달 후 돌아온 아이는 눈빛부터 달라져 있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방해 받지 않고, 공부하는 분위기 속에서 치열하게 자신의 일에 매달리다 보면 삶의 의욕도 생기기 마련이다. 베네딕토도 이러한 효과를 위한 것이었을까. 로마의 환경에 실망한 베네딕토는 엔티페라는 곳으로 공부하는 장소를 옮겼다. 이곳에는 적은 수의 사제들이 경건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제 환경이 바뀌었다. 베네딕토는 만족했다. 매일 사제들과 함께 기도하고 묵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베네딕토 성인이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 기적의 내용은 여기에 적지 않는다. 어쨌든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당연히 이들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 몰려들지 않으면 소문을 억지로 내서라도 사람들을 불러 오려고 난리다. 왜 기적을 몰라주느냐며 목에 핏대를 올린다. 교도권에 대한 반발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베네딕토와 동료 사제들의 반응이 의외다. 이들은 기적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을 고통으로 여겼다. 베네딕토와 동료들은 사람들이 찾아올 수 없는 산중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꼭꼭 숨었다. 기적을 행하고 입단속을 시키신 예수님을 닮았다. 요즘 한국교회에는 “나를 통해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며 떠드는 사람이 있다.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도 많다. 예수님을 닮지 않았다. 베네딕토의 소재지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로마노(Romanus) 수사 한 명 뿐이었다고 한다. 로마노 수사는 가끔 자신이 먹기에도 부족한 빵을 떼어 베네딕토에게 주었다고 한다. 베네딕토는 그 빵 한 조각 한 조각을 감사히 먹으며, 오로지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가톨릭신문, 2010년 6월 6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35) 성 베네딕토 ② 순명을 덕(德)으로 삼은 수도생활의 아버지 청년 베네딕토는 건강했다. 몸뿐 아니다. 마음도 영혼도 건강했다. 그랬기에 자신을 통해 일어난 기적을 철저히 숨기며 더욱 산중으로 숨어들어간 것이다. 기적은 청한다고 일어나고, 청한다고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청함이 원인이 아니다. 기적은 은총의 결과다. 저절로 일어나고 저절로 알려지는 것이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베네딕토는 또다시 한 번 악마로부터 큰 유혹을 당한다. 특히 정결에 대한 유혹이 심했다. 이에 베네딕토는 옷을 벗고 가시덤불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뒹굴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다. 그제야 악마의 유혹이 물러섰다. 이후로는 정결에 대한 유혹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은수 생활이 3년간 계속됐다. 완전한 고독 속에서 명상만으로 보낸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베네딕토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목동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쳤다. 드디어 세상 밖으로 한 발 나온 것이다. 베네딕토가 목동들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지자 진정한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물려들었다. 그만큼 성인의 명성이 이미 세상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자 베네딕토는 이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수도원을 세워 함께 생활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인근의 한 수도원 원장이 서거하는 일이 생겼다. 그러자 수도원의 수사들이 베네딕토를 찾아와 후임 원장이 되어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베네딕토는 그들의 간청에 못 이겨 마침내 수락한다. 그런데 베네딕토는 원장이 되자마자 엄격한 수도생활을 요구했다. 수도원 개혁에 나선 것이다. 어쩌면 지위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는 베네딕토가 수도원장직을 수락한 것은, 타락해 가는 수도원을 개혁해 하느님으로 이끌겠다는 원의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락과 타성에 젖은 일부 수도자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지금까지 잘 생활해 왔는데, 갑자기 엄격한 수도원장이 와서 우리를 못살게 군다”고 수군거렸다. 결국 이들이 일을 낸다. 수도자들은 점심식사 때 독약을 넣은 포도주를 베네딕토에게 권했다. 그런데 베네딕토가 포도주를 마시기 전 성호를 긋자 잔이 깨졌다. 이 이야기는 베네딕토의 수도원 개혁이 얼마나 어렵게 이뤄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는 사이 수도자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모두 베네딕토가 성덕으로 이끈 결과였다. 수도원 하나로는 모든 수도자를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베네딕토는 수도원 수를 늘려 나갔다. 분가된 수도원에는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성덕있는 수도자를 원장으로 보냈다. 원래 진실은 승리하는 법이다. 타협과 술수는 신앙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느님은 늘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이웃과 사랑을 주고 받으며 겸손과 낮추임을 통해 정진하는 것을 원하신다. 실제로 은총도 그러한 방식으로 내리신다. 베네딕토 성인은 이후 525년경 이탈리아 남부의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에서 새롭게 수도 생활을 하려고 마음 먹는다. 몬테카시노 인근의 주민들은 우상 숭배가 강했다. 몬테카시노 산에 그리스 신 아폴로에게 바쳐진 신전이 있을 정도였다. 베네딕토는 즉시 이 신전을 파괴한다. 그리고 성덕의 모범을 통해 마을 주민들을 모두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이어 5년 후인 530년경에는 이곳에 성 요한 세례자의 성당과 성 마르티노(Martinus)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다. 이곳이 바로 서방 수도원의 발상지가 된다. 오늘날에도 이곳에는 성 베네딕토 수도회의 총 본부가 있다. 베네딕토는 이곳에서 올바른 금욕생활, 기도, 공부 그리고 노동 및 한명의 원장 아래 있는 공동체 생활을 규정하는 유명한 규칙을 썼는데, 이 규칙이 오늘날 모든 수도회 규칙의 모태가 된다. 그 결과 베네딕토는 오늘날까지도‘수도 생활의 사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규칙은 공동생활을 명백히 규정하고, 순명을 최대의 덕으로 삼았다. 또 재산의 사유화를 금지했으며, 일평생 한 수도원에 머무를 것을 요청했다. 또한 교회의 가르침에 따를 것을 명시하고 특히 전례를 중요시하도록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도 생활의 중심으로 성무일과를 규정했다는 것이다. 베네딕토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수도회도 없다. 오늘날 수도회는 그래서 베네딕토에게 대부분 의지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0년 6월 13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36) 성 베네딕토 ③ 은총의 일상 속 실현 위해 끊임없이 노력 베네딕토 성인의 빛나는 삶은 입에서 입을 거쳐 당시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많은 신자들이 수도생활의 잣대이자 올바른 신앙 삶의 전형이었던 그의 삶을 기억하고 따르기를 원했다. 그래서 8세기말부터 7월 11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해 왔으며, 교황 바오로 6세는 1964년 10월 24일에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베네딕토 성인의 삶을 기억하는 그 기저에는 겸손한 성인의 삶이 있다. 수련생활을 하다 보면 흔히 ‘나는 하느님을 따르며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잘 했다고 생각할 때, 바로 그 순간이 잘못하는 순간이 될 수 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부족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진정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있었던가. 어린 시절에는 막연히 하느님의 존재하심을 믿고 의지하고, 따를 수는 있어도 높은 경지의 하느님 뜻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는 어려도 한참 어린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 안에서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초월적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바꿔 나아가야 한다. 베네딕토 성인의 삶을 보자. 성인은 청년 시절, 자신을 통해 일어나는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했다. 일반인들은 이 경우,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영성의 완성으로 생각하고 자만에 빠질 수 있다. 하느님께서 기적을 직접 보여 주셨으니, 완벽한 영성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통해 기적이 일어났다며 선전하고 다니는 이들이 많다.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일어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는 둘째로 하더라도, 겸손한 영성이 없다면 일단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하느님은 겸손함 속에서 진정으로 찾아오는 분이기시 때문이다. 베네딕토 성인은 어떻게 했을까.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철저히 숨겼다. 그리고 영적 정진을 위해 더욱 노력한다. 산 속에 꽁꽁 숨어, 무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욕심의 몸짓과 나쁜 습성을 끊어버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런데 영적 성장은 이렇게 수련을 지속적으로 계속한다고 해서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영적 성장을 위한 길에는 수렁도 있고, 높은 벽도 있고, 가시밭길도 있다. 모두가 영혼의 단련을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장치다. 실제로 성인도 어느 날 벽에 부딪힌다. 성(性) 문제였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직면할 수 있는 문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다. 창조될 때부터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무조건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많은 이들이 성에 대해, 단편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성을 성행위로만 보는 것은 곤란하다. 인간은 육신과 정신, 영으로 이뤄진 존재다. 통합적인 존재다. 이 삼중으로 이뤄진 인간 존재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을 때 진정한 완성된 인간이 될 수 있다. 몸만 건강하다고 완성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적으로 똑똑하다고 해서 완성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몸과 정신 영적인 에너지로 하나로 통합 돼, 최고의 아름다운 가치를 실현해 내야 한다. 성도 육신과 정신 영의 통합 차원에서 봐야 한다. 성은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성을 터부시하고 나쁜 것으로 봐서는 안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베네딕토 성인은 성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일반적으로는 이 문제를 비켜가거나 묻어버리는데, 성인은 정면으로 맞선다.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육신적 고통을 자발적으로 수련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통해 해결해 낸다. 몸과 정신과 영혼이 완벽한 통합을 바탕으로 정결의 덕을 성취해 낸 것이다. 청년 베네딕토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을 끊임없이 일상 속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 했고, 결국에는 성의 문제까지도 극기 수련을 통해 극복해낸다. 성덕은 떠들고 다니지 않아도, 저절로 세상에 알려지는 법이다. 하느님과 합치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향기는 저절로 세상에 퍼지게 되어 있다. 베네딕토 성인의 영성 향기가 세상에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옆동네 수도원의 수도원장님이 돌아가셨다. 지도자를 잃은 수도자들은 베네딕토를 새 수도원장으로 추대했다. [가톨릭신문, 2010년 6월 20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37) 성 베네딕토 ④ 은총 받아들여 하느님과의 합치로 승화 수도원장 베네딕토는 난감했다. 수도자들이 정도의 길이 아닌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몇몇 수도자들은 일반인들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기도 했다. 수도자들을 나무랄 일이 아니다. 열두 제자도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의 무리’라는 혹독한 질타를 받은 일이 있지 않은가. 베드로조차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니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후대의 수도자들이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원을 쇄신하기로 마음먹는다. 쇄신과 개혁에는 저항이 따르는 법이다. 처음에는 수도자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심지어 어떤 수도자들은 성인을 암살하려고 까지 했다. 하지만 하느님의 정의와 진리는 언제나 승리한다. 성인은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기도로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고, 결국에는 수도원 개혁을 성공적으로 성취해 냈다. 이 과정에서 베네딕토 성인은 특히 ‘순명의 덕’에 주목했다. 실제로 개인의 신심이 성장하기 위해 또 공동체가 성장하기 위해 순명만큼 이름다운 덕도 없다. 베네딕토 성인이 순명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는 다음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흉년이 들었던 해였다. 한 사제가 성인의 수도원을 찾아와서 기름을 청했고, 성인은 이를 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정작 수도원의 재정담당 수사가 기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제에게 기름을 주지 않았다. 뒤에 이 사실을 들은 베네딕토는 그 수사를 불러놓고 “순명의 덕을 파괴하게 한 이 물건(기름)을 수도원에 둘 수 없다. 즉각 기름을 그릇과 함께 버려라”하고 엄중히 명했다고 한다. 베네딕토 성인이 이처럼 순명을 강조한 것은 공동체를 위해서였다. 순명이 공동체를 성장시키고, 또 그 공동체를 통해 개개인의 구원 또한 성취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베네딕토 성인이 이처럼 본격적으로 수도원 원장으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 때는 45세부터다. 선종하는 67세까지 22년 동안 성인은 빛나는 하느님의 사업을 하게 된다. 눈부셨다. 교회 발전의 초석을 놓기 위해, 수도원 성당을 건립했고, 이단자들을 회두시켰으며, 활발한 전교활동을 통해 수많은 이방인들을 입교시켰다. 특히 중요한 점은 수도원의 규칙을 정립한 것이다. 그가 정립한 수도원 규칙은 단순한 생활규범이 아니었다. 수도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을지에 대한 바로미터였다. 그 규칙서로 인해 이후 수많은 이들이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올바른 길을 알 수 있게 됐다. 베네딕토 성인이 없었다면, 어쩌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수도회들은 생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하느님은 베네딕토 성인을 통해 수도생활의 전형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 또 있다. 바로 베네딕토 성인의 여동생 스콜라스티카 성녀다. 하느님은 남자 수도회의 정립만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베네딕토를 통해 여동생 스콜라스티카에게 섭리하심으로 여자 수도회의 전형 또한 마련하셨다. 스콜라스티카는 오빠보다 먼저 선종했지만, 생전에 여자 수도 공동체를 이끌며 진정한 완덕을 보여주었다. 베네딕토가 수사들의 아버지라면 스콜라스티카는 수녀들의 어머니였다.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느님은 베니딕토 성인에게도 처음부터 섭리로 이끄셨다. 공동생활로 이끄셨고, 그 공동체 안에서 당신을 체험하게 하셨다. 문제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주시는 그 은총과 형성의 신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성장시키느냐에 있다. 베네딕토 성인은 형성의 초대에 갈망과 땀으로 응답했다. 은총을 경외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과의 합치로 승화한 것은 실로 베네딕토성인의 공덕이다. 성인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그 길을 아름답게 걸었고, 열매를 성취해 냈고, 결국에는 진정한 완덕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 날에는 하느님의 편안한 품에 안겼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함께, 공동체 안에서 걸어가야 할 길이다. 베네딕토 성인의 삶은 단순한 공경의 차원으로 대상화해서는 안 된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으로 재현해 내야 한다. 베네딕토 성인은 547년 3월 21일 선종했다. 마지막 날 성인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성인은 침대에 누워있지 않았다.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제대 앞에 서서 팔을 벌리고 기도하면서 그렇게 선종했다. [가톨릭신문, 2010년 6월 2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