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命)이란 내가 받아서 간직한 것이다. 나는 즐겁고 남은 근심할 경우, 내가 남의 즐거움을 가로채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며, 남은 즐겁고 나는 근심할 경우도 어찌 남이 나의 즐거움을 가로채서 그런 것이겠는가? 그러나 남은 귀히 되는데 나는 천하고, 남은 부자로 사는데 나는 가난하고, 남은 편안한데 나는 수고로운 것은 사람에 달린 것이다. 남은 장수하는데 나는 요절하고, 남은 건장한데 나는 약하고, 남은 슬기로운데 나는 어리석은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심정은 근심 걱정으로 고생이 극도에 달할 때는 은연중에 다른 사람을 나무라고 하늘을 원망하는데, 이는 누구나 자기 운명에 살아간다는 것을 사뭇 모르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이 사귀어 그의 왕성한 원기(元氣)로 만물을 생성하는데, 물(物)마다 각기 형체를 부여받게 되니, 기(氣)에 청(淸)ㆍ탁(濁)ㆍ경(輕)ㆍ중(重)의 한계가 있으므로 물(物)이 이 때문에 귀천의 구별이 있는 것이니, 하늘이 어찌 그 사이에 고의(故意)가 있겠는가?
딱딱한 저 흙이나 돌은 “어찌하여 하늘이 나에게는 초목(草木)처럼 생의(生意)를 부여해 주지 않았는가?” 할 것이고, 초목은 “어찌하여 하늘이 나에게는 금수(禽獸)처럼 지각(知覺)을 부여해 주지 않았는가?” 할 것이고, 금수는 “어찌하여 하늘이 나에게는 사람처럼 존귀(尊貴)함을 부여해 주지 않았는가?” 할 것이지만, 설령 하늘이 입이 있다면 어찌 말이 없겠는가?
만일 진흙 한 움큼을 농(籠) 안에 넣고 무심코 손으로 잡아 돌리면 그 뭉쳐친 진흙덩이가 혹은 크고 혹은 작고 혹은 매끄럽고 혹은 거칠고 할 것이니, 이는 진흙덩이 자체가 서로 같지 않게 된 것인데 돌려 준 사람을 어찌 나무라겠는가? 사람에 달린 것도 또한 그러하다. 사람마다 아무리 자신을 귀히 만들고 부자로 만들고 편안하게 할 권리는 있지만, 남은 되는데 나는 되지 않는 것은 역시 운명이다. 내가 만일 처음부터 남달리 좋은 운명을 부여받았다면 남들이 아무리 나의 운명과 바꾸려고 해도 되겠는가? 마치 나와 같은 사람도 많은데 어찌하여 경중의 차이가 이토록 나는가? 여기에서 곧 자신의 운명은 본래부터 타고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활쏘는 데에 비유하였다. 쏘아서 맞지 않았을 경우 아무리 시기하는 마음이 들어도 감히 남을 탓하지는 못한다. 내가 무엇을 구하려다 얻지 못했을 경우도 마치 활을 쏘아서 맞히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순경(荀卿)이 말한 “자신을 아는 자는 다른 사람을 원망치 않고, 운명을 아는 자는 하늘을 원망치 않는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옛날에 성인(聖人.공자를 말함)이 천하를 주유하면서 진ㆍ채(陳蔡)의 액을 당할 때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고, 곤욕(困辱)을 당하면서도 남을 탓하지 않았다. 당시의 비방과 배척으로, 그에게 정치를 맡기지 않았으므로 그가 “나를 알아줄 이가 없다.” 한 것이다. 그에 대해 알아주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즉 ‘하늘은 위에 있고 사람은 아래에 있는데, 내가 자연의 이치를 통하였으니 이는 위로 천리를 통달한 것이요, 평탄하든 험하든 가리지 않고 어디에 가나 도움을 주었으니 그 덕은 곧 아래서 배운 것이요, 쉴새 없이 천하를 주유한 것은 천하를 위한 것이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마음을 하늘은 모르지 않았으련만 사람이 미처 몰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