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너무하잖아요
https://youtu.be/tqJ91oLXRxM
햇님
https://youtu.be/ZqUYtqvqJlg
바람
https://youtu.be/Urle5rT9kko
봄
https://youtu.be/ffvJqu4nPZw
비가오네
https://youtu.be/Fl5-uUS9iq4
간다고 하지 마오
https://youtu.be/gwhndL2W28c
담배꽁초
https://youtu.be/AOmieGTfHyU
몇년전부터 가요마니아들은 김정미라는 생소한 가수의 음반을 고가로라도 매입하려는 열기가 후끈함을 감지했다.
낯선 가수의 음반을 1-2만원도 아닌 ‘상태가 좋다면 100만원에라도 구입을 하겠다’는 파격적인 내용에 가수와 음반에 대한 궁금증의 강도는 짙어만 갔다.
회현지하상가, 청계천 등 중고 LP가게들이 몰려있는 지역에서는 '신중현 음반을 싹쓸이하는 일본인들이 부르는대로 가격을 쳐 준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중 ‘김정미 음반은 가장 인기있는 품목’임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믿기 힘든 황당한 소문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희귀 록음반들이 일본등 외국 마니아들에게 무차별 팔려나가고 있다’는 소식은 마니아들 사이에 ‘우리음반을 지켜야한다’는 애국심마저 일어났을 정도.
최근 ‘LP수집붐이 일고있다’는 보도가 심심치않게 오르내리는 것은 그동안 천시했던 우리 가요음반의 음악성을 뒤늦게 인정, 콜렉션 대상으로 여기면서 찾는 이가 많이 늘었기 때문이다.
김정미 음반들은 가요음반의 전체적인 고가바람에 기름을 부은 악영향도 있지만 이사때면 늘 천덕꾸러기로 버려졌던 우리 가요음반을 소중히 여기게 된 계기가 된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김정미는 어떤 빛깔의 음악을 남긴 가수이기에 30년이 지난 지금 난리들일까?
70년대말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팬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잊혀진 김정미. 김추자를 뛰어넘을 재목감으로 장래가 유망했던 가수였다.
추구했던 음악만큼이나 섹시했던 음색의 콧소리 창법과 현란한 춤은 흔치 않았던 여성 사이키텔릭 록커라는 프리미엄이 더해지며 70년대 초중반 가요계 최대 돌풍의 주역이었다.
사업가 김순성씨의 유복한 가정에서 1남5녀중 둘째로 태어난 김정미는 어릴 때부터 타고난 춤과 노래 재능으로 주변의 소문난 귀염둥이였다. 또한 지지않으려는 욕심과 고집이 대단했지만 붙임성 좋은 활발한 성격의 장난꾸러기였다.
서울 정신여고 재학시절, 김정미는 흑인가수 아레사 프랭클린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좋아했다. 국내가수로는 김추자를 꽤나 좋아했지만 그녀의 넋을 빼놓은 것은 전설적인 록그룹 제퍼슨 에어플래인의 비트 강한 사이키델릭 사운드였다.
또한 한국고전무용과 모던발레를 배우며 율동의 기본을 익혔을 만큼 예능쪽으로 대학진학을 하려했고 유행하던 포크곡들보다는 진보적인 록그룹의 노래를 즐겨불렀던 평범치 않았던 여고생이었다.
또한 시원한 이목구비와 164㎝의 훤칠한 키에 볼륨감 넘치는 몸매는 늘 주변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친구들은 까무잡잡한 야성적 피부에 인기만점인 그녀를 ‘인디언 추장의 딸’로 부르며 주위에 모여들었다.
늘 김정미의 재능이 아까웠던 친구들은 어느날 ‘가수만들기 작전’을 세우고 작곡가 신중현에게 연락, 테스트를 받기로 미리 약속을 받아두었다. 엉겁결에 친구들을 따라나선 김정미는 당대 최고의 히트곡 제조기 신중현의 마음을 한눈에 빼앗아 버렸다.
69년 그룹 <뉴덩키스> 시절부터 신중현은 사이키 델릭사운드에 심취해 있었다. 김추자라는 대형가수를 발굴했지만 늘 스캔들을 몰고다녀 골머리를 썩던 터라 김정미의 등장은 신중현의 음악적 실험욕구에 불을 댕겼다.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음악에 걸맞는 창법과 안무를 개발, 정성을 다해 공을 들였다. 김추자에 비해 성량은 다소 떨어졌지만 음폭은 오히려 넓었던 김정미만큼 사이키델릭사운드를 이해하고 소화해낸 가수는 없다’고 신중현은 회고한다.
김정미는 펄씨스터즈와 더불어 신중현이 가장 애지중지했던 여가수였다. 1년6개월동안 노래공부에 전념한 그녀의 가수생활은 엉뚱하게 시작되었다. 첫 데뷔무대는 김추자의 대역출연이었다.
온나라가 떠들석했던 소주병 얼굴난자 사건의 당사자로 71년 12월 시민회관에서 예정된 리사이틀을 포기해야만 했던 김추자. 이미 공연홍보에 큰 경비를 투자한 주최측은 붕대를 칭칭감은 끔직한 김추자 모습에 낙담을 했다.
그러나 한사코 무대에 서겠다는 김추자를 대신하여 노래를 부를 대역이 필요했다. 이때 신중현의 추천으로 긴급히 선택된 가수가 김정미였다. 같은 신중현 문하생이자 동국대 연극영화과 후배이기도 했던 김정미의 창법과 춤사위는 김추자를 빼다박아 관객들에게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 때문에 김정미는 ‘제2의 김추자’로 불리워졌다. 김추자대역으로 출연한 성공적인 데뷔무대는 이 글래머 여대생가수에게 큰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켜 단숨에 주목받는 가수로만들었다.
대중들이 보내주는 사랑과 관심은 달콤했지만 ‘제2의 김추자’라는 꼬리표는 불만이었다. 그래서 김정미는 늘 ‘제1의 김정미’를 외치며 의식적으로 김추자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더욱더 새로운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신문 방송의 요란한 인터뷰요청이 이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준비한 데뷔음반은 록그룹 <더 맨>이 연주한 <김정미 최신가요집-유니버샬,KLS44,72년중순>. 수록된 9곡은 모두 신중현의 창작곡이었다.장현의 저음을 느끼게하는 <기다리는 마음>과 김추자의 다이나믹한 폭발력에 야릇한 분위기를 느끼게하는 콧소리창법으로 노래한 <간다고 하지마오> <잊어야 한다면> 등은 독특했다. 사이키델릭 노래가 풍기는 섹시함이 가득한 김정미의 노래는 70년대 남성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금지곡 족쇄로 스러진 못다 핀 대형가수
71년 봄, 신중현에 픽업된 김정미는 정식데뷔를 앞두고 호텔나이트클럽에서 몇달간 노래실력을 쌓으며 <늑대와 고양이> <대합실의 여인> 등 영화주제가를 취입하기도 했다.
핀치히터로 나선 첫 대중과의 만남은 신인탄생이라는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김정미는 이때의 심정을 ‘너무나 엄청난 시발이어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어떻게 나흘간의 공연이 지나갔는지 꿈만 같아요’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대중과 언론의 호감은 학교의 반대를 격려로 변화시킬 만큼 대단했다. ‘여고를 졸업하면 남의 흉내보다는 제 나름대로의 노래를 열심히 부를거예요’라고 김정미는 당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데뷔앨범에 수록된 여러곡들이 히트를 하자 당시 언론들은 ‘김추자를 능가하는 대형가수’라며 김정미를 가요계 최대 기대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2, 3집의 연이은 히트로 장안은 온통 사이키델릭사운드로 출렁거렸다. ‘제2의 김추자는 이제 제1의 김정미로 바꿔야 한다’는 평가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김정미는 무교동, 명동의 밤무대에서 월 개런티 80만원에 서로 모셔가려는 특급가수로 급부상하며 현란한 사이키 조명을 받게 되었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김추자 사건을 기억하는 김정미의 집안에선 험한 연예계에 귀한 딸을 내놓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모친이 함께 방송이나 출연무대를 따라다녔고 자택에 걸려오는 전화도 2중3중으로 거른 뒤에야 바꿔줄 만큼 철저한 보안조치를 취했다.
김정미의 음반중 <김정미 NOW-성음,SEL-100 023,73년11월>는 국내 록음반 중에서 <신중현과 엽전들> 초반과 더불어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희귀음반이다.
이때는 ‘신중현의 사이키델릭사운드가 최고조에 달해 물이 오를대로 올랐다’는 평가처럼 김정미독집음반 중 국내외 마니아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반이기도 하다.
이 앨범에 수록된 <봄> <햇님> <바람> <아름다운 강산> , 그리고 한국전통음악과 록의 접목을 시도한 <나도 몰래>는 신중현 사이키델릭의 걸작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명곡들. 김정미는 수많은 자신 의 히트곡중 7분짜리 대곡인 데뷔곡 <잊어야 한다면>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다.
NOW앨범과 거의 동시에 발매된 3집 <바람>을 발표하면서 김정미는 ‘저만의 노래다운 특징을 찾아내려고 많이 연구했어요. 춤도 환각적이고 전위적인 율동으로 사이키델릭에 맞추어 연습하고 있어요. 이게 저의 참다운 모습입니다’라고 인터뷰를 했을 정도로 만족감을 표시했다.
74년말 MBC-TV의 히트드라마 주제곡 <갈대(신중현곡)>를 부르면서 톱가수의 대열에 올랐다. 밀려드는 방송과 밤무대 요청은 한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는데 75년초 뉴코티나 승용차를 구입해 한없이 높아지는 인기를 과시하기도 했다.
빅히트곡 갈대는 74년 9월 <이건 너무 하잖아요/갈대-지구,JLS120920>음반으로 발표되었다.
이 음반은 금년초 지구레코드에서 CD로 편집, 재발매되어 언론의 재조명을 받았던 <김정미-JCDS-0737>의 자켓으로도 사용됐다. 수록곡중 <담배꽁초>는 마니아들조차 감탄하는 명곡. 여기서 ‘담배꽁초는 대마초를 상징한다’는 풍문이 자자할 정도로 짙은 사이키델릭 향기가 진동한다.
이 음반의 특색은 펄시스터즈,정훈희의 히트곡들과 전설적인 가수 오세은의 데뷔곡 <그날이 오면>과 <친구야>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김정미의 불운은 소위 가요정화운동으로 불리어지는 75년 5월의 ‘대통령 긴급조치9호’로 빚어진 금지곡 사태로 부터 시작되었다. 김정미의 곡들은 대부분 창법저속, 곡 퇴폐라는 명목으로 금지족쇄가 채워졌다.
<바람> <이건 너무 하잖아요> <담배꽁초> <너와 나> <나비 같은 사랑> <가나다라마바> 등의 장례일이었다. 비록 이곡들은 12년후인 87년8월 해금조치가 되었지만 당시 김정미의 충격은 대단했다.
또한 음악스승 신중현의 대마초 구속사건은 헤어날 수 없는 수렁이었다. 막 꽃을 피우려했던 순간에 찾아든 감당키 힘든 음악적 좌절은 은둔아닌 운둔생활을 강요당했다.
2년여동안 침묵을 지키던 김정미는 처음으로 신중현이 아닌 김영광, 김용선의 곡으로 재기를 꿈꾸며 <난 바본가봐-지구,JLS1201239,77년9월> 음반을 발표했다. 트로트로의 변신이었다. 음반 발표 때마다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던 지라 냉담한 대중들의 반응은 낯설고 힘겨웠다.
결국 이 음반을 끝으로 김정미는 소리소문없이 대중들의 곁을 떠났다. 음악적 좌절은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가며 심신을 망가뜨렸다. 70년대말 수도권의 한 암자에서 요양을 하는 모습이 목격된후 현재까지 그녀는 철저하게 대중들로부터 잊혀져 왔다.
미국에서 쓸쓸한 삶을 보내고 있는 김정미는 총 13장의 앨범을 남겼다. 2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녀의 노래가락은 재평가되어 ‘가요LP 수집붐을 주도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상처받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주었으면 좋겠다.
출처 : 촌동네 | 글쓴이 : 청해
첫댓글 제목만 보고
회원 중 누군가가 뭔가 complain하는 게시글인가 했네요.
- - ;;
김추자 소주병 난자사건이 더 궁금해집니다.
(나훈아도 아니고 ...)
요즘이야 모창가수들도
나름 확실한 직업으로 잘 삽디다만...
워낙 김추자가 막강해서
전 김정미는 ㅎㅎ 그냥 그랬어요
익숙한 디스크쟈켓 사진보니 반갑네요
방장님 감사르~
저는 김정미 라는 가수는 처음 들어보네요~
노래 한번 들어봐야겠네요~~
김정미 가수 잘 모르는데 해설을 읽어보니 김추자의 대역을한 가수이군요~
2의 김추자라했죠 사이랙가수 무대매너가 인기였어요
신중현의 성공했던가수
결혼으로 미국에서 꼼짝안하네요
싸이키델릭의 여제, 김정미.. 대마초파동에 휩쓸려 조용히 사라진 신중현사단의 여가수중의 한명이지요.. 이정화, 임아영, 김추자, 김정미의 노래는 지금 들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명곡들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