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105.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 밤하늘의 잔 별이 되어. 등 )
* 조명언 신부님 : 아직 / 06:17 추가
* 키엣 대주교님 : 아직 / 06:21 추가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05 03:52
- 밤하늘의 잔 별이 되어
주님 공현 대축일-2023
오늘 공현 대축일에 동방박사들이 빛이신 주님을 찾아와 뵙기까지
그 배경이랄까 상황은 어두움이고 그러나 하늘에 별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오늘 이사야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동방박사들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직 주님을 뵙지 못한 사람들이고,
대신 어둠에 둘러싸여 어둠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빛을 포기하지 않고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둘러싼 어둠은 어떤 어둠입니까?
첫째는 죄와 악의 어둠입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참으로 죄와 악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선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암울합니다.
둘째는 고통의 어둠입니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들고,
인간관계도 힘들고,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닌데다
이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날 길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셋째는 알 수 없는 어둠입니다.
이 악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을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어둠입니다.
한마디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니 그 길도 모르는 어둠이요,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니 여기저기 방황하는 자의 어둠입니다.
이 모든 어둠이 합쳐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둠 곧 절망의 어둠입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은 한동안 이 어둠 속에 주저앉아 있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계속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세상에서 하늘로 시선을 돌리고 어둠에서 별을 보기 시작했을 겁니다.
세상에서 해법을 찾을 수 없어 하늘에서 해법을 찾으려고 한 것인데,
그렇게 하늘을 보니 비로소 하늘에 별이 떠 있는 것이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참 희망의 진실입니다.
밤이 돼야 별이 뜨고 밤이 깊어야 새벽이 오듯
인간에 대한 희망이 절망이어야 하느님께 대한 희망이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밤 중에 어둠을 보지 않고 별을 보는 것은 이제 희망의 시작일 뿐입니다.
밤은 어두움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별도 있음을 봤을 뿐입니다.
이제 별을 비추는 더 큰 빛을 봐야 하고,
별이 인도하는 더 큰 빛으로 나아가야 하며,
더 큰 빛을 본 다음에는 이제 내가 별이 되어야 합니다.
빛에서 빛을 받는 작은 별들이 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혼자 자기가 빛나는 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는 별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과 나의 선행이 어두운 세상에 한 줄기 빛처럼 빛날 때
그것이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하고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선을 가리키고 인도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말씀의 소리일 뿐이라는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 사랑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고
하느님 사랑 덕분에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나는 참 빛의 잔별일 뿐이라고 말이 아니라 행위가 말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라고 하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귀담아듣는 오늘입니다.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1.05 06:14
월요일 새벽 미사가 끝나면 미사에 온 아이들과 라면을 끓여 먹습니다. 처음에는 미사에 오는 아이들이 복사 외에 없었지만, 이제는 꽤 많은 아이가 새벽의 어둠을 뚫고 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라면 먹는 즐거움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탁구를 하기도 하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목청껏 부르기도 합니다. 또 몇몇은 숨바꼭질을 하며 놀기도 합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 친구들과 많이 놀았습니다. 그 시간이 너무 좋아서 더 자고 싶어도 억지로 일어나 성당에 갔습니다. 솔직히 미사 자체는 재미없었지만, 친구들과 노는 것은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이제야 그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었음을 깨닫습니다. 즉, 당시에는 전혀 몰랐습니다. 제게 주어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그런 기회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계속 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이렇게 50대를 사는 제가 어렸을 때 놀던 놀이의 순수한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영원할 것 같은 그 순간도 또 기회가 무한하다는 생각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지금 삶이 영원하리라 생각하면서 순간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그렇게 살다가는 이 모든 것이 후회로 남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주님 뜻에 맞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빛이신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날인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먼 곳에서 주님의 별을 보고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들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들의 여행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별에 의지해서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가는 여정은 힘들기도 하지만 정말로 위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백성의 수석 사제들, 율법학자들은 어떠했습니까? 동방 박사들을 통해 메시아 탄생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곳이 유다 베들레헴인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경배하러 가지 않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편하고 쉬운 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황금, 유향, 몰약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봉헌합니다. 그러나 헤로데 임금과 종교 지도자들은 아무것도 봉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얻을 것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주님께 무엇을 봉헌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행복한 지금이 아닌, 후회만 가득한 지금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
오늘의 명언: 인생을 즐겨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호라티우스).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찬미 성탄! 오늘은 “제2의 성탄절”이라고도 불리는 “주님의 공현 대축일” 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동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이 비로소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계시되었습니다.”(에페 2,5)
그래서 동방교회에서는 오늘을 “거룩한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때 이것을 보는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너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이사 60,5)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벅찬 기쁨을 찾아, 동방박사와 함께 임을 찾아나서는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 ‘길’은 성경의 핵심단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고(요한 14,6), 프란치스코 교종은 친구인 ‘한 랍비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할 때, 그는 길을 떠나야 합니다.
사람은 걸어가면서, 앞으로 나아가면서, 하느님을 찾으면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기를 찾아 나서도록 허락하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법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길을 떠난 이들’이요, 또 한 부류는 ‘길을 떠나지 않는 이들’입니다. ‘길을 떠난 이들’은 빛을 따라나선 동방박사들과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나온 마리아와 요셉이 있고, 멀리 하늘에서 길을 떠나온 아기 예수님이 있습니다. 한편 ‘길을 떠나지 않은 이들’에는 왕궁에 머물러 있는 이들, 수석 사제들, 율법학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둘 중,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요? 빛과 진리를 찾아 길을 떠나 여행하는 사람일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안전과 편리에 머물러 안주하고 있는 사람인가요?
또 오늘 <복음>에는 두 명의 ‘왕’이 있습니다. 한 ‘왕’은 황포를 걸치고 화려한 왕궁에 사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헤로데 왕’이요, 또 한 ‘왕’은 포대기로 둘러싸여 무력하게 누추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어떤 왕을 만나려고 길을 떠나 여행을 하고 있나요?
지상이 화려한 왕인가요? 아니면 가난하고 힘없는 아기 예수 왕인가요?
또 오늘 <복음>에는 세 번의 ‘길 떠남’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의 터전에서 예루살렘으로의 길 떠남이요, <두 번째>는 헤로데 왕궁에서 마구간으로의 길 떠남이요, <세 번째>는 마구간에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길 떠남입니다.
‘길 떠남’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빛’이 비추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별이 나타나 우리를 비추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 별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자만이 그 빛을 볼 수 있으며, 그 별을 보는 자만이 그 별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무나 길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애타게 갈망하고 고대하는 자만이, “그분의 별”(마태 2,2)을 따라 그분을 만나 경배하러 길을 떠납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떠나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비추고 계시는 그분을 향한 갈망과 목마름으로 ‘떠나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첫 번째> 길 떠남을 위해 우리는 온갖 편리와 안주를 포기해야 했고, 위험과 위기의 십자가도 져야 했습니다. 이 길을 오면서 때로는 사막처럼 무미건조하고 쓸쓸할 때도 있었고, 빛을 놓치고 어둠에 쌓여 길을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 길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고, 반항할 때도 있었습니다. 더러는 좌절하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했고, 그분이 계실만한 화려한 하려한 왕궁을 찾아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마치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 왕궁을 기웃거렸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처럼, 별의 안내를 받아서 이스라엘까지는 왔지만, 메시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찾아 만나는 데에는 “꼭 필요한 한 가지”(루가 10,41)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참된 빛이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마태 2,3)를 이미 “말씀” 속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예언자 미카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1)
그리하여, 마침내 동방박사들이 “말씀”을 따라 다시 <두 번째> 길을 떠났듯이, 우리도 ‘말씀을 따라’ 여행 중입니다. 잠시 착각하고 머문 허황한 왕궁인 자기를 떠나 작은 고을 베들레헴을 향하여 갑니다. 이제 오로지 “참 빛이신 말씀”의 비추임을 따라 걷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빛”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비추는 곳을 따라 걷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빛” 이 비추는 낮은 곳, 누추한 마구간에서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낮은 곳, 마구간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비로소 ‘참된 빛’이 낮게 엎드린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배 드리는 일, 자신을 땅에 내려놓는 일, 낮아져 예물이 되면, 우리 안에 참 빛이 들고, 우리 안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세 번째> 길을 떠납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우리 안에 탄생한 빛이신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품고 새로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 번째> 길을 떠남이 바로 오늘 주님의 공현이 우리에게 이끄는 “길”입니다.
이제는 빛이 되어 걸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은 자신을 채우기 위해 온갖 화려함으로 꾸미고 있는 왕궁을 향해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찬란히 빛나는 예수님과 동행하여 빛을 비추며 가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맞이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분의 별”(마태 2,2)
주님!
당신은 먼저 저를 찾아와 비추셨습니다.
제 마음에 열망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랑을 심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빛이 되어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다른 길’에 의해 우리는 쇄신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지만, 주님을 알아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바로 동방의 박사들을 통하여 주님의 탄생이 공적으로 드러났음을 기념합니다. 이 시간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드리고 예물을 바쳤듯이 우리도 주님께 진정한 경배와 예물을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구세주가 오셨다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탄생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누리고 있는 자기의 기득권, 권력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움켜쥔 것을 놓으면 자유를 얻을 것인데 움켜쥐고 있기에 잃어버립니다. 먼저 주면 잃을 것이 없는데 주지 않으려 하니까 결국은 누가 빼앗지 않아도 빼앗긴 기분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 놀랐을까요? 헤로데는 내가 임금인데 감히 어디에 다른 임금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놀라움입니다. 또한 백성들이 놀란 것은 저 소리를 들은 헤로데가 어찌 나올까? 불똥이 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살 이내의 남자 아기를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큰 죄악을 가져왔습니다. 오늘의 정치 현실도 다르지 않습니다. 국민을 위한다는 속임수로 계엄을 선포하고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처단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사실 헤로데는 로마를 위한 전쟁에 큰 공을 세워서 기원전 47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예루살렘에 대성전도 짓고 세금 정책도 잘 세워서 백성을 위했습니다. 자기 개인 사치품을 팔아서 백성의 식량도 사들이고 하던 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왕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면서부터 의심증이 생기고 의처증이 생겼습니다. 결국 말년에 가서 폭군으로 둔갑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인 미리암도 죽이고, 장모 알렉산드라도, 장남 안티파테르도 다 죽였습니다. 장남의 두 아들도 그리고 왕권을 탐낸다 싶으면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속적인 욕심이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가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충분한데도 근심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1,15).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야고4,2).라고 말합니다. 결국 욕심을 부리면 끝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욕심은 그나마 지금 처지의 행복마저도 거두어 갑니다.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의 길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자기 고장으로 돌아갈 때 ‘다른 길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길은 바뀌고, 전혀 다른 방식의 삶으로 돌아가며 ‘다른 길’에 의해 우리는 쇄신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박사들은 내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내 계획,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동방의 이방인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아보고 멀리서 귀한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삶의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느님을 발견하면,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하고 끝까지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인도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 별입니다. 그러나 깊이 보면 별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구세주를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이 별을 찾아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박사들이 “그분의 별을 보고” 라고 표현합니다. 별이 믿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분의 별을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찾는 갈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상의 것에, 지나치게 몰두하느라 천국을 바라보는 법을 잊었습니다. 대사제들이나 율법 학자들도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정작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머리에 머물렀지, 믿음으로 승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이 요구됩니다.
동방의 박사들(6세기경부터 카스팔, 발타살, 멜키올이라고 불렀습니다)은 믿음이 있었기에 먼 길을 떠났고, 아기 예수님을 발견하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멀리서 온 박식하고 저명한 이들이 몸을 숙이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권세와 명예를 과시하는 권력자 앞도 아닌데 베들레헴의 아기 앞에서 땅에 엎드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엎드렸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상상한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작고 가난한 모습의 주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사람들의 표징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겸손이 필요합니다”(프란치스코). “스스로를 구원이 필요한 존재로 여기는 것”에 진정한 부요함이 있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 엎드려 경배하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아기 예수님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보아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성체이신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에 자양분을 주는 침묵의 단순함을 통해 삶의 항로를 다시 발견하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따라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간적인 요구보다도 천상 것을 우선시하고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삶의 방향 전환이 주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길 바랍니다. 일상 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가오는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손길을 꼭 잡으시길 기원합니다. 사람에게 매이거나 세상 것에 묶여 천상을 놓치는 일은 결코,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러분 위에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여러분 위에 나타나기 바랍니다(이사60,2).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19년 8월에 미국에 왔습니다. 미국에서 안정적으로 생활하려면 ‘쇼셜넘버’를 받아야 합니다. 지금은 기억에 없는데, 사무실 직원이 도와주어서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운전면허증은 신분증과 같기에 운전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비행기를 탈 때도 필요하기에 면허증을 취득했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이민 변호사의 도움으로 영주권을 신청했고, 신문사에 있었기에 별 어려움 없이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영주권이 나왔다고 주교님께 보고드렸고, 주교님께서는 이왕 영주권이 나왔으니, 미국에 더 있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작년 2월 교구 인사이동으로 저는 뉴욕의 가톨릭 평화신문에서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왔습니다. 저는 교우들에게 ‘준비된 본당 신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뉴욕에서 5년 살다가 왔기에 미국 생활에 필요한 쇼셜넘버, 운전면허증, 은행 계좌가 이미 있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브루클린 한인 성당 주일미사를 함께 했습니다. 영주권이 있기에 비자를 얻기 위해서 한국에 다녀올 필요도 없었습니다.
돌아보면 외적인 준비는 어느 정도 갖추었지만, 내적인 준비는 부족했습니다. 사제에게 가장 필요한 건 ‘기도’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성지순례를 간다는 이유로, 신문 홍보 다닌다는 이유로 꼭 해야 할 기도를 소홀히 한 적이 많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기도로 자라는데, 기도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사제에게 필요한 건 ‘말씀’입니다. 매일 미사를 위해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지만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 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말씀이 제 안에 머물지 않고, 세상의 것들이 제 안을 채웠습니다. 사제에게 필요한 건 ‘시대의 징표’를 보는 안목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책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 외로운 이, 고통 중에 있는 이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합니다. 뉴욕에 5년 동안 있으면서 이런 내적인 준비는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린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만민에게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나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한 번 공적으로 드러나는 때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받으실 때입니다. 그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난 것은 주님의 성탄, 동방박사의 경배, 세례 때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정의는 창과 칼, 권위와 권력으로 세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공정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성서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그리고 오늘 제2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빛은 정의롭게 비추지 않습니다. 빛은 공정하게 모든 곳을 비추기 마련입니다. 주님의 영광도 정의롭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모든 곳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고,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셨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갈릴래아의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것은 공정을 위해서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에페소인들에게 보내 편지에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혈연이나, 능력, 학벌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삶으로 증거하고, 신앙의 빛으로 비추어야 참된 상속자가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당과 교회는 성탄을 맞으면서 트리를 만들고 그 위에 예쁜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도시의 밤에 많은 십자가가 붉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불을 밝히고, 트리의 전구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들의 신앙의 불을 밝히는 것, 희망의 빛을 비추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께 경배하는 참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십니다. 작은 도시에서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주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언서에는 베들레헴을 이렇게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곳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는 작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저는 우리 안에도 이런 베들레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 작다고 느끼는 곳 혹은 보잘것없다고 생각되는 그곳에 바로 우리 각자의 베들레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하느님의 뜻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부끄럽게 여기고 작다고 느끼는 그곳에서 주님께서 태어나시기를 바랍니다. 그곳에 말씀이 머물고 그곳에서도 빛이 뿜어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은 우리 눈앞에 주님께서 드러나셨음을 말합니다. 또한 우리 마음 안에서도 주님께서 드러나셨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 작은 곳에서 태어나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오늘의 되기를 기도합니다.
⭐ 동치미 막국수
얼마 전 휴가 중에 들렀던 막국수 집이 생각납니다.
초겨울이었음에도 막국수 집은 사람으로 가득했습니다.
추위에도 이가 시린 막국수를 먹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다려 자리를 잡았습니다.
또 기다려 막국수 한 그릇이 제 앞에 놓였습니다.
동치미 한 그릇과 함께 말입니다.
동치미 국물을 국수 더미 위에 부었습니다.
휘휘~ 젓가락으로 풀어 국수와 국물을 함께 들이켰습니다.
뚝뚝 끊어지는 면발이 막국수의 순도를 자랑했습니다.
한입으로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안에 담긴 순박한 오랜 정성을 말입니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가끔 동치미 막국수 같은 사람을 만납니다. 한 번의 짧은 대화로 깊은 맛과 감동을 안겨주는 사람 말입니다.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믿음과 신앙의 빛
25.01.05 06:18
어둠을 밝혀주는 별, 그것은 믿음의 빛입니다. 영혼을 밝게 비춰주어 믿음에 이르게 하는 별,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길, 바른 길, 믿음과 경외의 찬란한 길로 인도하는 그 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찾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고 싶지만, 주님에 대해 알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 지, 무엇을 해야 할 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옛날 동방박사들을 인도했던 그 별을 찾아 떠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더 이상 반짝이는 별로 나타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을 때만이 별은 의미가 있습니다. 빛이 있어야만 빛을 반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별과 같습니다. 자신의 삶이 빛을 지닐 때만이, 주님의 빛을 받아 밝게 빛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희망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은총에 대한 희망은 이상을 향해 가는 힘이 됩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은 아름다운 사회를 건설하는 힘이며, 영원한 행복에 대한 희망은 세상의 물질적 가치를 올바르게 판단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희망은 인간의 삶을 아름답고 고귀하게 만드는 빛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온정이 넘치는 세상을 만드는 사랑, 서로 화합하며 용서하는 사랑, 적대와 불화, 분열 등 세상의 어둠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비와 정의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불의와 두려움을 떨쳐내고 정의로운 삶을 살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랑을 다시 이웃에게 아낌없이 돌려주어야 합니다.
희망과 사랑의 빛, 자비와 정의의 빛, 세상의 모든 빛이 어우러져 신앙과 믿음의 빛이 됩니다.
물질적 유혹과 의심은 사람들을 절망과 고독에 빠뜨립니다. 자비와 정의의 상실은 세상을 비인간적인 어둠의 세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세상의 어둠을 걷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신앙의 빛, 오직 그 빛 하나뿐입니다. 신앙의 빛이야말로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세상,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힘 됩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인도해 줄 빛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을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믿음과 신앙의 빛을 통해 형제 자매들이 주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주님, 저희들이 빛나는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아멘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주님을 증거하기 위한 나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별이 되려고 노력해 보았습니까?
2. 다른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 지 생각해 보십시오.
3. 올 한 해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희망의 여정
“희망의 순례자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대축일 미사중 해마다 반복되는 방금 부른 대축일 화답송 후렴은 늘 불러도 흥겹습니다. 오늘 끊임없는 화살기도로 바치고 싶습니다.
“하느님 만백성이 당신께 조배하리이다.”(시편72,11)
더불어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거룩함은 기쁘다. 사람을 끌어 들인다. 그것은 발견하기 쉽지 않을 지라도 영적기쁨이다. ‘거룩함은 영적기쁨이다(Holiness is a spiritual joy)’.”
이런 화답송 후렴 노래가 영적기쁨을 더하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며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듭니다. 결코 우울이나 슬픔은 영적 징표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공현 대축일 해마다 반복되는 마태복음, “동방박사들의 방문” 일화를 대할 때 마다 11년전 2014년 안식년때 산티아고 순례 여정이 생각납니다. 오늘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을 방문한 동방박사들의 순례 여정과 흡사하다는 생각에 해마다 강론도 비슷했고 오늘도 역시 같은 내용을 나눕니다. 2014년 순례 첫날, 8월21일자 강론 서두 부분입니다.
“세분의 동방박사가 탄생한 주님을 방문했듯이 이냐시오, 프란치스코 형제와 저 셋이 희망의 순례자가 되어 산티아고의 주님을 찾아 동방의 한국을 떠났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베들레헴 방문 여정, 순례자들의 산티아고 방문 여정은 그대로 우리 인생 순례 여정을 압축, 상징합니다. 여정의 최종 목적지인 베들레헴, 산티아고 대신 우리 인생 여정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의 집이요, 저는 이를 일컬어 주님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집을 향한 순례 여정중에 있는 희망의 순례자들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또 하나의 예루살렘인 우리의 용기를 붇돋웁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발광체인 주님을 비추는 반사체 주님의 별로, 희망의 별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열려 있는 구원의 순례 여정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바다의 보화가 너에게로 흘러들고, 민족들의 재물이 너에게로 들어온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바로 탄생하신 주님이 세상 모두의 중심, 구원의 중심임을 상징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나는 계시를 통하여 그 신비를 알았습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갈망하는 구원의 하느님이요, 모두가 당신을 찾는 구원의 순례 여정에 오르라는 주님의 촉구 말씀입니다. 산티아고 희망의 순례 여정중 발견한 “인생 순례 여정”중 네 요소입니다.
첫째, 최종 목적지 희망의 하느님입니다.
동방박사들의 베들레헴이, 산타아고 순례자들의 산티아고 대성전이 상징하는 바, 우리 인생의 최종목적지인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열망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베들레헴의 탄생하신 예수님을 찾아 떠난 동방박사들이야 말로 갈망의 사람, 열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주님을 찾는 갈망이 순례 여정의 원동력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과연 나는 동방박사들처럼 인생 궁극의 목표인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둘째, 희망의 이정표입니다.
산티아고 800km 2000리 순례 여정 길에는 산티아고를 가리키는 화살표가 그려진 이정표들이 즐비합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의 이정표는 “주님의 별”이었습니다. 주님의 별의 인도 따라 최정 목적지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탄생하신 주님을 만난 세 동방박사들입니다. 그 험난한 여정을 한결같이 인내하며 주님의 별을 바라보며 따라감으로 마침내 최종목적지 베들레헴에 도착한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주님의 별! 누구나 자명하게 드러나는 확고불변의 객관적 실재가 아닙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갈망에 깨어있는, 눈이 열린이들에게 계시되는 주님의 별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중 주님의 별을 발견하여 순례 여정에 오른 이들은 이방의 동방박사들뿐이었습니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지척에 태어난 주님도 알아보지 못한 예루살렘 사람들이었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평생 이정표와도 같은 주님의 별은 무엇인지요?
믿음의 눈만 열리면 환히 계시되는 주님의 별, 희망의 별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의 이 거룩한 성전이, 날마다 거행되는 매일미사가 주님께 인도하는 주님의 별이 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이웃도 주님의 별이, 희망의 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깨어 있는 이들의 마음 하늘에는 무수한 주님의 별들의 이정표가 있어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셋째, 희망의 도반들과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오래 멀리 못갑니다. 너무 위험하고 위태합니다. 더불어의 도반이, 더불어의 공동체가 필수입니다. 때로 혼자일 수 있어도 더불어의 공동체 안에서의 순례 여정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순례 여정이 이를 입증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웃들이 때때로 함께 해 주었는지요! 정말 하느님의 선물같은 상호보완의 공동체 도반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은 셋입니다. 전설같이 들려오는 가스팔, 멜키올, 발타살 셋입니다. 혼자였다면 분명 도중하차 했을 것입니다.
도반들과 더불어의 여정, 더불어의 믿음, 더불어의 희망, 더불어의 사랑, 더불어의 기쁨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도반들은 있습니까? 여기 수도형제들은 모두가 순례 여정중의 도반들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믿는 이들의 자랑은 영원한 도반, 파스카의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형제 도반들과 함께 하는 희망의 순례여정! 바로 우리의 자랑이자 기쁨입니다. 저절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넷째, 기도입니다.
동방박사들 제 추측에는 기도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기도하는 인간, 바로 인간의 정의입니다. 마음 깊이에서는 누구나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한결같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기도할 때 깨어있게 되고 주님을 만납니다. 기도할 때 눈이 열려 희망의 목적지도, 희망의 이정표도, 희망의 도반들도 새롭게 확인합니다. 기도없이 희망의 순례 여정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함께 하는 공동체의 미사전례은총보다 더 순례 여정에 큰 도움은 없습니다.
제가 참 많이 강조하는 것이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또 일년사계로 압축하여 어느 시점에 있는지 압축해 보자는 것입니다. 아침6시 해가 뜨면서 태어났다가 오후 6시 해가 지며 세상을 떠난다 했을 때, 또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마치는 인생 여정이라 할 때, 과연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는가 자주 점검 확인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래야 하느님 주신 선물 인생, 하루하루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동방박사들은 주님의 별의 인도 따라 무사히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보물 상자를 열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칩니다. 우리도 이 거룩한 미사중 아기 예수님께 우리의 모두를 봉헌하도록 합시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남은 순례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별>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그분이 계십니다
늘 그렇게
그분의 별이
칠흑 같은 어둠 뚫고
빛나고 있습니다
그분의 별을
아득히 먼 곳에서나마
애틋이 바라봅니다
그분의 별을
온몸 온 마음 다해
오롯이 따라나섭니다
그분의 별이
앞서다 멈춘 곳에
설렘과 놀람으로 섭니다
그분을 만납니다
감사와 기쁨과 희망으로
그분의 별을
거칠고 더러운 아래로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그분의 별을
홀로 가지려고
움켜쥐지 않습니다
그분을 별을
탐욕과 미움과 거짓으로
가리지 않습니다
그분의 별을
품은 작은 그분의 별이
되어 떠납니다
그분께서 드러나시도록
온 누리 모든 이에게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주님 공현(公現) 대축일입니다. 전에는 삼왕들이 아기 예수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삼왕 내조축일'(三王來朝祝日)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공현’(公現)은 그리스어 ‘에피파네이아’ ‘테오파니아’ ‘신현(神顯)’을 의미하는 것으로 동사 ‘에피파이노’에서 파생한 것입니다. ‘에피파이노’라는 뜻은 ‘드러나게 나타나거나 밝혀지는 것’ 또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 ‘유명한 존재로 나타남’ 등의 뜻으로써 곧 ‘왕이나 황제의 오심’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어 세상 안에 처음으로 존재를 알리신 ‘빛과 계시의 축일’로도 불려지는 이날은 구원의 뜻이 어느 한 민족 백성 시대에 머물지 않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짐을 드러냅니다.
이 축일은 본래 동방교회에서 유래합니다. 서방에서 동지축제(태양신 탄생 축제)를 12월 25일에 지낸것처럼 이집트와 아라비아 등에서는 1월 6일에 이 축제를 지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낮이 점차 길어지는 이날, 그리스도의 탄생과 공현을 기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참빛임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4세기까지 성탄 축일도 이날에 지낼 만큼 주님 공현 대축일이 상징하는 바가 매우 컸습니다. 이때는 가나혼인 잔치의 첫 기적과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낸 사건도 함께 기념하였습니다.
성공회에서는 공현절(公現節 "공식적으로 나타난 날") 개신교회에서는 주현절(主顯節, Epiphany "주님이 나타난 날")이라고 부릅니다. 천주교회, 개신교회, 성공회 등 서방교회에서는 동방 박사가 예수를 찾은 때를 공현축일로 지내는 반면, 정교회 등 동방교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준 때를 공현축일로 간주하는데 그 날이 1월 6일입니다.
서방교회는 공현 대축일 축제를 동방박사들의 축제로 기념합니다. 구유를 장식할 때도 성탄 때는 아기 예수와 마리아, 요셉, 목동들, 가축들에 한정시켰다가 공현 시기가 되면 동방박사 형상을 배치, 그 의미를 부각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축일은 전례상 성탄과 같은 대축일입니다. 성탄은 그리스도께서 유다 민족에게 당신의 강생을 보여주었으나 공현은 세상 끝까지 약속된 구세주이심을 보여줍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한 곳을 찾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림으로써 주님이 온 세상의 메시아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박사(magi)라는 칭호는 당시 페르시아와 칼데아 사람들이 천문학자와 현인들에게 붙여 준 칭호입니다. 이들은 레위족과 같은 이방의 제사장 계급으로 왕과 주권자를 위해 꿈, 환상, 하늘의 징조 등을 해석하고 신의 계시 등을 다룬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별을 관찰하고 그것을 통해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였으며 종교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 별자리 중에서 왕을 상징하는 별은 사자자리의 일등성인 레귤러스(Regulus)와 목성입니다. 레귤러스는 왕의 별로 알려져 있으며 고대 유대 학자들에 의해 목성은 메시아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의 별은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이들에게는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것을 직감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메시아시암을 고백하는 상징적인 예물을 바치게 됩니다.
황금은 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왕에게 드리는 예물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유향은 아라비아 지방의 관목에서 채취한 향기로운 송진으로서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를, 몰약은 시체를 염할 때 사용하는 방부제로서 매우 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죽었을 때만 그 시체에 바르는 고가의 값비싼 물품으로 세상의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수난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 처럼 발은 땅에 내딛고 현재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충실하고 눈은 하늘을 바라보며 천상적인 것, 영원한 것, 참된 진리로 향해 가는 세상의 구도자이며 순례자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앞을 분간 할 수 없는 짙은 어둠에 속에서도 별만 바라보고 별의 인도로 마침내 주님을 찾아 경배한 것처럼 우리 또한 시련과 환난의 고통으로 인해 지금 당장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상황일지라도 우리안에 감추어진 영원히 변치 않는 성령의 빛을 바라 보십시오. 그 성령의 빛은 우리가 일상안에서 만나는 사람들, 특히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받은 이들을 비천한 아기 예수님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아기 예수님을 대하듯 존경과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들을 나누게 됩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이 주님께 바치는 살아있는 예물이며 주님 공현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가 될 것입니다.
----------------------------------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성도(聖徒) 이야기
그들은 사실 여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밤낮으로 이 은수자에게 의심을 잔뜩 품고 있는 전문 감시인을 붙여 놓았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에게 먹고 마실 것을 주지 않는지 혹은 니클라우스 자신이 무엇인가를 먹는지 세심하게 관찰하도록 시켰다. 사람들이 그렇게 진지하게 사실 여부를 알아보았기 때문에 이 은수자에게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로 확인하게 되었다. 이 소문은 모든 사람의 귀에 들어가 커다란 놀라움이 되어 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어떤 일이 매우 드문 일이거나 들어보지도 못한 일이 될수록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놀라움으로 더 깊이 자리잡게 마련이다. 그는 단 2 년 동안만 그렇게 살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황무지로 그를 방문하여 경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동네의 주민들은 그에게 증축된 경당을 갖춘 성당을 세워 주었고 현재는 니클라우스 형제가 거기서 살고 있다. 이에 대한 이야기가 곳곳으로 퍼졌기 때문에 그를 만나보고 싶은 소망이 나를 충동하였다.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 나는 존경할만한 사람들과 함께 길을 떠나 그가 사는 광야로 서둘러 찾아갔다.
그 장소가 어떻게 생겼고 내가 무엇을 보았으며 그가 그의 육체와 얼굴, 그리고 말과 몸가짐을 어떻게 하였는지에 대해 나는 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께 내가 아는 한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그 황무지는 다음과 같은 곳에 있었다. 우리가 숲을 지나 케른 (Kern) 이라 불리는 마을에 왔을 때 사람들은 앞서 언급한 브뤼니히 산을 향하여 갔다. 우리는 마을이 끝나기 바로 앞에서 넓은 길을 포기하고는 얼음이 얼어 있고 눈으로 가득 덮인 높은 알프스를 향하여 왼쪽으로 접어들었는데 이 산과 언덕을 약 반마일 올라갔을 때 높은 평지가 나왔다.(318)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2,10~11)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그리스도인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태어나고 철이 들면서부터 우리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어디로 향하든 우리는 지금도 길을 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이웃을 미워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돈을 좇아, 권력을 좇아, 때로는 비굴하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기도 하며, 꿈이나 환상을 추구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쉼 없이 인생길을 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은 하느님의 뜻과 그 부르심의 상징인 별을 보고 길을 떠납니다. 그들은 길을 가는 우리네 삶의 원형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을 율법이나 예언서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단지 별을 보고 온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별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기 때문이었지만, 그 별은 꼭 하늘에 있는 별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별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 마음속에 심어주신, 즉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별입니다. 학문의 궁극적 목적은 진리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학자인 그들은 진리에 이르고 싶은 소망과 열망을 가졌기에 진리로 인도하는 별을 인식하고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별이 언제나 찬란히 빛나는 것은 아닙니다. 해가 뜨면 별은 보이지 않듯, 우리가 따르는 별도 때로는 다른 많은 장애물로 가려져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박사들도 그랬습니다. 왕이라고 하면 당연히 왕궁에서 살 것이란 생각했기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지로 인해 착오나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갈망을 놓지 않으면, 다시 별은 보이게 마련입니다. 박사들은 이로써 헤로데로부터더 정확한 정보를 얻고 다시 떠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진리인 분을 만났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나는 진리다, 고 말씀하실 분이십니다. 참으로 나약한 이 아기를 진리와 생명의 임금으로 알아보고 경배할 줄 알았던 동방박사들의 안목을 우리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또 다른 반전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은 대성전이 있고 학자들과 대사제들이 있고 헤로데가 사는 화려한 도시입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나신 베들레헴은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2, 6)라고 한 것으로 보아, 작고 초라한 고을로 인식되던 곳이었나 봅니다. 그러니까 헤로데와 율법 학자 그리고 대사제들은 그들이 안주해 살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춘 화려한 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 동방박사들은 마치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고향과 친척을 떠났던 것처럼 목표를 향해 어디든 떠날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이 가장 보잘것없는 곳이며 낯선 곳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욕심과 집착은 별을 보지 못하게도 합니다.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났던 때는, 물론 별이 나타난 때이며 예수께서 나신 때입니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별을 보고 표징을 읽고 기회를 포착한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마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은 것처럼 말입니다. 별은 언제나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보일 때 행동으로 따라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 떠날 줄 알아야 하고 떠난 사람만이 동방박사들처럼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할 수 있습니다. (2, 11참조) 이처럼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박사들은 아기를 뵙고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고 나서, 그들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 다른 길입니다. 꿈에 헤로데한테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기를 만난 사람의 길은 만나기 이전과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아기를 만나기 전에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헤로데를 만나는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 아기를 발견한 이후 그들은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박사들은 그들이 가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팔아 그 밭을 산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지시해 주신 길을 따라가면서 그들은 본래 삶의 현장에서 진리를 찾은 자유로운 영혼처럼 행복한 삶을 살았으리라 믿습니다.
그 옛날, 그 아름다운 밤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처음으로 보았던 소외되고 미천한 처지의 목동들로부터 오늘 이방인 동방박사들까지 모두에게 개방된 구원의 보편성을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 3, 6) 우리 또한 동방박사들과 함께 진리를 찾아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갇혀서 사는 이기심의 따뜻한 온상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도, 우리가 받은 상처도 모두 잊어버리고 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가지고 우리와 시비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향해 길을 떠나면, 별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줄 때, 하느님은 우리의 별이 되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헤로데나 사제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하느님 없이도 잘 굴러가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무방하고 흠집이 잘 드러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이나 그런 삶은 어둠이며 인간성 상실의 삶입니다. 인간 상실의 표본이 바로 헤로데와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라면, 동방박사들은 진리를 향해 행동한 사람들의 표본입니다. 우리는 동방박사들처럼 진리를 향해 움직여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은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 동방박사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 신앙인들이 끊임없이 가져야 할 교훈은 머물러 주저앉은 안주의 삶이 아니라 변화와 떠남의 영성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탈리아 밀라노 대교구장이셨던 마르티니 추기경은 모세의 생애를 묵상하시며 그런 존재를 파스카 인간으로 규정하였습니다. 『파스카 인간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건너가는 인간을 말한다.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한 체험에서 다음 체험으로 건너가는 사람이다. 크고 고통스럽고 참으로 인생을 뒤집어엎는 사건들 속에 끼어서 하나에서 다른 경험으로 옮아가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이, 또 자기 겨레가 한 실존에서 다른 실존으로 옮아가고 옮아가게 만드는 사람이다. 모세는 구원의 역사를 산 사람이요, 자기 스스로 하나의 여정을 걸었고 자기 백성에게도 걷게 한 인물이다.』 가끔 신앙의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안타까움은 변화와 전진前進에 대한 두려움과 깨달은 바를 실행하지 못하는 용기와 열정의 부족입니다. 현재의 기도 생활에, 현재의 신앙생활에, 현재의 위치에서 만족을 느끼며 그곳에서 더 이상 진전을 이루려 하지 않습니다.
더 큰 인생의 별이 비추고 있음에도 일어서려 하지 않습니다. 장엄한 주님의 목소리가 울려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신앙은 퇴보하며, 믿음은 편협함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 같은 눌러앉은 신앙, 움직이지 않으려는 신앙, 폐쇄적이고 편협된 신앙에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또다시 준엄한 목소리를 높입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60, 1~2) 우리는 분명 우리 인생을 밝혀 줄 은총의 별을 보고 축복의 길을 걷는 복된 존재들입니다.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며, 세상이 슬픔의 암흑과 고통의 어둠 속에 있음을 깨닫고 우리를 비추는 별빛을 받아, 어두운 세상을 향해 반사하도록 분발해야 합니다. 이제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이 우리 안에서 성취되도록 마음의 별을 따라나설 준비가 되었는지요? 그 별의 인도를 따라 매일 매일 아기가 있는 곳에 도달하는 새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일어나 비추어라!”(이60,1)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밤을 설친 동방 박사들 /
박윤식 [big-llight] 250104. 21:13 ㅣNo.179056
밤마다 걸어온 그들은 길을 떠났다. 동방에서 본 그별이 앞서 가다, 아기가 누운 곳에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에게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서,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하늘의 별빛이 구세주의 탄생을 알렸다. 그 별이 온 누리를 비추었음에도, 모든 이에게는 구원의 표징은 아니었다. 못된 헤로데에게는 두려움으로, 동방의 박사들에게는 하늘의 지혜를 얻고자하는 기다림으로. 삶에는 대체적으로 이런 두 모습이다. 헤로데는 온갖 수단으로 세상 권력을 탈취해 권좌에 오른 이다. 메시아의 탄생이 위협임을 눈치 챈 그는, 잔꾀를 찾으려 덤볐다.
’유다인들의 임금‘, 이 말은 당시 정치적 권력을 잡고 있던 헤로데에게는 큰 도전이었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수 없듯이, 유다인들의 임금은 단 하나 헤로데여야 하였기에.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은 헤로데에게 그들이 예로부터 기다린 메시아 대망을 짚어 주었다. ‘유다 땅 베들레헴’, 그곳에서 참 통치자가 나와야 한다는 신앙 고백은 헤로데를 대단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한편 박사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먼 길 마다않고 길을 나섰다. 그들은 구세주의 탄생을 깨닫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는 그분만을 찾는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그 믿음으로 별빛을 따라 밤이면 밤마다 걸었다. 그 어둠을 별빛이 인도해 주는 길 따라서. 왕과 박사들은 똑같이 예수님을 찾지만 그 목적은 서로가 달랐다. 이렇게 예수님의 등장은 당시 사회에 혼란을 초래했다.
그 못된 여우같은 헤로데는 단지 자신의 권력 유지로 찾았지만, 동방의 박사들은 진리를 찾아 경배하며 선물을 드리려 하였다. 같은 예수님을 두고 한 쪽에서는 원수, 또 다른 곳에서는 진리의 불빛이 된 셈이다. 이처럼 박사들은 기쁘고 행복해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헤로데는 늘 초조와 불안이다. 이는 예수님 등장이 마냥 기다렸다거나, 그렇다고 무관심한 것만도 아니었다.
사실 정처 없이 길을 떠난다는 것은 모진 고생과 위험을 받아들이고 이겨 내겠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렇게 기약 없이 길 떠남은 가진 것을 죄다 버리는 것과 같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과 친지 가족을 포기했듯이, 먼 길 나섬은 편안함과 개인의 욕심을 버리는 ‘자기 비움’일 게다.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러 먼 곳에서 밤마다 별의 인도로만 왔을 게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이다. 그분은 시도 때도 없이 다 개입하신다. 그분 떠난 우리는 없다. 우리도 박사들처럼 물러나지 말고, 발걸음을 주님께 돌리자. 그러면 그분께서는 삶의 별빛으로 답을 주시리라.
이렇게 아기 예수의 탄생이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임은 이미 예고된 바다. 박사들의 길 나섬이 이를 드러낸다. 그들이 그 귀한 선물을 들고 광야를 지나 베들레헴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구세주에 대한 간절함이었다. 우리 역시 일상의 여정에서도 그분 찾아 믿음을 택했다. 지금 우리는 어떤 희망으로 큼직한 선물을 움켜쥐고 그분께 경배 드릴까? 오로지 하늘의 별만을 보고 발길 옮긴 박사들처럼, 우리 역시 믿음으로 그분 안에 머물기를 간곡히 청하자. 오직 밤중에만 그 머나먼 길 달려온, 동방의 그 박사들을 꼭 기억하면서.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제1독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먼저 떠오른 이는 솔로몬 임금이었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보면 솔로몬의 뛰어난 지혜와 그가 이룬 업적들로 사방에서 그를 칭송하며 선물을 들고 찾아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아무 업적도 없이 그저 태어나시기만 하였는데
동방 박사들의 방문과 경배를 받으십니다.
그분께서 와 주신 것만으로도 온 세상은 축복받았다는 뜻이겠지요.
하느님께서는 ‘은밀하게 위대하게’ 일하시면서도 당신의 존재와 움직임에 대한 단서(또는 흔적)를 세상 곳곳에 남겨 주십니다.
동방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았다고 하지만 별은 최종 목적지까지 이끌어 주지 않고 길 중간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은 오던 길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
그리고 그곳에서 결정적인 답을 찾아 듣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2,6).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미카 예언서 5장 1절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 들려준 것이었지요.
사람의 힘과 지식만으로는 구세주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열어 보여 주신 ‘계시’의 도움이 필요하였지요.
그들이 제대로 된 목적지를 찾고 방향을 잡아 나아가는데 또다시 별이 나타나 그들을 인도합니다.
마침내 동방 박사들은 별이 멈추어 비추는 곳에서 아기 예수님을 발견하고는 경배하고 예물을 드립니다.
주님의 공현(에피파니아, epifania)은 이렇게 주님께서 당신을 온 세상에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 주심을 뜻합니다.
공현은 주님 성탄의 절정이며 장엄한 선포입니다. 그래서 공현을 ‘제2의 성탄’이라 부르나 봅니다.
----------------------------------------------------
==========================================================
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5:35)
==========================================================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유다인들의 임금을 찾고 있는데
먼저 임금의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기에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 땅에서
태어나시는 것이 예상되었지만
유다 땅에서도 가장 큰 도시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장 작은 고을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박사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찾지 못하고
대신 베들레헴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들이 처음에 생각한 것을 바꾸지 않았다면
당연히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셔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작은 시골 마을인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별의 인도로 그들은 아기가 있는 곳에 도착합니다.
마을이 작기도 하지만
루카복음이 전하는 것처럼
아기는 구유에 누워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이 아기를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알아볼 수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인도해 주는 별을 따라왔다고 해도
별이 잘못 이끄는 것은 아닐까 의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예루살렘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
더 커졌을 것입니다.
별이 멈추어 선 곳
그곳에 아기가 있었습니다.
왕궁이 아니라는 것을 한 번 경험한 그들이기에
구유에 누운 아기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서가던 별이 멈추었다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표징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하느님의 이끄심이 있습니다.
그 별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보고 있는 별이
정말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생각했던 방식과 충돌해서
더 그런 의심이 드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심과 함께
별을 따라가는 것을 멈추지 않을 때
우리도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보내주신 별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그 별을 잘 따라갈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 2)
빛과 어둠의
교차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삶의 변화는
마음과 같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을
찾아가는
뜨거운 실천이
필요합니다.
도로표지판 같은
실천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공현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는
여정의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계십니다.
반갑게
동방박사들을
맞이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소외된 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길을 떠나고
고개를 넘었을
것입니다.
마음을 만나고
마음이 통하는
이 여정이
바로
공현의 여정이며
경배의 예물입니다.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는
무엇보다도
더 나은 가치로
나가는 길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더 나은 가치를
향해 먼 길을
떠났던
동방박사들의
노고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노고가
어둠을 걷고
밝음을
드러내는
진정한
빛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비춰주는
큰빛을 만나면
우리의
부족함 마저
끌어안는
사랑의 세상이
됩니다.
아기 예수님께
드리는 경배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정반대의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향하는
오늘의 예물임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 줄
만남이 곧
주님 공현입니다.
주님 공현에
우리 나라가
위험한 나라가
아닌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안전한 나라가
되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공현이
우리의 아픔을
치유할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의
기도와 실천은
실패가 아닌
하느님 탄생을
만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
동방박사들은
주님 공현의
이유가
소중한 것을
지키고
소중한 것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
비겁함을
반성합니다.
작지만
빛을 내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진정한
공현입니다.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제 구세주를 뵌 기쁨을 가슴에 담고 다시금 일상생활로 돌아갈 순간입니다!
피정이 들어올 때, 제 하루 마지막 일과는 보일러실에 들러 난방 상황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기나긴 하루를 마치고 수도원으로 올라오면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세상에! 별이란 별들이 총집합해있습니다.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며 인생무상함을 온몸으로 체험합니다.
광대무변한 우주와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크고 위대하심 앞에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아무리 난다 긴다, 잘난체하지만, 티끌이요 먼지인 것을...
동방 박사 세 사람도 밤길을 걸으며 그런 생각을 했겠지요.
박사들은 탄생하실 구세주의 별을 목격한 후, 즉시 그 멀고도 오랜 여행길을 시작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세 명의 이름은 멜키오르, 가스파르, 발타사르입니다.
당시 동방이라는 지역은 페르시아나 아라비아로 추정됩니다.
그들의 여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과거 박사란 칭호는 가방끈이 긴 사람들을 대상으로 폭넓게 적용되었는데, 아마도 별자리 연구를 통해 미래의 일을 예언하던 천문학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박사들의 시선은 온통 주님의 별을 향했습니다.
낮에는 휴식을, 밤에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기약 없는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유다 지방에 이르러서는 구세주의 별빛이 사라지는 난감한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박사들은 예루살렘 성읍으로 들어와서 공개적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본인 말고 또 다른 임금이 유다 땅에 태어났다는 말에 헤로데 임금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겠지요.
겉으로는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라고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그 경쟁자를 신속히 해치울 계략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박사들은 진리의 빛이자 생명의 빛이신 메시아를 뵙고 경배드리기 위해 오랜 나날의 수고와 갖은 위험을 감수했던 참된 순례자였습니다.
탄생하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난 후 박사들이 봉헌한 선물도 참으로 의미가 깊습니다.
진정한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는 유향과 구세주의 희생을 상징하는 몰약을 예물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박사들이 바친 봉헌의 결과로 되돌려받은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토록 뵙고 싶어 했던 아기 예수님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뵈었습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베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경배했습니다.
멀리서부터 가져온 선물도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탄의 기쁨을 우리 마음 깊이 간직하고, 또다시 골고타 언덕이란 신앙의 정점을 향해,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란 우리 인생의 최종의미를 향해 먼 길을 떠날 순간입니다.
언제까지나 구유 앞에서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 구세주를 뵌 기쁨을 가슴에 담고 다시금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 공현은 우리에게 또 다른 떠남을 요구합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앙증맞은 작은 두 손을 벌리고 우리의 선물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세주 하느님께 드릴 선물 중에 가장 좋은 선물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지닌 것 가운데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황금)을 바칩시다.
매일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외치며 내 의지를 접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유향)합시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매일 직면하고 견뎌내야 하는 고통(몰약)을 기쁘게 견뎌냅시다.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12: “별”, 삼 왕에게 경배받은 아기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오늘의 전례는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확인하고 그분이 만민의 주님이심을 공적으로 선포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과 교회의 보편성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의 주제는 찬란한 빛이다. 이 빛은 어둠을 이기고 앞길을 밝히는 희망의 표지이다. 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의 동방이란 동쪽 즉 다마스쿠스 쪽을 의미한다. 이곳에서 성서를 열심히 읽으며, 시대의 징표를 잘 살폈던 히브리인들을 말한다. 별은 사람의 아들 징표로서 영광의 십자가의 모습이다(마태 24,30). 박사들이 찾아온 아기는 수천 년 기다려온 분이며, 오셔야 할 분으로 성서에 예언된 분이시다. 박사들은 동에서 본 별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으며, 그 별이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 멈추어 빛나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이 아기는 왕이며 성서적으로 구세주이신 분이시다.
복음에 나오는 박사들의 의미는 깊다. 그들의 고국이 어디든 간에 그리고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아 모여드는 이방인들의 세계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구원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하러 오시는 그 백성은 온 인류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을 맺는 선교 사명의 내용이 이미 동방박사들의 이야기 속에 예고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28,19).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시다. 항상 이 선물을 받으면서 그분을 알아봐야 하기에 항상 새로운 신비이다. 공현이 우리의 삶 속에 새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주님께서는 당신을 내어주실 때 당신을 아는 방법과 수단도 주신다는 것이다. 박사들에게는 별을, 헤로데에게는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4절) 성경의 증거를 주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앙의 빛은 겸손하고 준비된 마음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이다. 헤로데나 대사제들에게는 성경의 증거도 그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기에는 부족하였다.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 왕들에게는 불확실한 증표도 도움이 되었다. 은총의 작용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찾던 왕을 베들레헴의 보잘것없는 한 아기에게서 발견하였고 경배드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11절).
이 등장인물들의 여러 가지 태도는 예수께서 앞으로 당하게 될 운명을 어렴풋이 그려주고 있다. 메시아의 탄생 소식에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3절), 헤로데는 이미 그를 죽일 생각을 품는다(7-8절). 그러나 박사들은 별을 따라 온갖 일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고생 끝에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그 별을 다시 발견하고 “더없이 기뻐하였다.”(10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죽음을 맞게 되는 그 사건이 암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주님 공현축일의 의미가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드러나느냐, 즉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느냐 아니면 헤로데의 경우처럼 감추어져 있느냐,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제거해 버리려고 하는 삶인가 하는 것의 신비가 될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시대의 징표를 깨어 기다리던 삼 왕들은 구세주를 만났다. 삼 왕은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를 구원으로 부르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모두가 당신의 모상이며 당신과 같은 모습이 되기를, 그분을 닮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구원으로 초대를 받았다는 것(에페 1,4-5),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인류 전체가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이 그분의 원하심이다. 그래서 모두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복음 선포는 매우 중요한 우리의 사명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증거하는 삶이 있어야 한다. 구원자로서 그리스도를 지금, 여기서부터, 나를 통해서, 나 자신을 통해서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이며 사명이다. 우리만이 아닌 모두가 구원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 구원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그 안에서 모두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모두 영광의 주님을 드러내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러한 삶은 생명의 십자가에서 나타난다. 오늘 이방인들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 주님은 아기가 아니다. 십자가를 통한 영광의 주님, 구세주로 오신다. 이 신비가 나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많은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도 하여야 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한 형제자매임을 느끼도록 하여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교회를 위하여서 한다고 생각하고 말이나 몸가짐이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한다고 실천해 나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현대의 현명한 동방박사들
오늘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찾던 사람들일까요?
일단 ‘행복’을 찾았던 이들임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결정은 행복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던 때는 언제일까요?
친구들이 생겼을 때일 것입니다.
혼자 가는 길은 너무나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가면 좋은 친구들이 생깁니다.
내 주위에 좋은 친구들이 생겼다면 그 사람은 좋은 목적지로 가는 것입니다.
워런 버핏은 인생에서 성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많은 재산이 성공이 아닙니다.
돈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줄 때 그게 성공입니다.
사랑받는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좋은 인간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관계가 잘 형성되고 있다면 아기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5)에서 폰 트랩 대령은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장군이고 아이가
일곱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내가 죽어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습니다.
폰 트랩 대령은 아이들에게 제복을 입히고 호루라기로 명령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원했지만, 아버지는 한 명의 군인 상사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행복이 없습니다.
이때 가정교사로 마리아가 들어옵니다.
마리아는 고아로 자랐습니다.
마리아는 수련 수녀입니다.
워낙 노래하는 것을 좋아해서 수녀원에서 쫓겨나 폰 트랩 대령의 자녀들을 돌보는 일로 파견을 받은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칩니다.
이것은 폰 트랩 대령의 가정에서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유로워지면 감당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폰 트랩 대령은 마리아를 쫓아냅니다.
그리고 귀부인 한 명과 재혼하려 합니다.
그러자 가족은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마리아는 수녀원에 다시 들어갑니다.
아이들은 한 번 느낀 자유와 행복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노래로 아버지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수녀원에 가 마리아를 찾습니다.
마리아는 다시 대령의 집에 돌아옵니다.
대령은 마리아가 없는 집에서는 행복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대령은 말합니다.
“당신이 이 집에 행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자녀들과의 관계 회복이었습니다.
그래서 귀부인과 헤어지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마리아는 엄격한 군인인 폰 트랩을 자상한 남편이요 아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장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집과 재산을 포기하고 마리아와 아이들을 데리고 오스트리아를 탈출합니다.
폰 트랩과 아이들은 참 행복을 찾는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저도 대학생 때 주일학교 교사를 하였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아기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을 사랑하면서 많은 시간을 희생해야 했지만, 아이들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만나는 교사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성당의 모든 공동체는 이러한 동방박사들이 가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하게 하지 않는 대상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돈과 교만과 육욕을 봉헌하게 하는 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한국 영화 ‘친구’도 있습니다.
시골 친구들이 어떤 아이들은 조직 폭력배가 되고 어떤 아이는 공부를 잘해 유학도 다녀옵니다. 조금이라도 착해지려는 친구는 착한 친구와 사귀고,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길 원치 않는 친구는 친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영화입니다.
사람의 관계를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세속-육신-마귀입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해야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함께 있다고 친구가 되지는
않습니다.
‘감동의 운동회’를 생각해보십시오.
아이들은 키가 작아서 달리기를 못 하는 친구들의 손을 잡고 같이 걸어서 꼴찌를 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황금은 재산이고 유향은 기도이고 몰약은 육체의 절제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일시에 포기하게 할 수 있는 대상을 사랑할 때만 그 동료들과 함께 진정한 친구가 됩니다.
자기를 포기해야 사랑할 수 있는 이를 사랑하는 이들이 동방의 현자들입니다.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쁨을 희망하는 사람만이 기쁜 소식을 듣고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 2,1-12).”
1) ‘공현’은 공적으로 드러낸다는 뜻이고, ‘공현 대축일’은 예수님께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공적으로 드러내신 일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는, 예수님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라는 것을 나타내고, 동시에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또 주님으로 섬기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동방’은 페르시아일 수도 있고, 아라비아일 수도 있습니다.
‘박사들’은 점성술사들인데, 단순히 점을 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당시의 천문학자들이었습니다.
박사들이 모두 몇 명이었는지 모르는데, 예수님께 세 가지 예물을 드렸기 때문에 세 명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네 번째 동방박사 이야기는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박사들의 이름도 후대에 누군가가 자기 마음대로 지어낸 것입니다.>
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이었거나, 천사였을 것입니다.
박사들이 예수님께 드린 황금은 예수님의 왕권을, 유향은 예수님의 사제직을, 몰약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후대에 붙인 해석이고, 박사들이 정말로 그런 의도로 예물을 드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박사들은 메시아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과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장 비싸고 귀한 예물을 바쳤습니다.
<황금, 유향, 몰약은 당시에는 가장 귀한 보물들이었습니다.>
2) ‘별’이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하지 않고,
중간에 예루살렘을 거치게 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메시아 강생’ 소식을 선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박사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메시아 강생’ 소식을 선포하는 일을 했습니다.
헤로데 임금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메시아 강생’을 공식 확인하는 일을 했습니다.>
헤로데는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족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을 안 믿었고, 성경의 내용도 몰랐지만, 그래도 박사들이 말한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말이 ‘메시아’를 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나타난 ‘별’은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으로 박사들을 인도했는데, 아마도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 탄생 직후에 방을 구해서 옮겨 갔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본 아기 예수님은, 외양간에서 태어나서 구유에 누워 계시는 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가난한 아기,
아무런 힘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갓난아기였습니다.
그런데도 동방박사들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3) 동방박사들이 한 말 때문에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는 말은, 메시아 강생 소식이 너무 갑작스럽게 선포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 소식을 기뻐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은 반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메시아 강생을 갈망하고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갈망한 것도 아니었고 기다린 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께서 태어나실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동방박사들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갈 생각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박사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거나,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천사가 박사들에게 지시한 것을 보면, 헤로데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죽이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당연히 거짓말이고, 그런 그의 모습은 ‘위선’입니다.
‘메시아 강생’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이 되는 소식인데도(루카 2,10), 메시아 강생 소식을 들었을 때 모든 사람이 기뻐한 것은 아니고,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관심 갖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기쁨’을 원하고 갈망하는 사람만이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하는 법입니다.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2,1-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신학생 시절 가톨릭 대학교 국제 의료봉사단의 일원으로 몽골에 간 적이 있습니다. 중간에 몽골의 유명한 관광명소인 ‘테를지 국립공원’에 들렀었는데, 거기에서 보았던 밤하늘의 아름다운 풍경은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도시에 있을 때에는 달빛이, 별빛이 그렇게 밝은지 미처 몰랐지요. 그런데 전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캄캄한 벌판 한 가운데 서 있으니 달빛은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실 정도였고, 하늘을 가득 채운 수많은 별들은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처럼 밝고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몽골에서 바라본 하늘과 지금 서울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같은 하늘일 것입니다. 그곳의 하늘에 있던 별들의 수효가 서울 하늘보다 더 많다거나, 몽골 하늘에 있는 별이 특별히 더 밝은 것도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초원의 별이 더 밝게 보이는 것은 인공적인 다른 빛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서울과 같은 도시는 곳곳에 전등불이 밝혀져 있기에 그 빛에 눈이 가려 하늘의 별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아름다운 밤 하늘을 보고 싶다면, 다른 불빛이 없는 어두운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빛을 비춰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데에도 그와 같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려면 값 비싸고 화려한 것들로 치장된 유흥가가 아니라, 소박하고 가난한 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주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은 동방박사들만 비춰준 게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밝고 화려한 세속의 빛에 눈이 멀어 그 별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을 뿐인 겁니다. 반면 동방박사들은 자신이 속한 화려하고 부유한 대제국을 떠나 상서로운 별빛만 보며 따라갔기에,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무슨 일로 수천 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을 찾아왔느냐는 헤로데 임금의 질문에 동방박사들은 유다인들은 물론 온 세상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왔노라’고 답합니다. 그 별이 대단하고 특별해서 믿게 된 게 아니라, 먼저 갈구하고 일단 믿었기에 그 별이 하늘에 뜬 게 무슨 의미인지, 그 별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에 비해 예루살렘에 사는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은 참으로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메시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지를 머리로 아는 지식에 머물렀을 뿐, 그분을 뵙기를 갈구하지도 그분을 직접 찾아나서지도 않았기에 지척에서 태어나신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한 겁니다.
천신만고 끝에 상서로운 별의 종착지에 도착한 동방박사들은 그 별 아래에 있는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여기서 ‘경배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프로스퀴네오’인데 이를 직역하면 ‘~앞에서 무릎을 꿇다’라는 뜻이지요. 누군가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찬미를 드린다는 건 그가 나의 ‘주인’임을 인정한다는 표시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그저 겉으로만,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만 주님을 경배한 ‘척’ 한 게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담은 선물로 ‘주님’께 대한 자기들의 믿음을 드러냈지요. 그들은 소중하게 챙겨온 보물상자를 열고 그 안에 담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주님께 ‘예물’로, 즉 감사와 찬미의 마음으로 기꺼이 내놓는 순수한 봉헌물로 바쳤습니다. 황금은 소유하고 있으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는 귀한 재물입니다. 그렇기에 그 황금을 예수님께 봉헌한다는 것은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며 그분께서 나를 통해 원하는 일을 하시도록 자신을 봉헌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은총과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유향은 오직 하느님께만 올리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그렇기에 유향을 예수님께 봉헌한다는 것은 그분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인정하는 일이 되지요. 주님은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고 따르는 이에게 무한한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몰약은 죽은 이를 염할 때 쓰는 약품입니다. 그렇기에 몰약을 예수님께 봉헌한다는 것은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부족하고 약한 인간임을 생명의 주인이신 분 앞에서 겸허하게 인정하는 일이 되지요. 주님은 그런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세주로 오시는 그분께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할까요?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그분께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화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니 주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순명의 예물을 바쳐야겠습니다. 날마다 꾸준한 자기성찰과 통회, 그리고 변화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는 회개의 예물을 바쳐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지금 여기에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행동에 옮기는 실천의 예물을 바쳐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빛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당신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 드러나는 진리의 빛으로 우리를 비추시며 우리가 그 빛을 따라 걷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구원의 빛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데에 그치지 않고, 굳건한 믿음과 착한 행실로 이루어진 ‘신앙의 빛’으로 다른 이들을 비추어 그들을 하느님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이끄는 사도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경배를 마친 동방박사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습니다. ‘유다인의 임금이 될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달라’는 헤로데 임금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동방박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뜻과 하느님의 뜻 중 한쪽을 따라야 하는 선택의 순간을 수도 없이 마주하게 되지요.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여 따르는 것이 옳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 정도로 분명하지만, 문제는 현실적으로 그런 선택을 하기가 어렵다는데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세상의 가치기준에 부합되는 쪽을 택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큰 이득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익숙하고 편한 기존의 방식을 포기하고 아직 잘 몰라서 불안한 방식을, 더 힘들고 어려워서 불편한 방식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이스라엘에 올 때와는 ‘다른 길’로, 더 멀리 ‘돌아서’ 간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세상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인의 소명입니다. 그러기 위해 어렵고 힘든 길로 돌아서 가는 수고를 마다않고 행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신앙생활입니다. 구원은 하느님을 위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
25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은혜의 자리를 기억하는 삶
<2025.1.5> 아침을 여는 묵상 (수 4:1~24절)
❝은혜의 자리를 기억하는 삶❞
❚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할 때 승리를 확신하며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믿음과 담대함을 갖도록 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1~9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다 건너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여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이 서 있는 곳에서 열두 개의 돌을 택하여 그들이 그날 밤에 유숙할 곳에 두도록 말씀하십니다(1~3절).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6절a)... ‘표징’은 단순한 기적을 기념한다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돌들이 표징이 되어 그들의 후손들이 자신들이 어떻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입성하게 되었는지 기억하게 될 것(6~7절)입니다. 각 지파에서 대표로 나온 자들로 하여금 요단강에서 돌을 가져다가 자기들이 유숙할 곳으로 가져가서 그곳에 내려놓았습니다(8절). 그리고 여호수아는 추가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따라 제사장들이 서 있던 곳에 열두 개의 돌을 세웠습니다(9절). 요단강을 건너기까지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많은 갈등과 염려와 불안한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운 난관 앞에서도 여호수아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고, 백성들 또한 여호수아를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놀라운 은혜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가끔 이른 아침에 고속도로를 운전해 갈 때,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안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운전을 오래 했다 할지라도 그 순간에는 긴장이 되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짙은 인생의 안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 앞에서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삶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인생의 안개는 사라지게 됩니다. 때로는 힘든 일이 닥칠 때가 있고,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할진대 능히 감당하지 못할 일이 없음 또한 기억하며 찬양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우리 인생을 전개해 나아갈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주님을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앙하는 믿음의 길을 걸어 구원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 안에서 믿음과 담대함을 갖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을 날마다 기억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염려와 두려움을 이기게 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10~18절).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다 건너기까지 요단강 바닥에 서 있습니다. 결코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합니다. 아울러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역시 요단 동편에 이미 땅을 분배 받았지만, 모세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그들의 가족들을 돌볼 최소한의 사람들만 남겨둔 채 무장을 하고 이스라엘 선봉에 서서 사만 명 가량이 여리고 평지에 이르게 됩니다(10~14절).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셔서 제사장들을 올라오도록 합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을 듣고 제사장들이 요단에서 나와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다시 흘러 전과 같이 언덕에 넘쳤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임의로 행동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과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순종했습니다(15~18절).
갑자기 물이 덮치면 어떡할까? 혹 이방 족속들이 우리 가족이 있는 곳을 침략해 오면 어떡할까? 왜 이런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말씀에 대한 확신이 그들 안에 있던 두려움과 염려 그리고 근심과 걱정을 물리칠 수 있었고, 끝까지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일에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돌보고 계신다...’라는 확신과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무슨 일을 하든지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의 근원이 됩니다. 흐르는 요단강을 멈추게 하시고, 그리고 다시 흐르게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인생길 위에 동행하고 계심을 확신할진대 그 어떤 장애물도 내 인생을 가로막을 수 없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입은 은혜의 경험들을 과거로만 남겨 두지 말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충성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견고한 믿음의 바탕 위에 서서 맡기신 양떼들을 돌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충성을 다하는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그 어떤 어려운 난관에 부딪힌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용기 있게 그 난관을 이겨나가는 신실한 주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순종과 정체성을 깨닫게 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19~24절).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기념비로 세우는 시점은 첫째 달 십일입니다. 그리고 그 장소는 길갈입니다(19절). 첫째 달 십일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양을 준비했던 날입니다(출 12:3). 다시 말하면 유월절을 지킬 날이 가까웠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길갈은 대략 여리고 성에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매우 가까운 곳으로 추정이 됩니다. 본격적으로 여리고 성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요단강을 건넜음을 기억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리게 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길갈에 열두 개의 돌을 세운 이유는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너게 하신 것’입니다(22절). 그리고 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손이 강한 것을 알고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23~24절)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증거들을 붙들고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시시라 확신하며 믿음의 여정을 계속해서 걸어가야 합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 말씀들을 상고하고, 우리와 우리 공동체에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변질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능하신 손을 붙잡고 하나님을 더욱더 경외하므로 모든 유혹에서 이기는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구원 얻은 자답게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정체성을 잊지 않고, 주님이 걸으신 그 길을 따라 걷는 순종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과 맞닥뜨린다 할지라도 주님의 돌보심의 은혜를 기억하며 지혜롭게 상황을 헤쳐 나아갈 뿐 아니라 인생길 위에 늘 동행하셔서 능하신 손으로 인생의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날마다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수 4장 1~2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