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8. 큐티
창세기 18:1 ~ 15
하나님과 두 천사의 방문, 그리고 사라의 웃음
관찰 :
1) 천사를 섬기는 아브라함
- 1절.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 아브라함의 모든 권속들의 할례를 마친 후 아브라함은 다시 마므레 상수리나무 숲에 거주했습니다. 이 장소는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유명한 곳이었고, 아브라함이 공개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팔레스타인 광야의 뜨거운 낮에 장막 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혹시라도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브라함의 행위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자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에 합당한 모범을 보이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것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2절.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 아브라함은 이들이 누구인지 첫눈에 보자 말자 알았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런 차원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시각은 뜨거운 사막의 열기 속에 나그네가 쓰러져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늘상 하던대로 나그네를 대접하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하늘의 하나님과 두 천사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 3절.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 아브라함은 이 때의 나그네 세 사람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들 나그네에게 “주”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노력합니다.
- 4절.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 아브라함은 구체적으로 쉬고 가실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마치 늘상 나그네를 접대해온 모습으로 보입니다.
- 5절.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섬김에 감동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극진한 대접은 하나님의 마음을 열게하였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원하는 대로 섬기도록 허용해 주십니다.
- 6절.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 아브라함은 마치 늘 하던 일을 하는 것처럼 손님 대접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신속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당황하지 않고, 사라에게 맡길 것은 사라에게 맡기고, 또 다른 이들에게 맡길 것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서 손님이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접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7절.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 아브라함은 손님을 접대함에 있어서 쩨쩨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하고자 할 때 최선의 것을 아낌없이 신속하게 드리고자 하고 있습니다.
- 8절.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 아브라함이 준비한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습니다. 당시에 귀하게 여겨지던 우유와 요구르트와 송아지 요리를 정성스럽게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시원한 상수리나무 숲의 그늘 아래에 식탁을 마련했습니다. 하나님과 천사들은 아브라함이 준비한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2) 사라의 웃음
- 9절.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 하나님께서 이 날 아브라함에게 방문하신 것은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라에게 아들 이삭을 잉태할 것에 대한 수태 고지였고, 또 다른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같이 동급으로 취급하고 계십니다. 당시의 남성우월적인 문화가 팽배하던 상황에서 다른 종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해 볼 때, 상당히 남녀 평등을 고려해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십니다. 지금의 잣대로 해석하면 안되는 영역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라함과 사라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잇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라는 손님 앞에 나오지 않고 장막 안에서 있었습니다. 이것 역시 당시의 문화로 외부의 남성에게 가정의 여성을 보이지 않는 관습을 따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이 손님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기 때문에 장막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은 억지스러울 따름입니다.
- 10절.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 사라는 장막 문 뒤에서 하나님께서 수태고지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다음 해 비슷한 시기 이전에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을 사라에게 알려주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해 주셨던 주님께서 사라에게도 직접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 11절.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들 사이에서 아들을 얻는 것을 포기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오랜 시간 부부로 살아왔고, 더 이상 생산할 수 있는 육체적 시기가 지났던 것입니다. 이것을 누구보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 12절.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 사라는 웃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들 이삭을 얻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수태고지에 웃음으로 반응했습니다. 이 일이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포기했던 상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면 여한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아들을 갖고 싶은 욕망이 매우 컸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갈을 남편에게 들여보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라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하시니 상상하지 못했던 소식을 들었기에 웃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해서 나오는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에 대한 수태고지를 하셨을 때 웃었던 것을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막 뒤에서 웃음을 짓고 있는 사라를 아셨습니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사라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사라가 마음이 열리고 아들을 얻는 상상을 하면서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넘어서서 아들을 얻게 될 것에 대해 웃음짓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 14절.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 성육신 하시기 전의 성자로 여겨지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을 예수님이야 말로 가장 잘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스스로를 자증하신 주님께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임을 다시금 힘주어 확증해 주시고 있습니다.
- 15절.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 사라는 자신이 웃은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알고 두려웠습니다. 자신의 웃음이 잘못 해석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불쾌하게 했을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에 대해서 문제를 삼거나 책잡지 않으십니다. 이 일은 즐거운 소식이고, 기쁨의 소식이고, 인류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는 소식에 아브라함도 사라도 웃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라는 뜻의 “이삭”이라 지어주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알려주실 때 사라도 웃게 될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가르침 :
1) 아브라함의 믿음의 진보가 또 다시 언급이 됩니다. 마므레 상수리나무 숲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섬기는 존재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곳을 지나는 나그네들을 성심껏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부를 통해서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섬겼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만 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도 섬기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이웃을 섬기는 삶으로 나타내며 살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랬기에 날마다 그곳을 지나는 나그네를 살폈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과 천사들을 섬기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기쁨으로 하나님과 천사들을 섬겼습니다. 아브라함의 행위에는 억지로 하는 것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너무나 자연스럽고 순식간에 최고의 재료로 최선의 식탁을 준비하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가시는 과정에서 말씀에 순종하며 삶을 살아내는 아브라함을 보시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자란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사라에게 이삭에 대한 수태고지를 하십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해서 아브라함과 상의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께서 상의하시는 단계에 까지 다다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4)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한데 사라는 이 이야기를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반응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차마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이미 생육할 수 있는 몸이 아니기에 희망고문을 하지 않고자 그랬을 수도 있고, 도저히 아내 사라에게 동침하자고 하는 용기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아브라함은 이제 주님께서 사라에게 수태고지를 하셨기에 확신을 가지고 아내 사라와 동침함으로 아들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한 문제를 상의한 것 이상의 중요한 믿음의 영역이었습니다.
적용 :
1)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날마다 이어져야 합니다. 어쩌다 혹은 몰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는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과 천사들을 섬기는 일은 물건너 가게 됩니다. 날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나그네를 섬기는 일이 자연스러울 때 하나님과 천사를 섬기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게 허락된 상황 속에서 섬길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중국 북경에서, 그리고 지금 미얀마 양곤에서 섬겨야 할 대상을 유심히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2)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 이삭은 웃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웃음이 되었고, 사라에게도 웃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도 웃음이 되었고, 모든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웃음이 되었습니다. 저도 믿음의 선진 이삭으로 인해서 웃음이 될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드러나는 순간은 언제나 경이롭고 위대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