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71
9월5일[연중 제2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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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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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OnRbypO0-SA
[인천교구 오세찬 스테파노(서운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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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담한 실패 체험의 배경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습니다!>
출가 이전 뱃사람이었을때 시몬의 외침은 오늘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5,5)
시몬의 체험과 외침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반복해온 체험이요 외침이었습니다.
목표를 달성해보겠다며, 한번 보란 듯이 대박 내 보겠다며 밤잠을 줄이고 건강까지 해쳐가며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결과는? 참담하고 초라한 꽝이었습니다. 비참함과 자괴감에 당당하던 어깨는 축 처지고 자신감 넘치던 목소리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위축됩니다.
살아가면서 수시로 참담한 실패의 새벽을 맞이하는 시몬과 우리입니다. 참담한 경험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로지 인간의 힘, 인간의 경험, 인간의 능력만 믿은 결과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난다긴다하지만 아무리 기를 써도 안될 때가 부지기수입니다.
놀랍게도 인간의 끝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더 이상 한걸음도 물러날 곳 없어 보이는 벼랑 끝에서 하느님이 시작하십니다.
돌아보니 참담한 실패 체험에는 언제나 내가 중심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자리하셔야 할 곳에 교만하고 이기적인 내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으니 실패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습니다.
매사에 주님께 영광과 찬미와 감사를 드릴때, 내 이름,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들어높이고, 주님의 뜻을 찾고 실현시키고자 노력할때, 결과는? 언제나 대성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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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FWwoPfcpx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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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첫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첫 제자들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그들을 부르시되 말로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먼저 은총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고기가 엄청 많이 잡히는 기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입은 사람이 누구나 갖는 공통된 감정입니다. 저도 신학교로 불러주시면 그에 합당한 은총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성모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정말 성모님이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쨌건 첫 번째 느낌은 같았습니다.
저는 성당 마당에 무릎을 꿇었고 한참을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는 마음으로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사람이 주님과 어느 정도 가까이 있는지를 판단해야 할 상황이 오면 그 사람이 이 감정을 가졌었는지를 살핍니다. 그러한 감정을 가졌었다면 사람을 덜 판단합니다. 하느님 앞에 한 발짝 갈 때마다 자기를 죄인으로 여기기 때문에 타인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한 번 배반한 유다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서 잘살고 있다고 믿었지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듣고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는 누구보다 죄인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완전했던 사도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보았을 때 그조차도 그분 앞에서 설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요한 1,17)
영화 ‘벤허’(1959)에서 유다 벤허는 예루살렘에서 존경받는 유대인 귀족입니다. 그는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는 유대 민족주의자이자 깊은 신앙심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오랜 친구였던 메살라가 로마의 장군으로서 예루살렘에 돌아오면서 상황이 급변합니다. 메살라는 벤허에게 유대인 저항자들을 배반하라고 요구하지만, 벤허는 이를 거부합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의 우정은 깨지고, 메살라는 벤허를 반역자로 몰아 그의 가족을 감옥에 가두고, 벤허를 노예로 처벌합니다.
벤허는 노예로 끌려가 로마의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고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곳으로 끌려갈 때 나자렛을 지나치게 되었고 자신에게 물을 주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벤허는 여전히 강한 의지로 버티며 복수의 마음을 품습니다. 한 전투에서 벤허는 로마의 군사 지도자 퀸투스 아리우스를 구해 그의 신임을 얻게 되고, 결국 해방되어 로마로 가게 됩니다.
벤허는 로마에서 퀸투스 아리우스의 양자가 되어 명예를 회복합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메살라에게 복수할 생각뿐입니다. 벤허는 메살라가 참가하는 전차 경주에 나서고, 치열한 경쟁 끝에 승리하며 메살라를 쓰러뜨립니다. 그러나 이 승리는 그에게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여전히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배경으로 그려집니다. 벤허는 여러 차례 예수님과 마주치게 되며, 특히 골고타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며, 벤허는 자신의 복수심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분의 자비 앞에서 복수만을 생각해 온 자신이 그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어가는 분 앞에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때 어머니와 여동생도 기적적으로 나병에서 치유되면서, 벤허는 진정한 평화를 찾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입니다.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압도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나아갈 때는 언제나 자신이 죄인으로 여겨지는 두려움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싫으면 방향을 잃습니다.
내가 주님을 판단하고 주님 앞에 무언가 많이 드린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내가 주님 앞에 죄인이고 주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의무적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 때마다 그때를 기억했다고 합니다. 저는 다 주신 주님 앞에서 무언가 주고 있다고 착각했을 때를 기억하려 노력합니다. 이 만남의 상품은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않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런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존 뉴턴은 노예상을 하다 폭풍우 중에 하느님을 만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라는 성가를 작곡합니다. 주님 앞에 서면 항상 우리는 죄인이고 그 덕분에 자신 외에 누구도 심판할 수 없고 이 때문에 더 큰 찬미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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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선배들은 ‘판단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사제도 거룩함을 지향하며 성덕(聖德)을 쌓아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해야 하니 지덕(知德)을 쌓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체덕(體德)을 쌓아야 합니다. 라틴어로 이 3가지 덕은 모두 S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선배들은 3S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덕목이 있는데 그것이 ‘판단력(判斷力)’입니다. 판단력은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내비게이션은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를 알려줍니다. 잘못된 길을 가면 다시 새로운 방향을 알려줍니다. 예전에 냉장고 광고 문구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성탄 선물로 ‘목도리’를 하기로 했습니다. 총구역장님과 백화점엘 갔습니다. 저는 원하는 가격이 있으면 대충 사면 좋겠다고 여겼습니다. 총구역장님은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좀 더 좋은 목도리를 찾았습니다. 한 시간 정도 백화점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서 구역장과 반장들에게 드릴 성탄 선물을 골랐습니다.
신학생 때의 기억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천마산으로 답사를 갔습니다. 우리는 물이 있는 곳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비가 조금씩 내렸습니다. 교사들의 의견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비가 곧 그칠 것 같으니 그냥 물가에서 지내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비가 더 내리면 위험하니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교사들은 신학생인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모두 저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냥 있으면 편하기는 한데, 비가 많이 내리면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동하면 물을 구하기 어렵고, 짐을 다시 정리하는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자리를 옮겼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왜 이동했느냐’고 할 것 같았습니다. 자리를 옮기지 않았는데 비가 많이 내리면 ‘왜 이동하지 않았느냐’고 할 것 같았습니다. 자리를 옮기자고 하였고, 다행히 모두 저의 이야기를 따라 주었습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자리를 이동한 것에 대해서 모두 기쁘게 받아들였고, 다음 날, 답사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본당 사제가 되면서 ‘판단력’이라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더 깊이 생각합니다. 저의 결정과 저의 판단이 최종 결정과 판단이 되는 때가 많습니다. 제 뒤에 수정하거나, 번복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은 비교적 판단하기 쉽습니다. 차 축성, 가게 축성, 봉성체에 대한 부탁은 시간을 정해서 약속을 잡으면 됩니다. 선거 때가 되면 후보들이 찾아와서 홍보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성당 안에서 홍보하기는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성당 밖에서 명함을 돌리는 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며칠 전입니다. 가정 미사를 해 줄 수 있는지 문자가 왔습니다. 작년에 남편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고, 1년이 되는 날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고, 형제님을 위한 기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형제님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교우들이 함께했습니다. 뉴욕에 사는 부모님이 함께했습니다. 뉴욕에서 온 부모님은 브루클린 교우들의 영상 인사를 스마트폰에 담아 왔습니다. 덕분에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중한 판단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성전 신축이나, 성전 이전과 같은 문제는 비용도 많이 소요되고, 공동체의 의견이 나뉘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판단의 기준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판단의 기준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판단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판단의 기준은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갈릴래아의 어부들도 판단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물을 깊은 곳으로 치라고 하셨고, 어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어부들은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부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치워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판단 기준도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9월은 순교자의 성월입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좋겠습니다. 그 신앙의 눈으로 순교자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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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5,1-11: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라
회당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은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배에 앉으시어 가르치신다.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배를 빌어 육지에서 배를 조금 떼어 그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신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4절)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5절) 베드로는 자기 일생을 고기 잡는 일로 잔뼈가 굵었고, 고기 잡는 일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오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절) 베드로는 전능하신 분의 말씀을 따랐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다고 하였다. 고기 잡는 일에 그렇게 경력이 있고 능력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른 결과는 지금까지 자기 생애에 보지 못했던 엄청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예수께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
베드로는 자신의 모습이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느낀다.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 불결한 인간으로서 순결한 분을 감히 모실 수 없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 하셨을 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신다. 베드로가 자신의 오랜 경험 등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을 때, 커다란 체험을 하였듯이, 때로는 우리도 우리 자신의 고집을 버려야 할 때가 많다. 더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이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하는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항상 말씀이 강생하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말씀을 강생시키는 삶, 여기에서 근본적인 우리의 변화를 가질 수 있다. 베드로와 같이 자기 생각이나, 고집, 고정관념을 주님의 말씀 앞에 모두 버렸을 때, 기적을 체험했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체험케 하고 하느님 안에 자녀로서의 기쁨과 구원을 체험하게 해줄 것이다. 우리 안에 강생하시는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을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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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선택하셨음이 오늘 복음의 여러 부분에서 눈에 띕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계시고 군중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었다면, 이 어부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 주변에 모여 있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을 터인데,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은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 두 척 가운데 시몬의 배에 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내려 고기를 많이 잡은 이는 시몬이었고, 다른 배의 동료들은 아마도 고기를 잡지 않고 있었기에 그물을 올릴 때 시몬을 도와주고 시몬이 잡은 고기를 두 배에 나누어 싣습니다. 마지막에는 시몬의 동료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을 따라나서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신 이는 시몬이었습니다.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베드로는 놀라고 두려워 예수님께서 떠나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떠나가시지 않고 베드로를 당신 곁에 있도록 부르십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두려워하지 마라”(5,10). 어쩌면 이 말씀이 열쇠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실 때마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시지만, 사실은 늘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부르심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이라야 부르심에 따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인간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부당함이 아니라 그를 부르시는 분의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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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허무한 인생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인생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루카 5,4-6)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8-11)
1)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 1장에 있는 이야기와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요한 1,35-37)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요한 1,40-41)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요한 1,42)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전에, 어부들이 먼저 예수님을 따라갔고(찾아갔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어부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신앙인이 된 일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정식으로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신 일 사이에는 몇 달의 간격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 몇 달 동안, 어부들은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군중을 가르치신 것은,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마르 3,9), 즉 사람들을 좀 더 잘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1절-3절의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를 시간 순서에 따라 다시 정리해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군중을 가르치실 때 있었던 일이다. 군중이 그분께 몰려들자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셨다. 시몬은 그물 씻는 일을 중단하고 배를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갔다. 예수님께서는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배 두 척을 보신 일과 어부들이 그물 씻는 것을 보신 일은, 사람들을 가르치시기 전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몰려들자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가르치셨고, 어부들은 그물 씻는 일을 중단하고 군중과 함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물 씻는 일을 하느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3)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사는 인생의 허무함을 상징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깊은 데’와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주신 일’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인생을 상징합니다. 그 인생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생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라는 말은,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된 자신의 경외심을 나타낸 말입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스승님’에서 ‘주님’으로 바뀐 것도 경외심을 나타냅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는 말도 역시 주님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낸 말입니다. <실제로 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두렵고 무서워서 주님을 섬기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고 사랑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4)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동안 너는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사는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 살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직업이 어부였기 때문에 ‘낚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물 속’은 죽음을 상징하고, ‘물 밖으로’ 사람을 끄집어내는 것은 구원과 생명을 주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가장 먼저 낚아야 할 사람은, 즉 가장 먼저 구원사업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어부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자기 자신이 구원받는 일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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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첫 제자들을 부르신 그날, 당신께 몰려든 군중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의 시선은 호숫가에 배를 대어 놓고 그물을 씻는 어부들을 향하여 있습니다. 밤새워 일하고도 허탕 치기 일쑤인 팍팍한 삶 속에서 여느 사람들처럼 예수님께 귀를 기울일 여유가 좀처럼 나지 않는 어부들을, 예수님께서는 유심히 바라보시고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어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군중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그분 곁에서 말씀을 듣게 되었을 터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불렀던 베드로는, 얼마 전 열을 꾸짖어 자신의 장모를 곧바로 치유하시고(루카 4,38-39 참조), 밤새 허탕 친 그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물고기를 낚게 하신 대자연의 주인 앞에 엎드려 이제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의 부당함을 고백하던 구약 시대 예언자들의 모습을 많이도 닮았습니다.(탈출기 4,10.13 ; 이사야 예언서 6,5 ; 예레미야 예언서 1,6 참조)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을 당신의 첫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나섬으로써 ‘지혜롭게 되고자 어리석음을 택한 이’가 되어 오롯이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습니다.(제1독서 참조)
우리의 시선을 온통 앗아 가는 요즘의 일상에서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제풀에 지친 나의 하루라는 배에 주님을 모셔 들이고, 그분과 함께 더 깊은 곳으로 저어 들어가 구원을 낚는 복된 삶을 새롭게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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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라!" (5,4)
요즘 우리는 멘토와 멘티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그 유래는 이렇습니다. 오디세이아에 보면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면서 집안일과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그의 친구인 멘토르 Mentor에게 맡깁니다. 오디세우스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무려 10 여 년 동안 멘토르는 텔레마코스의 아버지처럼 그를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후로 '멘토'라는 그의 이름은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멘토는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 지도자, 스승, 선생의 의미입니다.
멘토와 멘티와의 관계와 달리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는 다른 여타의 스승들과 전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그 무게 중심은 제자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님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여타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한결같이 하느님의 자비에 의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선택이나 제자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가 낳은 결과이며 이를 오늘 복음은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때,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오자 예수님께서 갑작스레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신 것입니다. 이어서 베드로에게 배를 저어나가라고 하신 다음, 배에 앉은 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참 평온하고 온화한 풍경화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다음,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라!" (5,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미처 하지 않은 순간 예수님께서 무작정 ‘깊은 데로 저어나가서 그물을 치라’고 말씀하시니 무슨 상황이며 이 무슨 경우인가요? 밤새도록 동료들과 그물을 던졌지만 공교롭게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아침인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또다시 던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이를 어찌해야 한다말인가! 이 고장에서 태어났고 이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이 바다와 그물질하기 좋은 시간과 장소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그물질로 피곤할 뿐만 아니라 마음도 낙심한 상태인 자신에게 웬 그물질! 그러기에 베드로의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5,5)라는 표현 속에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네 경륜, 경험과 지식이 곧 자산이라고 할 만큼 베드로 역시도 자기 커리어career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 대단했으리라 봅니다. 더욱 밤새도록 애썼는데도 이상 하리만큼 그날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한 허탈감, 실망감으로 베드로의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던 것입니다.
이 상황을 대변하는 말 “애썼지만”(5,5)이라는 표현은 ‘나는 수고를 무척 많이 하였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 보았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쳤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전라도나 경상도에서 욕봤다는 표현은 수고했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표현과 같은 어감입니다. 결국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아니면 사도직 활동 가운데서 겪는 피로감, 허탈감, 자포자기의 심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일 것입니다. 애써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실이나 결과가 보이지 않을 때, 자신에 대한 실망의 순간에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에게 도전하시고 새로운 길로 초대하십니다. 이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께 지금 바다에 다시 나가 그물질을 하는 것은 다 부질없고 소용없는 짓이니 저는 그만 집으로 가렵니다, 고 거부하고 돌아섰다면, 그는 평생 그 바다에서 어부로 끝날 인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우리네 인생살이에도 삶을 바꿀 기회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 기회를 붙잡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나 봅니다. 이게 뭐지. 나의 판단으로 이건 아닙니다, 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힘과 생명을 느끼고 있으니 말입니다. 마침내 베드로는 피로감이나 부담감을 떨쳐 버리고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5)라고 응답함으로써 자신의 아집이나 자존심, 경험과 지식에 연연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삶의 선택과 결단을 향해 나가는 용기 있는 사람으로, 무엇보다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인간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실망과 허탈 그리고 인생의 피곤함으로 힘들 때 베드로처럼 “스승님, 당신이 말씀하시니 제가 그물을 치겠습니다.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당신의 은총을 믿고서...” 마침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일, 곧 밤새도록 똑같은 바다에서 그물을 던졌던 그들에게 자신들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니 그때 비로소 베드로는 자신의 배에 올라타시고 배를 저어나가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5,8)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 베드로의 말과 행위는 스승이신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승복이며 의탁이라고 봅니다. 이는 곧 사람들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은 상대적으로 인간의 죄 많음을 극명하게 드러나게 하고, 하느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면 상대적으로 인간의 살아온 삶이 얼룩져 보이고 비뚤어져 보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고백한 전 죄 많은 죄인입니다, 는 고백은 베드로가 상대적으로 타인보다 자신의 죄가 더 많다, 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베드로는 하느님의 자비를 더 많이 느끼고 깨달았다는 표현인 게지요. 하느님 자비의 거울 앞에 적나라하게 서 있는 베드로는 그러기에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절감하면서 예수님의 대자대비하심을 체험했고, 그래서 그는 자기 동료들과 함께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5,10)라는 스승의 말씀에 힘입어 그분께 귀의하고 의탁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5,11) 것입니다.
이처럼 첫 제자들로부터 비롯하여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호의를 체험하였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온전히 회개하고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똑같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지 못하고 자비에 사로잡히지 못하면 우리는 온전히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투신할 수 없기에, 오늘의 복음은 우리에게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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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생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그 밖에도 못 하는 것이 거의 없어 보이는 동기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해서 기도 시간에 제일 나중에 성당 문을 나오는 친구였습니다. 아무튼 모든 점에 있어서 다른 이의 모범이 되는 친구였지요. 그런데 이 친구가 여름 방학 끝나고 개학 때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친구에게 물어보니, 방학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신학교 생활하면서 우울증으로 힘들었다면서 말입니다. 당시만 해도 우울증을 정신력이 약한 사람이 겪는 것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친구 정신력이 강해 보였는데 아닌가 보네.”
정신 질환은 나약한 사람이 앓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의지를 세우면 얼마든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결코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의지를 세우려 그토록 노력했지만 결국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지금은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할 정도로 흔하기도 하고 또 치료받아야 할 병으로 여깁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만 이 병에 걸릴까요? 2020년 OECD 국가별 우울증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의 우울증 유병률은 36.8%로 전체 1위를 차지했습니다. 2.5명 당 1명 꼴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이만큼 우리 인간은 계속해서 보호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 역시 보호가 필요할 정도로 나약함과 부족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완벽한 사람을 뽑지 않습니다. 당신의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을 당신 제자로 뽑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인 시몬을 뽑습니다. 그런데 어부로서 그렇게 능력이 뛰어났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밤새도록 애써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없는지 목수인 예수님 말씀을 듣고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립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이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자기 기술이나 능력을 초월한 어떤 힘에 사로잡혀 두려워졌던 것입니다. 그때 깨닫게 되는 것이 자기 죄악입니다. 그래서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죄가 많다고 해서 내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 많은 부족함을 보시고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더욱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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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버리고 떠나기>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인 동시에 희망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면 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바랐던 성모님의 모습에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로마4,18) 해야 한다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수고와 땀을 통해 일구어 자리를 잡은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많은 미련과 아쉬움이 있게 마련이지만,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명을 받았으면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임지에서 더 있고 싶은데 떠나라는 명을 받고, 빨리 떠났으면 좋겠는데, 더 있으라는 명을 받기도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성직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때가 되면 자기가 움켜잡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고 떠났으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안주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을 때 떠나야 합니다. 영광까지 누리려 한다면 욕심입니다.
엉뚱한 생각을 해 봤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으로서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 생각하셨을까? 교황으로 선출되면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못하는데 짐 정리는 다 해놓고 오셨을까? 소지품들은 어떻게 처리하실까? 아니 추기경 관저에서 살지 않으시고 방 한 칸의 아주 검소한 아파트를 임대하여 간단한 저녁식사를 직접 해 드셨고, 버스로 출퇴근을 하며, 근검한 선교사들에게 추기경 관사를 내놓으셨다 하니 아예 정리할 것도 버릴 것도 없이 사신 것은 아닐까? 세상의 권력은 다 버리고 주님의 권위와 겸손으로 만족하셨음에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시몬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는 이유는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은 윤택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실망 속에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은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말씀대로 했더니 차고 넘쳤습니다. 순명이 기적을 낳았습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부가 많은 고기를 보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현실입니다. 전에는 고기만 봤는데 이제는 능력의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 모시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또한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하시며 죄 많은 자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능력과 자비를 체험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기의 어부로서의 지식과 경험, 상식,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가 배를 놓고, 고기를 놓고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사람을 낚을 사명을 주시니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바뀌는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로 살게 된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잡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지식이나 경험, 업적, 애착... 인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되는 하나를 버리는 가운데 새로움을 만나길 바랍니다. 거듭나고 싶은 만큼 버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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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뭍에서 호수로, 호수에서 뭍으로>
루카 5,1-11 (고기잡이 기적-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뭍에서 호수로, 호수에서 뭍으로>
그날 새벽 뭍에다 배를 대고
빈 그물을 씻고 있었지
초췌한 모습 허탈한 마음으로
밤새 나에게 아무 것도
베풀지 않은
쌀쌀맞기 그지없던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러나 이내 곧
다시 맞닥뜨려야만 하는
삶의 터전이요
고통의 현장인
호수를 등지고서 말이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무언가 해야만 했기에
그저 내 손가락들을
작은 물고기 삼아
그물코에 넣었다 뺐다
뜻 없는 짓을 반복하던
그날 새벽녘
낯선 그분이 다가와
배에 오르시어 말씀하셨지
뭍에서 조금 저어
호수로 나가줄 수 있겠소
뭍에서 호수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평소 같았으면 그랬겠지
나에게 모든 것이었던
너무나도 익숙한 호수였으니까
그러나 그날은 그렇지 않았어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닌
너무나도 낯선 호수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그분의 까닭 모를 부탁을
흔쾌히는 아니지만
난 들어 주었어
뭍에서 호수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던 길
먹고 살기 위해서
좋으나 싫으나
어쩔 수 없이 가야했던 길
그때 내키지는 않았지만
낯선 그분과의 첫 만남을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멀리도 아니고 그저 조금만
청하는 낯선 그분에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으니까
이 정도는 해주는 것이
사람으로서 예의였으니까
뭍에서 조금 떨어진
그곳에서 잠시 머물러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를 마치신
조금은 익숙해진 그분은
또 다른 부탁을 하셨지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시오
아 어떻게 해야 하나
뭍으로 돌아갈까
깊은 데로 나아갈까
이분이 뜻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왜 처음부터 깊은 데로
나가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뭍에서 호수로
이번에는 얕은 데서 깊은 곳으로
다음에 또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러면 다음에는 그 무엇일까
뭍으로 돌아가는 것도
깊은 데로 나아가는 것도
이제 나에게 달려 있는데
아 어떻게 해야 하나
짧은 순간 스치는
수많은 물음들을 가슴에 담고
난 한 걸음 더 나가고 있었던 거야
조금씩 그분에게 끌렸는지도 모르지
이미 시작했으니 되돌리기 싫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라 그저 가는지도 모르지
아무튼 깊은 데로 나아갔고
아무튼 그물을 내렸어
그분이 하라는 대로
그리고
지난 밤 처절한 패배의 현장에서
난 다시 일어났어
아니 난 다시 일으켜졌어
일어났기에 기뻤지만
일으켜졌기에 두려웠어
이제 낯설진 않지만 아직은 잘 모를
나를 일으키신 그분 앞에서
이제 그만 여기까지만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해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강박 속에
내가 떠날 용기가 나질 않아
나에게서 떠나시라고 읊조리던
참담한 패배를 딛고
두려운 승리를 품었던
그날 새벽녘
첫 만남의 낯섦을 녹이고
서서히 어느덧 날 사로잡은 그분은
마지막으로 청하셨어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제부터 사람을 낚으시오
그래 그랬던 거야
그분이 내게 원했던 것은 단 하나
물고기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는 것
내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명을 맡기시려고
조금씩 당신을 내어주셨던 거야
조금씩 나를 가지셨던 거야
조금씩 나를 드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사람을 낚으시오
옆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나가 그물을 던지시오
뭍에서 조금 저어 호수로 나가시오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시간 동안
그분이 내게 건넨 애틋한 청을
마지막에서 처음으로
곰곰이 되새기면서
어슴푸레 밝아오는 동녘을 바라보며
그날 새벽 나는 다시 뭍에 올랐어
여느 때처럼 호수로 나갈 채비를 하려
잠시 오른 것이 아니야
다시는 호수에 나가지 않으리라
이제 뭍에 뼈를 묻으리라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서
아직은 설은 다짐으로
아직은 뿌연 바람으로
그날 그렇게 뭍에 올랐어
그리고 난 지금도 뭍에 있어
그래서 난 지금도 뭍에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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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소(聖召)의 여정>
-우연(偶然)은 없다, 모두가 은총(恩寵)이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은총입니다. 모두가 성소의 여정 중에, 섭리 은총중에 살아갑니다. 이를 깨달아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이런 깨달음입니다. 성소의 여정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성소의 여정, 부르심과 응답의 여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결코 삶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넘어지면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이 답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큰죄입니다. 다음 옛 현자의 말씀이 성소의 여정에 도움이 됩니다.
“바르지 않은 길에서 멈출 줄 아는 사람이 헤매지 않고 길을 걸을 수 있다.”<다산>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 오래 갈 수 있다.”
삶이 바쁘고 힘들 때, 멈춤 줄 아는 것도 참 중요한 삶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이 영적 상징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님의 고기잡이 기적과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과정중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주님께서 고기잡이 기적을 일으키시고 제자들을 부르시는 과정이 우연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 안에 이미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의 은총이 선행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어부 시몬의 배에 오르실 때 이미 예수님은 시몬을 점찍어 뒀음이 분명히 감지됩니다. 우리보다 언제나 한 발 앞서 가시는 주님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가 삶의 의미와 기쁨을 잡아 끌어 올릴 깊은 데입니다. 시몬의 즉각적인 대답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써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밤새 노력했지만 허무와 무의미만 가득 길어 올렸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공허의 텅빈 가슴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런지요! 코헬렛 고백처럼 평생을 살아도 헛되고 헛된 삶일 수 있습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시편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시편 127,1-2)
주님이 빠진 삶은 헛된 삶이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단잠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시몬은 겸손하고 지혜롭게도 순종을 택했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았고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됩니다.
놀라운 은총, 충만한 행복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즉각적인 고백이 평생 묵상할 내용으로 참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많은 사람입니다.”
주님 거울에 환히 드러난 죄로 얼룩진 내면을 본 시몬입니다. '스승'이자 '주님'인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성인들의 공통적 반응이 죄인이라는 자각입니다. 아브라함(창18,27), 욥(42,6), 이사야(이6,5)의 체험도 이와 흡사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죄로 얼룩진 참나의 얼굴을 보고 즉각적인 회개와 더불어 겸손한 마음에 참나의 얼굴을 회복합니다. 시몬뿐 아니라 모두가 놀랐고 주님의 위로와 격려가 뒤따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성소의 여정이라 했습니다. 부르심과 응답은 단번에 끝난 듯 하지만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계속됐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쌍벽을 이루는 사도 바오로는 가톨릭교회의 양대 기둥입니다. 오늘 제1독서 코린토 전서 말씀은 주님을 만난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인간의 지혜가 어리석음이며 참으로 지혜롭기 위해서는 자기를 텅비운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한다는 체험적 고백에 공감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의 허황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입니다. 대우(大愚)이자 동시에 대지(大智)의 역설적인 바오로 사도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만난 깨달음의 절정을 나눠줍니다.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대우이자 대지의 사도 바오로는 우리 모두가 목표하는 영적 최고봉의 경지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날로 주님을 닮아 우리 모두 성소의 여정중 참으로, 지혜롭고 겸손한 삶, 너그럽고 자비로운 삶,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삶, 하느님으로 가득한 참 삶을 살게 합니다.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성소의 여정중인 우리 모두를 대우(大愚)의 사람이자 대지(大智)의 역설적 참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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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실은>
“형제 여러분,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남을 속이는 것만 반성하는데 어쩌면 남을 속이기에 앞서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기보다 자기를 속이는 경우가 더 많기에, 이것을 먼저 그리고 더욱더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속입니까? 자기를 잘못 생각하는 것과 더 나아가 자기를 잘못 믿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거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실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 많아서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했지요. 자기가 그리 지혜롭지 않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요,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인지를 알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아는 것에서 더 나아가 믿기까지 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자신감(自信感)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자신감이라는 것을 요즘 말을 빌려서 평하면 근자감, 곧 근거 없는 자신감입니다.
이 자신감이 어떤 때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기를 믿게 하고, 자기가 어리석은 줄을 모르고 지혜롭다고 믿게 하고, 심지어 불행한 줄을 모르고 행복하다고 믿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더 심각한 자기 속임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자기가 모든 것의 주인이라거나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렇게 곧 묘하게 얘기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왜 이렇게 얘기합니까? 사실 프란치스코의 말대로 우리 것이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다 하느님 것이고 내 것이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는 코린토 공동체가 바오로파니 아폴로파니 하고 갈라졌는데 사실 바오로 자기도 그리고 아폴로나 케파도 다 하느님 도구일 뿐이고, 자기들은 코린토 공동체를 하느님 공동체가 되도록 파견된 도구들이니 자기들은 코린도 신자들 여러분의 것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도 얘기하는데 모든 것이 여러분 것이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 것이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실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더 엄중한 사실은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고, 나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다 하느님 것입니다.
사실 여러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나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라져도 세상은 그대로 있으니 나라는 인생이 허무한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니 모든 것이 다 하느님 것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내가 소유한 것 내 것이지만 실은 하느님 것이고, 내 생명도 지금 내 것이지만 실은 하느님 것이라는 것도 사실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또 믿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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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루카5,6)
<어리석은 사람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 5,1-11)은 '고기잡이 기적과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군중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
그러자 시몬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가 잡히는 대박, 잡힌 고기가 두 배에 가득 차 배가 가라앉을 지경에 이르는 대박(육의 대박)이 일어납니다.
제베베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있었던 시몬 베드로가 몹시 놀라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5,8)
그러자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또 한번의 대박(영의 대박)이 일어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3,18-19ㄱ)
'어리석은 사람'은 시몬 베드로처럼 하느님의 지혜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 순종이 대박을 일으킵니다. 이 순종이 영과 육을 다시 살리는 대박을 일으킵니다.
말씀을 따르는, 말씀에 순종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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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루카 5, 11)
버려야
돌아갈 수 있고
부서져야
따를 수 있습니다.
따름의 여정은
깨어짐의 연속입니다.
깨어져야
가야할 길을
알게됩니다.
버려야 묶여 있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거칠고 아픈 시간을
걸어가는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삶의 기쁨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주어지는 참기쁨입니다.
진정 따른다는 것은
넘어지는 아픔까지
봉헌한다는 것입니다.
쏟아져 내리는
은총은 모든 것을
버릴 때 주어지는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되돌려 주시기 위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기쁘게
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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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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