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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 2강-생멸의 지혜, 아나함, 아라한-일부 메모
우 소다나 사야도 법문
일창 스님 통역
이것은 강의 내용 일부의 메모를 편집한 것으로 스님들의 검증을 받지 않은 것이며, 주석과 첨부는 메모자가 다른 책에서 인용한 것도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보내거나 인터넷에 게시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강의 내용 전체는 한국마하시선원 카페 https://cafe.naver.com/koreamahasi/2094 (2021-5-20)참조.
교재 : 『열반에 관한 법문』 (마하시 사야도 원법문, 한국마하시 사야도 우 소다나 재법문,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도서출판 불방일, 2021년 4월 5일 출간)
지혜의 단계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부풂 꺼짐 오른발 왼발” 등 육문에서 생기는 분명한 대상이 생길 때마다 모두 관찰하지 못하는 초보 수행자는 분명한 육체적인 현상 하나를 기본으로 삼아서 관찰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가고 있을 때에는 가는 움직임을 기본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좋고, 앉아 있을 때에는 앉아 있는 상태를 관찰하면 됩니다. 그때 다른 현상이 나타나면 분명한 현상을 관찰해야 됩니다.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앉아 있을 때 그냥 앉아 있는 상태보다 더욱 분명한 배가 부풀고 꺼지는 것을 먼저 관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부풂 꺼짐을 잘 관찰하다가 중간에 생각이나 망상이 분명하게 나타나면 그것을 관찰해야 합니다. 혹은 저림, 뜨거움, 아픔 등의 느낌들이 분명하면 그것들을 관찰한 다음에 부풂 꺼짐으로 돌아옵니다. 봄 들림 좋아함 싫어함 등도 분명하면 분명하게 드러날 때마다 관찰합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삼매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납니다. “부푼다, 꺼진다.” 다섯 번 정도 하면 다른 곳으로 달아나기도 합니다. 누구를 만나고, 시장가고 하는 식으로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납니다. 그런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실망하지 말고 생각을 관찰해서 알 수 있도록 노력하기만 하면 됩니다. “달아남, 달아남, 망상함, 망상함, 생각함, 생각함” 등으로 관찰하면 됩니다.
그렇게 잘 관찰해 나가서 삼매의 힘이 좋아지면 더 이상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습니다. “부푼다, 꺼진다.” 관찰 대상에만 마음이 착착 잘 붙어 있습니다. 가끔 생각이 다른 곳으로 달아난다고 해도 그 생각을 즉시 관찰해서 압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관찰해서 알고, 알자마자 바로 생각이 멈추고, 멈추자마다 “부푼다, 꺼진다.”로 계속 관찰하는 대로 알아갑니다. 이때는 앞의 마음도 관찰하는 마음, 그 다음 마음도 관찰하는 마음, 이렇게 관찰하는 마음만 계속해서 깨끗하게 이어지는데, 이것을 “마음 청정”이 생겼다고 합니다. 마음청정이 생기도록 열심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관찰해서 알게 되는 대상과, 관찰해서 아는 정신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물질 대상이라면 “관찰해서 알게 되는 물질이 따로 이고, 관찰해서 아는 정신이 따로 이구나.”라고 구분해서 알게 됩니다. 관찰할 때마다 저절로 많이 알게(경험하게) 되면, “‘나’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알아지는 물질과 아는 마음(정신) 두 가지만 있을 뿐이구나.” 라고 알게 됩니다. 이것이 “정신 물질 구별의 지혜”, 청정으로는 “견해청정”이 생긴 것입니다.
계속 관찰해 나가면 조건과 결과가 계속 생기고 있는 것을 스스로의 지혜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로는 “조건 파악의 지혜”라고 하고, 청정으로는 “의심 극복 청정”이라고 합니다.
계속 관찰해 나가면 관찰해서 알아지는 대상들이 새록새록 생긴 뒤에 찰나마다 즉시 사라지는 성품 혹은 처음과 중간과 끝이라는 세 가지 성품을 모두 분명하게 경험합니다. “생겨서는 사라져 버리니 이것은 무상한 것이구나.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닌 괴로움이구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무아일 뿐이구나.”라고 약간 명상하는 듯 혹은 숙고하는 듯한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명상의 지혜”입니다.
계속 관찰해 가면 한 순간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는 것만 경험합니다. 그러면 빠르게 관찰할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는 성품, 예를 들면 예리한 사띠, 예리한 지혜가 생기는 것도 경험합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빛도 경험하고, 소름 돋는 희열, 몸과 마음의 편안함인 경안이 생기는 것도 경험합니다. 이것이 생김과 사라짐을 아는 생멸의 지혜입니다. 이 생멸의 지혜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칭송하셨습니다.
생멸의 지혜
출처 : https://cafe.naver.com/koreamahasi/2098
또한 누가 백 년을 살지라도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지 못한다면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이의
단 하루의 삶이 더욱더 훌륭하네.
요 짜 왓사사땅 지웨, 아빳상 우다얍바양.
에까항 지위땅 세요, 빳사또 우다얍바양. (Dhp.113)
대역:
요 짜 : 부처님 출현 아홉 번째 좋은 시기에* 사람으로 태어난 어떠한 이가
우다얍바양 : 집착의 대상인 다섯 취착무더기의 생성소멸을
아빳상(apassaṁ) : 관찰하지 않고 수행하지 않아서 알고 보지 못한 채
왓사사땅 : 백 년이란 긴 세월동안
지웨 : 죽지 않고 계속 산다 하더라도
따또 : 그보다; 다섯 취착무더기의 생성소멸을 관찰하지 않고 수행하지 않아서
알고 보지 못한 채 백 년이란 긴 세월동안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것보다
우다얍바양 : 집착의 대상인 다섯 취착무더기의 생성소멸을
빳사또 : 관찰하고 수행하여 알고 보는 이가
에까항 : 한낮 한밤, 단 하루 정도라도
지위땅 : 물질정신 연결되고 조건결과 이어져서 생명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세요 : 부처님 출현 아홉 번째 좋은 시기에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다네.
거룩하고 훌륭하다네.
*주: 부처님 출현 아홉 번째 좋은 시기 : https://cafe.daum.net/satisamadhi/4vdS/1894 참조
마하시 사야도의 게송
생성소멸 못 보고서
백년사는 삶보다도
생멸 보는 단하루가
더욱더 거룩하다네.
생멸의 지혜를 우 소다나 사야도는 고속도로의 휴게소에 비유합니다. 자동차를 오래 동안 타면 피곤하므로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서 쉬고 식사도 하는 것처럼, 위빳사나 수행도 처음에는 아프고 저리고 피곤합니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수행하면 지혜가 생기기 시작하여 생멸의 지혜에 도착했을 때, 빛 희열 편안함 등을 경험하기 때문에 좀 쉬는 듯한 단계가 생멸의 지혜이기 때문에, 그리고 여기에 이르면 그 다음 지혜에도 쉽게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생멸의 지혜에 도달하도록 열심히 수행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빛이나 희열에도 집착하지 않고 계속 관찰만 중시하면서 계속해서 관찰해 나가면, 형체가 더 이상 드러나지 않고 빠르게 사라지는 성품만 경험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알게 되는 대상도 사띠해서 아는 마음도, 생기는 것은 분명하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것만 경험합니다. 이렇게 소멸을 알고 보는 지혜를 무너짐(소멸)의 지혜라고 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부풀어오는 배의 모습이나 머리 팔 다리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떤 수행자는 인터뷰할 때 가족들도 이와 같이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우는 수행자도 있었습니다. 지혜에서 나타난 현상이니까 가족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계속 관찰하기만 하라고 지도하곤 했습니다.
계속 관찰을 이어가면 두려움의 지혜, 허물의 지혜, 염오의 지혜, 벗어나려는 지혜, 재성찰의 지혜가 차례대로 생긴 뒤에, 형성들을 단지 알기만 하면서 평온하게 관찰하는 형성평온의 지혜의 단계에 도달합니다. 이 지혜가 완전히 무르익었을 때,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는 물질정신을 관찰하여 알고 있는 중에, 물질정신들이 완전히 소멸해 버린 어떤 성품에 지혜가 도달합니다. 대상도, 대상을 관찰해서 아는 마음도, 탁 하고, 픽 하고, 휙 하고 도달하는 어떤 성품에 도달합니다.
이것이 성스러운 도의 지혜, 그리고 바로 이어서 과의 지혜입니다. 이렇게 처음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가 한 번 생기면 수다원이 됩니다. 수다원에게는 사악도에 떨어지게 하는 이전의 업이 다해 버립니다. 사악도에 떨어지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업은 행하지 않습니다. 여덟 번 이상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바닷물에 긴 풀잎을 담갔다가 꺼내서 물이 일곱 방울 묻어 있다고 하면,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윤회의 고통은 그 일곱 방울의 물과 같고, 사라져버린 고통은 남아 있는 바닷물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반대로 범부(성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고통은 바닷물과 같습니다. 범부들은 생(삶)의 부자입니다.
수다원이 위의 단계를 성취하기 위해서 수행을 시작하면 생멸의 지혜부터 시작해서 위빳사나 지혜가 향상된 뒤에 사다함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에 도달하여 사다함이 됩니다. 사다함이 되면 탐욕 성냄 등의 번뇌가 약해지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사다함도 계속 수행하면 위빳사나 지혜가 무르익어서 아나함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에 도달하여 아나함이 됩니다. 아나함이 되면 욕계 탄생지에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이전의 업들이 다하고, 욕계 탄생지에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업도 더 이상 생기지 않습니다. 감각욕망과 관련된 탐욕, 성냄이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욕계 탄생지에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업이 생기지 않는다면, “욕계 선업 예를 들어 보시를 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아나함도 선행을 하기는 하지만, 욕계의 생을 애착하고 갈망하는 감각욕망갈애이라는 짝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업은 더 이상 욕계에 태어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욕계 탄생지에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업도 더 이상 생기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나함이 행한 업은 전혀 과보를 주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현생에 과보를 줄 수도 있고, 자연적으로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의 힘으로, 아라한의 도와 과라는 결과를 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욱가 장자 일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첨부 참조)
아나함이었던 욱가 장자가 사람의 생에서 부처님께 “훌륭한 결과를 얻고자 보시합니다.”라고 기원하면서 훌륭한 음식을 올렸습니다. 아나함인 욱가 장자가 말하는 훌륭한 결과는 아라한도일 것입니다. 장자는 죽은 뒤에 정거천에 태어났습니다. 거기서 부처님께 와서 인사드렸을 때 “그대가 바라는 거룩한 결과를 얻었는가?”라고 부처님께서 물었습니다. 장자는 “네, 부처님, 제가 바라는 결과를 얻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나함이었던 장자가 아라한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훌륭한 것들을 보시해서 정거천에 태어나 머지않아 아라한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나함에게 생기는 욕계 선업은 강하게 의지하는 조건의 힘으로 아라한과라는 결과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시했다고 해도 위빳사나 수행을 하지 않고 아라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위빳사나 관찰을 해야 아라한이 됩니다. 아나함이 아라한이 되는 목적으로 열심히 관찰을 하면 위빳사나 지혜가 무르익으면 아라한 도과의 지혜로 다시 열반을 경험하고 아라한이 됩니다. 아라한이 되면 무명 갈애 모든 번뇌가 없어지므로, 이전의 모든 업들도 새로운 생에 태어나도록 하는 결과를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보배경에서 “이전 것도 다했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라한이 필수품을 다른 스님에게 베푸는 행위, 계를 지키는 행위, 법을 설하는 행위, (선행이라고 말하지 않음) 법문을 듣는 행위, 자애 수행을 하는 행위,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행위 등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라한에게는 번뇌라는 짝이 없기 때문에, 번뇌라는 과보를 줄 수 있는 새로운 업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행하는 것은 다음 생에 태어나게 하는 결과를 주지 못하고 작용(기능, 역할)만 생깁니다. 그래서 “이전 것(업)도 다했고, 새로운 것(업)도 안 생기네.”라고 보배경에서 설한 것입니다.
이어서 “나중의 생에 대해서 집착마음 없다네.”라고 설했습니다. 범부들은 현재생을 애착하고 즐깁니다. 천천히 늙고 병들지 않고 그대로 계속 살기를 바랍니다. 노인들이 너무 오래 살았다고 말은 하시지만, 실제로는 존재 갈애가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은 믿지 말아야 할 말입니다. 현재생에서 잘 살았던 사람은 죽더라도 그처럼 잘 살기를 혹은 더 좋은 생에 태어나고 싶어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까지도 생(존재)를 애착하고 즐기는 성품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천상의 행복을 누리려고 하는 욕망이 남아 있습니다. 아나함에게는 욕계의 감각욕망을 즐기려는 애착은 없지만 색계나 무색계에 존재하고자 하는 애착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아나함도 색계나 무색계에 다시 태어납니다.
아라한에게는 현재생을 애착하는 마음이 전혀 없고 다음 생에 대해서도 바라는 성품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죽고 사는 것에 대한 게송이 테라가타(長老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죽음도 안 바라네. 목숨도 안 바라네.
단지 시간만을 고대하나니. 월급쟁이 월급만 고대하듯이.
설명:
“죽음도 안 바라네.” : 죽은 뒤 다음 생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목숨도 안 바라네.” : 현재의 삶을 계속 유지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라한에게는 바라는 성품인 갈애가 전혀 없기 때문에, 현재 생의 생명을 계속 유지하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죽는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성냄인데 아라한에게는 성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는 것도 원하지 않고 사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라한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단지 시간만을 고대하나니. 월급쟁이 월급만 고대하듯이.” : 근로자들이 월급날만 기다리듯이 아라한은 완전열반에 들 시간만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근로자들은 피곤하므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렇다고 일을 안 하면 생계유지에 문제가 생기니 일을 그만두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근로자들이 월급날만 기다리는 것과 같이 아라한들은 반열반에 들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열반에 들어야만 매우 무겁고 큰 짐(오온)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라한들에게는 자신에게 생기고 있는 물질과 정신작용들인 오온이 매우 무거운 짐으로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오온을 항상 보살펴 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걸어야 하고, 가끔씩은 멈춰서야 하고, 가끔씩은 앉아야 하고, 가끔씩은 누워야 되고, 자세도 한 가지만 유지하고 있으면 무너지기 때문에 바꿔줘야 합니다. 굽혔다가 폈다가 움직였다가 여러 가지 동작으로 몸을 바꿔줘야 합니다. 매일 탁발해서 음식도 먹어야 하고, 물도 마셔야 하고, 세수도 해야 하고, 샤워도 해서 계속 보살펴줘야 합니다. 심지어는 눈을 깜빡이거나 적당한 대상을 생각하거나 하면서 보살펴줘야 합니다. 계속 숨을 쉬어서 보살펴주어야 합니다. 적당한 날씨, 적당한 장소, 적당한 음식, 적당한 약으로도 계속 보살펴줘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온이 매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허묾)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이 오온을 언제 처음 얻었는가 하면, 현생에서는 현생에서 재생연결할 때 얻었습니다. 그 순간을 시작으로 알고 닿고 보고 하면서 물질 정신 무더기들(오온)이 끊임없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이전 생의 업(원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 업(번뇌)이 있었던 과거에도 오온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과거생의 오온도 그보다 더 이전 생의 업(번뇌)이라는 원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물질 정신 무더기가 언제 최초로 생겼는지 찾아보고, 찾아봐도 그 제일 처음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작을 알 수 없는[無始] 윤회, 실제로는 시작이 없는 윤회라고 합니다. 비유하자면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망고 씨와 망고나무 중에 어떤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우주가 처음 생길 때 인간세상이 처음 생기는 것처럼, 닭과 망고나무도 그때 생겼다고 말할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 정신 무더기의 처음은 어떻게 하더라도 시작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물질 정신 무더기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시간이 매우 길었다고 하는 말을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윤회하는 동안 짊어져 왔던 매우 무거운 오온이라는 짐을 반열반이라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라한 존자들은 완전열반에 들 시간만 고대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게송을 읽고 오늘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죽음도 안 바라네. 목숨도 안 바라네.
단지 시간만을 고대하나니. 월급쟁이 월급만 고대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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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보시로 아라한이 된 욱가 장자의 일화
https://cafe.naver.com/koreamahasi/2097
2018년 7월 부처님 공양 법문
-법문: Ven. 한국마하시 우 소다나 사야도
-통역: 우 담마간다 스님
-녹취: 까루나님
부처님 당시 때 웨살리Vesālī 국에 욱가Uggā라는 장자가 있었습니다. 욱가 장자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여덟 가지 놀랄 만한 덕목을 갖추었다고 비구 대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한 비구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욱가 장자의 집에 가서 “욱가 장자여, 그대는 여덟 가지 놀랄 만한 덕목을 갖추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여덟 가지 놀랄 만한 덕목을 갖추었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욱가 장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어떠한 여덟 가지 특별한 덕목을 두고 말씀하셨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저에게 분명히 있는 여덟 가지 덕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부처님을 처음 뵈었을 때부터 ‘진정한 정등각자이시다’라고 바로 믿고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나중에 아나함 성자가 되지만 욱가 장자가 부처님을 처음 뵈었을 때는 범부였습니다. 아직 범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바라밀이 무르익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바로 뵙자마자 ‘정등각자이시다’라고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라밀이 없으면 ‘이 분은 성자이시다’라고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믿고 결정하고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들으면서 네 가지 진리를 알고 보는 법안<아나함 도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청정범행 제5계*도 수지했습니다.”
*주: 청정범행 제5계란 삿된 음행 계목 대신에 음행을 전혀 하지 않는 계목을 넣어 수지하는 오계를 말합니다. 자세한 것은 비구 일창 담마간다, 불방일, 『가르침을 배우다』 pp.174~175 참조.
“세 번째는 저에게는 젊은 네 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네 명의 부인들에게 저는 ‘누이들이여, 나는 청정범행 제5계를 수지했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대들과 부부로서 지낼 수 없소. 그러니 이 집에서 계속 지내고자 한다면 남매처럼 생각하고 지내시오.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돌아가시오. 자기가 마음에 들어 하는 남자가 있으면 말하시오. 그 남자에게 맡겨 주겠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첫째 부인은 자기가 원하는 남자에게 보내 주기를 청했습니다. 저는 아주 젊은 그 첫째 부인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 물주전자로 물을 부으면서 그 남자에게 보냈습니다. 이렇게 보낼 때 저의 마음에서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입니다.”
질투, 인색이 없다는 말입니다.
“네 번째는 제가 가진 모든 재산을 계를 갖춘, 그리고 실천을 구족한 이들과 구분하지 않고 나누어 사용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하나입니다.”
이것에 비춰보자면 여러분들이 매달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또 이곳에 온 도반들, 수행자들과 같이 나누기 위해서 음식 등을 준비한다면 계를 갖춘, 실천을 구족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욱가 장자와 같은 성자들의 실천을 잘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비구들을 친견할 때는 아주 정성을 다해 조심스럽게 친견합니다. 이것이 하나입니다. 여섯 번째는 그 친견한 비구 스님이 법을 설하면 정성스럽게 듣습니다. 그 비구 스님이 법을 설하지 않으면 제가 법을 설합니다. 이것이 하나입니다.
일곱 번째는 천신들이 저에게 와서 ‘장자여, 부처님의 가르침은 잘 설해진 가르침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잘 설해진 가르침이라고 말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은 잘 설해진 가르침입니다.’라고 그들에게 다시 대답합니다. 이렇게 천신들과 대화를 하더라도 저에게 거만함이나 아만·자만, 건방짐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입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아랫단계인 욕계 윤회에 헤매게 하는 족쇄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존재더미사견, 의심, 행실의례취착, 감각욕망애착, 분노라는 낮은 부분 족쇄 다섯 가지가 모두 저에게는 없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하나입니다. 저에게 분명한 놀랄 만한 덕목들은 이러한 여덟 가지입니다.”
그렇게 특별한 덕목 여덟 가지를 갖춘 아나함 욱가 장가가 어느 날 자신의 집에 오신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여쭈면서 주식, 부식물 등을 올렸습니다.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는, 아끼는, 좋아하는 것을 보시하면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고, 좋아하는 것을 얻는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살라sāla 나무 꽃 모양의 과자를 아낍니다. 좋아합니다. 그 과자를 연민의 마음으로 받아주십시오. 대추를 우린 신맛 나는 물로 요리한 돼지고기 반찬도 저는 좋아합니다. 그 돼지고기 반찬도 받아주십시오. 기름에 데친 공심채(空心菜)도 좋아합니다. 그 공심채 요리도 받아주십시오. 여러 가지 국물과 소고기 반찬을 곁들인 살리밥도 좋아합니다. 그 여러 가지 국물과 소고기 반찬을 곁들인 살리밥도 받아주십시오. 까시(Kāsi) 국에서 나는 부드러운 옷감도 좋아합니다. 그 옷감도 받아주십시오.”
이러한 등으로 여쭈고 나서 자신이 아끼고 좋아하는 먹을 것, 마실 것, 사용할 필수품들을 보시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축원해 주셨습니다.
흡족하게 보시한 이 흡족한 것 얻는다네.
올곧은 성자에게 열의 가져 보시하면 …
그 참사람 베풀기에 어려운 것 베풀고서.
흡족하게 보시하여 흡족하게 얻는다네.
욱가 장자는 자신이 아끼고 좋아하는 먹을 것, 마실 것, 사용할 필수품 등을 보시했고, 그러자 부처님께서 위의 게송을 통해 축원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게송의 의미는 ‘마음에 드는 것을 보시한 이는 마음에 드는 것을 얻는다. 올곧은 성자에게 열의를 가지고 잘 보시하면 그렇게 베풀고 나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얻는다.’라는 뜻입니다.
그 뒤 시간이 조금 흘렀을 때 욱가 장자는 인간 세상에서 임종하여 아나함이므로 정거천 범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뒤 머지않아 부처님께 와서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어떤가, 욱가여. 그대가 바라는 대로 다 이루어졌는가?”라고 물으셨습니다. 욱가 범천은 사람의 생으로 있을 때 아라한도와 과를 염원했습니다. 그것을 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욱가 범천도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바라는 대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여기서도 아끼고 좋아하는 것을 보시하면 아끼는 것을 얻는다는 가르침에 따라 자신이 아끼고 염원하던 아라한과를 마음에 두고 자신이 아끼고 좋아하는 먹을 것, 마실 것 등을 사람의 생에 있을 때 보시했고, 범천 세상에 태어났을 때 자신이 아끼고 염원하던 아라한과에 도달하여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바라는 대로 다 이루어졌다고 장담하면서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보시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처님을 위시한 승가와 계와 실천을 갖춘 도반들에게 보시한 보시의 공덕, 계를 잘 지킨 지계의 공덕, 열심히 잘 실천한 수행의 공덕으로 이번 생, 이번 몸, 이번 부처님의 가르침에, 아니면 언젠가는 도와 과의 지혜로 여러분들이 바라는 열반을 증득하는 데 이러한 것들이 바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 매달매달 보시하고 계를 지키고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욱가 장자가 그렇게 장담하고 말씀드렸을 때 부처님께서 다시 설하신 게송을 끝으로 법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흡족하게 보시한 이 흡족한 것 얻는다네.
으뜸인 것 보시한 이 으뜸 다시 얻는다네.
뛰어난 것 보시한 이 뛰어난 것 얻는다네.
최상인 것 보시한 이 최상 경지 도달하네.
첫댓글 사두 사두 사두 ~~^^
고맙습니다 ~~
사-두 사-두 사-두! _()_
사두사두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