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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잘츠부르크(Salzburg)의 대주교의 궁전 소속 음악가이며 존경받는 작곡가이고 바이올린 주자이던 레오폴드 모짜르트(Leopold Mozart)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예술사상 가장 비상한 천재 아동으로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작곡을 시작했으며 여섯 살 때에는 마리아 테레사 여왕의 궁전에서 연주했다. 야심적인 그의 아버지는 다음 해에 파리, 런던, 그리고 뮌헨을 포함하는 대연주여행을 계획했다. 열세 살 될 때까지 이미 이 소년은 여러 곡의 소나타, 교향곡, 종교음악 작품과 한 편의 오페라 부파, 그리고 <바스티엔과 바스티엔느(Bastien and Bastienne)>라는 오페레타를 작곡했다. 그는 성년이 되기 전에 이미 예술의 모든 형식에 숙달되어 있었다. 다른 어떤 작곡가도 따를 수 없던 그의 창작력의 속도와 확실성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가장 잘 묘사하고 있었다. "비록 길이가 긴 작품이라도 그것은 내 마음 속에 완성되어 있었다. 나는 기억의 자루에서 이미 거기에 수집되어 있는 것을 꺼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므로 종이에 옮기는 것은 아주 빨랐다.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이 악보 위에서 나의 상상과 다른 일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나는 이 일을 할 때 방해받는 것을 용납한다. 내 주위에서 무엇이 진행되든 간에 나는 쓰고 이야기하기까지 한다." 그와 그의 후원자이던 잘츠부르크의 대주교 히로니무스 폰 콜로레도(Hieronymos von Colloredo)와의 관계는 매우 불운한 것이었다. 원기 왕성한 젊은 예술가는 예술후원 제도가 강요하는 사회적인 제약에 반항하였고 마침내 그 지위를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대주교와 다투고 해고 되었고 25세의 나이로 자유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비인에 자리를 잡으며 그 동안에 공식 지위를 구했다. 앞으로 남은 10년의 여생을 그는 재정적인 안정과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평온을 되찾으려는 비극적인 고투 속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 당시 세속적인 성공은 귀족의 보호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를 "결정적인 재능"이라고 언급한 일도 있던 황제 요셉2세는 그보다 못한 사람의 편을 들어 그를 지나쳐 버리거나 드디어 모짜르트를 고용한 이후에도 궁중무도회의 무곡을 작곡하게 하는 등 천재에는 어울리지 않는 임무를 주었다. 이 일에 관해 (그의 보수에 관해) 모짜르트는 "내가 하는 일에 비해서는 너무 많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비해서는 너무 적구먼"하고 빈정대며 말했다. 1782년 그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다. 이 단계는 아들의 행복을 확보하려고 헛되이 애쓰면서 선의의 권력을 휘두르는 부모와 모짜르트를 연결하는 긴밀한 유대로부터 그가 해방된 계기가 되었다. 콘스탄체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으며 또한 모짜르트가 유래없이 무방비했던 세상과의 투쟁에서 보호될 만한 부(富)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가끔 애정이 식기도 했지만 이 평범한 여인에게 모짜르트는 깊은 애착을 갖었었다. 그녀는 모짜르트의 사후 여러 해가 지나 세상이 그를 칭송함을 보고서야 남편의 위대함을 실감하게 된 것 같다. 로렌쪼 다 폰테(Lorenzo da Ponte)의 대사에 의해 1786년 작곡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으로 모짜르트는 성공이란 면에서는 그의 최고봉에 도달했다. 이 작품은 비인과 프라하에서 대단한 평판을 얻었고 프라하로부터의 그의 편지는 이와같은 반응에 대한 그의 기쁨을 말하고 있다. 그는 다음해에 상연할 또다른 작품을 위촉 받아 역시 로렌쪼 다 폰테의 대본에 의한 <돈죠반니(Don Giovanni)>를 썼다. 이 오페라는 비인사람들을 당황케 했고 그에 대한 호평은 사라졌다. 당시 경솔한 대중들의 견해로는 우리가 명확성과 우아함의 표상이라고 생각하는 이 작곡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의 음악은 몇 번씩 들어야만 파악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는 말은 그것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입증한다. 사실상 모짜르트는 귀족적 오락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고 그는 세상에 새로운 강렬한 발언을 찾아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요셉2세는 <돈죠반니>를 가리켜 "이 오페라는 아마도 피가로보다 더 아름다운 천상의 아름다움을 가졌어. 그러나 나의 비인 시민들의 이로는 먹기 어려운 음식이야" 라고 말했다. 그것에 대해 모짜르트는 "그렇다면 그들이 씹을 수 있는 시간을 주라"고 말했다. 어떤 출판업자가 보다 인기있는 양식으로 작곡하라고 권했을 때 그는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쓸 수 없으며 차라리 굶어 당장에 죽는 편이 낫다"고 대답했다. 그는 만년을 더욱 심한 궁핍 속에 지냈다. 그가 친구들에게 보낸 도움을 청한 편지들은 그의 절망과 무력함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희망과 불안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가 굉장한 노력으로 쫓아버려야 할 암담한 생각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초기에 여러 실망적인 일들에 도 불구하고 그를 지탱해 온 생에 대한 사랑은 그에게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여러 번 그의 어려운 일들을 해결할 듯 여행을 떠났으나 그 때마다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의 작품 산출이 감소된 후 생애 마지막 해에 그는 분발하여 최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대중적인 비인의 극장을 위해 배우이자 흥행사이고 엉터리 시인이던 에마뉘엘 쉬카네더(Emanuel Schikaneder)의 대본에 의한 마적(Zauberflote;마술피리)을 썼다. 다음에는 희망의 돌풍이 그를 몰아 새 황제 레오폴드 2세의 보헤미아왕 대관식이 있는 프라하로 떠나게 만들었다. 이 행사를 위해 작곡한 축제 오페라 <티토 왕의 자비>는 오래 끈 대관식 의식에 지쵸버린 귀족들을 감동 시키지 못했다. 모짜르트는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비인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종의 강한 절망감 속에서 마지막 과업인 진혼곡에 손을 댔다. 그것은 자신이 작곡가라는 환상에 빠진 음악애호가인 어느 백작이 자신의 작품으로 내놓으려는 생각에서 의뢰한 것이었다. 과로에 지친 모짜르트는 이 죽은 자를 위한 미사가 자신을 위한 것이고 그는 이것을 마치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죽음의 환상에 깊이 빠진 이 대작을 쓰는데 자신의 능력을 다 기울였고 시간과의 비통한 경주가 시작되었다. 그의 최후의 나날은 <마적>의 인기가 올라가므로써 활기를 띠었다. 병이 위중한 작곡가는 시계를 손에 들고 마음으로 공연을 따라가고 있었다. "지금 첫 막이 끝났어....이제 밤의 여왕의 아리아가 나올 차례야 " 그는 작품의 한가운데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애제자인 지스마이어(Fanz Sussmayr)는 스승의 초고를 바탕으로 자신의 것도 약간 첨가하여 이 미사를 완성했다. 모짜르트는 1791년 그의 생일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부채 때문에 그의 장례는 극빈자의 장례로 치루어졌다. 날씨가 험악해지자 장례식에 참석해서 성문까지 따라갔던 친구들도 돌아가고 영구차만이 홀로 가게 두었다. "이와 같이 한 줄의 음악도 없이 그가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 받고 이 음악의 왕자는 땅에 묻혔다- 자기의 무덤도 아닌 극빈자의 공동 묘지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