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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고의 남자 신데렐라 >
모두가 알지만 모르는 뒷이야기
거지, 부랑자, 탁발승
반란군의 우두머리
피의 숙청
황토의 모래바람을 잠재우다
"명나라는 가죽 벗기기로 시작해 가죽 벗기기로 끝났다."
루쉰(鲁迅, 1881년 9월 25일 ~ 1936년 10월 19일)은 중국의 소설가
역사상 최고의 남자 신데렐라는 단연 홍무제이다. 그는 여복이 있었다. 역경과 역병을 모두 이겨낸 나의 롤 모델이다. 인자하고도 잔인한 면모를 다 갖추었다.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신분 상승의 최고봉은 그가 거머쥐었다. 남자도 여자를 잘 만나 유리구두를 벗어던질 수 있을까? (참고로 신데렐라가 신었던 구두는 하얀 털신이었다. 1697년 프랑스 동화 작가 샤를 페로가 ‘상드리용(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여자)’의 발에 하얀 털신을 신겼다. 하지만 그의 프랑스판 이야기가 영어로 옮겨지면서 프랑스어 ‘vair(일종의 흰색 털) ’가 ‘verre(유리)’로 잘못 번역돼서 ‘하얀 털신’이 ‘유리구두’로 둔갑했다. 유리구두가 훨씬 더 아름다워 보이긴 하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자 부랑자로 떠돌다 탁발승이 되었다. 수행자(승려)가 남에게서 음식을 빌어먹는 행위이다. 인생에는 바닥까지 내려가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 세계가 싫어 올라오려는 자들과 그 세계를 지배하려는 탐욕스러운 군상들을 다 겪고 훗날, 이때 배운 모든 것들을 정치에 활용했다. 반란군에 들어가서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통일하기 시작했다. 무협지나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닌 역사 속 인물의 이야기이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남자 신데렐라이다. 모든 노려봐야 할 적이 된 순간, 스스로 운을 만들어간 사람이다. 하늘이 준 불운과 맞짱 뜨고 이겨낸 한 남자의 눈물겨운 뜨거운 인생 이야기이다.
중팔은 1328년, 원나라 호주 종리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부인 부모는 먹을 게 없어서 그를 갖다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까지 했다. 어떻게든 근근이 먹고는 살았다. 17세가 된 어느 날 전염병과 기근으로 부모와 형을 잃었다. 썩어가는 시신 앞에선 어린 소년에게 가능이란 단어는 없었다. 통곡의 시대였다. 망연자실한 아이 앞에 아웃 주민이 다가와 내게 작은 땅이라도 있으니 일단 장례부터 치르거라. 힘들면 언제든 찾아오거라. 내 이름은 유계조이다"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떠돌다 밥이라도 먹을 수 있기에 황각사를 찾아갔다. 절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읽고 쓰는 것에 탁월했다. 문맹이 많았던 시절 글을 안다는 것은 혁명의 아이콘이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의 유리구두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그의 탁월함을 알아본 주지스님이 탁발승으로 전국을 떠돌라고 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떠돌며 타락한 관료들과 부패한 정치에 백성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사는지 몸소 배웠다.
친구의 권유로 홍건적에 들어갔다. 홍건적 대장 곽자홍은 중팔의 총명함과 인간 됨을 보고 그가 뛰어난 인물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중팔은 싸움과 학문에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의리의 인간이었다. 아름다운 삶의 기술의 달인이었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문과 무를 겸비한 자가 출세하기가 제일 쉽다. 멋진 남자는 남자가 먼저 알아본다. 두목 곽자홍은 그를 눈여겨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되었다. 장인은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촌스러운 중팔이라는 이름을 원장으로 이름을 개명했다. 1368년 1월 31일 새로운 세상이 그에게 펼쳐진다. 중국사 최후의 한족 통일 왕조 명나라의 창업 군주가 되었다. 후계자의 자리를 충실한 사위인 그가 물려받은 것이다. 수많은 반란군을 제압하고 황사가 전국을 덮을 때 그가 홀연히 나타나 교통정리를 했다. 그가 바로 훗날 명나라의 황제가 되는 주원장이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가장 먼저 유계조를 찾았다. 한순간도 그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고 했다. 보은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성공하고 싶은 이유와도 같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관료들에게는 박피형을 가했다. 부패한 관료들을 철저하게 응징했다. 벗긴 가죽을 허수아비에 씌워 관청 문 앞에 세웠다. 길거리에 전시했다. 효수를 해서 저잣거리에 매달았다.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그였지만 정치 관료들에겐 엄격했다. 황권 강화를 위해 개국공신들과 가족들을 잔인하게 숙청했다. 과거엔 그렇게 잔악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만이 또 다른 죽음을 덮을 수 있는 어둠의 실력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언제든 나와 내 가족이 아무도 모르게 독살당할 수도 있고 죽음과의 거리가 가까웠다. 언제든 원시 소년처럼 짱돌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내 가족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는 역병이 창궐하던 시기 그를 도와준 유계조를 단 하루도 잊지 않았다 했다. 아름다운 보은이다. 역병 중 나를 도와준 자가 누구일까?
공신들의 힘으로 얻은 권력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는 이방원의 롤 모델이기도 하다. 영웅의 아우라와 성군의 자질과 도덕적 관념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고대에는 치안과 사법 강화를 하기 위해 형벌이 가혹했다. 남편의 포악함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내인 마화후밖에 없었다. 아내의 말을 잘 듣는 게 중요하다. 황권에 관심이 없는 자에겐 관대해서 신뢰를 잃지는 않았다. 겸손하고 온화한 처세술의 달인인 서달은 잘 살아남았다. 그에게도 하루하루가 힘들었을 것이다. 세종이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 이방원이 길을 잘 닦아 주었기 때문이다. 역병을 이겨내고 광활한 땅을 지배하고 고통의 순간 도와주었던 손길을 기억한 황제, 백성들의 아픔에 주저하기 않고 공감했던 성군이 되었다.
나는 정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혹여 잉여인간은 아닐지? 아니 어쩌면 부유물일지도 모른다. 무심코 내가 뱉어낸 분노가 누군가에겐 치사량의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를 마지막 잎새처럼 매달려 대롱거렸다. 삶의 거적대기를 벗어버리고 철새처럼 날아 가을 숲의 가장 깊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나를 물고 뜯었던 그들을 용서하려고 이를 악물었다. 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삶이 주는 시련의 차가운 냉기는 시체실의 온도처럼 느껴졌다. 악다구니를 쓰고 늑골 깊숙이 파고든 슬픔의 칼날을 차마 빼지 못했다. 늘 두려웠다. 원시시대부터 가슴 아래 슴베찌르개가 깊숙이 박혀있었다. 난 그렇게 타고났다. 남편이 같이 동반자살이나 하자라는 말을 한다면 교외 커피숍이나 가자는 말처럼 들릴 것 같다. 가슴 설렌다.
그래 끝까지 싸우는 거야. 언론이 회칼을 휘두르면 난 광어가 되지. 푸르디 푸른빛을 뿜는 절대 미각의 고등어회가 돼버리기도 했지! 전 국민의 자극적인 입맛을 맞추기 위해 언론은 하이에나처럼 덤벼들었다. 그날을 기억한다. 내 뜨거운 피를 내장을 그리고 골수를 다 파먹었다. 마지막 살가죽만 남았다. 온 국민 앞에서 가죽만 벗겨 걸려진 병원에서 이불을 쓰고 서럽게 울었다. 얇고 투박한 병원용 무명 이불은 곰팡이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주검의 냄새는 바로 앞 장례식장에서 연기처럼 피어 올라왔다. 통곡해서 가슴을 치고 울었다. 6인용 병실 다들 숨소리마저 멈추었다. 어르신께서 한숨을 쉬었다.
죽음에 대한 사유와 내가 견뎌야 하는 시련의 크기가 너무 거대했다. 이제 난 미지의 세계로 끌려가는 거야. 오늘 내게 손가락질하고 선동질 했던 언론이라는 거대한 티렉스와 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치러야 한다. 인류 최초로 공룡과 싸우는 길을 가게 된다면 맨몸으로 톱날의 이빨과 맞설 것이다.
지난 3년이 사라졌다. 내가 분명 세월의 강을 건너 왔는데 그 어디에도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허전해서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모든 것이 다 바뀌었다. 집으로 와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욕했던 그들이다. 같은 이들인데 그 어느 누구도 겪어보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내가 불길이 되어 타오르라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3년이 넘은 지금 어느 언론사도 교육청도 사과하지 않았다. 많은 댓글을 달았고 정식으로 삭제도 부탁했다. 어느 누구도 답하지 않았다. 사과란 내가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손 내미는 것이다. 어설픈 보건소는 오전에 아버지의 증상을 음성(-)이라고 했다가 저녁에 양성 (+)이라고 했다. 난 부모의 양성 사실을 속이고 아이들을 가르친 마녀라고 욕먹었다. 프랑스 정치인들로부터 시작된 좌파 우파 난 그냥 양파 같은 사람이다. 오른쪽, 왼쪽, 난 사실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다. 자신들은 안전할 것 같은 영역이 무너지자 관대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난 그들의 구토 나는 이중성의 잣대를 경험했다. 극으로 차 닿은 인생은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비극일 뿐이다. 그냥 잭다니엘 한 병이랑 수면제 들고 심해 같은 숲으로 가고 싶다. 푸른 이끼 위에 누워 개나리 광대버섯을 안주 삼아 먹고 나뭇잎을 이불 삼아 영원히 자고 싶다. 용서의 강은 벌써 바다로 흘러왔고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워졌다. 그때 그 절명의 순간, 우리의 이성은 어디로 달아났던가? 정말 묻고 싶다. 겨우 스물다섯살의 어린 주무관은 또박또박 자신을 합리화시켰고 서른의 남자 직원은 소리치고 막말을 했다. 민원서류를 없앤 여인은 잠적했다. 교활함의 끝판왕인 과장은 묘수를 쓰고 둔갑했다.
인류 역사상 어떤 시대에도 역병에 걸렸다고 동선 공개하고 언론에서 떠들고 끌고 가고 격리시키고 난리를 피운 적은 없었다. 전국 방송에 수십 차례 나오고 저주와 육두문자가 난립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시대적 관용(똘레랑스)이라는 게 있었다. 우리 모두 한때 하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고 이달을 넘길지 의심스러운 시대의 강을 건너 왔지만 아무도 역병 걸린 사람에게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배움이 짧고 싸움에 약한 난 용기도 없어서 남 앞에 나서지도 못하지. 뒷담화는 자신 있다. 지나온 날들에 대한 기록이 예언서처럼 남아 보이지 않는 적 바이러스가 또다시 난립한다면 지침이 되길 바랄 뿐이다. 포스트 코로나, 내게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질펀하게 코로나와 한몸이 되어 뒹굴고 나서 일어나 보니 가죽만 앙상하게 벗겨져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살아있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엔 아침이 없기를 기대하지. 백신 피해자 협회 팔순이 넘은 회장님께 커피 쿠폰을 보내드렸다. 돈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싸운다고 생각한다. 절대로 아니다. 돈이 목적이었다면 차라리 진작에 자리를 걷고 일하러 갔을 것이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아비의 삶의 이유는 억울한 죽음에 대한 사과와 앞으로의 나아갈 길에 대한 표명일뿐이다. 이 모든 것들이 끝나면 조용히 딸에게로 갈 것이라고 했다. 난 그를 응원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야기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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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온이야 맞는 말.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야기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
우리 온이는 독서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