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리(馬場里)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에 있는 리(里).
마을 동남쪽으로는 가평천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옥여봉이 있다. 명지산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낮은 산지지형이다. 자연마을로는 당묵개, 샛말, 송장, 쑥벌 등이 있다. 송정은 샛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소나무 정자가 있다는 점에서 유래되었고, 쑥벌은 쑥이 많았다는 점에서 유래되었다.각 군현에는 군마(軍馬)를 합해 수백필씩의 말을 길렀으며, 그 말들을 기르고 훈련시키는 장소를 마장(馬場)이라 불렀다. 이러한 기능을 하던 마장리는 말을 놓아 먹이던 곳이던 마장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마장리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에 있는 리(里).
마장리(馬場里)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리(里).
낮은 산지와 평야지대에 있는 마을이다. 말을 먹이던 장소이므로 마장골 또는 마장동이라 한데서 마장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자연마을로는 가운데말, 검바위, 보월동, 샘골 등이 있다. 가운데말은 마장리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검바위는 앞에 큰 바위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보월동은 앞에 큰 보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샘골은 샘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충신 이장(李璋)의 정문(旌門)으로 이충신문이 있다.
마장리(馬壯里)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에 있는 리(里).
대부분의 지대가 분지로 이루어져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봉황천(鳳皇川)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마을은 남향으로 봉황천을 안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이다.
백제 때는 진내군(進乃郡)에 속하였다가 통일신라 때는 진례군(進禮郡)에 속하였으며, 고려 때는 진례군을 거쳐 금주군(錦州郡)에 속하였으며, 조선 태종 때 금산군(錦山郡)에 속하였다.
-1896년 13도제(道制) 실시에 따라 전라북도에 편입되었으며,
-196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충청남도로 편입되어 지금에 이른다.
'마장'이라는 명칭은 마을이 있는 지형이 말[馬]의 형세를 한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조선시대에 말을 기르던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순국한 칠백의사의 한 사람인 박중립(朴中立)이 이 마을 출신으로, 의병장 조헌(趙憲)과 각별하여 진중에 출정하는 장한 말[壯馬]들을 이 마을에서 훈련하였다고 전한다. 1789년 무렵에 삼태곡리(三台谷里)와 마장리(馬莊里)라는 명칭이 보이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강제 통폐합 때 삼태·마장·호미 등지를 합쳐 마장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무내미(마장리)·삼태곡·호미동·옴팡거리·옹기점·흔터골·곰말·웃말·죽말 등이 있다. 무내미는 봉황천 물가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넘는다는 뜻의 물남이가 변한 명칭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문암리(文岩里)로 표기되기도 하였으며, 마장리를 따로 부르는 명칭이기도 하다.
삼태곡은 마을 지형이 삼태육경(三台六卿;삼정승과 육조 판서)을 배출할 만한 명당이라는 데서 붙여진 명칭이며, 삼태리·서디실·서드실이라고도 한다. 호미동은 마을 지형이 쌍호휘미(雙虎揮尾;두 마리의 호랑이가 꼬리를 휘두룸)의 형상인 데서 유래한 명칭이고, 마장리와 삼태곡 사이에 있는 지형이 옴팡 들어가 있다고 하여 붙은 명칭이다.
옹기점은 비모골 서남쪽에 있던 마을로 옹기점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은 명칭이다. 흔터골은 원래 삼태곡이 있던 곳이었으나 화재로 인하여 주민들이 지금의 삼태곡으로 이주하고 몇 집이 살고 있는데, 허무른 집터가 많은 마을라는 데서 붙은 명칭이다. 곰말은 삼태곡 황새봉 골짜기에 있고, 웃말은 삼태곡 저수지 방향에, 죽말은 대나무가 많은 곳으로 삼태곡 입구에 있다.
문화재로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양제를 기리는 정충사(마장리 669번지)와 여말선초와 세조 대에 걸쳐 충절과 충의를 드높인 박힐· 박인·박휘권 3세를 기리는 숭모사(마장리 840번지) 등이 있다. 2009년 마장리의 무내미마을이 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되었다.
마장리(馬場里)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에 있는 리(里)이다.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져 있고 마장천이 흐르며 관동소류지가 있다. 말을 먹이는 곳이었으므로 마장이라 하였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구부골, 표갱이골이 있다. 구부골은 마장리의 중앙에 있는 마을이다. 표갱이 골은 마장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표씨들이 많이 살며 골짜기에 위치해 있다 하여 표갱이골이라 한다.
마장리
평양특별시 중화군 북동부에 있는 리.
북쪽과 북동쪽은 상원군 대동리(大同里), 동쪽은 용산리(룡산리), 남쪽은 물동리, 남서쪽은 어룡리(魚龍里), 서쪽은 채송리(蔡松里)와 접한다.
-1952년 12월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협계리·고정리·설매리가 면이 폐지되고 마장리로 통합되었다가
-1963년 5월 군과 함께 평양특별시에 편입되었다.
옛날 고구려군사들이 말을 매어두던 장소라는 데서 지명이 유래한다. 북쪽에는 운추산(313m)이, 남쪽에는 마장산(309m)이 있으며, 넓은 계곡을 따라 동서방향으로 무진천이 흐른다. 전체면적의 67%가 산림으로 중화군에서 산림이 많은 지역에 속한다. 경지면적 중 밭이 70% 이상이며 논이 20%, 과수원이 5%를 차지한다.
옥수수·콩·쌀 등을 주로 재배하며, 땅콩이 많이 난다. 예로부터 이곳 특산물인 밤·대추·배의 집산지였다. 관개용저수지인 마장저수지가 있으며, 잉어·붕어 등 물고기를 많이 기른다. 고등중학교와 인민학교, 병원이 있으며, 평양∼원산 간 도로가 지난다. 중화읍까지는 12km, 평양특별시까지는 22km 거리이다.
마장리(馬場里)
강원도(북한) 철원군 중부에 있는 리.
북쪽은 신진리(新進里), 동쪽은 마방리(馬放里), 남쪽은 가승리(加承里), 서쪽은 밀암리(密岩里)와 접한다. 옛날에는 돌다리·새말·노루목·마가지 등 여러 마을이 있었고, 그 후 경기도 삭녕군 마장면 장포리·남일원리·내물면 마방리가 되었다.
그 후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 장포리가 되었다가 장포1리, 장포2리, 장포3리, 장포4리로 분할되었다.
-1952년 12월 면이 폐지되고 다시 마장읍으로 통합되었으며,
-1961년 3월 마장읍이 마장리로 개편되었다.
지명은 옛날에 말을 놓아기르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철원평강대지에 있어 리의 대부분 지역이 평야이며, 북동쪽은 낮은 구릉성 산지를 이룬다. 남쪽 경계를 따라 임진강(림진강)의 지류 역곡천이 흐르며, 연안에는 충적토가 분포한다. 전체면적 중 산림이 19%, 경작지가 71%를 차지한다.
일대에는 밤나무·잣나무·일본잎갈나무·아까시나무숲이 조성되었다. 경지면적 중 논이 60%, 밭이 35%이며, 철원군의 주요 쌀생산지이다. 쌀·옥수수·배추·무를 많이 재배한다. 고등중학교·인민학교·병원이 있으며, 철원∼도밀리 간 도로가 지난다. 철원읍까지의 거리는 12km이다.
마장리(馬場里)
평안북도 운산군 남부에 있는 리.
북쪽은 마상리(馬尙里), 동쪽은 향산군 석창리, 남쪽은 용호리(룡호리, 龍湖里), 서쪽은 이답리(니답리, 泥踏里)와 접한다.
-1949년 10월 운산군 동신면 마장동이 마장리로 개편되었고,
-1952년 12월 면이 폐지되면서 운산군 마장리가 되었다.
북쪽에는 구봉산(553m)이 있고, 동쪽으로는 구룡강이 흐른다. 전체면적의 77%가 산림으로 소나무와 참나무의 혼합림이 분포한다. 각종 산나물과 마타리·참취·싸리버섯 등이 많다. 경지면적 중 논이 27%, 밭이 62.8%, 과수원이 7%, 뽕밭이 3.2%를 차지하며 쌀·옥수수·콩·배 등을 주로 생산한다. 소와 양을 많이 기르며 양잠도 활발하다.
고등중학교·인민학교·병원이 있으며, 구읍리·영변군(녕변군)·박천군 방면의 도로가 나 있다. 운산읍까지는 12km 거리이다.
마장리
서울특별시 성동구 마장동의 조선 후기부터 1936년까지 이름이다. 마장리 지명은 이곳 일대에 조선 초기부터 말을 기르던 목마장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한성부 동부 인창방(성외) 마장리계에 속하였고,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 동소문외계 마장리가 되었다.
-1911.4.1 경기도령 제3호로 경성부를 5부 36방, 성외를 8면으로 할 때 경성부 인창면 마장리가 되었다.
-1914.4.1 경기도령 제3호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마장리가 되었으며,
-1936.4.1 조선총독부령 제8호와 경기도고시 제32호로 경성부 관할구역이 확장될 때 경성부 마장정이 되었다.
-1943.6.10 조선총독부령 제163호에 의한 구제도(區制度) 실시로 성동구 마장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10.1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성동구 마장동이 되었다. → 마장동 [법정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