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동지역의 선교활동
(1) 안동이 선교 거점이 된 배경
19세기에 들어서 세도 정치가 거의 막을 내려갈 때 정치 기강이 문란하고 삼정의 문란(전정, 군정, 환곡)과 민란의 발생으로 부패 정치에 대한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할 때였다.
고종이 개화 정책과 더불어 쇄국 정책을 실시할 때에 서양 문물과 서양 종교인 기독교가 들어오게 된다. 우선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 대 도시에 선교 부를 설치하고 활동하게 되었다.
그 중에 경상도 영남지방 에서는 정치, 사회, 문화 어느 비중으로 보나 부산, 대구, 안동을 중심 목표로 삼았다.
B.C 57년 삼한 때 염상도사(念尙道士)가 세운 창녕국(昌寧國)이란 부족국가를 세운 이후 신라 때 고타야군(古陀耶郡)또 고구려에 근접해 있던 관계로 한때 굴화현으로 부리우기도 하다가 고려 태조 때에는 고려 땅 복주(福州)로 되어 있었다. 고려 건국 초에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 군과 싸울 때 복주 청년 김씨3형제가 용감히 선봉 에 서서 이곳 고을 사람들을 이끌고 태조를 도와 싸워 승전의 공을 세웠으므로 그 공으로 3형제에게 김선평(金宣平), 권 행(權 幸), 장 길(張 吉)에게 처음으로 각각 성(性)을 하사하고 태사(太師)라는 벼슬을 내려 주었다 3태사 이후 안동은 용감한 충성의 고장으로 유명해졌다. 태조13년에 부(府)로 승격하여 안동도호부로 개칭했다, 조선시대를 내려오면서 특히 안동은 고대로부터 인다안동(人多安東)으로 명현거유(名賢巨儒)의 고장으로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있었다. 그래서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일컬을 만큼 장상(將相)선비는 물론 유학에 능통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어 인재의 보고라 했다.
고려 때 삼태사, 우 탁, 김상헌, 조선의 권 근, 권 람을 거쳐,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등 명현들을 통하여 많은 후학의 인재들이 길러지고, 학문을 통해서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고 혼인(婚姻)을 통하여 인연(因緣)을 맺어서 고을마다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어서, 집집마다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은 고을이었다.
이때에 19세기(1882)에 조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우리 조선에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일찍이 1891에 부산에 들어온 미국선교사 배아드 (Rev,W.M.Baird; 배위량) 선교사가 2년 동안 선교활동을 하다가 1893년 4월 17일에서 5월 20일까지 경상북도 지방으로 처음 전도여행을 한 것이 밀양, 청도, 경주, 대구, 상주를 거쳐 안동에 4월 25일에 첫 발을 디딘 것이다.
그는 서경조(徐景祚)전도사와 박재용 이란 소년과 그리고 마부 두 사람을 데리고 말을 타고 육로로 밀양, 청도를 거처 대구, 동명, 상주, 안동지방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안동지방을 둘러본 여러 선교사들의 인상에 평화롭고 살기 좋은 작은 분지 고요한 아침의 나라, 평안한 동쪽 선비의 공장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안동에서 복음 전도 활동을 하며 선교 부를 설치하게 된 큰 이유 중의 하나는 학식이 많고 문맹이 적은 고장인데 다가 지난날에 세도가들이 많이 살아온 지방이기에 관심과 호감을 많이 갖게 되었고, 그들 집성촌 양반 고을 가까이 에 먼저 복음이 전해지면 일반서민 지역 전도는 쉬울 것으로 판단하고 대구와 안동을 연계하여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하며 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1893년 장로교 선교사 공의회의 협약(Comity Arrangements)에 의하여 경남 지구가 호주 선교회의 담당 구역이 되므로 부산에 주재하던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들은 대구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3년 후 1896년에는 선교사 연차 총회에서 배아드(배위량) 선교사를 서울 지역 교육 담당 고문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대구 지역 선교 업무는 그의 처남인 제임스 아담스(Rev. James E. Adams ; 안의와 ; 安義萵)에게 인계하게 되었다.
그들 내외가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1895년에 부지를 조금사고 1897년부터 안정되어 오랫동안 대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구의 선교부가 애덤즈(J. E. Adams)와 존슨(Dr. W. O. Johnson)에 의해서 개설되었다. 존슨은 후에 동산 병원의 설립자로서 병원 선교를 중심으로 맹활약하게 된다. 후에 안의와 선교사가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명한 비중 있는 고장 안동을 순방하게 된다. 1902년 3월에 김기원 이란 조사와 함께 안동을 순방하면서 시장 전도를 하면서 복음서를 팔았던 것이다.
(2) 복음의 씨앗(선교사의 전도여행)
안의와(Adams) 선교사가 대구에서 전파한 복음의 씨앗이 안동으로 안동을 거점으로 해서 방잠으로, 국곡으로, 풍산으로 길안으로 파종되었다. 1893년 1월 28일 한국주재 미국 남북 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사업의 중복과 지역의 중첩을 피하기 위해서 조직된 선교사 공의회 즉 “장로교회 치리기구 준행선교부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rom of Government) 에서 선교지 분할 협정이 맺어짐에 따라 당시 부산에 주재하던 선교사 배아드((Rev. W. M. Baird) 목사가 1893년 4월 25일 선교지 탐사 여행으로 안동을 지나가게 된 것이 안동지역에 첫발을 디딘 것이 효시가 되었다. 그는 1년 동안에 약 7개월은 지방순회에 종사했다고 한다. <울릉도 기독교90년사. p46>
1899년에 대구에 선교부가 설치되었을 때 안동은 그 선교 구역으로 소속되었다. 그 다음 1902년 3월 안의와 목사가 처음 안동지역을 방문하여 두 번에 걸쳐 경북북부의 9개 군을 순행하면서 성경을 팔기도 하고 또 장날에는 거리 노방전도도 하였다. 이때 국곡의 권수백(權守佰), 풍산의 정봉모(鄭鳳模) 그리고 와룡 홍재삼(洪在三) 같은 분들이 믿게 되어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게 된 것이다.
1902년 장로교 선교회 연차대회를 위해 미국에서 갓 도착한 베럿(Rer.W.M.Berrett)목사를 경안지방 14개 군의 전담 선교사로 임명하였으므로 1903년 봄 부루엔(H.M.Bruen;부해리) 목사와 함께 안동에 전도 여행하게 되었으나 베럿 목사는 순방전도 중에 몸이 쇠약해져서 건강상 이유로 곧 귀국하고 말았으나 이들 베럿 목사 일행은 두 차례에 걸쳐 동서남북을 두루 다니며 전도여행을 했는데 50일에 걸쳐 700리 이상을 걸었으며 복음서 1,000권 이상을 판매하는 등 그 활약과 열정이 대단하였다.
<김광현 목사 논설집.p51>
선교사들은 양반고을에 먼저 복음이 전해지면 일반서민 지역에는 복음전도가 한결 쉬울 것으로 판단해서 선교 거점을 정하고 활동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안동을 중심으로 해서 남쪽으로는 일직 국곡, 귀미, 박곡, 아곡, 장사리 등, 북쪽으로는 와룡 방잠, 예안, 동교, 마동, 록전, 방하, 매정 등, 서쪽으로는 풍산 하리, 소산, 예천 상락, 풍양 등, 동쪽으로는 길안 오대, 영양, 영덕, 청송, 등지를 거점으로 삼아 순방전도를 열심히 했다. 이 지방에는 당시 안동 김씨 세도가나 선비가문의 집성촌이 가까이 있거나 많이 살고 있는 곳이고, 퇴계 이황 선생님의 후학들이나 인척 가문이 가까이 있거나 여러 집성촌이 가까이 많이 형성된 곳이었다. 학문과 예절의 영향을 받아 문맹을 일찍이 깨우친 고장이기에 예의범절을 아는 유식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먼저 전해진다면 다른 여타 지역은 선교하기가 쉽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있어 각각 복음을 듣고 전도 받은 곳은 다르지만 지역마다 활동적인 선각자들이 먼저 복음의 씨앗을 받아 지역 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3) 안동 지역의 초기 교회들
★국곡교회
국곡에 사는 권수백(權守佰)씨는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아 믿기로 결심한 후 성경 읽기와 기도에 전념하였다. “야소귀신(耶蘇鬼神)이 동내에 들어와 동내가 망하게 되었다”는 등 갖은 비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전도하여 1902년에는 김병석(金炳錫)이 믿게 되어 두 가정에서 예배하다가 후에 김병일(金秉一)의 집에서 예배하는 중에 교우가 점차 증가되어 이 지역 최초의 교회인 국곡교회(菊谷敎會)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일찍 믿은 권수백은 말씀대로 살면서 가까운 곳은 물론 북부지역을 두루 순회하면서 복음 전도하는 전도인이 되었다.
★비봉교회와 풍산교회
배위량 목사가 1893년 대구를 거점으로 경상도 지역을 전도 여행할 때 의성 비봉 사람 김수영이 청도 밀양지방 시장에서 선교사가 노방 전도하는 것을 보고 군중 가운데서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다. 얼마 후 신앙의 확신을 갖게 되자 1900년 초에 고향인 비봉으로 돌아와 열심히 전도하여 신자들을 모아 1902년(任寅年)에 설립한 것이 오늘의 비봉교회이며 경안노회에서는 가장 최초의 교회라 한다.
1902년 초에 국곡 권수백의 전도로 김인수, 정봉모, 박경오, 강덕수, 이원선 등 수십 인이 예수를 믿고 김인수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하리교회가 성립되어 후에 풍산교회로 되었다. 1911년 김병우, 김익현, 김동규 등 10여명이 소산에 교회를 분립하여 소산교회를 세웠다. 1920년에 정봉모, 1921년에 이원선이 장로로 장립하여 처음 당회가 조직되고 당회장은 인노절 선교사가 되었다.
★박곡교회, 아곡교회,
1904년에는 괴산 동의 김학배, 이만기, 손용진, 최달모 등이 권수백의 전도로 믿게 되어 마침내 예배당을 건축하게 된 것이 오늘의 박곡(朴谷)교회이다.
1906년에는 남후면 상아동의 권수필, 권봉원 등이 역시 권수백의 전도로 결심하고 국곡교회로 다니다가 그 이듬해 설립한 교회가 아곡교회의 시작이다.
★소호리교회와 창길교회
1907년 아곡교회로 다니던 이태응, 이경백 등을 중심으로 장사리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09년에는 장사리 교회에서 분립되어 소호리교회가 설립되었다.
괴산(박곡)교회에 다니던 최달모는 자신이 사는 창길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위해서 기도했더니 마침 쌍계교회의 김성실장로가 이사를 오게 되어 협력 전도하여 창길 교회를 세우고 예배당 3칸을 건립하였다. 쌍계에는 이미 1902년경에 김인옥, 이성준 등이 믿고 군위군 호암교회로 다니다가 그 다음 해에 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예배당을 세우게 되니 박영화(朴永和)의 전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쌍계교회와 삼분교회
쌍계 교회에서 분립한 삼분 교회는 카톨릭 신자였던 김재언이 개종하여 열심히 전도한 결과 권돈표, 박영환 등이 믿고 협력하여 1904년에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쌍계교회가 1906년을 전후해서 분립시킨 교회로는 대사, 장림, 덕봉, 하화 등이 있으며 예천 상락의 양조환, 양위환 등이 믿고 다니다가 1907년에 상락 교회를 설립하였다.
★하회교회
특히 배타적이고 완고한 조선의 전통유교문화의 양반마을이라 할 수 있는 하회마을에 일찍이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10년 한. 일 합방이 이루어지던 해 난세에 생계를 위해 어물장사를 하던 북촌 댁이 복음을 받아 깨닫고 그의 전도로 이난강(여)씨가 예수를 영접하고, 하회에서 20여리나 떨어져 있는 풍산의 고창교회까지 매주일 가마를 타고 예배를 드리러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이난강 씨는 정동완(여)씨와 채원식(여)씨와 그의 아들 류시증 씨에게 전도하여 예수를 영접하게 하였다. 그 후 이난강씨 댁에서 숨어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하회교회의 시작인 셈이다.
이 때 서후면 마명리에서 영수 전기석씨와 풍산교회 영수 정봉모씨가 와서 매주일 예배를 인도하였고, 안동에서 김성삼 장로도 매월 1회 정도씩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문중의 핍박으로 다락방에 갇히기도 하는 등 많은 박해 속에서도 복음의 씨앗은 자라서 1921년 10월 20일 현 위치에 야학을 겸한 하회교회가 설립되었다.
그것은 양반 고을에 복음 전도하려는 선교사들의 선교 전략에 의한 결실이기도 하였다. 이곳을 거쳐 간 한국교회의 초기 선교사들은 심우사, 인노절 오월번, 권찬영, 안병남, 안두조, 옥호열, 반피득, 마삼락, 조운선, 설의돈 제씨들이 하회에 복음을 전하였든 분들이다. 오늘에 류단하 목사(숭실대 교목은퇴), 류시홍 목사, 류돈우 장로(순복음교회) 등이 이곳 출신이다.
(4) 안동교회의 설립
미국북장로회 대구선교부가 안동을 비롯한 북부지역을 총괄하는 선교관리지역으로 결정하고 복음선교를 위한 순행을 하게 되었다. 너무나 광범위한 지역이고 또 대구에서 안동 북부지역까지 70마일 거리로서 너무 멀고 도보로 사흘 길이나 되기 때문에 미국북장로회선교회 본부와 협의하여 1908년에 안동선교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대구에 주재하던 쇼텔(Rev. C. C. Sawtell)목사를 안동 주재선교사로 임명하고 파견하였다.
산골짜기 시골에는 벌써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했는데 안동시내에는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고 있었다. 이에 교인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이들이 방잠이나 심지어 영주 지곡, 내매까지 내왕하며 예배한다는 사실을 알고, 안의와 선교사가 내안하여 풍산의 교인 김병우를 매서인(賣書人)으로 파송하여 서문 밖 대석동에 초가 5칸을 사서 서원을 개점하고 교인들을 모아서 예배를 인도하게 했다. 그 날이 1909년 8월 둘째 주일로서 이때 참석교인은 김병우, 강복영, 원화순, 원홍이, 권중락, 박끝인, 정선희, 김남홍 등이 모여 처음예배를 드리므로 안동교회의 시작인 법상동교회가 설립되었다.
(5) 방잠을 중심으로 한 교회설립
1902년에 안동지역을 배럿(Rev.W.M.Barrett) 목사의 순회 담당 구역으로 임명받아 수행하는 가운데 1903년 봄 브루엔(Rev.H.M.Bruen; 푸해리) 목사와 함께 순방하면서 안동시장에서 전도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전도자를 얻고자 노력하였다. 이때 이미 복음서를 읽고 믿게 된 홍재삼(洪在三)씨를 만나고자 와룡면 지내동 장싯골(장수골)을 찾게 되었다. 홍재삼 씨는 1902년에 어떤 이웃 사람이 안의와 선교사로부터 사다준 복음서를 읽고 믿게 된 사람으로 걸어서 사흘길이나 되는 대구에까지 직접 가서 복음을 듣게 되고 복음서를 구하여 읽기도 하였다. <안동교회80년사, p91>
베럿 목사는 전도 여행길에 마침 주일을 맞아 홍재삼씨 집에 유하며 그에게 학습을 세웠다. 그가 안동지역의 최초 학습교인이 된 것이며 그로 하여금 지내교회의 시작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예안 장날을 중심으로 예안지방에 전도를 계속하다가 방잠에서 선교사의 전도집회가 시작되었다.
안동지역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철저한 숭유(崇儒) 고장으로 배타적인데다가 대원군의 오랜 쇄국 정책으로 국내외의 정세는 혼란했지만 지역주민들은 너무나 어두웠다. 우리보다 먼저 개화하고 개혁한 일본은 벌써 서양 열강들과 함께 제국주의 정책을 펴며 조선 땅에서의 이권을 둘러싼 세력다툼을 하다가 결국엔 러․일 전쟁(1904-1905)까지 일으켰다. 일본은 전쟁 승리의 기운이 일자 본격적으로 한국 지배의 야욕을 갖게 되었다. 한․일 의정서와 한․일신협약(1904)을 같은 해에 연이어 맺고, 급기야는 을사조약(1905. 11)을 고종황제의 윤허도 없이 강압 체결이 되게 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결과로 외교권이 박탈당하여 국정이 슬픔과 좌절 속에서 헤매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나라의 국정은 혼미하여 어지럽고 어수선한 때이지만 선교사들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1902년에 예안시장의 공원으로 있던 김성복(예안 장터 도감 일을 보았음)이 장터에서 전도를 받고 배럿 선교사와 협의하여 자기마을인 예안면 오천동 방잠리(지금 와룡면 나소동)에서 신 깃대(십자가 깃대)를 세우고 복음선교 집회를 개최하였다(1903). 이때 인근 골짜기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선교사들의 서툰 우리말과 통역 설교를 호기심으로 듣고 믿게 되어 새 힘을 얻었다. 국가는 외교권 박탈로 모든 백성들이 시름에 차 있을 때에 백성들은 민족의 살길과 구원의 길을 갈망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선교사 배럿 목사와 부해리 목사가 교대로 집회를 인도하였다. 여러 차례 순회집회를 하는 가운데 김성복은 이호명이란 사람과 뜻을 같이해서 1906년에 방잠에 예배당을 짓고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어떤 때는 500명, 또는 700명까지 모였다고 전한다. 와룡, 예안, 월곡, 도산, 녹전 일대는 물론 안동, 임동, 길안, 영주, 매정, 지곡, 봉화에서까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5-60리, 7-80리 길을 멀다 아니하고 나무방티(함지박)에 보리밥과 된장, 고추장을 준비하여 삼베보자기에 싸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몇 날 며칠을 머무르며 호기심에 찬 부흥의 열기가 대단하였다. 계속 그렇게 모이다가 거리 관계와 교인이 증가하자 방잠으로 다니던 교인들이 1907년 이후부터 각기 자기들 마을 중심에 교회를 설립하게 된 것이 오늘날 녹전, 방하, 예안, 동교, 마동, 안흥, 매정, 의일 등 각지에 설립된 교회들이 되었다.
이 지역에서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인 초기교인들은 생활 근거를 따라 안동시내로 나와 생활하게 되자 시내교회 설립발전에 주역이 되어 많은 봉사와 헌신을 하게 되었다.
◉ 방하교회
1907년 최영구씨 외 8명이 방잠교회에 가서 부흥사경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계속 왕래하며 다니다가 가까운 동리에 모여서 분립하여 예배드리기로 뜻을 모으고 녹전면 신평리에서 최영봉씨의 집 감나무 밑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린 것이 신평리교회로 시작하여 방하교회가 설립되었다.
◉ 녹전교회
녹래동의 이주호(李周浩; 이찬경장로, 이준희장로, 이찬도장로의 조부)씨가 제일 먼저 방잠집회에 참석하고 많은 감동을 받고 돌아와 이주여(李周焒; 이희옥 장로 부친), 이주상(李周尙), 이성완(李聖完), 이주한(李周翰), 이희연(李羲淵) 등 일가친척들을 권유하여 1906년부터 방잠교회 부흥사경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 받고 계속 왕래하며 예배드리다가 1909년 9월 9일 교인들의 헌금 775원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신깃대(십자가 깃발)를 세우고 오월번 목사와 김성삼 조사의 인도로 녹전면 녹래동에 녹전교회가 설립되었다.
◉ 예안교회
1908년 7월 17일 예안면 동부동 만촌에서 10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예배드린 것이 만촌 교회로 시작하여 1920년에는 신택희 장로의 장립과 더불어 발전하였다. 1923년에는 조사로도 시무하였다. 1922년 6월 14일 만촌교회에서 회집한 제2회 경안노회록에 의하면 예배당 재건축을 위해 2천원의 거액을 연보하였다고 보고 되어 있다. 다음 해에 제5회 노회 때 민태규, 이갑원 양씨가 장로 피택으로 문답청원 허락을 받고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가 성립되고 1925년부터 예안교회로 교회명을 변경하였다.
◉ 온혜교회
1908년 초에 방잠에 다니며 신주(信主)하던 이동태(李東泰), 이원춘(李源春) 등이 먼저 믿기 시작하여 교인이 모이게 되자 1910년에 온혜교회를 설립하게 되자 교인들이 불어나서 교세가 발전부흥 하여 교회가 설립되었다.
◉ 동교교회
1909년 4월 14일에 박순기(朴順起; 領袖, 박재귀 장로부친) 이동소(李東沼) 등이 30리 길이 넘는 방잠에 다니며 예수를 믿게 되자 그 후 4, 5명의 교인이 모이게 되었다. 그때 방잠집회 인원은 4, 5백 명이요 강사는 선교사 부해리(H. M. Bruen)목사요, 조사는 김성삼씨였다. 약 6개월을 방잠에 다니다가 교인들이 증가하여 어떤 협실(작은집)을 얻어 예배당 표시로 신깃대(십자가 깃대)를 높이 세우고 10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이때 동교교회 명칭을 허락 받고 선교사인 권찬영 목사와 김성삼씨를 조사로 하여 교회를 세웠다. <동교교회사>
복음을 받고 부흥하게 되자 1910년 3월 13일 구룡동 류인식 씨의 입구자형 12간 기와집을 56원을 주고 매입 수리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당시에 합심하여 교회를 설립한 이들은 박순기 영수(박영길장로 조부), 김재진 영수, 정양조 영수, 김점수, 류연선, 김점실, 김우현 등 10여명이었다. 1935년에 가서야 이두일(이원태목사 부친) 씨의 장로 장립으로 당회가 성립되었다.
◉ 의일교회
예안면 괴내 후평리에서 김충서, 엄덕희, 이덕선 제씨가 일찍이 30리 길인 멀리 방잠 교회로 다니며 예수를 믿고 교인이 불어나자, 1909년 6월 권찬영 선교사의 전도에 힘을 얻어 김충서(김수근장로, 김종근장로의 조부), 권두영(권오윤장로, 권오길장로의 조부)씨를 중심으로 초가 3칸을 매입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후평교회로 설립되어 발전하다가 얼마 후에 의일교회로 개명한 뒤 김충서, 권두영 양씨가 장로 장립하므로 당회가 조직되었다.
◉ 안흥교회
우연석, 신재균, 남수용씨 등이 방잠교회에 다니며 예수를 믿고 예배를 드리다가 교인들이 차차 많아지므로 1909년 10월에 작은 집 건물을 마련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안흥교회이다. 우연석(우덕출 장로, 우재출 목사, 우재봉 장립집사의 부)씨는 1922년에 장로 장립을 받아 일찍이 장로가 되어 경안노회 초기 장로로서 충성하며 많은 활약을 하였다. 그리고 신재균(신현수 집사, 신현락 집사, 신현석 집사, 신현구 목사의 부)씨는 1934년에 장로장립을 받아 안흥교회가 완전 당회로 성립되었다.
◉ 마동교회
1908년경부터 방잠교회로 다니면서 예수를 믿게 된 이가 김영목(김상한 목사, 김계한 목사, 김인한 장로, 김경한 장로, 김명한 장로, 김정한 장로의 조부)씨이다. 나중에 그의 아들 김진호씨와 방잠의 이치운(이수영 집사의 조부)씨의 딸 이도금씨와 혼인을 하게 되고 또 얼마 후 이치운씨의 둘째딸 이분애씨가 마동 정헌조씨의 아들 정석이(정기국 장로, 정휘동 목사, 정관수 장로의 부친)씨에게로 혼인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한 마을에서 복음을 통해 혼인을 하게 되고 신자들이 불어나 가족 친지들이 모이게 되자 1909년에 마동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안동에 이주한 이들 후손들이 해방 후에 동부교회의 기반을 닦고 부흥발전 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며, 큰 역할을 하였다, 30여 년 간 김진호 목사와 김상한 목사 부자(父子)가 2대에 걸쳐 동부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 지내교회
대구를 자주 왕래하던 홍재삼(洪在三)씨가 안의와 선교사를 통해 1902년부터 복음서를 접하고 예수를 믿고 배럿 선교사에게 학습을 받은 후 그의 가정을 중심으로 홍종진, 호재동, 홍재길, 홍재선, 이재술, 김영칠, 김영규, 손건이 제씨들이 중심이 되어 예배를 드리면서 방잠교회가 왕성하여짐에 따라 그리로 20리 길을 내왕하게 되었다. 차차 교인의 증가로 1909년경에 자기가 살고 있는 장수골에 지내교회를 설립하였다. 1923년 제3회 경안노회록에 의하면 “방잠교회를 장수동교회로 합하고 회당을 방매하여 기도실을 사고 잔금은 노회 회계에게 맡겨 저금하였다가 몇 해 후에 다시 교회가 서게 되면 출급하기로 허락하였사오며, 그리고 그 후 1932년 12월 20일 제22회 시에 당회조직을 허락받았다.”
◉ 매정교회
선교사 안대선 목사로부터 전도를 받아 먼저 믿은 이가 임학수, 임경수 씨이다(이 분들은 후에 목사님으로 안동교회에서 시무함). 이 두분은 한학에 능한 선비였다. 이분들이 먼저 믿고 열심히 전도하여 교인이 70여명이나 불어나 1909년 초에 초가 4칸 집을 마련하여 예배를 드린 것이 매정교회의 시작이다. 후에 조사 엄응삼, 매서인(賣書人) 장치견이 협력하여 많은 전도를 하였다. 그 외에도 안북의 방잠을 중심으로 이 시기에 설립된 교회들이 많았다. 지곡, 내매, 영주, 봉화, 온혜, 중평, 오대 등지의 교회들이 거의 모두 방잠에 와서 복음을 듣고 믿음의 씨앗을 가져가 지역교회로서는 일찍이 성장하였던 것이다.<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p129-140, 경안노회 70년사 참조>
(6) 안동에 선교부가 설치되기까지
1899년에 대구에 미국 북 장로회 선교부가 설치되고, 안동은 대구 선교부 관할에 소속된 선교지가 되었다. 1902년 3월에 안의와목사(Rev. J. E. Adams)가 처음으로 안동을 순행 전도하게 되었다.
주로 복음서를 판매하면서 시장전도를 중심으로 노방전도를 하였다. 이때 전도를 받고 믿게 된 사람이 국곡사람 권수백과 풍산사람 정봉모 등이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국곡과 풍산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때 선교사들의 활동은 안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순회전도 계획을 하였다.
1903년부터 대구 선교부에서는 안동 지역 일대를 배럿(Rev.W.M.Barret)의 순회 선교 지역으로 배정하였다. 그는 부해리 목사(Rev.H.M.Bruen)와 함께 처음으로 순행에 나섰다. 그들 두 선교사는 안동에 와서 시장전도를 하면서 알게 된 홍재삼(洪在三)을 찾아 와룡면 장수동으로 갔으며, 배럿 목사는 그 해 2차에 걸쳐 전도여행을 하여 50일 동안 700리를 걸어서 복음을 전하며 복음서 1,000여권을 판매하였다. 선교보고에 의하면 1903년에 12동리에서 12명이 믿었고, 1904년에는 집회소 6군데, 학습교인 7명, 신자는 12동리에서 33명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1905년에는 집회소 8군데, 세례교인 2명, 학습교인 19명, 신자는 20동리에서 79명이 되었다. 1906년에는 신자 200명 이상이 되었고, 1907년에는 신자 600명 이상, 1908년에는 신자 1,000명 이상으로 놀라운 성장을 하였다. 이렇게 복음이 전파되어 교인이 증가되어 가는 중에 1906년 가을 배럿 목사 부처는 건강이 나빠져서 귀국하게 되고 그 뒤를 이어 맥화렌(Rev. Mecforlend) 목사가 대임하다가 2년 후에는 어도만(Rev.W.C.Erdman)목사가 계승하였다. 이때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 대구선교부가 경북전체를 관할하기에는 벅찬데다가 안동북부까지는 거리가 너무나 멀고 당시 시골 산골짜기 오솔길 교통은 너무나 험했다. 대구에서 안동까지는 사흘길이나 되었다. 교통수단은 우마를 이용하거나 거의 도보로 다니며 전도를 하였다. 그래서 대구 선교부 에서는 안동에 1908년에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배위량(Rev. W. M. Baird)선교사가 1894년에 처음으로 안동 땅을 밟고 지나간 지 12년만이 된다.
(7) 선교부 설치와 활동
경북북부지역에 선교 활동이 크게 성과를 거두어 안동지구가 급속도로 성장하자 선교본부에서는 대구에서 도보로 사흘길이나 되는 거리이므로 어려운 점이 너무 많아 1908년에 안동에 따로 선교부를 둘 것을 결의하고 쇼텔(Rev. C. C. Sawtell)선교사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미국 북장로회는 서울, 부산, 원산, 평양, 대구, 선천, 사리원, 청주, 강계 다음으로 안동에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 배후에는 보덴(Mrs. M. Borden)부인이 안동선교부 설치를 위해 100$을 미국선교부에 헌금함으로 확정짓는 동기가 되었다.
한편 주한 선교 공의회에서는 1895년 장․감선교구역 협정에서 강원도가 감리교 선교구역이 되었으므로 원주에서 활동하던 오월본(Rev. A. G. Welbon) 목사가 안동으로 새로 부임하게 되었다.
오월본 선교사는 김영옥 조사를 대동하고 와서 선교부 기지를 물색하면서 가옥을 매입하였다. 쇼텔과 오월본 이들 선교사들은 1908년 8월 둘째 주일 법상동교회(안동교회) 창립예배에도 참석하였다.
10월에 고참 선교사 오월본과 새 선교사 쇼텔이 사역지역을 나누어 쇼텔은 북쪽, 오월본은 서쪽으로 나누어 전도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들이 그 여행을 시작한 지 10일 만에 불행하게도 쇼텔이 장질부사란 열병에 걸려 돌아왔다. 곧 대구로 옮겨 치료하였으나 11월 16일에 하늘나라에 가고 말았다. 우리 지역 최초의 선교사는 열병으로 우리 땅 대구 남산동 동산에 묻히게 되었다. 이때 함께 시찰 여행을 했던 오월본 목사도 19년 후 즉, 1928년 4월 5일에 서울에서 같은 열병으로 우리 땅에서 목숨을 잃었다. 1908년에 내한한 별의추(A. G. Fletcher) 의사가 1910년에 안동에 왔다. 그리고 그 해 6월에 오월본 부인도 오게 되었고 이때 권찬영(J. Y. Crother) 목사가 죽은 쏘텔의 후임으로 안동에 왔다. 그는 1909년 9월에 내한하여 1910년 1월에 안동에 왔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11년 11월에는 죽은 쇼텔의 처제와 결혼하여 정년이 될 때까지 안동에서 살면서 이 지역 동서남북을 안간 곳이 없이 두루 다니며 선교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그를 “미스터 안동”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 뒤를 이은 선교사가 레닉(E. A. Renick)이 1910년-1913. 그 다음 인노절(Rodzer Winn)이 부산에서 선교하다가 대구를 거쳐 안동에 1914년에 와서 1922년까지 일하다가 1922년 2월에 이질병에 걸려서 이 땅에서 잠들어 금곡 동산 경안고등학교 구내 선교사 묘지에 있다. 그 다음 쿡(W. T. Cook)이 와서 1917-1918년까지 있었고, 안대선(W. J. Anderson)이 1917-1922년까지 안동에 와서 있는 동안 청년운동을 많이 했다. 의사로는 스미스(R. K. Smith)가 1911-1920년 사이에 활동했으며, 여 선교사로는 미스 카빙톤(H. Covington)이 1917-1918년 사이에 활동했으며, 그 다음 미스 핸선(Hanson)이 1918년-1928년까지 활동하다가 선천으로 갔다.
◉ 선교사들의 주택은 처음엔 임시주택에 살다가 영구주택을 지어서 옮겼다. 처음에는 선교부 부지 때문에 동쪽이냐 서쪽이냐 하면서 상이한 의견 때문에 고심도 많았다고 한다. 선교사 주택으로 영구주택을 짓기 시작한 것은 1911년 여름부터였다. 제일 먼저 지은 집이 12월에 완성하여 오월본 목사가 입주하였는데 그 자리는 지금 경안고등학교 신관 동편 회의실 앞 지금은 없어진 동산 위에 있었던 것이다. 우열성 목사도 이곳에 오래 거처했다. 그 다음 1912년 5월에 완성된 집에는 레닉(E. A. Renick)이 처음 살았는데 지금 경안고등학교 운동장 북쪽 동산 위였는데 시내 장춘당 약국에 매각되어 지금은 헐어져서 어린이 놀이터가 되어있다. 그리고 그 후 1913년에 두 동을 더 지어 한 동은 권찬영목사가 또 한 동은 심의사(R. K. Smith)가 살았다 . 그 중에 제일 작은 주택이 마지막 남은 선교부 주택 1동이 지금 경안고등학교 기숙사 옆 경고 학사로 남아있다. 그 저택들은 모두 외국인 설계에 의해서 동산 위에 영구주택으로 지하실과 상 하수 물탱크 시설을 정원지하에 갖춘 지하 1층 지상 2층 서구식 양옥을 건축하여 모든 사람들이 안동시내에 들어서면 푸른 수림 가운데 우뚝 솟은 구운 회색벽돌 건물에 하얀 창문이 보이는 아름다운 경치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당시에는 보기 드문 이중창문으로 집의 기둥과 문틀은 무늬목인 원목에다가 서구식 문양을 섬세하게 조각해서 아름답게 인테리어를 한 깨끗하고 우아한 집은 보는 이마다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경탄해 마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금곡동 선교 동산은 상수리나무 수림이 우거진 동산에는 꿩, 비둘기, 독수리 그리고 새매가 날고 토끼가 뛰어놀고 노루가 거닐던 동산이었다. 지금 남아 있었으면 아마도 안동에서는 문화재급 양옥주택이라 하겠다.
◉ 안동의 의료사업은 1910년에 별이추(A. G. Fletcher)의사가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없어진 성소병원 건물은 1914년-1915년에 심의사 재임 때 건축되었는데 그 기금은 뉴욕에 있던 샤프라(A. F. Schauffler) 부인이 친정 아버지인 코넬리어스 베이커(Conelius Baker)를 기념하여 1만불을 기증하여 지었다. 3층으로 지은 그 건물은 당시 선교회에서 한국에 지은 병원 건물 중에 가장 잘 지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 후 병원이 경영난에 빠지자 샤락스(Sharracks)라는 간호원을 통하여 샤프라 부인이 운영비를 도와주었고 그녀의 여동생인 케네디(J.S.Kennedy) 부인도 도와주었다 한다.
◉ 성서신학원 사업은 1912년에 오래된 기와집을 사서 먼저 여자들로부터 시작하다가 후엔 남자들도 같은 이 건물을 사용하였다. 1920년 4월 10일 안동시 금곡동 현재 성소 병원자리에 권찬영, 인노절에 의하여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태평양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8,15 해방이 되자 1946년 9월 5일 이원영 목사님이 인노절(印魯節)기념성경 학원을 경안 고등성경학원으로 개칭하고 초대 원장으로 취임하여 11년 간 재임하였다. 지금의 성서학원 건물은 1925-1927년에 지었는데 이질병으로 죽은 이 학교 초대교장인 로저 윈(Rodzer Winn : 인노절)을 기념하여 처음에는 “로저 윈 기념 성경학교”라고 이름지었다. 이 건물은 총 일만 이천 불을 들여서 학교 건물 뿐 아니라 기숙사까지 지었는데 짓고 남은 돈은 반환했다고 한다.
◉ 기독 청년면려회 활동은 1921년 2월 5일에 안대선 선교사의 지도로 전국 최초로 안동 법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안동에서부터 조직되어 경안노회와 전국 교회에 확대되었다.
<안동을 거쳐 간 역대 선교사들>
쇼텔 목사 1909. 2 - 1909.11.16 장질부사로 사망
웰본(오 월본) 목사 부부 1910-1919 평양으로 전임
죤 영 크로더스(권찬영) 목사 부부 1910-1950 정년으로 은퇴
플렛쳐(별위추) 목사(의사) 1910- 대구로 전임
레닠 목사 부부 1910-1913 사면 귀국함
스미스(심의사) 목사 부부 1911-1920 대구로 전임
미스 로저 1912-1915 별위추 의사 부인이 됨
로져 윈(인노절) 목사 부부 1914-1922 적리(이질)로 별세
앤더슨 (안대선)목사 1917-1922 서울로 전임
미스 카빙톤 1917-1918 선천으로 전임
미스 핸슨(행선) 1918-1928 선천으로 전임
미스 멕켄지 1920-1934 귀국
벤 아담스(안변암) 목사 부부 1923-1930 사면 귀국함
벨코비츠 목사 부부(의사) 1924-1930 평양으로 전임
쇠락스 간호사 1926-1934 전쟁으로 귀국
보컬(옥호열) 목사 부부 1929-1948 귀국,
6.25후 다시 내한 서울 숭실대학교 교수로 정년을 마치고 귀국.
미스 헨드릭스 1931-1934 전쟁으로 귀국
보어(뽀이사) 부부 1931-1934 전쟁으로 귀국
조지 아담스(안두조) 목사 부부 1932-1940 전쟁으로 귀국
힐(허일) 목사 부부 1947-1948 청주로 전임
미스 올가 존슨(조운선) 1948-1959 정년으로 은퇴
미스 캐더린 클락(곽가전) 1948-1950 대구로 전임
삐거 의사 부부 1949-1950 귀국
피터 밴닐롶(반피득) 목사 부부 1949-1956 서울 연세대학으로 전임.
사무엘 윌슨(우열성) 목사 부부 1954-1966 서울 미국 연합장로교회 주한 현지 대표로 전임.
억할트(이혈두) 목사 부부 1954-1955 대구로 전임
사무엘 마펫( 마삼락) 목사 부부 1956-1959 서울로 전임, 장로회신학대
벤 쉘든(설의돈) 목사 부부 1957-1964 귀국
로이 쉬어(서명원) 목사 부부 1959-1960 강릉으로 전임
킹스 베리(김승배) 부부 1960-1965 농업기술 선교사, 강원도로 전임.
<동은 김광현 목사 논설집 p65-67>
선교 기록에 의하면 안동은 사부지향(士夫之鄕)이라고 하여 선교를 시작 할 때부터 미국 선교 부에서는 매우 비중 높은 지방으로 평가하고 큰 관심을 갖고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들의 생각대로 선교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처음 쇼텔 목사를 임명하여 그가 와서 순회 선교활동을 하다가 장질부사로 병사한 지 50년 되는 해에 경안노회는 선교 희년을 맞아 그들이 선교한 구역의 일부인 문경군은 경서노회로 의성군은 경중노회로 분리해 주고도 교회 수 20곳에 세례 교인 수 7천명을 갖게 되었다. 교회수가 많기로는 전국 노회 중에 둘째요 세례교인수가 많기로는 넷째 되는 큰 노회로 발전 부흥하였던 것이다. <경안노회 선교50주년 약사 p11, 김광현>
1965년 안동선교부는 오직 한 분 농업기술 선교사였던 킹스베리(Kingsbery, 김승배)선교사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철수됨에 따라 선교부 재산은 경안노회와 함께 설립하여 경영해 오던 경안학원과 성소병원 성서신학원 그리고 성노원 등에 완전히 이양되었다. <김광현 목사 논설 집p67>
(8) 선교사들의 노고(勞苦)와 애로(隘路)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오던 시기는 한국의 정치 정세가 매우 혼란하고 위태로운 때였다. 일본과 중국 서양 열강들은 한국 땅을 가운데 두고 식민지 개척과 이권 쟁탈로 암투를 벌리다가 청일전쟁(1892) 러․일 전쟁(1904)의 각축장이 되었다.
러․일 전쟁으로 한국에서 기선을 잡은 일본은 을사조약(1905), 한․일 합방(1910)으로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 마수에 걸려 강압적인 국권강탈로 민족은 망국의 비탄에 빠져 비참한 생활환경에 처했을 때 선교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선교사역을 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피해간 이도 있었지만 이 땅에서 애로와 고충을 같이 겪어가면서 선교의 행보를 멈추지 않은 이도 많았다.
3․1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을 도운 이도 많았다. 우리 민족은 오랜 역사동안 외침을 너무 많이 당했기 때문에 중앙의 양반 세력가들이나 지방의 선비들은 외침을 피해 첩첩산중(疊疊山中)에나 심산유곡(深山幽谷)의 분지에 찾아들어 집성촌을 이루어왔기 때문에 시장거리보다는 산골짜기에 유식한 선비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특히 안동 북부지방은 산악지대로 교통이 불편하기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산고곡심(山高谷深)한 산악지대에 별 교통수단이 없이 선교사들은 도보가 아니면 조랑말을 겨우 사용하여 자기들의 생필품과 먹거리를 싣고 다녔다. 그리고 여름에는 낙동강 소금 배를 이용하여 지게로 짐을 나르고 운반하였던 것이다. 안동에는 1917년에 처음 자동차가 다니게 되었으며 경북선이 1931년에 개통되고 1932년에 낙동강 인도교가 준공되고, 1942년에 중앙선이 개통된 것이 고작이었다. 불편한 오지 산간 마을에는 오솔길 재 너머로 다녔기에 돌 뿌리에 걸려 넘어지기 부지기수였기에 너무나 활동이 불편하였던 것이다.
여타 많은 사람들은 안동이 양반의 고장이라고 하여 우쭐대고 자랑하고 있으나 무속신앙과 미신은 여전히 많았고 불교와 유학이 오랫동안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서학(천주학)과 기독교에 대한 배타적인 사상은 너무나 크고 많아서 선교사들의 고충(苦衷)과 애로(隘路)는 말할 수 없었다.
또 안동을 비롯한 이 지역에는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오는 풍토병이 많았다. 그 당시에는 별다른 풍토병이 없는 줄 알고 있었지만 이질, 학질, 장티푸스, 천연두, 채독(채달이), 결핵, 디스토마 등 많은 유행병들이 가끔씩 일어났다. 그래서 처음 선교사로 안동에 왔던 쏘텔은 온지 열흘 만에 장티푸스(융감 : 열병)로 이 땅에 잠들었고, 인노절 선교사 역시 이질(적리)이라는 병으로 쓰러져 1922년 11월 22일 금곡동산에 묻히고 말았다.
이는 선교사들에게는 이곳 환경이 적응하기에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이 병에 더 잘 걸린 이유는 이때 우리나라에 시골 농촌에서는 비료가 없던 시절에 농사를 지을 때면 사람의 분뇨(糞尿)와 가축의 분뇨가 퇴비와 함께 거름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것들을 각종 씨앗을 파종할 때에 씨앗에 분뇨를 나무 땐 재와 함께 섞어서 손으로 뿌리기도 하고 채소밭에 거름으로 주어서 손과 발, 의복에 묻거나, 채소를 날 것을 먹는데서 병충이 피부로 입으로 들어가 병이 옮겨지고 전염되어 치명적인 전염병이 만연되었던 것이다. 당시 위생 시설이 없던 시절 불결한 샘 우물과 사용하는 그릇, 불결한 손, 발을 통해서 병충 세균이 입으로 피부로 들어가서 이따 금식 배탈이 나거나 여러 가지 병을 앓게 되었던 것이다.
어른들에 의하면 권찬영 선교사가 필자의 고향인 월곡면구룡동(지금 예안면) 동다리 동교교회에 순행을 왔을 때 잠자리는 야영용 조립식 침대와 의자를 조랑말에 싣고 다녔다고 하며 밀가루 식빵과 버터치즈를 주식으로 하였는데 가끔씩 빵 조각을 받아먹을 때도 있었다한다고 한다. 지방 시골 교인들이 대접한답시고 정성껏 쌀밥을 지어 옥식기나 사발에 가득 담아서 밥이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부드럽게 다져서 한 상 가득 차려 대접하면 숟가락으로 밥그릇 위에 솟아난 겉의 밥을 걷어버리고 밥그릇 속을 오목하게 파서 거기다가 날계란을 깨어 넣고 섞어 비벼서 그것만 먹고 밥상을 물리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즉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러 가지 불결한 것들을 만지고도 손도 제대로 씻지 않고 그릇과 수저를 만지거나 때가 묻은 앞치마 자락에 닦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또 부엌과 소외양간, 거름더미와 화장실이 너무나 가까이에 인접해있어 여름철이면 파리가 많이 나는 것을 자주 보아 왔기 때문이다. 당시에 우리 나름대로는 청결하게 한다고 했지만 그들 선교사들 눈에는 극히 불결하고 추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초기에 왔던 선교사 쇼텔이나 인노절 같은 선교사들과 특히 고추와 마늘을 잘 안 먹는 서양인들은 풍토병에 약한데다가 이런 세균에 감염되어 저항 역이 약하여 목숨까지 잃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 선교사들은 사람들을 만나거나 집안에 들어갔을 때에나 음식상을 받았을 때에 자기들 나름대로는 고충(苦衷)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그런 무서운 죽음의 풍토병이 있는데다가 전쟁의 불안, 일제의 민족적인 강압정치와 선교사들의 배척과 함께 신사참배(神社參拜), 창씨개명(創氏改名), 강제징용(强制徵庸), 강제공출(强制貢出)로 민족의 쓰라린 역사는 선교사들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 심지어 한국인 중에서는 양반에 시달리고 전쟁과 일제에 시달리는 것이 두려워서 중국으로 미국으로 도망가다시피 살길을 찾아 망명 가던 이때에 선교사들이 우리 한국에 와서 선교한다는 것은 순교 정신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위대한 순교 정신이 오늘날과 같은 위대한 한국의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며 세계선교국가로의 위대한 업적을 남기며 일익을 담당해 가고 있는 기독교 국가로 발전하게 한 것이다.
3. 교회의 민족 운동과 노회의 조직
(1) 안동 지역 교회와 3월 만세운동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갑자기 승하(昇遐)하자 전국의 민심은 매우 흉흉하였다. 일제의 모리배에 의한 독살설이 퍼진 가운데 국권을 일본에 빼앗긴 황제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온 국민은 더욱 분통을 참으며 슬퍼했던 것이다.
3월 1일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일을 기하여 안동 예안을 중심으로 한 안북 지역의 인사들이 상경하여 고종의 장례에 참석하고 3․1운동의 실상을 목도하고 돌아와서 비밀히 모여 결의한 끝에 3월 17일에 예안 장날 대대적으로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예안의 이동봉, 김성복, 이해동, 이호명, 동교의 박성경(2년 옥고), 박춘근(옥사함), 마동의 김영목, 정치문, 김치경 등이 옥고를 당하면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그 후손을 통해서 안동댐 독립만세운동 비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때 이동봉 이 선봉에 서서 “내가 죽음을 무릎 쓰고 만세를 부를 터이니 모두 용기를 내어 내 뒤를 따르라”고하자 수천 군중이 노도와 같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주재소(파출소)로 가서 창유리를 부수고 파괴하니 일본순사(경찰)들은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18일에는 안동 만세 시위에 참가하고, 21일 에는 책거리(임동)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던 것이다. 그 다음은 각 지방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어 나갔다. 안동에서는 동경 유학생으로 2. 8 독립 선언에 참여하였던 강대극(姜大極)이 안동 책임자로 파견 귀국하여 안동 군청 서기 김원진(金元鎭)과 비밀리에 만나고 안동교회 김영옥 목사와 이중희 장로 등과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북만주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돌아온 이상동(후에 장로가 되어, 동부교회 모체가 된 신세교회 설립에 주역으로 일익을 담당했다) 그리고 독립선언문을 갖고 온 세브란스 의전 학생 김재명(金在明), 김병우 장로, 이중희 장로, 김익현, 황인규, 김계한, 권점필, 김재성, 이인홍,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 교인 지도급 목사, 장로, 영수, 평신도, 청년 등 교인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비밀리에 계획하였다.
만세시위 거사전인 3월 10일에 김영옥, 강대극, 김원진, 이중희 등은 예비 검속까지 당했으나 장날인 18일 11시에 계획대로 삼산동 곡물점 앞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조용히 모여들자 갑자기 격문이 뿌려지면서 난데없이 태극기 물결이 이루어지며 시민들은 일제히 어떤 한사람이 신호로 대한 독립 만세를 크게 외쳐 부르며 노도와 같이 거리로 전진해 갔다.
3월 23일 밤 8시를 기해서는 5,000여 군중들이 영남산 봉홧불을 신호로 만세 시위를 벌리자 일경은 발포와 함께 무기로 무차별 진압에 시민들은 칼, 곡괭이 등으로 반격하여 이때 피살 순국한 사람만도 30여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투옥되어 옥고를 당한 사람, 옥사한 사람 등 3.1만세 운동에 참여 한 이들은 의식이 먼저 깨고 개화의 눈을 일찍이 뜬 기독교인들이었으며, 유생들보다는 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참석한 지역 교회 인사들도 대개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예수교인만이 참혹한 일제 식민지 하에서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유일한 부류의 국민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다른 종교의 지역주민들이 교회를 보는 시각이 일신되었다고 김광현 목사는 지적하고 있다.
(2) 학교와 강습소 경영
우리나라는 물론이며 안동에도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서양 문화도 함께 들어와 개화의 눈을 일찍이 뜨게 민족운동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대인 사회 사업의 하나로 특히 교육기관은 복음 전도와 함께 반드시 필요했다. “교회 옆에 학교” 라는 칼빈의 이념에 따라 일찍이 1920년대부터 교회 안에 학교가 설립되었다. 서민 생활 개선과 문맹을 없애고 성경을 읽게 하기 위하여 강습소와 간이 학교를 설치하여 한글을 일깨워 주었으며 창가와 유희(율동)를 가르쳐 민족운동의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었다. 집단 부락이 있는 교회에서는 거의 신교육과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가 서게 되었다. 그것이 우리나라 초등학교인 국민학교의 기반이 된 것이며 민중의 문맹퇴치에 지름길이 되었다.
그 선구적인 학교가 안동에는 1920년 안동시 금곡동에 인노절(R. E. Winn) 선교사가 성경을 가르치기 위한 단기성경학교(5학년제, 연2학기, 한 학기 1개월)를 설립하였다. 이 성경 학교는 1943년 5월 성경을 통한 신앙 교육이 반일 민족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일제의 강압적인 탄압 정책에 따라 폐쇄되었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 더불어 교회의 부흥과 함께 전도운동이 활성화되자 이원영 목사의 주선으로 학생 18명을 모아 경안고등성경학교로 재설립 하게 되었다. 1946년 6월 제40회 경안노회에서 받고 계속되다가 1962년 3월 경안성서신학원으로 개설되었다. 교사 건물은 2000년에 성소병원 재단에 22억에 매각되고 2000년 10월 5일(목)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 652~10번지에 경안성서 신학원 신축교사 기공 감사 예배를 드렸다. 1920년대에 들어서 당시 성경 학교를 비롯한 안동시 지역 내에 세워진 학교와 강습소는 11개나 되었으며, 경안노회 지역에는 28개교나 되었다. 1925년부터 1931년까지 설립된 학교, 1925년 6월 제8회 경안노회 학무부 보고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학교명칭 소재지 교장 및 책임자
영흥(永興) 학교 : 안동군 와룡면 지내동 홍종진
대동서숙(大東書熟) : 안동군 임북면 마동 李用鎭
동교서숙(東橋書熟) : 안동군 임북면 구룡동
신명(信明) 학교 : 안동군 녹전면 안흥동 서화선
광신(廣信) 학교 : 안동군 녹전면 방하리 최상진
동화(東華) 학교 : 안동군 북후면 옹천동 강대극
록명(祿明) 강습회: 안동군 녹전면 녹내동 이주여
계명(啓明) 학원 : 안동읍 옥동 권찬영
경안(慶安) 학원 : 안동읍 법상동 강병주
1931년 제19회 경안노회시 학무부 보고
영흥(永興) 학교 : 안동군 와룡면 지내동 홍종진
영창(永昌) 학교 : 안동군 서후면 명동 윤주한
계명(啓明) 학원 : 안동읍 법상동 권애라
일국(一菊) 학교 : 안동군 일직면 국곡동 장사성
영명(永明) 학교 : 안동군 남후면 상하도 권수필
1926년 제10회 노회시 학무부 보고
계명 여학원 : 안동읍 법상동 한선
신명서숙 : 안동군 녹전면 신평동 신재균
녹명서숙 : 안동군 녹전면 록내동 이주여
대동서숙 : 안동시 임북면 마동 김진호
보성강습회 : 안동군 녹전면 매정동 신효균
동화학원 : 안동군 북면 옹천동 강낙원
영흥강습회 : 안동군 와룡면 지내동 김진규
(3) 의료 사업
우리나라에서 선교사업은 처음부터 의료구제 사업으로부터 시작했다. 알렌이 그 개척자이다. 안동에는 1909년 10월 1일 별이추(A.G.Fletcher) 선교사가 의료 선교사로 와서 신세동 구 형무소 서쪽에 개설하였는데 그 명칭은 기독교 명의로 거룩할 성(聖)자를 따고 예수의 한자표기인 야소(倻蘇) 소자를 따서 성소병원이라 칭하고 초대 원장이 되었다. 1910년 초에 죤슨 씨가 원장으로 수고하다가 다음 해에는 무마씨가 원장 대리로 시무하였다. 그 이후 지금 안동교회 교육관 자리에 있던 옛 기와집에서 진료를 시작한 것이 지금이 성소병원이 되었다. <경안노회회보 50주년기념호,1959. 경안노회교육부편p.84>
김광현 목사 논설집 경안노회 편에 기술한 바에 의하면 병원 건축은 1914년 미국 뉴욕의 아시아인 샤프라(A. F. Schauffler)여사가 자기 아버지 코네리어스 베이커(Conelius Baker)를 기념하여 그때 돈으로 1만불($)을 기증하여 병원 기와건물을 지어 로아 K.스미스 원장이 사립병원으로 인가를 받아 운영하였다 한다. 1917년에는 복거위 박사가 경영하였으며, 1925년에는 렌트겐과를 신설하여 결핵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하였으며, 1531년 10월 1일 전화일(H. D. Baugh) 선교사가 원장으로 부임과 함께 간호원장 사은라씨의 노력으로 매주 소아위생과 육아법을 지도하였다. 그러다가 그 건물은 6.25때 폭격으로 없어졌다. 당시 의료사업은 매우 부진한 편이었는데 그 이유의 하나는 안동에 파송 되어온 선교사들이 병으로 죽거나 쇠약하여져서 건강문제로 오래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환자들이 너무 가난해서 치료비 부담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때는 대구 동산 병원 의사가 내왕하며 진료하기도 했다. 그 후 한국인 의사를 몇 사람 채용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 백태성 이라는 분이 병원을 잘 운영하여 호전되어 갈 무렵에 2차 대전으로 선교부가 철거되고 병원문은 닫게 되었다. 그리고 해방 후에 1947년에 권찬영 선교사가 다시 들어오고, 1949년10월1일 비거(J.T.bigger)라는 선교사가 평양 기휼 병원 원장을 지낸 분이 안동으로 왔다. 그는 계획을 크게 세워 병원을 일으켜 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는 가운데 6.25 전쟁이 일어나서 있던 병원 건물조차 폭격으로 파괴되어 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 의료 선교 사업을 계속하게 되어 1953년 반피득 박사의 노력으로 애린 진료소를 개설하여 장승벽 의사가 6년 간 원장으로 시무하였다. 그러다가 지금 있는 금곡동 성서신학원 올라가는 정문 옆 일본식 함석 지붕 건물을 대구 동산 병원 분원으로 새 진료소를 열어 1950년대 말까지 병자를 치료하였다. 그 건물은 1960년대 말까지 존속해 있었다. 1958년도부터는 경안고등학교 기숙사로 사용했으며, 그곳에서 가끔 신앙부 모임도 갖고 셀던 선교사와 신앙부 학생들이 크리스마스 파티도 열었다. 그런데 성소 병원인 진료소가 개설당시 미국 선교 본부에서 모홍크(Mohonk) 선교 정책 회의 결정으로 한국에 있어서 병원은 서울의 세브란스와 대구 동산 병원만을 경영하고 그 외의 것은 진료소(Clinic)로 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병원 복구 기대는 무산되고 그때 선교 정책 변동으로 협동 사업부가 발족한 것이다. 안동 크리닉은 협동 사업부의 도움으로 비록 이름은 크리닉이지만 종합병원 규모로 발전하여 왔다.
안동성소병원 역사 속에는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의 선교사 추방으로 곤경에 처한 때도 있었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적도 있었으며 경영부실로 존폐 위기에 놓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뜻있는 성도들의 염려와 기도로 의료선교의 맥은 이어져 오게 되었다. 지난 1994년 서울 명성교회(김삼환목사 시무)에서 경영권을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앞으로 제2병원을 지어 의료선교의 사명을 다하는 병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4) 경안노회의 조직
한국 기독교의 초기 대 부흥기였던 1907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전신인 독노회(獨老會)가 조직된 후 9월 17일 역사적인 조선 노회가 조직되었으며 독노회 아래에 7대리회(代理會)가 조직되었다. 그 후 1912년에 총회가 창립된 후 1월 6일 부산 진 교회에서 경상노회가 조직되었으며, 1916년 12월 27일 대구제일교회에서 이 경상노회는 경북노회와 경남노회로 분립되었다.
5년 후에 안동선교부를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일대 9개 군 지역교회를 중심으로 1921년 12월 20일 경안노회는 경북노회로부터 분리되어 경안노회 조직 노회를 개최하였다. 12월 20일 하오 2시에 안동읍 옥동(금곡동) 여자성경학당에서 조직회로 회집하여 조직회장 선교사 권찬영씨가 기도하고 성경 에베소 4장 7절에서 16절까지 보고 “교회 사역자의 의무”라는 제목으로 강설한 후 김영옥씨의 기도로 회장이 개회하였다.
회장이 본 경안노회가 경북노회에서 분립함을 공포하고 임시서기를 이대영 씨를 회중이 공천 선정하여 회원을 점명하니 선교사 권찬영, 인노절, 목사 이대영, 김영옥, 강셕진, 장로 황영규, 량위환, 김션실, 김용규, 김용휘, 신효균, 김병석, 리원선, 윤주한, 졍한죠, 신택희, 조학규 제씨로서 회원 모두 17명이었다.
회장 및 신 임원 선택에 있어서 투표하여 선정하였는데 회장에 김영옥, 부회장에 권찬영, 서기에 강석진, 부서기에 리대영, 회계에 조학규, 부회계에 인로절로 선정하고 회원 중 1인으로 하여 신임회장을 영접하여 승석하게 하고 회중이 환영하였다.
제1회 경안노회는 1922년 1월 18일 안동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경안노회 시찰 분할을 4개 시찰로서 영덕지방, 남편지방, 안례지방, 북편지방으로 나누어 조직 운영하였다.
경안노회 창립 조직 당시 1922년 6월 현재 교회현황은 교회수 122개 처, 선교사 2명, 목사 3명, 장로 46명, 세례교인 2,642명, 교인 총수 7,008명이던 것이 1933년 6월의 교회 수는 146개 쳐, 선교사 3명, 목사 11명, 장로 104명, 영수174명, 세례교인 3,348명, 유아세례 1,493명, 학습교인 1,153명, 총 교인수 101343명.
(경안노회 p7. 안동교회 80년사 p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