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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 : 41. 십리를 동행하고 42. 거절하지 말라
마 5 : 41. 십리를 동행하고 -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
우리를 억지로 5리를 가게 하는 자에게 10리를 동행하고
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 십리를 동행하고
세 번째 예화에서는 길 안내자나 또는 운반자로서 민간인들에게 동행할 것을 강요하는 로마 수비대의 권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본문에서 '억지로 가게하다'(*, 앙가류오)는 강제적 의미가 강한 '징발하다'는 뜻이다.
로마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징용하여 군수 물자를 규정된 거리(로마 도량형으로 1마일 곧 '5리', 우리나라 치수로는 약 3리 정도, 이는 보통 성인의 약 1,000보(步)에 해당)를 운반하게 했다(W. Hatch, Essays in the Bibical Greek, pp.37-38).
이 단어는 27: 32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사용되었는데, 로마인들은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에까지 운반하도록 강요했다. 이 경우와 비슷하게 로마 군인들은 자주 한 개인에게 그러한 봉사를 요구했는데, 법질서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때에도 이 봉사를 요구했다(Schweizer).
이처럼 강제로 징용(徵用)을 당하게 되면 무고히 소송을 당한 경우처럼 분노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예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앙심을 품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마 5: 42. 거절하지 말라 -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
우리에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다.
엄격한 공의의 법에 의하면, 우리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하는 악한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고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의로 벌하지 않고 선대하셨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공의로 보복하지 말고 선대하라는 것이다.
1] 네게 구하는 자에게 ... 거절하지 말라.
네 번째의 예화에서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도록 명령할 뿐 아니라
* 출 22: 25 -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 레 25: 37 -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 신 23: 19 -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관대한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 신 15: 7-11 –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 시 37: 26 -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 도다.
* 시 112: 5 -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이 구절에 대한 평행구절의 형태를 보면, 두 가지 요구가 아니라 한 가지 요구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 눅 6: 30 -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비슷한 것을 반복함으로써 요점을 더 분명하고 강력하게 하고 있다.
마지막 두 예화를 보면 38-39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 이야기 전체는 이웃을 향해 열려진 마음의 자세, 즉 더 나은 의(義)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네 개의 미담은 강한 충격을 주지만 새로운 율법의 규정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본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돈을 꾸고자 하는 사람에게 무한정으로 돈을 주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 잠 11: 15 -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 잠 17: 18 -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 잠 22: 26 -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구하는 자에게 준다면 살인자에게 칼도 줄 것인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심사숙고해야 한다(Tholuck).
이 예화들이 수없이 애매모호한 설명들로 인하여 그 의미가 약화되거나 왜곡 되어서는 안 된다. 신자들이 이러한 예화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에 대응하는 자세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사랑과 성경에서 명하고 있는 것, 그리고 예수의 심장을 닮은 뜨거운 열정뿐이다.
마태복음 5장은 완전한 의의 삶을 가르친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완전한 의이시다. 그 의를 받은 자는 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의의 삶은 외적 규례를 지키는 삶이 아니고, 내적으로 형제를 미워하거나 욕하지 않고 사랑하고 음욕을 품지 않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며, 거짓 맹세를 하지 않으며, 악한 자를 대적지 않는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율법은 철저한 공의의 보응을 가르친 말씀이다. 이 공의는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구약 율법을 부정하실 수 없으므로, 이 말씀의 뜻은 다른 데 있다. 구약의 엄격한 공의의 법에 따른다면, 우리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 씻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보복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가장 큰 보복을 생략해 주셨는데 우리가 남에게 어떤 보복을 시행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개인적으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보복하려 하지 않으셨다. 공의의 보복 자체가 악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악한 자에게도 선을 베푼다는 것뿐이다. 이렇게 긍휼과 선을 베풂으로 악인들도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올지 누가 아는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선을 베풀자. 그가 악하게 요구하는 그 이상으로 그에게 선하게 대하자.
그러나 이 말씀은 나라에 경찰력이나 사형법이나 군대나 합법적 전쟁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로마서 13: 4는,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사자들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보응하기 위하여 ‘칼’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이나 사형, 군대나 전쟁은 사회의 질서와 국가의 안녕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사회와 국가와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2]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 ( 마 5: 38-42 )
그리스도인은 세상적인 삶의 기준과는 판이하게 다른 삶의 기준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 기록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의 원칙'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면서 본문에서 주님이 보여준 삶의 기준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리스도께서 직접 실천하시고 명령하신 삶의 원칙을 거부할 리가 없다.
(1) 정의와 사랑
모세의 율법에서 중요한 원칙 중의 하나는 누군가가 죄를 범하면 그 범한 죄의 중량만큼 벌도 따라야 했다. 그렇기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원칙(동해보상법)이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죄를 지은 사람은 그가 죄를 지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기가 범한 만큼만 형벌을 받게 되어 있어 매우 공정하고 정의로운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율법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듯 공정하고 정의로운 율법의 원칙에 하나의 중요한 원칙을 더하셨으니, 사랑이라는 최고의 법이다.
복음의 핵심은 사랑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할 심판의 자리에서 영생과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공정한 판단에 더해 사랑을 가져야 한다. 물론 범법자에게 마땅히 징벌을 가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친다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와 동시에 모든 분노와 원한을 없애고, 범법자에게 다가가 형제의 사랑으로 대해 주어야 한다. 그에게 가능한 더 큰 호의와 친절로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정의와 공의 위에 사랑의 법을 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의 정신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고 우리 스스로가 자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율법의 핵심이요, 완성이기 때문이다.
(2) 악을 이기는 선
본문은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행해져 온, 그리고 일종의 의무로까지 생각되던 복수심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말씀이다. 주님은 복수심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 작은 불씨를 더 큰 불씨로 번지게 하는 무익하고 위험한 것이며, 영적인 생활과 사회적인 생활을 파괴하는 가장 치명적인 것임을 일깨워 주고자 하셨다.
우리가 악한 자에게 불의한 일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불같은 복수심이 생겨난다. 이러한 복수심은 대부분 자신이 당했던 그 악을 동일하게 저지르고 나서야 잠잠해진다. 따라서 복수심은 또 다른 악과 복수심을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된다면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는 더 큰 재난과 불행을 당하게 되고 결국에는 파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은 복수를 금하셨을 뿐만 아니라 악에 대적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다. 악은 결단코 악을 이길 수가 없다. 오히려 악은 더 큰 악을 초래한다.
예수님은 악의 이러한 특성을 아셨기에 악을 이기기 위한 지혜로운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오직 선이 필요하다. 얼핏 보기에는 가장 허약하고 소극적인 방식 같지만, 영적으로 보면 가장 강력하고 적극적인 방법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같은 삶의 방식과 기준에 따라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대적하며, 이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보통 수준이냐, 하나님의 수준이냐?
많은 사람은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의 기준을 더 따르려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이 드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산다는 것이 손해가 되고 귀찮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보통 기준에 따라 산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격은 완성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의례적인 도덕률에 따라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기준을 높여서 산다는 것은 큰 희생이 따르는 일이 틀림없다. 하지만 보통 수준의 도덕적 삶은 누구나 영위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면서 보통의 수준에 따라 살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모순이다.
우리는 주님이 제시한 삶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기준을 따라 살아갈 것을 선택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에 임재하시고 모든 일에 축복해 주실 것이다.
3] 복수 해야 하는가? ( 마 5: 38-42 )
복수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악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죄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이기 때문에 악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1) 율법의 가르침
구약에는 동해보상법(해를 준 자에게 동일하게 벌을 가하는 것)이 세 곳에 기록되어 있다.
* 출 21: 23-25 – 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 레 24: 19-20 – 19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20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 신 19: 21 -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2) 이 말씀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39절에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듯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가르쳤다. 율법이 분명 이는 이로, 눈은 눈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 보상법은 출 21: 22에 있는 대로 본래 재판장의 판결의 원리로 주신 말씀이다. 개인은 사사로이 갚을 권한이 없다. 그런데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개인에게 적용시켜 악한 자를 가만두지 말고 사사로이 대적하라고 가르쳤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율법의 정신에 위배된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사랑이다. 그러므로 보상법도 사랑의 정신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크리소스톰이라는 교부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을 하시니까 그 말이 조금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만일 하나님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셨다면 오히려 잔인할 뻔하셨다.“
이처럼 사회의 공의는 공의대로 흐르되 우리는 진정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원뜻이다. 사랑한다 해서 사회의 정의까지 사라지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사랑한다고 형법을 없애면 세상은 극악무도해진다. 북한을 사랑한다고 해서 우리 군대나 반공법까지 없애면 어떻게 되겠는가?
정의는 정의대로 흘러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나라에 맡기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영적인 문제라면 기도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개인적인 복수는 금해야 한다. 그런데 창 4장의 라멕 같은 악인은 칠십 칠 배로 보복하겠다고 했다. 엉덩이에 뿔 날 사람이다. 복수는 악인이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백성이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복수심을 허용하신 적이 없다. 오직 재판장의 공정한 판결을 통해서만 보상이 가능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공정한 판결을 통해 죄가 무서운 줄 배웠고, 남을 존중하는 것이 나를 존중함이며 남을 해함이 곧 나를 해함이라는 내 몸 원리를 배웠다. 롬 12: 19에도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셨다. 그러나 당시 유대 사회는 잘못 가르침으로 원수 맺고 원수 갚는 일이 성행했다. 원수는 또 다른 원수를 낳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았다. 그래서 유대에 열심당과 같은 폭력조직도 있었고 예루살렘의 멸망도 이 잘못된 가르침이 직접적 원인이었다.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원수를 미워하고 원수를 갚으라는 말씀이 없다. 오히려 신 32: 35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보복하리라." 레 19: 18에도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잠 25: 21에도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해석이란 참으로 한심했다. 자기들의 욕망을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전도자였던 워치만 니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해 몹시도 가물 때 물 때문에 분쟁이 많은데 어느 농부가 자기 논에 물을 대놓으면 아래 논 임자가 몰래 논둑을 터서 말도 없이 물을 빼내갔다. 몹시 화가 났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모른 척하고 참았다. 그런데 그다음 날 아침 논에 나가보았더니 또 물이 많이 빠져 있었다. 이웃 논 임자를 찾아가 정중하게 항의했다. 물론 이웃 논임자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다음부터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농부의 마음에 기쁨이 없었다. 자기가 잘못한 것도 없고 그만하면 참았고 정당한데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에 기쁨과 평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기에 앞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 제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어찌 저의 마음속에 기쁨과 평강이 없습니까?" 그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먼저 이웃의 논에 물을 가득히 대줘라.”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이 논으로 가서 물을 퍼 올려서 이웃 논을 채웠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마음이 기쁘고 평안한지,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웃 논 임자는 감동하여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3) 주님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이 말씀은 꼭 돌려대라는 의미보다 매 맞았다고 화내지 말고 그만큼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라는 뜻이다.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가 값나가지 않는 속옷을 빼앗고자 하면 그것 때문에 맞붙어 싸우려고 하지 말고 더 값나가는 겉옷까지 주라는 것이다. 역시 관대함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당시에 로마군들이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강제 부역시켰다. 그래서 억지로 가게하면 기분이 나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것 때문에 속상해하지 말고 기쁨으로 십 리까지라도 가주라고 말씀하셨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너무 인색하게 굴지 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베풀면서 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남에게 다 주고 내 가족은 굶으라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너그러울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6·25 동란 때였다. 어떤 집사님이 퇴각하던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인민군은 그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다. 그리고 그를 앞장서 걷게 했다. 날은 더운지라 땀을 뻘뻘 흘리며 짐을 지고 걸어갔다. 짐을 지고 가던 집사님의 마음속에 불현듯이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이다.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들랑 그 사람과 십 리까지라도 가주어라."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르지만 죽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 앞에 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십 리까지 가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한 오 리쯤 갔을 때다. 인민군이 그를 불러 세웠다. "동무! 수고했소. 이제 짐을 내려놓으시오." 그때 그는 진심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좀 더 갈 수 있습니다." 그러자 인민군은 표정을 바꾸더니 이렇게 말했다. "동무, 빨리 가시오! 사실은 내가 여기 와서 동무를 쏴 죽이려고 했는데 동무가 친절하게 하니까 그럴 수가 없구려. 그러니 어서 빨리 가시오!" 그렇게 해서 그는 살아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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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의는 정의대로 흘러야 한다.
아멘~~~
설교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정의는 정의대로 흘러야 한다.
설교 감사합니다.
정의는 정의대로 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