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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라마에는 언제나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가 주인공만으로 흘러갈 수 없습니다. 주인공 말고도 조연, 그리고 수많은 단역이 필요합니다. 이는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인공이시기는 하지만, 예수님 밖에도 수많은 조연과 단역을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루카 복음서에서는 모범적인 인물로 그려진 단역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 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자식이 없음에도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시메온은 이스라엘에 주어질 구원을 기다리며 한평생을 의롭고 독실하게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나는 평생 과부로 어렵게 지냈지만 성전지기로 살면서 하느님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그 밖에도 겸손한 모습의 모범을 보인 카파르나움의 백인대장, 세관장으로서 죄를 지으며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자캐오, 예수님께 다가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죄 많은 여인, 예수님의 옆 십자가에 매달렸다가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된 강도, 스스로 나서서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신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도 있습니다.
드 라마에서 단역들이 보여 주는 여러 이야기가 엮일 때 드라마의 전체 내용이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 그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의로움을 잃지 않은 이들 등의 이야기가 모여 복음이 완성되었습니다. 드라마의 단역들이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것처럼, 복음서의 단역들은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는 데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처럼 위대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들처럼 큰 인물이 되기도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단역들처럼 크게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주님의 눈에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약해지지 마
-전삼용신부-
송정림씨는 자신의 책 ‘화양연화’에서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영화 주인공은 예쁘고 착한 젊은 여자가 아닙니다. 그녀는 중년 아줌마. 아이가 셋이며 두 번 이혼했고 무시를 당하면 절대 못 참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가리지 않고 다 하는데 주로 하는 말은 지독한 욕설입니다. 의상은 가슴이 훤히 보이는 밤무대 의상. 걸음걸이는 투박함 그 자체. 가방끈 무지 짧습니다. 통장 잔고는 달랑 16달러. 그런 그녀에게 있는 유일한 재산 한 가지. 그건 바로 용감무쌍하다는 것. 그녀의 이름은 에린 브로코비치.
직업소개소를 전전하며 직장을 알아보던 에린은 차 사고로 알게 된 변호사 에드를 무턱대고 찾아갑니다. 자식이 굶게 생겼는데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지요. 돈 되는 일은 무저건 해야 했습니다. 에린은 “일 좀 시켜 주세요.”라며 변호사 사무실에 눌러앉아 버립니다. 거친 말투에 맘대로 입은 옷차림, 남들 이목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태도... 가람들은 그녀와 일하기 싫어했고 그녀는 쫓겨나기 직전이었지요. 그런데 에린은 이상한 의료사고 기록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을에 있는 대기업 공장에서 크롬 성분이 유출되고 있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병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불의는 절대 못 참아!”
지금껏 그 누구도 대기업에 맞장 뜨는 일은 차마 벌이지 못했건만 이 무식한 아줌마는 풍덩 뛰어듭니다. 그리고 거대 기업을 상대로 한 미국 역사상 최대의 전쟁을 시작합니다. 자,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에린은 용감한 것 하나로 최고의 성공을 거둡니다. 수질오염의 피해 주민 643명에게 3억 2천 3백만 달러라는 큰 보상금을 타 내는 소송에게 성공을 거둔 그녀는 입을 크게 벌리며 이렇게 외칩니다.
“오~ 예!”
오늘 복음에 한나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만 단식과 기도로 살아가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목격하고 온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성경에 기록되게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단 하루라도 살게 하신다면 그 이유는 그 하루를 그냥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하도록 허락하신 것일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무언가 역사에 남을 일을 하는데 너무 늦은 때는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그런 일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니라고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라고 예언자가 못 되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시바타 도요는 올해 102세 할머니입니다. 도요가 자신의 장례비용으로 모아둔 100만 엔을 털어 첫 시집 ‘약해지지 마’를 출판 100만부가 돌파되어 지금 일본열도를 감동 시키고 있습니다.
1911년 도치기시에서 부유한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난 도요는 열살 무렵 가세가 기울어져 갑자기 학교를 그만둡니다. 이후 전통 료칸과 요리점 등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더부살이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20대에 결혼과 이혼의 아픔도 겪었습니다. 33세에 요리사 시바타 에이키치와 다시 결혼해 외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후 재봉일 등 부업을 해가며 정직하게 살아왔습니다. 1992년 남편과 사별한 후 그녀는 우쓰노미야 시내에서 20년 가까이 홀로 생활 하고 있습니다.
배운 것도 없이 늘 가난했던 일생. 결혼에 한번 실패 했고 두 번째 남편과도 사별한 후 20년 가까이 혼자 살면서 너무 힘들어 죽으려고 한 적도 있었던 노파. 하지만 그 질곡 같은 인생을 헤쳐 살아오면서 100년을 살아온 그녀가 잔잔하게 들려주는 얘기에 사람들은 감동을 먹고 저마다의 삶을 추스르는 힘을 얻습니다. 그분의 시를 몇 편 감상해 볼까요?
<비밀>
나,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어
하지만 시를 짓기 시작하고
많은 이들의 격려를 받아
지금은 우는 소리 하지 않아
아흔 여덟에도 사랑은 하는 거야
꿈도 많아 구름도 타 보고 싶은 걸
<나에게>
뚝뚝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멈추질 않네
아무리 괴롭고
슬픈 일이 있어도 언제까지
끙끙 앓고만 있으면 안 돼
과감하게 수도꼭지를 비틀어
단숨에 눈물을 흘려버리는 거야
자, 새 컵으로 커피를 마시자
<너에게>
못한다고 해서
주눅 들어 있으면 안 돼
나도 96년 동안 못했던 일이
산더미야
부모님께 효도하기
아이들 교육
수많은 배움
하지만 노력은 했어
있는 힘껏 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닐까
자 일어나서
뭔가를 붙잡는 거야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출처: 다음 카페 ‘사랑과 평화’]
마데 데레사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가난은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지금도 내가 무언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가 아닐까요? 새 해에는 마음만 먹이면 될 수 있는 그런 참다운 부자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언 젠가 산책을 하다가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살았던 집, 그러나 추억이 많은 묻어있는 집이지요. 꽤 컸던 마당에서 야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또 탁구도 치면서 형제들과 재미있는 시간이 많았던 곳입니다. 비록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지만,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나기 때문에 이 집을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과는 달리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 근처에 있었던 큰 개천도 없었고, 또한 집 바로 옆에 있어서 형제들과 신나게 놀 수 있었던 넓은 공터도 없어졌습니다.
무 엇보다도 그때보다 지금의 제가 훨씬 커졌다는 것도 찾을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때는 무엇이든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게 크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크게 느껴졌던 초등학교의 운동장도 사실은 그리 크지 않았고, 산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야트막한 조그만 언덕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시각의 차이도 전의 집을 발견하지 못하게 했던 이유였지요.
어 제 이런 이야기를 형제들과 하다가, 큰 형님께서 자신은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저와 나이 차이가 많기 때문에, 저와 달리 어른이 되어 보았던 동네를 다 기억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동네가 바뀌어도 또 만약 집이 없어졌다고 해도 찾을 수 있답니다.
어 쩌면 우리의 신앙도 이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보는 세상과 어렸을 때 보는 세상이 다른 것처럼, 성숙한 신앙을 갖추었을 때 제대로 볼 수 있고 또 제대로 주님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숙한 신앙은 하루 피정을 하고서 쉽게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주일 미사 한 번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또 레지오 활동 한 번으로 얻는 것이 성숙한 신앙일까요?
아 닙니다. 이 성숙한 신앙은 단 일회적인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내 생의 전부를 바쳐야지만 겨우 얻을 수 있는 것이 이 신앙이 아닐까요? 그래서 어떠한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나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온전히 볼 수 있고, 주님의 뜻에 사는 행복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 늘 복음에는 한나라는 여자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삶은 매우 불운해 보입니다. 결혼을 해서 7년 만에 남편을 잃고 84살이 될 때까지 성전에서 지내면서 단식과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을 섬겼다고 복음은 말해주고 있지요. 당시 혼인하는 나이가 15~16세라고 생각한다면, 7년 만에 과부가 되어 60년 이상을 성전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84 살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이 있다고 하지요. 세상의 전 과정을 뜻하는 숫자 ‘7’과 완전수를 뜻하는 ‘12’를 곱한 숫자가 바로 ‘84’입니다. 즉, 자신의 전 생애 전체를 꽉 차게 하느님을 찬양하고 섬겼던 ‘한나’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기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자신의 품에 안을 수 있는 큰 영광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나 예언자처럼 나의 전 생애 전체를 꽉 차게 하느님을 찬양하고 섬길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던지기 전에,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부족한 자신의 믿음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불이 빛의 모체가 되는 것처럼, 사랑은 항상 평화의 모체가 된다.(칼라일)
신앙생활에 대해....
모 든 습관은 노력에 의하여 강화된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잘 걷기 위해서는 자주 그리고 많이 걸어야 하겠지요. 또 잘 달리기 위해서는 많이 달려야 합니다. 책을 잘 읽기 위해서는 많이 읽어야지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습관을 중지해버리면 자신이 강화시켰던 부분을 쇠퇴시키고 맙니다.
제 아버님이 매일 운동을 하셔서 하체가 많이 발달했었지요. 그런데 아프시고 나서는 운동을 하지 못하다보니 하체가 정말 많이 얇아졌습니다. 그만큼 노력에 의한 습관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쩌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운동하면서 발달되었던 부분들이 더 약해지는 것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주님과 관계했던 그 모든 끈들이 느슨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 앙생활은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누군가가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억지로 우리에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지도 않으며, 내가 깨달을 수 있도록 다른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신앙이고, 이를 통해 큰 기쁨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력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신앙임을 기억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신앙생활을 잘 생각해봅시다. 이제는 주님께서 내게 다가오기만을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다가가는 적극성을 보여야 할 때가 아닐까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란,,,
-김대열신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요한1서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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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라면 모를 이 없을 우리 삶의 이치입니다.
삶의 경험으로 통감하는 내용이지요.
모든 것은 반드시 지나가고, 그 안의 어떤 욕망도 지나가버립니다.
하지만 그 욕망은 항상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가 그만큼 어리석던가, 아니면 욕망이라는 괴물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욕망이 앞서는 삶은 끝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온갖 종류의 권력을 쥐고자 애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도 어리석고 가련하게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좀 더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이 삶을 다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해야 합니다.
금욕주의자들처럼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청승이나 궁상을 떨며 사는 것이 복음적 삶이 아닙니다.
놀 때는 놀고, 쉴 때는 쉬고, 즐길 때는 즐기며 밝게 살아야 합니다.
단, 그 목적은 나눔이고 사랑이었으면 합니다.
저물어 가는 이 한 해, 우리의 마음을 가장 불편하게 했던 것들이 혹시 덧없고 영혼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욕심이나 욕망 때문은 아니었는지 뒤돌아보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할 이들을 떠올리며 안부 전화라도 주고 받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이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저 옳은 것이 좋아 옳게 살려는 마음들을 가진 이들입니다.
요한1서가 말하는 것처럼,
영원히 남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