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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 공현의 회개. 등 )
* 조명연 신부님 : 아직 / 05:2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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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06 03:58
- 공현의 회개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보니 어제 공현 대축일 본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어제 본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늘 별의 인도로 성자를 이민족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으니
믿음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 저희도 자비로이 이끄시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직접 뵈옵게 하소서.”
주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으니
우리도 하느님을 직접 보게 되기를 비는 내용입니다.
보여줘도 봐야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주님께서 당신을 공현하셔도
우리가 보지 않으면 주님의 공현은 내게는 헛것입니다.
공현 곧 모두에게 공적으로 당신을 나타내 보이셔도
어떤 사람은 보지만 어떤 사람은 보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아기로 당신을 나타내 보이신 주님께서 이제
어른이 되어 공적으로 등장하시며 첫 말씀을 이렇게 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주님의 오심과 함께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어도
그 하느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있다면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공현의 회개를 묵상해봤습니다.
우리는 회개를 여러 차원에서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사순시기의 회개는 십자가를 거부하는 삶에 대해 회개하고,
부활 시기의 회개는 여전히 죄의 어둠 가운데 사는 삶에 대해 회개해야겠지요.
그렇다면 공현의 회개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보여주셔도 보지 않는 죄와 보지 못하는 죄로부터의 회개인데
우리는 왜 보지 않고 왜 보지 못하며,
왜 어제 삼왕처럼 보고픈 갈망과 보려는 열망이 없습니까?
그것은 어쩌면 삼왕처럼 어둔밤을 겪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고,
어둠 속에서 별을 찾지도 보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나라를 볼 때 어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현실을 볼 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의 어둠을 볼 때 어둠 곧 절망에 빠지지 말고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하늘을 보고 하늘의 별을 봐야 하며,
하늘의 별이 가리키는 주님을 봐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어둠에서 빛을 찾고 빛으로 참 빛이신 하느님을 찾는 회개입니다.
둘째는 주님을 공현하지 않는 죄로부터의 회개입니다.
우리는 삼왕처럼 별을 보고 그 인도를 받는 사람이자
동시에 빛이 필요한 이들에게 별이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별이야!’ 하고 지레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린 주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 하늘로 오를 수 있게 되고
그분이 인성을 취하심으로 신성을 지니게 된 고귀한 신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주 공현의 또 다른 모습인 주님 세례 축일에 기념하는 것처럼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도 주님의 왕직과 예언직과 사제직에 참여하고,
이 왕직과 예언직과 사제직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을 공현하고 하느님 나라를 공현하는 자들이 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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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배움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배움을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그릇이 바뀌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우치다 다쓰루, ‘무지의 즐거움’ 중).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지도 않고 그릇이 바뀌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배움이 아니라는 말에 큰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작년까지 본당에서 매주 성경 강의를 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강의했던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 다니면서 공부하는 법을 배운다고 말합니다. 즉, 앞으로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공부하며 성경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공부하기 전과 비교하면 많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맞습니다. 그릇이 바뀌어 지는 것이었습니다.
배움은 우리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렇다면 이 배움을 멈춰야 할까요? 아이들은 공부가 싫다고 말하고, 청소년은 공부가 지겹다고 합니다. 중장년은 시간이 없다고 말하고, 노년이 되어서는 이 나이에 무슨 공부냐고 합니다. 그릇이 바뀌지 않으니 계속 똑같은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릇이 바뀌어야 행복할까요? 바뀌지 않아야 행복할까요? 자기 마음에 드는 새 물건을 사게 되면 기분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배움의 시간은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배움을 통해 바뀌게 되는 나의 모습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똑같은 삶이 아닌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도파민이 형성되어야 하는데, 똑같은 상황에서는 절대로 도파민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배움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다가설수록 새로운 배움이 계속됩니다. 그 새로운 배움으로 행복이 계속해서 자기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는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로 실제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고, 사람들이 데려온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역시 고쳐주신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렇게 환자들만 치유하시는 의사의 역할만 하셨을까요? 항상 말씀이 있었습니다. 즉, 그들이 하느님을 알 수 있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구원의 길로 갈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 그릇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음을 알게 되어, 다른 이들에게도 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를 알리게 됩니다.
우리의 그릇이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겨 알아가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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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람에게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몇 년을 살았느냐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오 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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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빛의 축제일인 ‘주님 공현 후 월요일’입니다. 오늘도 어제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의 빛의 공현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빛을 받으며, 빛 속에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빛을 증언하러 왔던 요한은 물러가고, 참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요한 1,6-9).
오늘 <복음>은 이사야가 예언한 빛이 이미 도래했음을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그 빛은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에서부터 비추어왔습니다. 질곡의 땅 갈릴래아, 이곳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장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당신 ‘사명’의 내용을 밝혀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먼저 이방인의 압박, 곧 죽음의 그늘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먼저 선포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은 어두움 속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으로 오시는 분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빛 안에서 걸어야 하는 첫걸음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밝혀줍니다. 곧 “회개하여라.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슈브,שב)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돌이키다’, ‘돌아오다’라는 뜻인데, 원래의 그림문자의 뜻은 ‘집을 무너뜨리는 것’을 뜻합니다. 곧 자신이 ‘이전에 살던 집’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에 거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전에 살던 집’이란 우리가 거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 우리가 이전에 행하던 행위나 지식까지도 포함합니다. 곧 우리의 행위와 앎으로부터 벗어나 새집으로 돌아와 하늘의 양식을 먹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옛사람의 행위와 지식(옛집)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새로운 성전을 건축하는 것)”(콜로 3,9-10)이라고 말합니다. 곧 ‘우상의 집’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집인 성전으로 돌아가 하느님의 양식인 말씀을 먹으며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는 죄악을 버리는 것보다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의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께서 사람과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만든 하느님의 처소(집)임과 동시에, 마지막 때에 다시 회복될 ‘새 예루살렘’(묵시 21,2)입니다.
‘회개’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호세 14,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켜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있게 하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요한 14,23 참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거처를 함께 하시면 우리 안에 ‘하느님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 안으로의 전환이 곧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건설되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곧 우리의 말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이 건설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일, 곧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거처가 되는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마태 4,15)
주님!
당신께서는 어둠이 덮인 곳에 큰 빛을 비추셨습니다.
질곡의 땅, 핍박받는 이들에게 의로움의 빛줄기를 뿌리셨습니다.
오늘, 저희의 오류와 완고함을 뚫으소서.
어둠의 갇혀 있는 저희의 속박을 풀고, 묶인 이들을 해방하소서.
무지와 어리석음을 밝혀 주시어, 진리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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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의 관심
예수님께서 공적인 일을 시작하신 곳은 갈릴래아, 사람들이 육지 속의 섬이라 부르는 변두리, 소외된 땅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물이 풍부하여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살기 좋은 지역이었으나 가장 착취를 받던 곳이 또 갈릴래아 지방입니다. 대부분 땅은 부유한 사람들의 소유였고, 많은 사람은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과 억압을 강요당해야 했습니다. 고통스럽게 착취 받는 땅이 갈릴래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지역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첫 말씀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착취한 부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주변에는 부자들은 멀리 사라지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몰려왔습니다. 뒷전으로 밀려나 하느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은 가르치는 일을 하는 교육기관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허약한 이들을 치료하는 병원을 운영하고 사회복지시설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와 병원 복지시설은 이미 우리 마음에 설립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관심은 부유한 사람, 힘 있는 사람, 잘나가는 사람, 멋진 사람, 편안한 사람에게 더 쏠립니다. 이러한 우리의 태도에 예수님께서는 무어라 하실까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둑질하는 사람이 회개했다면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걸어왔던 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 관한 관심을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든 어렵고 힘든 사람은 항상 있습니다. 힘겨워 지친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힘든 사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힘든 사람, 도움을 청하기 전에 알아봐야 합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듭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것은 그분에게 넘치는 사랑과 자비가 있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다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할 소명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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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자선 음악회를 마치고, 수익금은 장애인 학교에 전달하였습니다. 장애인 학교는 18세 이상인 학생과 18세 이하인 학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18세 이하의 학생들은 일반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일반 학교에는 장애인 학생을 위한 학급이 따로 있어서 선생님들이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토요일에 장애인 학교에 와서 지낸다고 합니다. 18세 이상인 학생들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장애인 학교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수익금 전달하는 날은 학생들의 성탄 파티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이사진이 선임되었습니다. 저는 장애인을 위해서 헌신하는 봉사자를 보았습니다. 장애인 학교를 운영하는 목사님, 영어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님, 그림과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 음식을 준비하는 봉사자, 학생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주시는 미용 봉사자, 학생들의 건강을 챙겨주시는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장애인 학교에는 다운 증후군 학생과 자폐 학생이 있었습니다. 일반 학생과 조금 다른 자녀를 낳아서 키우는 부모님이 있었습니다. 작은 정성이지만 장애인 학교를 도울 수 있어서 제게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내년에도 자선 음악회를 한다면 그 수익금을 기꺼이 장애인 학교를 위해서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위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교리 논쟁이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비인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교리는 신앙인이 따라야 할 길과 같습니다. 교회와 다른 교리를 이야기한 사람은 이단이 되어야 했고, 교회는 처음으로 이단을 단죄해야 했습니다. 두 번째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공격입니다. 중동에서 시작된 새로운 종교는 막강한 힘으로 교회의 턱밑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사랑과 평화를 선포하는 종교는 십자가의 이름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자비와 용서의 종교는 다른 문화와 다른 종교를 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원주민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인류와 역사 앞에 용서를 청했습니다.
세 번째 위기는 내부의 분열과 갈등입니다. 프로테스탄트가 생겼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새로운 교회를 세웠습니다. 같은 배를 탔던 교권과 왕권은 각자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인간 중심의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도래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풍요와 편리함을 주었지만, 인류의 영성과 지성을 물질의 ‘틀’에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네 번째 위기는 신앙과 삶이 다른 겁니다. 교회의 전통과 유산이 사라지고, 세속화의 바람이 들어온 겁니다. 성소의 감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자의 수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기도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삶의 중심에 신앙이 있지 않고, 세속의 가치와 판단이 우선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고령화되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가진 걸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주님 안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나쁜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하여야 한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빛이 있어야 어둠이 밝아지듯이, 빛이신 예수님 곁에 머물러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2025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열망으로 내 마음 안에 있는 거짓된 것들을 버리고, 하느님의 계명과 주님의 사랑을 담아 빛이신 주님께로 가까이 가야 하겠습니다. 작은 실천이 세상을 변화시키듯이, 신앙 안에서 작은 실천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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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공현 후 월요일입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이행하십니다.
주님의 첫 마디는 이것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주님은 이 말씀으로 자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늘나라는 주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하늘나라 안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만을 전하셨던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사랑을 실천하시며 하늘나라가 다가왔음을 몸으로 전하셨습니다.
말로 주님을 전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말하지 않는 것보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듯이 사랑은 실천과 함께 할 때 그 힘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힘은 바로 기적이고 치유입니다. 사랑이 말에서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질 때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기적과 치유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보여주셨듯이 우리도 우리 주변에 하늘나라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과 행동으로 말입니다. 우리 말이 누군가에게 삶의 희망이 되고 우리 손길이 도움이 되고 치유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마음 관리 사무소
어둑어둑한 시간
한적한 어촌마을을 산책했습니다.
많은 곳의 불빛은 이미 잠들어 있었습니다.
작고 예쁜 건물이 보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곳은 예쁜 카페일 거야. 오늘은 영업이 끝났나 보군.
내일 와봐야겠어.’라고….
그리고 그곳을 지나치려 하는 순간 멀어서 보이지 않았던 간판이 보였습니다.
‘마음 관리 사무소’
이름이 참 맘에 들었습니다. ‘마음 관리 사무소’
카페는 아니었지만, 더 근사한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곳이라 생각했습니다.
가끔씩 우리는 마음 관리가 안 돼서 힘들어하고 아파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어촌마을을 거닐며 그렇게 ‘마음 관리’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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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하느님 중심의 삶”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새벽 인터넷을 여니 1.3일부터 1.6일 새벽 지금까지 한남동 공관 앞에서 고스란히 눈을 맞으며 추위에도 불구하고 20-30대 여성들 주도의 수많은 은빛 우의를 걸친 은박 탄핵시위대의 정의롭고 순수한 나라 사랑에 코끝이 찡하며 가슴 먹먹한 감동과 더불어 저절로 눈물이 났습니다. 요즘 하얼빈 영화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안중근 토마 의사가 남긴 삶의 가르침입니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세월을 낭비하지 마라.”
요즘 세계적 정치지도자였던 독일 최초의 전임 여성 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자유”라는 회고록을 읽고 있습니다. 그의 감동적 신앙 고백 일부를 나눕니다.
“‘주여, 저를 굽어 살피소서.’ 나는 선서문 말미에 이 구절을 집어넣었다. 종교적 차원의 맹세없이도 선서할 수 있었지만 내게 이건 아주 중요했다. 나는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는 ‘주여, 저를 굽어살피소서’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선포함으로써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도 하느님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을 쓰게 된 지금 돌아보니, 나의 총리 재임 시절, 그러니까 임기 첫날과 마지막 날을 제외한 지난 16년 5860일 동안 매일의 혼란스런 사건들 너머에서 나를 붙들어준 무언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 참으로 기쁘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탈리아 교육자들을 알현할 때 하신 말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희망을 잃는 것을 피하고 날마다 그 희망을 키울수 있을까? ‘날마다의 투쟁중에, 시선을 그리스도께 두는 것이다(Amid daily struggles, keep eyes on Christ).”
마음 깊이 각인하고 싶은 대목은 괄호안에 영어를 집어넣습니다. 위 모든 내용들이 우리의 회개를 북돋웁니다. 얼마나 치열하게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노력하며 산 삶인지 깨닫습니다. 결론은 날마다 “하느님 중심의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자는 것이요,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이요 언젠가는 어김없는 죽음입니다. 이래서 늘 반복하여 강조하는 내 인생 일일일생(一日一生),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했을 때의 시점(時點)을 확인하자는 것입니다. 성탄시기가 끝나가니 오늘 복음은 바야흐로 갈릴래아 전도가 시작됨으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펼쳐집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말씀이 그대로 통쾌하게 실현됩니다.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예나 이제나 무지한 인간의 어둠의 현실을 똑같습니다. 문명의 야만시대의 역설처럼 여전히 어둠은 짙습니다. 어둠속의 큰빛이 바로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공생애 첫 일성이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오늘에도 호소력을 지닙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바로 큰 빛이신 예수님 자체가 하늘 나라 꿈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회개하여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삶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실현되는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후,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니 예수님의 눈부신 활약상이 눈에 보이는 듯 선명합니다. 온통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일에 전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일이 회개입니다.
주님께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하며 주님 중심의 회개의 여정에 충실할 때 저절로 치유되는 영육의 현실임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날마다 평생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궁극의 문제는 내 안에 있고 답은 하느님안에 있기에 회개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빛입니다. 회개를 통해 빛이자 생명이신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저절로 치유요, 회개의 여정은 그대로 치유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궁극의 답도 하느님께 돌아가 제자리에서 제본분을 다하며 제대로 사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참된 제자리의 정주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끊임없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가는 끊임없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요한1서 1독서에 대한 답도 하느님 중심의 회개의 삶에 있음을 봅니다. 회개를 통한 계명에 충실한 삶이요 영의 올바른 식별이니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 속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이 아닌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 중심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회개의 삶입니다. 요한 사도의 말씀이 참으로 적절합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안에 머무르십니다.”
회개의 삶은 믿음과 사랑의 계명 실천의 삶으로 입증되고, 계명의 실천과 더불어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 일치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회개의 열매가 바로 믿음과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앞서 요한 사도의 사랑의 권고가 생각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래야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습니다.”
바로 참된 회개 은총이 제멋대로의 감정적 사랑이 아닌 진리 이신 주님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합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정화되어야 할 이기적 불순한 우리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평생 배우고 공부해야 할 “진리 안에서의 행동으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회개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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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서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님
가까이
오시니
나
가까이
다가가요
믿음에
믿음으로
기쁨에
기쁨으로
희망에
희망으로
사랑에
사랑으로
품음에
품음으로
베풂에
베풂으로
돌봄에
돌봄으로
섬김에
섬김으로
돋움에
돋움으로
살림에
살림으로
님
가까이
오시니
나
가까이
다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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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마태 4,13)
유혹을 찾아 나서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왜 물러가셨을까요?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유혹을 찾아 나서지 말고 그 영향이 미치는 곳에서 물러가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일부러 찾아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것은 탓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연히 위험에 빠졌을 때는 씩씩하게 견뎌 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치는 한편 유대인 지도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시려고 카파르나움으로 물러가셨고,그럼으로써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이사 9,1-2 참조.>.
-요한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하느님을 긴의자 밑으로 밀어 넣는 짓은 우리가 만든 안경을 위해 하느님을 쫓아 버리는 것과 같은 짓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일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에게 두터운 외투를 덮어씌워 긴 의자 밑으로 밀어 넣는 짓이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쇼에 홀릴 수 있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을 부려먹는 짓을 멸시한다. 그는 심지어 종교적인 목적으로 하느님을 이용하는 행위마저 거부한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동원하여 아무개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치 하느님을 촛불로 만들어 무언가를 찾듯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찾고 있던 무언가를 찾으면 춧불을 던져 버립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부려서 무언가를 찾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찾고 있는 게 이익이든 보상이든 영성이든 다른 것이든 간에,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쓸데없는 것을 찾고 있기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308)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요한 1,1-14
머리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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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 /
박윤식 [big-llight] 250105. 18:25 ㅣNo.179079
예수님의 본격적인 복음 선포활동은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에게 “나를 따라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하신 후였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마치 혼이 빠진 것처럼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그 바닷가 생활에서 회개할 것이 얼마나 많아 모든 것을 그곳에다 죄다 던져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갔을까!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간 각종 유혹을 받으신 후 갈릴래아에서 전도한 최초의 복음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 호숫가를 두루두루 다니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분의 으뜸가는 과제는 죄의 반성과 철저한 ‘회개’였다. 하늘나라가 이미 가까이 다가와 있기에 바로 들어가려면 지금 여기서 회개하라는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큰 빛이 떠올랐다.”
갈릴래아는 젖과 꿀이 있는 땅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모든 것을 빼앗기며 살아왔다. 로마 제국에, 예루살렘에도 빼앗겼다. 정치적으로 소외되었고, 종교적으로는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라며 무시당했다. 그래서 민초들의 분노는 물론이고 폭동도 많았다. 예컨대 약속의 땅임에도, 도무지 그게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어쩌면 하느님 은총이 자연 가득하였다지만,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하여 무시당하였고, 가진 것이 없다고 업신여김을 감내해야 하였던 곳이었다.
어디 이뿐인가? 살다 살다 힘들면 동네 밖 도적 떼라도 되어야 입에 풀칠할 수 있었던 이들이 넘쳐 났고, ‘이렇게 살 바에야 그냥 소리나 한번 지르고 죽자.’라는 심정과 태도가 낯설지 않았다나. 아무튼 그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신다. 물질적 빈곤을 뛰어넘는 연민에 찬 하느님 자비를 그곳에 알리셨다. 버림의 땅인 갈릴래아를 약속의 땅으로 느껴지게끔. 그렇다.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당신의 전유물인 ‘큰 자비’를 만천하에 드러내신 것이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느님 능력이 바로 곁에 있단다. 그러니 아예 송두리째 바꾸란다. ‘정말 주님의 힘이 내 곁에 머물고 있을까?’라는 생각부터 바꾸라는 거다. 그러면 하느님을 작게나마 느끼리라. 그분의 힘이 함께하시면 우리 곁을 어정거리던 악한 기운은 멀리 물러가리라. 그토록 성체를 많이 모셨으면서도 우리가 바뀌지 않은 것은, 그분의 그 힘을 못 느꼈기에.
이렇게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하늘나라는 그분 말씀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늘나라는 결코 멀리에 있지 않다. 가까이 와 있으니 회개하라는 뜻은, 회개를 통해서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시각 우리가 그분 말씀에 따라 참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하늘나라에서 산다고 할 수 있을 게다. 회개를 통해서, 우리는 참 행복을 얻을 수가 있으리라.
하늘나라는 그분 부르심을 받아야만 들어간다. 그 부르심은 지금 이 시각에도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습관화된 나쁜 것을 모두 버리고 철저한 회개로 그분을 따르자. 그 옛날 예수님 제자들도 이리저리 따지지 않고 곧장 따랐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것이 예수님의 첫 설교 테마였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서 전도하신 최초의 복음이다. 우리는 이 회개를 통해 지상에서의 참행복을 얻고, 그분 부르심으로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누릴 믿음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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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독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영에 이끌리는지 그러지 않는지를 식별할 수 있는 주요한 기준 하나를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음을 믿고 고백하는가 그러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이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표현하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참인간’이시라는 믿음의 여부입니다.
이를 믿고 고백할 때 우리는 성탄과 공현의 의미를 깊이 되새길 수 있습니다.
주님 공현 뒤 한 주간의 복음 말씀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체포된 뒤 유다 광야에서 갈릴래아로 물러가시어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하는 선포를 시작하십니다.
당신의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여기’ 이 세상에 왔음을 말씀과 행적으로 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4,23).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이러한 복음 선포가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4,16)로 묘사됩니다.
주님께서는 어디든 당신의 구원이 필요한 이들을 먼저 찾아가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구원이 내게 필요함을 아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회개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인식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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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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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시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역으로 가신 것을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늘 나라를 선포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유다 광야에 있는 요르단 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후에 유다 지역에서부터
하늘 나라를 선포하실 수 있었을텐데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출발점으로 삼으십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요한이 잡힌 다음이기에
요한과 충돌할 것을 염려하셔서
갈릴래아로 가신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텐데
예루살렘에서 가장 먼 갈릴래아
그 시골에서부터 복음 선포는 시작됩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비효율적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효율을 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십니다.
효율적이지 않기에
하늘 나라는 빨리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온 세상에, 많은 사람에게
하루 빨리 하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필요로 해서 그분께 다가온 사람에게
하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느님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하느님께 다가오는 모든 이에게
기꺼이 다가오십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희망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유명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원하는 사람에게 집중하십니다.
우리가 부족한 인간이기에 하느님이 필요하다면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보잘 것 없는 우리에게
더 집중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집중하시는 하느님께
기꺼이 우리도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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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 17)
회개의 여정은
하늘 나라의
여정입니다.
사람과 회개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길이
회개의 길입니다.
회개는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십자가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십자가가
하늘 나라의
문을 엽니다.
회개는 하느님
사랑을 만나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늘 나라가
아주 가까이
왔습니다.
우리를 향한
조건없는 사랑이
회개를 불러
일으킵니다.
회개로
세상을 새롭게
보게됩니다.
모든 것을
하늘 나라의
은총으로
바뀌게 하는
회개가 있습니다.
회개가 없다면
하늘 나라도
없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회개가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
생명과 사랑
회개와 하늘 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곁에 가까이
오셨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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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회개할 때 얻게 되는 수많은 은총!
그 누구에게든 ‘최초 활동 무대’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 사업의 베이스캠프로 당대 가장 잘 나가던 도시, 거룩한 도시의 상징 예루살렘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유다 지방에서 활동을 개시할 것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부들과 농부들이 어울려 살아가던 한적한 시골, 여러 종족들이 살고 있었고, 종교적인 관습이나 전통, 신앙생활에 있어서 유다 지방과는 많이 고립되어 있었던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깡촌 갈릴래아, 카파르나움을 선택하신 배경에는 예수님께서 교만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겉멋만 잔뜩 든 휘황찬란, 위풍당당한 당대 대도시들의 위선과 타락을 산산조각내기 위해
작고 낮은 도시에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작고 낮은 도시에서 소박하게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잔뜩 부풀린 사람들, 자칭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서로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에게 크게 외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성탄 대축제 기간을 끝내고 이제 다시 한번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회개해야겠습니다.
회개할 때 얻게 되는 은총은 참으로 큰 것 같습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작은 것도 아름답고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고통이나 십자가도 은총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이 온통 기쁨꺼리로 가득한 축제의 장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면 즉시 떠오르는 것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상처나 고통을 안긴 이웃들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새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노력들, 아주 좋은 회개의 모습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좀 더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의 부족한 행동 하나하나를 기억하셨다가 철퇴를 내리시는 징벌의 하느님의 아니라, 돌아갈 때마다 활짝 팔을 벌리시며 또 다시 안아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고통스럽고 힘겨웠던 지난 삶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벌이 아니라 사실은 선물이요 축복이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상, 갖은 결핍과 죄투성이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그 안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나란 존재, 흙부스러기처럼 나약하고 머리칼보다 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 눈동자처럼 애지중지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나 같은 중죄인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가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히 하느님 나라’로 갈 것을 확신하는, 그래서 안심하고 기쁘게 지상 생활을 엮어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가 아니라 ‘저 사람도 당연히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것을 확신하는, 그래서 그를 귀히 여기고 그라는 존재 안에 깃들어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찾아나서는 노력이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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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4,12-17.23-25: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힌 것을 아시고 갈릴래아로 가신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우선은 때가 되었을 때, 수난 하시기 위해서였고, 우리에게 유혹의 위험에서 피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는 주님께서 유혹을 두려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모든 유혹을 다 이겨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가 그분을 따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유혹이라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연히 위험에 빠졌을 때는 이겨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며, 유대 지도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시려고 카파르나움으로 가셨고 이사 9,1-2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즈불룬과 납탈리 지파는 맨 먼저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분노가 내렸던 사람들이 먼저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영적 속박에서 풀려나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에 가려져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율법 아래에서도 그들은 많은 빛이 있었다. 모세와 아론과 많은 예언자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빛이셨고 그 빛이 그 지방을 비추고 있다.
여기서 큰 빛은 우리 주그리스도이시며 밝게 빛나는 복음의 가르침이다. 이 빛은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16절)을 즉 무지라는 오류 속에 있는 백성들을 비추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16절)는 죄로부터 오는 것인데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죄의 힘에서 오는 것으로 아직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그들을 이미 그 빛이 비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붙잡히자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17절)고 선포하셨다. 그 선포는 요한의 가르침을 확증해 주시는 말씀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참된 증인임을 알리고자 그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신다. 여기서 하늘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상태를 말한다. 그 상태는 바로 하느님께서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상태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우리 “안에”(루카 17,21)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사랑할 때, 하늘나라는 우리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악마에게 붙들린 육신을 풀어주시고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건강을 되찾아 주신다. “사람들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24절) 사람들을 그분께 데려왔다고 한다. 여기서 질병은 육체의 병을 뜻하고, 고통은 영적 질병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병은 신성의 권능으로 영적인 병은 자비의 말씀으로 낫게 해 주셨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우리도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분에게 가서 죄의 용서를 청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분께 용서받고 하느님의 참 자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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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꽉 막힌 마음 여는 법: 작은 틈새 찾기
어떤 분이 요즘 믿음에 불타 그 깨달음을 타인에게 전하려 하는데 거기에서 반작용이 너무 커서 조금은 힘이 빠지는 상황입니다. 그분에게 저는 ‘너만 잘났냐?’라는 반발의 마음이 들지 않게 살살 다가가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조금 더 자세하게 이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습니다.
가끔 고해성사를 주다 보면 부모에게 떠밀리다시피 들어오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한 번은 한 청년이 들어와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고해본 지 얼마 되었는지, 죄는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꽤 오래 냉담하던 입이 반쯤 나와 있던 그 청년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진짜 죄 없어요.”
여기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십계명을 읊어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사람은 마음을 굳게 닫아걸고 있습니다. 용서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예수님은 빛 자체이십니다. 빛이 의미 있는 곳은 어둠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둠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이 죄가 없다고 굳게 믿게 하는 무언가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 임언기 신부님이 고해성사를 주려고 간암 말기 환자를 찾아갔을 때도 그는 고해성사를 거부하며 “나 죄 없어!”라고 외쳤습니다. 임 신부님은 속으로 “그래, 너 잘났다!”라고 하며 돌아섰습니다. 꽉 막혀 말해봐야 소용이 없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리옷 유다처럼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자신이 어둠임을 알지 못하여 스스로 빛을 거부해 목을 매 자살하게 된 상황이 아니라면 항상 희망이 있습니다. 완전히 빛을 차단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항상 빈틈을 찾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사탄만이 빈틈을 주지 않습니다.
저도 나름 잘 산다고 교만해질 때가 많습니다. 이때 저의 빈틈을 공략하는 말들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자비가 필요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고해성사를 조금 늦게 들어가는 것, 강론 때 조금 합당하지 않은 농담을 하는 것, 아주 가끔이지만,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새벽 미사를 했던 것, 감기 걸리고 마스크 안 쓰고 미사 하는 것 등입니다. 만약 신자들이 “신부님은 회개하셔야 해요!”라고 말하면 저도 “본인이나 잘하세요!”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어린 관심으로 그러한 것들을 말해줄 때는 ‘아, 바꿔야겠구나!’라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가가야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비극은 잘못된 ‘믿음’ 때문에 시작되고 그 믿음을 파괴할 작은 틈을 찾아 누구도 빛을 넣어주지 못한 데서 비극으로 끝납니다. 예를 들어 ‘멕베스’를 생각해봅시다.
맥베스의 비극은 세 마녀의 예언을 맥베스가 맹목적으로 믿고, 주변의 누구도 그 믿음을 깨뜨리지 못하면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로 전개됩니다. 마녀들은 맥베스에게 글래미스의 영주, 코더의 영주, 그리고 미래의 스코틀랜드 왕이라는 칭호로 인사를 건넵니다. 이들의 애매모호한 말은 맥베스의 마음에 야망의 씨앗을 심어줍니다. 마녀들의 말은 해석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맥베스는 이 예언을 불가피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그가 코더의 영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맥베스는 마녀들의 예언이 신빙성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이를 들은 레이디 맥베스는 그의 야망에 불을 지피며, 맥베스가 직접 행동해 던컨 왕을 살해함으로써 예언을 이루라고 부추깁니다. 만약 레이디 맥베스가 던컨을 죽이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는 점이나, 던컨이 친척이자 집에 초대받은 손님임을 상기시켰더라면, 맥베스의 결심은 약화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의 조언은 맥베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운명이라는 믿음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맥베스는 예언에 대한 확신으로 인해 이성을 잃고 맹목적으로 행동합니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는 마녀들의 반쿠오 후손에 대한 예언 때문에 불안에 시달립니다. 그는 반쿠오와 그의 아들 플리언스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암살하려 하지만, 반쿠오는 살해되었지만 플리언스는 도망칩니다. 누군가 마녀들의 말이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나 예언이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더라면, 맥베스는 자신의 행동을 재고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언의 확실성을 믿는 그의 집착은 그를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맥베스의 불안감이 더욱 깊어지자, 그는 마녀들을 다시 찾아갑니다. 마녀들은 새로운 애매한 확신을 제공합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자는 그를 해칠 수 없다.”라는 말과 “"버넘 숲이 던시넌 언덕으로 움직일 때까지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러한 말은 맥베스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며, 그를 파멸로 이끄는 자만심을 심어줍니다. 누군가 숲이 인간의 위장으로 인해 움직일 수도 있다는 점이나, 제왕절개로 태어난 사람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자”로 간주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논리적 가능성을 지적했더라면, 그의 자만심은 누그러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맥베스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맥더프 가족을 몰살시키는 등 더 많은 악행을 저지르게 만듭니다. 한편 레이디 맥베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미쳐가며, 결국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목표를 위해 수단을 정당화했지만, 그들의 행위가 가져온 결과를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말콤과 맥더프가 이끄는 군대가 버넘 숲에서 나뭇가지를 잘라 위장하며 던시넌 성으로 진격하자, 숲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는 마녀들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고, 맥베스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자”는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믿음을 굳게 유지합니다. 맥더프가 자신이 제왕절개로 태어났음을 밝히자, 맥베스는 마침내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습니다. 마녀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은 그의 행동과 의미를 성찰하지 못한 태도는 결국 맥베스가 맥더프에게 죽임을 당하게 만듭니다.
맥베스의 비극은 마녀들의 예언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도덕적 논리를 제시하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피할 수 있었던 결과입니다. 그러나 제어되지 않은 야망과 운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은 맥베스를 파멸로 몰아넣었고, 그의 길에는 파괴와 비극만이 남았습니다.
꽉 막힌 사람을 설득하려면 그가 믿는 믿음의 빈틈을 공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해봐야 이미 세 마녀를 믿고 있는데 어떻게 그 생각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방법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녀는 하느님은커녕 사람에 대한 신뢰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도 사마리아인에게 물을 청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그녀의 믿음을 조금씩 허뭅니다. 그리고 여섯 명의 남편과 살아도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참 생명의 물을 주는 분이 당신임을 알리십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다면 그녀는 귀를 더 막아버렸을 것입니다. 항상 꽉 막힌 사람은 그 사람의 믿음을 깰 아주 작은 것부터 찾아서 그 안으로 빛을 넣어주어야 합니다. 어둠의 믿음을 깰 작은 빈틈으로 들어오는 믿음의 빛으로 자신이 어둠이었음을 깨닫는다면 차차 빛을 받아들이게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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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마태 4,12-17.23-25).”
1)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라는 말은, 다음 증언에 연결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4.9.12).”
예수님은 ‘죽음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생명의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에 있는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와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생명을 받으려면, 우선 먼저 ‘내가’ 죽음의 어둠 속에 있음을 깨달아야 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그 생명을 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합한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2) 산상 설교에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2-23)” 라는 말씀이
있고, 루카복음을 보면,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 11,34-36).”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어둠을 빛으로 착각하면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 줄 알면서도,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고, 그래서 빛을 거부하고 짙은 어둠 속으로 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같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9-20).”
<어쩌면 지옥은, 가고 싶어서 가는 자들만 가는 곳일지도 모릅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해서 빛을 거부하고 어둠 속으로 가는 자들은, 자기들이 원해서 지옥으로 가는 자들입니다.
정말로 지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곳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그곳에 가는 것을 피할 수 있을 텐데, 천국보다 지옥이 더 좋다고 가는 자들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빛’에 관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천국보다 지옥이 더 좋다고 하면서 자기 발로 지옥으로 가는 자들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옥이 얼마나 끔찍하고, 얼마나 비참한 곳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지옥에서는 모든 희망이 완벽하게 사라져서, 그곳에는 오직 ‘절망’만 있다는 것,
또 스스로 지옥을 선택한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과 고집에 대한 후회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절망과 후회가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곳, 바로 그런 곳이 지옥입니다.
4) 죄는 영혼의 병입니다.
그 병을 치유하는 약은 용서뿐이고, 용서는 주님의 권한입니다.
따라서 죄에서 구원되는 길은, 회개하고, 주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죽음은 유한한 인간을 억압하는 한계입니다.
그 한계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얻는 길은, 주님을 믿고, 주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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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4,12-17.23-25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어제는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온 세상에 드러내신 주님께서, 오늘은 장성한 청년의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드러내십니다. 아기의 모습일 때에는 사람들이 그분을 찾아갔다면, 어른의 모습일 때에는 그분께서 직접 사람들을 찾아가셨다는 것이 다른 점이지요. 그런데 그런 차이점 가운데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진 게 없고 힘이 없어서 세상의 변두리로 밀려난 작고 약한 이들에게, 세상으로부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고 이방인이라고 무시당하는 이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빛을 비춰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일부러 세상에서 소위 잘나가는 이들, 부자들과 권력자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을 일부러 외면하시거나 배척하신 게 아닙니다. 그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예수님께 무관심했기에,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핍박하기까지 했기에 그분께서 주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지요. 반면 이방민족들과 교류가 잦다는 이유로 거의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갈릴래아나 요르단 건너편, 즈불룬과 납탈리 땅 주민들은 자기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이 구세주라고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이 각박한 세상살이의 어둠, 고통과 시련의 어둠 속에 앉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주님께서 비춰주신 구원의 빛을 금새 알아보았고 그 빛에 그들 신앙의 빛이 더해져 더 밝게 빛났던 것이지요.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심지어 요르단 건너편에 사는 이들까지 그 빛을 알아보게 되었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빛을 비춰주시면서 사람들에게 강조하신 것은 한 가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슈브’(שב)를 직역하면 ‘돌이키다’, ‘돌아오다’라는 뜻인데, 원래 이 그림문자는 ‘집을 무너뜨리는 모양’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곧 자신이 ‘이전에 살던 집’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에 머무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전에 살던 집’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기 전에 욕망과 고집에 휘둘려 살던 생활양식을 뜻합니다. 한편 ‘새로운 집’은 빵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뜻하지요. 따라서 제대로 회개하려면 죄를 뉘우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며 그 말씀이 나를 통해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단단한 반석 위에 내 삶의 집을 짓고 그분으로부터 보살핌과 보호를 받으며 기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당신께서 구세주이심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분의 표징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으로 따르는 이들만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분명하게 알아보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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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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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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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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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
<2025.1.6> 아침을 여는 묵상 (수 5:1~12절)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
❚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을 때, 어떤 장애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 무엇을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까?
➲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순종해야 합니다(1절).
요단 서쪽에 사는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은 요단 강물을 말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고서는 그들의 마음을 녹았고,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요단 서쪽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들은 신체가 장대하고, 힘도 강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에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지극히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약하고 연약하지만 함께하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믿고 신뢰하기에 그 어떤 상황과 현실 앞에서도 결코 무너지고, 쓰러지지 않게 됨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동안 그 어떤 대적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세상이 우리를 만만하게 대하지 않도록 영적인 권위를 갖고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비겁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을 믿음으로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순종하여,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찬양해야 합니다(2~9절).
출애굽 1세대는 애굽을 나오기 전에 할례를 받았지만,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반면 광야에서 태어난 그들의 자녀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재정립이 필요하였기에 하나님은 여호수아로 하여금 할례를 시행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이는 택한 백성이며, 언약의 백성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2~5절).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다가 죽어 간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6절).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를 행한 것은 광야 세대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백성으로 태어나게 되었음을 확증하는 의미를 지닙니다(7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행한 후에 각 처소에 머물면서 낫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신 의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한 것’(9절)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비로소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 의식과 광야에서의 불순종의 상태를 벗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새로운 세대에게 할례를 명하심으로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입증하셨습니다. 그곳의 이름을 길갈(없애다. 옮기다)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앞으로 진행 되어질 일들을 생각해 보면 상식에서 한참이나 어긋나는 행위였습니다. 과거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가 강간당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서 세겜 사람들을 속여 할례를 행하게 한 뒤에 그들을 급습하여 몰살시켰습니다(창 34장). 이스라엘이 세겜 사람들처럼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치러질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심어주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임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의 우리의 삶은 참으로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와 같은 자의 과거의 수치를 제거해 주심으로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의 역사를 만들어 가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 삶의 전부를 주님께 바치는 헌신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의 과정을 거치게 하신 후에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날마다의 삶 속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어제의 실수를 용납하시고, 오늘 새로운 삶의 여정으로 이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과 긍휼을 찬양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닫고 신뢰해야 합니다(10~12절).
이스라엘은 여리고 평야에 있는 길갈에서 진을 쳤고, 그 달 십사 일 저녁에 그곳에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10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기의 규정에 따라 가나안 땅에서 첫 번째 유월절을 지켰습니다(신 16:1). 그들은 유월절 이튿날에 가나안 땅의 소산, 즉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습니다(11절). 이 음식을 먹은 그날부터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었던 만나가 그쳤고, 이제 땅의 소산물을 먹게 되었습니다(12절). 이는 곧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달라졌지만 하나님이 백성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신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가 결코 아닙니다. 구원의 역사는 모두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실을 유월절 절기를 지키면서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라는 한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드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돌아보고, 믿음을 굳건하게 다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인도해 가시는 방법은 달라질 수 있고, 상황에 맞는 은혜를 베푸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변함없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라는 영적 정체성을 잊지 않고,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비록 지금 거친 광야를 헤매고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서 역사하심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인생을 써 내려가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수 5장 1~1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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