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처방전
이기인
파란 거미줄 외로운 침대의 손을 붙들고
나비는 가을에도 꽃의 빈혈 곁에서 헌혈을 한다
이제는 모서리에서 미끄러지는 편편한 데가 좋아
밤새 빗소리도 눕지 못하고 풀썩 일어선 자리에 앉아서
하모니카 몸통 위로 흐르는 한 쌍의 눈부신 날개처럼
정오의 눈꺼풀이 풀리고 툭 튀어나와 굴러가는 알약을
손이 닿지 않는 형광등이 파르르 내려다 본다
열었다 닫아놓은 어스름에서 다 꺼내지 못한 소란들
가끔은 오토바이를 타고 온 햇빛이 편지봉투를 부풀리고
마른 옷소매로 부스럼을 문지르다 해바라기 얼굴에서
그을리는 저녁의 처방전을 한움큼 뽑아낸다
오후의 부스럭거림은 약봉지가 찢어질 때 새어나와서
휠체어에 앉았다 종달새처럼 혼자서 놀다가
봉투에 담아놓은 해바라기 씨앗처럼 껌벅껌벅
다음 생에는 바다로 도망갈까 산으로 번질까
숨죽여 울고 있다
----애지 겨울호에서
■ 이기인 李起仁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혼자인 걸 못 견디죠》 등의 시집이 있음.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