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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시작
창 12: 1-9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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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간은 정말 봄이 오는구나... 하는 느낌 속에서 지냈습니다.
오늘은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기는 했지만, 추위는 다가오는 따뜻한 기운에 곧 기세가 꺾이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봄이 다가오면 몇 년 전에 유행했던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최민식이 주인공 현우로 등장하는 영화입니다. 음대에서 트럼펫을 전공한 그의 꿈은 교향악단의 단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번번이 실패를 하고는 합니다. 자연히 일정한 직업도 없고 자신감도 상실한 채로 시간을 보냅니다. 게다가 그를 기다려주던 여자 친구마저도 ‘이제는 기다리는 일에 지칠 대로 지쳤다’면서 결별을 선언합니다.
모든 것이 답답해가기만 하던 그에게 새로운 인생의 기회가 열린 것은 강원도 산골에 있는 한 중학교의 밴드부를 지도하기 위해서 탄광촌으로 떠나면서부터입니다.
물론 그 학교의 밴드부라는 것이 모든 면이 열악합니다. 악기며, 시설이며... 아이들의 수준이며...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단지 음악뿐이 아니라 아이들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현우 자신도 용기를 얻게 되고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영화의 여러 장면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이 있습니다.
오디션에도 떨어지고... 여자 친구도 떠나가고... 답답해진 현우가 자기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그러자 어머니는 대뜸 이렇게 대답합니다.
‘넌 지금이 처음이야, 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그러면서 깔깔거리며 웃습니다.
마치 지금 자기 아들이 어떤 형편과 처지인지를 모르는 것처럼 말이지요.
영화 속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맡은 사람은 윤여정씨였는데, 그녀의 독특한 어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 대목에서 그렇게 말할 수가 있을까요?
기껏 돈 들여서 악기 사주고... 공부시켜서 대학까지 졸업을 시켰으면 이제는 좀 자식 덕을 볼 줄 알았던 어머니의 실망이 참 컸을 텐데... 그녀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넌 지금이 처음이야...’ 이렇게 말을 하다니... 감동스럽기까지 한 대목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현우가 마치 독백처럼 내뱉던 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아마 이런 생각... 이렇게 한다는 것이 허황된 것이고 불가능한 일인 줄 알지만. 살면서 이런 맘... 이런 바램... 안 가져 본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또는 내가 직면한 모든 것에 대해서, 맘에 들지 않고 후회하는 마음이 생길 때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런 바램을 가질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듣고 ‘넌 지금이 처음이야... 뭘 다시 시작해...’ 이렇게 말해준다면 물론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도 ‘아 나에게는 아직도 가능성은 있구나... 나는 모든 것이 늦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희망은 있구나...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하면 되는구나...’ 이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가지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왜 하나님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모든 것을 버리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려 하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서 느끼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은 구지 고향을 떠나지 않았어도 웬만큼은 살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아브라함은 단신으로 야반도주를 하듯... 그렇게 고향을 떠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때에도 이미 그에는 많은 재산과 거느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구지 고향과 일가 친족들을 떠나지 않아도 그곳에서도 먹고 사는 일에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물론 그에게는 아직 그들 부부 사이에서 얻은 자식이 없다는 문제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먼저 세상을 뜬 동생 하란의 아들 롯을 데려다 기름을 통해서 어느 정도 위로가 되었을 텐데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청산하고 불쑥 고향을 등지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혹시 아브라함에게도 영화 속에서 현우가 말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이런 고민이 그에게는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먹고 사는 일에는 별 지장이 없습니다.
웬만큼 노력한다면, 자신의 일에 게으르지 않다면 먹고 사는 일은 넉넉히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오셔서 하신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제안이 상당히 파격적이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들어 볼 수 없는 매력적인 제안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이 이런 제안을 할 수가 있을까요?
아주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을 세상에 존재했던 ‘어떤 사람보다도 위대하고 대단한 인물이 되게 해 주겠다는...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이름을 온 세상에 날리게 하며...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이러한 제안을 하나님 말고서 누가 할 수 있을까요? 과연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제안하신 약속의 내용이 근사하고 대단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새로운 길을 떠났다고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브라함의 마음 가운데서 엿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에게는 새로운 삶에 대한 욕구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이런 바램이 아브라함의 마음 가운데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때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그 가운데 사람을 만드시고는 심히 좋아하셨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곧 후회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노아의 시대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은 세상에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창6:6)
사람이라는 존재라는 것들이 생각하는 것마다 악하기 때문이었지요.
하나님은 더 이상 세상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홍수로 사람을 다 쓸어 버리고는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완벽한 인간은 노아와 그의 자손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려 하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계획은 잘못된 것임이 홍수 후에 곧 드러나게 되고 맙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서 벌거벗은 채로 잠드는 이야기가 암시하는 것이 바로 이런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노아는 무지개언약을 통해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거의 새롭게 창조하신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제 세상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의도와는 어긋나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나타난 바벨탑의 이야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니까 모든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탑을 쌓는 일에 달라붙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높아지고 싶은 하나님처럼 자기들의 이름을 온 세상에 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심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탑을 쌓으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홍수에도 대비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겠지요.
하나님의 마음이 편하실 리가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사람들의 언어를 흩어 놓으시는 것으로 사람들의 시도를 좌절시키셨습니다.
그리고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아브라함이야말로 하나님의 대안(alternative)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상대하시는 정책을 바꾸신 것이지요.
이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은 보편적인 모든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기대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의 악한 행동과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시려고 홍수를 내리셨는데, 홍수 이후에도 여전한 사람들의 행동을 보시면서 이제는 인류 전체가 아니라 한 개인을 통해서 세상을 섭리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드러내기로 마음 먹은 것이지요.
이런 하나님의 생각이 아브라함이라는 한 개인을 부르시는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가진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시작할 수 있다면...’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과 갈급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가운데도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나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인가? 단지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해서 산다는 것... 이것이 삶의 전부는 아닐 거야... 이것보다는 더 소중하고 멋진 삶이 있을 거야... 만일 내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참 좋을 텐데...’ 이런 생각이 아브라함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도 있었던 생각입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이렇듯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던 때에 내가 꿈꾸던 세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다면..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나님이나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아브라함에게나 이런 생각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것이 새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생각과 고민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간에 대형할인매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하지요.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농심>이라는 라면 업계에서 가장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는 회사에서 라면 값을 올리겠다고 하니까 그 난리가 난 것입니다.
100원이라도 더 싸게 사려고... 오르기 전의 가격으로 많이 사두려고... 그랬다는 것이지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사람이 있는데 그는 오늘의 돌아가는 세상을 지켜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시(詩)가 부족하여 세계가 나날이 죽어가고 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불행과 문제는 결코 경제적인 측면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라면 값이 어느 날 갑자기 100원이 올랐다고 해서 인생이 불행해지거나 삶이 가난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지나치게 크게 생각하는 것...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오로지 잘 먹고 잘 사는 경제의 문제에 두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윌리엄은 ‘시가 부족해서...’ 진정한 삶에 대한 성찰과 고민이 부족해서,거기서부터 우리의 불행은 시작되고 있다고 지적하는 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가 훌륭하게 믿음을 지키고 자신의 삶의 여정을 잘 마쳤기 때문에, 심지어는 그가 아들을 바치라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기에... 그래서 그가 위대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미 그에게는 남다른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런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한 고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과연 삶이란 이런 것인가? 이렇게 정신없이 나만을 위해서 살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뭐 다른 길은 없을까?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할 수는 없을까? 이미 그의 나이가 일흔 다섯이어서 이제는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이제까지 자기가 살아 왔던 삶의 방식에 순응하며 살 때가 되었지만 그가 여전히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위대한 사람이고 삶을 새롭게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로써 우리는 <사순절> 세 번째 주일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가져야할 생각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보통 <사순절> 이 되면 기도도 더 많이 해야 하고 예배도 더 잘 참석을 해야 하고 사랑도 실천해야 하고 성경도 더 많이 읽어야 하고.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이 시절을 보내면서 가졌던 고민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새로운 삶에 대항 열망이 아니었을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사는 일일까? 이런 고민을 예수는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적어도 예수의 십자가라는 것은 어느 날 우연히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요한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서는 예수가 그의 본거지인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여정을 따로 다룰 정도로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미 베드로로부터 자신이 누군가에 대한 해답을 들은 예수는 그 때부터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가 선택할 길은 어떤 것인가?
그는 세 번을 거듭해서 예루살렘에 가면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고난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까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극구 반대하거나 아예 무시해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에게는 적어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가 선택하고 걸어가는 길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생각이 온전히 드러나게 된 것이 그가 짊어진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심 앞에서 자신을 온전히 포기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 이러한 삶의 결과가 골고다의 십자가를 통해서 온전히 드러나게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순절> 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의 생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자체만을 생각하면 참 힘들고 부담스럽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처럼 자기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토록 두렵고 힘든 자리에 자기를 던질 수가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를 암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웬지 이 말씀이 우리를 십자가라는 부담과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듯 하지 않습니까?
참 다행스런 것은 예수가 예수 자신이 짊어졌던 그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 우리들 저마다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짊어지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오직 그것만이 십자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예수와는 다른. 우리들만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를 부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이렇게 주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 이제까지 바라보던 것과는 다른 것을 생각하려 할 때에. 라면 값이 올랐다고 하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을 오르기 전의 가격으로 많이 사 두려는 생각이 아니라 그럴 만한 힘과 능력이 아직 내게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더 선하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을까? 이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며 살려고 힘쓰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마음먹는 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어떻겠니? 너는 이렇게 사는 것이 좋겠다...’하면서 넌지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길이 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서처럼 말이지요. 이것을 가리켜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 갈 수 없을까? 다시 시작할 수 없을까?’ 살면서 문득 문득 우리에게 일어나는 질문에 대한 좋은 해답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무겁고 부담스럽고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지만 그 십자가야 말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우리에게는 삶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이요 새로운 삶에로의 초대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렇듯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부르실 때에 ‘넌 아직도 늦지 않았어... 너는 지금이 처음이야... 나이가 많다고 해도 그것이 문제 될 것은 없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에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버리는 일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출발은 버리는 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가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일인 것이지요.
그 당시 사회에서 이런 자기가 살던 땅과 핏줄로 연결된 친족들,심지어는 부모와의 관계조차 끊어 버리는 것은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선택을 해 가지고서는 도무지 삶이 보장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먼저 버리라고 하십니다. 버려야만 비로소 새로운 것들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철저히 버렸습니다.
혹시라도 고향에 돌아 올만한 빌미를 줄 수 있는 것들은 조금도 남겨주지를 않았습니다.
집도 팔고 땅도 팔고... 모든 것을 다 처분합니다.
그리고 자기와 관계된 모든 식솔들을 다 이끌고는 길을 떠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제는 다시는 옛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겠다... 난 죽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길을 따르다가 죽을 것이지 다시는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약간의 미련도 없이... 그는 철저하게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는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만 맡기고는 그가 인도하시는 세상을 향하여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버린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 않은 일입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처럼 이제껏 살던 삶의 터전이라든지... 친족들... 심지어는 살던 집이라든지 모든 가족 관계조차도 포기해야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요구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경우처럼 만일 목숨까지라도 바치는 일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요구에 응할 수 있을까요?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요?
특별히 “우리가 살면서 부여한 우선순위를 좀 바꿀 수 있다면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하던 것을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바꿀 수 있다면 나 보다는 나를 세상에 보내시고 지금도 지켜보고 게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면” 그 때부터 우리에게는 이제껏 살아 왔던 것과는 다른 길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단지 받는 것보다는 남에게 베푸는 것이 좋다는 것을 비로소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떠난 아브라함의 삶은 참으로 고달픈 것이었습니다.
우선 도대체 그는 지금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는 낯선 환경 속에서 자기를 지켜 나가야만 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신병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그들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몸을 느끼고 확인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고단한 숨결을 가다듬으며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를 찾아와 주시고 결코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의 길을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여 주신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지금 걸어가는 길이 자신만을 위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힘들고 어려운 것도 잊고 보람으로 가득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일흔 다섯에 시작한 새로운 삶의 여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 봄이 우리에게는 다시금 삶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 갈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는 문득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실은 그때가 우리가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몸담고 살던 옛 세계를 완전히 버려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에게 ‘너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아주 작은 것부터 실천해 봅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지고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