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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차사(咸興差使)’.
요즘에도 많이 쓰이는 말이다. ‘사라진 후 오래도록 연락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다. 조선을 건국한 왕 이성계가 아들 태종(이방원)과의 갈등으로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간 후, 이성계의 마음을 돌리려고 보낸 태종의 사신을 모두 죽인 데서 유래했다. ‘차사(差使)’는 맡겨진 사신이란 뜻이다. 즉, ‘함흥차사’의 본래 의미는 ‘함흥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발탁된 사신’이란 뜻이다.
이성계가 고려 말 혼란의 시기를 극복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최고의 공을 세웠으며 동시에 정치적 동지였던 아들과 이처럼 등을 지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건국 시기부터 두 부자 사이에는 갈등 요소가 존재했다. 무엇보다 둘의 갈등을 심화시킨 사건은 정몽주의 죽음이다. 정몽주는 고려 말 신흥사대부의 핵심이었고, 이성계가 권력을 잡는 데 있어 정도전과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성계와 정도전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는 혁명의 길로 가고자 한 것과는 달리 정몽주는 고려 왕조의 테두리 내에서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이성계ㆍ정도전...혁명의 길
* 정몽주................ 개혁의 길
1392년 4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자 정몽주는 이를 반격의 기회로 삼았다.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을 움직여 정도전과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
이때 행동대장으로 나선 인물이 바로 이방원이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동태 파악을 위해 문병 온 정몽주를 만나 ‘하여가’라는 시조로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정몽주는 그 유명한 ‘단심가’로 화답하며 자신의 의지에 변함이 없음을 천명했다. 결국 이방원은 부하들을 시켜 정몽주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1392년 4월 4일의 일이다.
정몽주의 죽음을 알게 된 이성계는 크게 노했다.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마음대로 대신(大臣)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네가 감히 불효한 짓을 이렇게 하니,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악연 때문인지 조선 건국 후에도 이성계는 이방원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더러 요직에 등용하지도 않았다.
1392년 7월, 조선 건국 후 이성계의 신임을 받은 인물은 이방원이 아닌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각별한 후원 속에 조선 건국의 모든 것을 설계해 나갔다. 건국 과정에서 정도전은 재상중심주의 정치사상을 피력했는데 이것이 이방원을 크게 자극했다. “왕조 국가에서 신권이 왕권을 넘어서는 것은 절대 불가하다”는 것이 이방원의 판단이었던 것. 태조가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방원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이는 1398년 7월 이방원 주도의 1차 왕자의 난으로 이어졌다. 이방원은 최대 정적 정도전과 이복동생 방석을 처형시켰다. 사랑하는 막내아들과 최고의 심복 정도전을 잃은 태조의 마음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반면 이방원은 한순간에 권력을 쥐었다. 결국 태조는 아들과 인연을 끊기로 한다.
왕자의 난 이후 정종이 잠시 즉위했으나, 1400년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면서 이방원은 조선의 세 번째 왕(태종)에 등극한다.
태조 입장에서 왕이 된 아들 태종은 자신이 가장 믿던 사람을 죽인 정적이었다. 태조는 아들과 한 궁궐에 있어야 하는 현재 상황이 너무 싫었다. 궁궐 밖으로 나와 양주의 소요산이나 회암사(檜巖寺) 등에 머물던 태조는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기로 결심한다. 태종은 늙은 아버지가 홀로 함흥에 가 있는 상황이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됐던 모양이다. 유교 국가에서 가장 큰 덕목이 효(孝)가 아니었던가?
태종은 태조가 마음을 돌려 궁궐로 돌아올 것을 청하면서 함흥으로 사신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조는 사신을 참수함으로써 아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표시했다. 이 과정에서 나온 말이 바로 ‘함흥차사’다.
‘연려실기술’에는 태조의 ‘함흥주필(咸興駐蹕·함흥에서 머묾)’이라는 항목에서 당시의 상황을 몇 가지 사례로 전한다.
먼저 성석린(成石璘)을 사신으로 파견한 내용이다.
성석린은 태조의 옛 친구로 그가 자청해 태조의 뜻을 돌이킬 것을 다짐하므로 태종이 허락했다. 성석린이 백마를 타고 베옷 차림으로 과객같이 하고 말에서 내려 불을 피워 밥 짓는 시늉을 했더니 태조가 바라보고 내시를 시켜 가보게 했다. 석린이 “용무가 있어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말을 매고 유숙하려 한다”고 말하니, 태조가 매우 기뻐해 그를 불렀다. 석린이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진술하니, 태조는 변색해 “너도 너의 왕을 위해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 아니냐”고 했다. 석린이 “신이 만약 그래서 왔다면, 신의 자손은 반드시 눈이 멀어 장님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자 태조는 이 말을 믿었다. 이때부터 양궁(태조와 태종)은 화합했다. 하지만 하늘은 석린을 그냥 두지 않았다. 훗날 석린의 두 아들은 과연 눈이 멀게 된다. 성석린은 태종을 위해 거짓말로 태조를 설득했지만 벌을 받은 것이다.
연려실기술은 이어 박순(朴淳)이 사신으로 간 이야기를 전한다. 당시에 문안사(問安使) 중 한 사람도 돌아온 이가 없자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누가 갈 수 있는가를 물었고, 박순이 자청했다. 박순은 하인도 데려가지 않고 새끼 딸린 어미 말을 타고 함흥에 들어갔다. 그는 태조가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일부러 새끼 말을 나무에 매어놓고 어미 말만 타고 갔다. 어미 말은 새끼가 걱정됐는지 머뭇거리면서 뒤를 돌아보며 울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태조가 말이 하는 짓을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박순은 이와 같이 대답했다.
“새끼 말이 길가는 데 방해가 돼 매어놨더니, 어미 말과 새끼 말이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비록 미물이라 하더라도 지친의 정은 있는 모양입니다.”
태조는 옛 친구였던 박순을 돌려보내기 싫었다. 함흥에 머물러 있게 하면서 함께 지냈다. 하루는 태조가 박순과 더불어 장기를 두고 있었다. 마침 쥐가 그 새끼를 안고 지붕 모퉁이에서 떨어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박순이 다시 장기판을 제쳐놓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더욱 간절하게 아뢰자, 태조는 마침내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함흥차사로서 임무를 완수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로는 성석린과 박순 외에도 이성계가 깊이 신임한 승려 무학(無學)대사가 있었다. 처음 태조는 무학이 방문하자 크게 분노했다. 하지만 무학은 말할 때마다 태종의 단점을 이야기하면서 태조의 신임을 얻게 된다.
“방원이 진실로 죄가 있으나 전하께서 사랑한 아들은 이미 다 죽고 다만 이 사람이 남아 있을 뿐이니, 만약 이 아들마저 끊어버리면 전하가 평생 애써 이룬 대업을 장차 누구에게 맡기려고 하십니까.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차라리 내 혈속에게 주는 것이 좋습니다.”
이처럼 무학의 집요한 설득에 태조는 마음을 움직였고 마침내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돌아오자 태종은 교외에 나가 친히 맞이하면서 큰 장막을 설치했다. 이때 태종의 참모 하륜은 “태조의 노여움이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차일(遮日)에 받치는 높은 기둥에 큰 나무를 써야 할 것”이라 건의했다.
태조는 태종을 만나는 순간 그동안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몰래 가져갔던 화살을 힘껏 당겼다. 태종이 급하게 차일 기둥에 의지했고, 화살은 그 기둥에 맞았다. 하륜의 예감이 적중한 것이다. 결국 태조는 응어리진 분노를 풀고 이 모든 것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함흥차사’에 대한 기록은 정사인 실록에는 전하지 않고, 야사의 내용을 연려실기술에서 정리한 것이 지금껏 전해진다. 연려실기술의 기록 또한 한 가지 이야기가 아닌 서로 다른 버전의 이야기가 여러 가지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분명한 사실은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후계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자간 갈등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는 점이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_____매경 이코노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