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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a wonderful world
밤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진 찬가: What a wonderful world
루이 암스트롱의 명곡 "What a Wonderful World-왓 어 원더풀 월드"에 담긴 유대적 세계관
오늘은 우리 모두의 귓가에 너무나 익숙하여 자칫 그 깊이를 놓치기 쉬운 한 편의 노래, 그리고 그 노래 속에 도도히 흐르는 거대한 영적 줄기인 '유대적 세계관(Jewish Worldview)'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967년,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의 그 허스키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세상에 첫선을 보인 노래, 바로 (What a Wonderful World: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노래를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에 듣는 평화롭고 달콤한 레코드판 소리로 기억하곤 합니다. 푸른 나무, 붉은 장미, 그리고 아기들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진 동화 같은 풍경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 노래가 태어난 시대적 배경을 한 번 돌이켜 보겠습니다.
1967년은 결코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미시시피와 알라바마의 거리에는 인종차별에 분노하는 흑인들의 피와 눈물이 흘러넘쳤고, 포격 소리와 고엽제 연기로 가득 찬 베트남의 정글에서는 수많은 청년들이 스러져가고 있었습니다. 냉전의 서늘한 공포가 온 지구를 감싸고 있었고, 암살과 폭력, 절망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암흑과 분열의 한가운데서 "참 아름다운 세상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어쩌면 지독한 현실 도피이거나 철없는 낙관론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당시 미국의 음반 제작사 사장은 이 노래가 너무 느리고 시대착오적이라는 이유로 홍보를 거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결코 가벼운 낙관주의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 노래는 절망의 한복판에서 절망을 찢고 들어오는 고도의 영적 투쟁이자, 어둠 속에서 빛을 선언하는 유대적 신앙의 정수입니다.
왜냐하면 이 노래를 만들어낸 창작자들—작사가 조지 데이비드 바이스(George David Weiss)와 작곡가 밥 시엘(Bob Thiele)—은 모두 유대인 이민자 가문의 후손이었으며, 그들의 뼈와 살 속에는 세기를 넘어 이어져 온 유대적 영성과 수난의 역사, 그리고 '티쿤 올람(Tikkun Olam, 세상의 복원)'을 향한 열망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른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은 뉴올리언스의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신을 거두어 준 유대인 이민자 가문 카노프스키(Karnofsky) 집안의 사랑을 먹고 자라 평생 목에 '다윗의 별'을 걸고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이 단순하고도 위대한 노래의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을 유대 신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라는 거울에 비추어 깊이 있게 살펴보려 합니다. 이 노래가 어떻게 창세기의 창조 고백과 잇닿아 있는지, 어떻게 탈무드의 이웃 사랑으로 확장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미래 세대를 향한 '레도르 바도르(L'Dor V'Dor)'의 소망으로 승화되는지 그 영적 여정을 시작하려 합니다.
<What a wonderful world> 기사
I see trees of green, red roses too
초록 나무에 빨간 장미를 보았네
I see them bloom for me and you
나와 너를 위해 피어나는 모습이여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나는 생각하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I see skies of blue and clouds of white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보았네
The bright blessed day, the dark sacred night
밝고 은혜로운 낮과 어둡고 거룩한 밤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나는 생각하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The colors of the rainbow so pretty in the sky
하늘 위의 아름다운 무지개가
Are also on the faces of people going by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피었네
I see friends shaking hands saying how do you do
친구끼리 악수하며 '잘 지내느냐' 묻는 걸 봤네
They're really saying, 'I love you.'
하지만 진실은 '너를 사랑한다'는 뜻이지
I hear babies cry, and I watched them grow
아기들이 우는 것을 듣고, 자라가는 것을 봤네
They'll learn much more than I'll ever know
그들은 내 평생의 앎보다 더 많은 걸 배울 테지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나는 생각하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Yes,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그래, 나는 생각하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창조의 아침과 "키 토브(כִּי טוֹב, Ki Tov)" – 신성한 세계의 발견
"I see trees of green, red roses too / I see them bloom for me and you"
(푸른 나무들과 붉은 장미가 보여요 / 나와 당신을 위해 피어나는 모습을 봅니다)
이 노래는 눈앞에 펼쳐진 푸른 나무와 붉은 장미를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지극히 평범한 자연의 풍경입니다. 그러나 유대적 관점에서 '보는 행위(Seeing)'는 단순한 광학적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의 비가시적인 거룩함을 알아보는 '영적 통찰(Spiritual Insight)'입니다.
히브리 성경의 첫 장인 창세기(Bereshit)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는 장엄한 서사가 펼쳐집니다. 빛이 생기고, 하늘과 땅이 갈라지고, 식물과 동물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매 창조의 순간마다 반복되는 거룩한 리프레인(Refrain)이 있습니다.
"바야르 엘로힘 키 토브(וַיַּרְא אֱלֹהִים כִּי־טוֹב, Vayar Elohim Ki Tov)"
"하나님이 그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4)
여기서 히브리어 토브(טוֹב, Tov)'은 단순히 외형이 예쁘다거나 기능적으로 훌륭하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내면 깊은 곳에 내재된 거룩함과 질서, 그리고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세계는 우연히 발생한 물질의 덩어리가 아니라, 거룩한 뜻에 의해 존재하게 된 축복의 터전이라는 선언입니다.
유대교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는 그의 저서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게 되는 첫 번째 단계를 '자연과 창조물에 대한 경탄'이라고 말했습니다. 광대한 우주와 정교한 생명 생태계를 바라볼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거룩한 창조주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노래 속 작사가가 푸른 나무와 붉은 장미를 바라볼 때, 그는 단지 아름다운 풍경을 관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창세기 1장의 '키 토브(Ki Tov)'의 눈을 되찾은 것입니다. 폭력과 전쟁으로 오염된 인간 사회의 표면 아래에 여전히 숨쉬고 있는 '창조 본연의 선함'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 노래는 "나와 당신을 위해 피어난다(bloom for me and you)"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나와 당신'은 분리된 개인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내려주신 생명의 선물을 함께 공유하는 '연대적 존재'입니다. 유대적 생태 영성인 'שְׁמִירַת הָאֲדָמָה, 쉬미랏 하아다마(지구를 지킴)'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은 인간이 수탈하고 착취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거룩한 정원이자 공동의 유산입니다.
장미가 피어나는 것을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 유대적 영성은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카도쉬(קָדוֹשׁ, Kadosh, 거룩함)를 포착해 냅니다. 히브리 전통에서는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모데 아니(מוֹדֶה אֲנִי, Modeh Ani,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내 안에 영혼을 다시 놓아주신 살아계신 왕이시여, 당신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
이 노래의 첫 구절은 바로 이 '모데 아니'의 현대적 축가입니다. 비록 세상이 온통 어둠으로 덮여 있을지라도, 오늘 아침 다시 피어난 붉은 장미 한 송이 속에서 창조주의 '키 토브'을 읽어내는 눈, 그것이 바로 유대적 신앙이 세상을 향해 건네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시공간의 거룩함 – "빛나는 낮과 신성한 밤"
"I see skies of blue and clouds of white / The bright blessed day, the dark sacred night"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보입니다 / 축복받은 밝은 낮과 신성한 어두운 밤)
이어지는 구절에서 노래는 시선을 하늘로 올립니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이어서 대단히 깊은 신학적 모순어법(Oxymoron)이 등장합니다. 바로 "축복받은 밝은 낮(bright blessed day)"과 "신성한 어두운 밤(dark sacred night)"이라는 표현입니다.
낮이 축복받았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빛은 생명을 주고, 온기를 가져다주며, 명확함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래는 낮뿐만 아니라 '어두운 밤' 역시 '신성하다(sacred)'고 선언합니다. 낮과 밤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 안에 있다는 이 고백은 유대 신학의 가장 깊은 정수를 관통합니다.
이분법적 세계관이나 영지주의적 사상에서는 빛은 선하고 어둠은 악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유일신론(Monotheistic Covenant)은 어둠조차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며, 어둠 속에도 신성한 의미가 은폐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사야서 45장 7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만들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이니라."
유대인들에게 '밤'은 단순한 태양의 부재가 아닙니다. 밤은 역사 속에서 유대 민족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난과 방황, 디아스포라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유대 전통에서 하루의 시작은 아침이 아닌 '저녁'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둠은 빛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빛이 탄생하기 위한 '거룩한 임신과 태동의 시간'입니다.
유대 신비주의 사상인 카발라(Kabbalah)에서는 이를 '찜쭘(Tzimtzum, 하나님의 자진 축소)'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가 존재할 공간을 만들기 위해 당신의 빛을 거두어들이시고 여백(어둠)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둠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피조물이 존재할 수 있도록 자신을 숨기신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의 흔적입니다.
그렇기에 작사가가 노래한 "신성한 어두운 밤(dark sacred night)"은 절망의 한가운데서 고통을 견뎌내고 있는 모든 이들을 향한 깊은 위로입니다.
우리가 지독한 슬픔과 고통의 밤을 지나갈 때에도, 그 밤은 버려진 시간이 아니요, 우리를 파멸시키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 밤은 하나님의 거룩한 품 안에서 내면이 숙성되는 시간이며, 새벽의 빛을 맞이하기 위해 영혼이 기도하는 '신성한 성소(Sacred Sanctuary)'입니다. 낮의 축복과 밤의 신성함을 동시에 고백하는 이 구절이야말로, 고난 속에서도 삶의 존엄성을 잃지 않았던 유대적 영성의 찬란한 고백인 것입니다.
사회적 자비와 관계성 – "손을 잡는 친구들과 샬롬(Shalom)"
"The colors of the rainbow, so pretty in the sky / Are also on the faces of people going by“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 색깔이 참 예쁩니다 /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그 빛이 있습니다)
"I see friends shaking hands, saying 'How do you do?' / They're really saying 'I love you'"
(서로 손을 잡으며 '잘 지내죠?' 인사하는 친구들이 보여요 / 사실은 '사랑해요(헤세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이제 노래의 시선은 자연과 하늘에서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사회적 지평'으로 이동합니다.
첫 문장에서 하늘의 무지개 색깔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인쇄되어 있다는 표현은 경탄을 자아냅니다. 무지개가 무엇입니까? 히브리 성경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무지개(Keshet)는 하나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영원한 평화의 언약(Covenant of Peace)'의 증표입니다. 다시는 인류를 폭력과 심판으로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거룩한 약속입니다.
노래는 그 무지개의 빛깔이 멀리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인종과 민족, 사람들의 얼굴 위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고 고백합니다.
유대 전통 미드라시(Midrash)에는 다음과 같은 유익하고 깊은 질문이 던져집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아담 한 사람만을 먼저 만드셨는가?"
미드라시는 세 가지 이유를 듭니다. 첫째, 그 누구도 "우리 조상이 당신 조상보다 위대하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요, 둘째,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과 같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며, 셋째, 왕의 도장은 같은 모양을 찍어내지만 하나님은 아담이라는 하나의 도장으로 수억 명의 각기 다른 얼굴을 찍어내셨으니 그 다양성이 창조주의 위대함이라는 것입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길거리를 지나가는 모든 인간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형상인 '쩰렘 엘로힘(Tzelem Elohim)'과 무지개의 언약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을 보십시오. 친구들이 손을 잡고 인사합니다. "How do you do?"(잘 지내시죠?) 그러나 노래는 그 평범한 안부 인사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영혼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They're really saying 'I love you'"(그들은 사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서로를 만날 때 나누는 인사가 무엇입니까? 바로 "샬롬(שָׁלוֹם, Shalom)"입니다.
우리는 보통 '샬롬'을 단순히 '평화(Peace)'로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샬롬'의 본래 의미는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샬롬'은 어원적으로 '샬렘(שָׁלֵם, Shalem)', 즉 '온전함, 결핍이 없는 상태, 관계의 완벽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유대 윤리학의 위대한 스승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그의 명저 『나와 너(I and Thou)』에서 인간의 삶은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타인을 단순히 이용 가치가 있는 '그것(It)'으로 대할 때 세상은 비극과 폭력으로 물들지만, 타인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며 진정한 '너(Thou)'로 마주할 때, 그 관계의 사이에 하나님께서 현재(Present)하신다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나누는 소박한 악수, "잘 지내시죠?"라는 스쳐 지나가는 안부 인사 속에 숨겨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의 온전함을 원합니다"라는 마음의 고백. 이것이야말로 삭막한 문명 사회 속에서 이웃 사랑(Ahavat Yisrael / Ahavat HaRe'a)을 실천하고, 인간의 불완전함을 타인과의 따뜻한 관계를 통해 채워나가는 유대적 커뮤니티의 거룩한 연대인 것입니다.
역사적 기억과 희망 – "카노프스키 가문과 나팔 소리"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잠시 이 노래를 불렀던 인물, 루이 암스트롱의 개인적 삶에 투영된 유대적 서사를 깊이 있게 생각해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노래 가사 바깥에 존재하는, 그러나 가사보다 더 강력한 역사적 입증입니다.
루이 암스트롱은 1901년 뉴올리언스의 '제인 골목(Jane Alley)'이라는 극심한 가난과 범죄가 들끓는 거친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가정을 버렸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아야 했습니다. 어린 루이는 굶주림과 매질, 인종차별의 폭력 속에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어린 루이에게 손을 내밀어 준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 이민자 가문, 카노프스키(Karnofsky) 가족이었습니다. 그들 역시 차가운 타향에서 차별과 가난에 시달리는 이민자 신세였지만, 길거리에서 고물을 수집하던 어린 흑인 소년 루이를 불쌍히 여겨 자신들의 집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카노프스키 집안의 어머니는 루이에게 따뜻한 음식을 먹였고, 밤마다 유대인 전통 자장가를 불러주었습니다. 그들은 어린 루이에게 일을 주고 정당한 임금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루이가 낡은 악기점 창문에 놓인 5달러짜리 중고 코넷(Cornet, 트럼펫의 일종)을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할 때, 흔쾌히 거금을 선금으로 빌려주어 그가 인생의 첫 악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 5달러짜리 중고 코넷이 없었다면, 오늘날 재즈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루이 암스트롱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루이 암스트롱은 훗날 그의 자서전과 수필 『뉴올리언스에서의 나의 유대인 가족(My Karnofsky Family in New Orleans)』에서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는 유대인 가족이 어떻게 불의와 차별 속에서도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부지런히 살아가는지를 곁에서 똑똑히 보았다. 그들은 나에게 사람을 사랑하는 법과 삶의 존엄성을 가르쳐 주었다."
루이 암스트롱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유대인의 상징인 '다윗의 별(Magen David)' 목걸이를 가슴에 걸고 연주했습니다. 흑인 영가와 재즈를 연주하던 그의 트럼펫 소리는, 구약 성경에서 고난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선언하던 '쇼파르(Shofar)'의 현대적 울림이었습니다.
유대 전통에서 쇼파르는 고난과 회개, 그리고 최종적인 구원과 자유를 선언하는 거룩한 악기입니다. 로쉬 하샤나와 욤 키푸르에 울려 퍼지는 쇼파르 소리는 잠들어 있는 영혼을 깨우고,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가 임했음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루이 암스트롱의 그 거칠고 깊은 목소리로 "What a Wonderful World"가 울려 퍼질 때, 그 목소리는 단순한 가수의 노래가 아닙니다. 흑인과 유대인이라는, 역사상 가장 지독한 수난과 차별을 경험했던 두 민족의 영혼이 만나 합창하는 '구원과 희망의 쇼파르 소리'인 것입니다. 고통을 아는 자만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다는 역설이 이 노래 전체에 깊게 깔려 있습니다.
대대로 이어지는 언약 – "레도르 바도르(L'Dor V'Dor)"
"I hear babies cry, I watch them grow / They'll learn much more than I'll ever know“
(아기들의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그 아이들이 자라는 걸 바라봅니다 / 그 아이들은 내가 알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울 것입니다)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그리고 나는 혼자 속삭입니다, 참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이제 노래는 마지막 장에 도달합니다.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넘어, 수직적인 세대와 세대의 연결, 즉 미래를 향한 시선으로 확장됩니다.
노래는 갓 태어난 아기들의 울음소리(Babies cry)를 듣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아기의 울음소리는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소리이자,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유대교에서 어린아이와 교육은 신앙 공동체의 생존을 결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유대인들이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드리는 가장 중요한 기도문인 '쉐마 이스라엘(Shema Yisrael, 신명기 6장)'을 보십시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나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유대교는 성전을 잃고 땅을 빼앗겼을 때에도 소멸되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과 학교(Bet Sefer)'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던 수용소의 극악한 환경 속에서도, 유대인 스승들은 비밀리에 아이들을 모아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을 가르쳤습니다. 아이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아이를 교육한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신앙 고백입니다.
히브리어로 이 개념을 "레도르 바도르(L'Dor V'Dor, 대대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라고 부릅니다.
가사를 다시 보십시오. "They'll learn much more than I'll ever know"(아이들은 내가 알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 구절에는 기성세대의 겸손함과 동시에 다음 세대를 향한 위대한 유산의 전수가 담겨 있습니다. 나보다 더 지혜롭고, 나보다 더 정의로우며, 나보다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아이들에 대한 완전한 신뢰입니다.
탈무드 타아니트(Taanit) 편에는 유명한 '호니와 캐롭 나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온 길을 걸어가던 현자 호니가 한 노인이 열매를 맺으려면 70년이 걸리는 캐롭 나무를 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호니가 물었습니다. "노인장, 당신이 70년을 더 살아 이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겠소?" 그러자 노인이 웃으며 답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내 할아버지가 심어놓은 캐롭 나무 열매가 무성하여 내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나 역시 내 자손들을 위해 이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가사 속의 고백은 바로 이 캐롭 나무를 심는 노인의 마음입니다. 지금 당장 내 눈앞의 세상은 전쟁과 분열로 얼룩져 있고, 내 시대에는 완전한 평화가 오지 않을지라도, 내가 오늘 사랑으로 기른 이 아이들이 자라나 내가 알지 못했던 더 깊은 지혜를 깨닫고 마침내 세상을 완벽하게 복원할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그렇기에 마지막 구절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그리고 나는 혼자 속삭입니다, 참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는 한탄이나 자조가 아니라, 미래의 완성을 소망하며 오늘을 견뎌내는 숭고한 믿음의 주문이 되는 것입니다.
티쿤 올람(תִּיקּוּן עוֹלָם) – 세상을 복원하는 인간의 사명
이제 우리는 이 노래의 가장 깊은 신학적 결론이자, 유대 사상이 인류에게 던지는 위대한 과제인 '티쿤 올람(Tikkun Olam)'에 도달했습니다.
카발라 사상가 이쯔학 루리아(Isaac Luria)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거룩한 빛을 담기 위해 그릇들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빛의 에너지가 너무나 강렬했던 나머지 그 그릇들이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버렸습니다. 이를 '셰비랏 하켈림(שְׁבִירַת הַכֵּלִים, Shevirat HaKelim, 그릇들의 파쇄)'이라고 부릅니다.
그 결과 거룩한 빛의 파편(Sparks of Holiness)들이 온 세상 구석구석, 가장 어두운 곳과 고통스러운 장소로 흩어져 불결한 껍질(קְלִיפּוֹת, 클리포트)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며 명하셨습니다. 세상에 흩어진 그 거룩한 빛의 파편들을 찾아내어 깨어진 그릇을 다시 조립하고 세상을 원래의 완성된 상태로 복원하라! 그것이 바로 '티쿤 올람(תִּיקּוּן עוֹלָם: Repairing the World, 세상의 수리/복원)'입니다.
이 사상에 따르면, 이 세상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어진 완성품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깨어져 있고, 상처 입어 있으며, 곳곳에 불의와 눈물이 도사리고 있는 '미완성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세상을 불완전하게 남겨두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완성해 나가는 '창조의 동역자(Co-creators)'가 되는 특권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세상이 이미 완벽하니 가만히 앉아서 즐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노래는 폭력과 미움으로 깨어진 세상의 껍질을 뚫고 들어가, 그 속에 갇혀 있는 하나님의 빛의 파편—푸른 나무, 붉은 장미, 친구들의 악수, 아기들의 울음소리—을 끄집어내는 영적 작업을 말합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비탄에 빠져 있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냉소주의와 절망은 언제나 나약한 영혼들의 가장 흔한 핑계입니다. 그러나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장미 한 송이의 신비에 눈물 흘리고, 미움이 지배하는 거리에서 이웃의 손을 잡으며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진실된 신앙적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노래를 쓴 유대인 작곡가들과 노래를 부른 루이 암스트롱은 절망을 몰라서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어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대로 방치하면 세상이 완전히 어둠 속에 삼켜질 것을 알았기에, 믿음으로 아름다움을 선언함으로써 세상을 치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수천 년 동안 성전이 파괴되고, 유럽의 가스실에서 번제물처럼 사라져 가면서도 유월절마다 모여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לְשָׁנָה הַבָּאָה בִּירוּשָׁלַיִם, 레샤나 하바아 비루살라임(내년에는 예루샬라임에서!)"
현실은 비참한 지하실 단칸방일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이미 온전하게 복원될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피눈물로 써 내려간 소망의 현대적 버전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서의 고백
오늘 우리는 참으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적 위기, 계층 간의 극심한 갈등, 지구 온난화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전쟁과 테러의 소식들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세상은 참 아름답다"는 노래 가사는 현실과 너무나 떨어진 허황된 소리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유대적 영성이 건네는 이 노래의 진정한 의미를 가슴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What a wonderful world"라는 고백은, 눈앞의 세상을 향해 던지는 감상적인 평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둠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영혼의 결의이자, 세상을 거룩하게 가꾸어 가겠다는 거룩한 선언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하루를 살아가시면서, 길가에 피어난 자그마한 풀꽃 하나에서 창조주의 '키 토브'을 발견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세상을 치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만나는 지치고 고단한 이웃에게 먼저 따뜻한 손을 건네며 '샬롬'의 인사를 전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깨어진 세계의 파편을 하나 붙여 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비난과 혐오 대신 사랑과 지혜, 그리고 희망의 유산을 전해줄 수 있다면, 우리는 '레도르 바도르'의 거룩한 언약의 사슬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루이 암스트롱은 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이 노래에 대해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일부 젊은이들은 나에게 묻습니다. '세상이 정말 아름답다는 건가요? 전쟁과 가난, 차별을 보세요. 그게 아름다운가요?'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문제는 세상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대하는 방식에 있다네. 우리가 서로를 조금 더 사랑하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다워질 수 있어. 내가 노래하는 건 바로 그 세상이라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찬란하게 빛납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선함과 아름다움을 향한 우리의 고백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노래하십시오. 분열의 시대에 화해와 악수를 건네십시오. 그리고 어둠의 한복판에서 담대하게 선언하십시오.
"וַיַּרְא אֱלֹהִים כִּי־טוֹב (바야르 엘로힘 키 토브) –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What a wonderful world (왓 어 원더풀 월드) –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By Torah & Juda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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