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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책이나 글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이해된다는 뜻으로, 학문을 열심히 탐구하면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讀 :읽을 독(言/15)
書 : 글 서(曰/6)
百 : 일백 백(白/1)
遍 : 두루 편(辶/9)
義 : 옳을 의(羊/7)
自 : 스스로 자(自/0)
見 : 볼 견, 뵈올 현(見/0)
좋은 책을 읽으면 옛 현인(賢人)과도 벗이 될 수 있다고 한 말이 맹자(孟子)의 독서상우(讀書尙友)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은 과거의 가장 뛰어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고 한 데카르트의 말과 똑 같다.
독서(讀書)의 유익함에 대한 성어는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책을 많이 갖고 있는 것, 밤낮으로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열심히 읽는 태도, 독서의 이득에 대한 깨우침 등등이다.
책을 펴기만 하면 졸린다고 머리카락을 매달고 넓적다리를 찔러가며 읽었다는 현두자고(懸頭刺股) 못지않게 수도 없이 반복하면 뜻을 알 수 있다는 이 성어도 유명하다.
글을 여러 번 계속해서 읽으면(讀書百遍)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義自見)는 이 성어는 학문을 열심히 닦게 되면 그 뜻을 스스로 깨우쳐 알게 된다는 뜻이다.
후한(後漢) 말기 위(魏)나라에 동우(董遇)라는 학자가 있었다. 겨울과 밤과 비 올 때를 가리키며 책 읽기에 좋은 세 가지의 여유 있는 시간이란 뜻의 삼여독서(三餘讀書) 고사의 주인공이다.
빈한(貧寒)한 집에서 태어났어도 배우기를 좋아하여 조용히 농사 지으면서 책을 읽었다. 뜻을 알 수 없는 책도 읽고 또 읽어 결국 문리(文理)를 터득했고 문장(文章)도 탁월했다.
소문이 나자 벼슬자리에 나아가 헌제(獻帝)의 글공부 상대가 되었고, 위(魏)나라 명제(明帝) 때에는 시중(侍中) 자리까지 올랐다. 고위직에 오른 뒤에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노자(老子)와 좌전(左傳)의 주석서를 만들어 문명을 떨쳤다.
人有從學者, 遇不肯敎而云.
인유종학자, 우불긍교이운.
必當先讀百遍, 言讀書百遍其義自見.
필당선독백편, 언독서백편기의자현.
동우의 명성이 높아지자 많은 사람이 그에게 글을 배우겠다고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선뜻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마땅히 먼저 백 번을 읽어야 한다.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왕숙전(王肅傳)의 위략(魏略)을 인용한 배송지(裵松之) 주(注)에 나온다.(▶삼여독서(三餘讀書) 참조)
후에 주자(朱子)도 훈학재규(訓學齋規)에서 동우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책은 다만 읽는 것이 귀한 것이다. 많이 읽으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동우도 독서백편의자현이라고 말했다.’
書只貴讀. 讀多自然曉. 董遇云, 讀書百遍義自見.
서지귀독. 독다자연효. 동우운, 독서백편의자현.
책을 읽다가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가면 반복해서 읽어라. 독서백편의자현이란 말처럼, 자꾸 읽다 보면 저절로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意自見)
책이나 글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이해된다는 뜻으로, 학문을 열심히 탐구하면 뜻한 바를 이룰수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책이나 글을 백번 읽으면 의의, 곧 그 글이 담고 있는 속뜻이 저절로 이해된다는 말로, 삼국지 위서(魏書) 13권(卷) 종요화흠왕랑전(種繇華歆王朗傳)에 배송지(裵松之)가 주(注)로 덧붙인 동우(董遇)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여기서 백번이란 그 뜻을 알 수 있을 때까지 되풀이해서 읽는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로써 이 말은 무엇이든 끈기를 가지고 노력하면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동우(董遇)는 후한(後漢) 말기 헌제(獻帝) 때부터 삼국시대 위(魏)의 명제(明帝) 조예(曹叡) 때까지 활동했던 학자로서 자(字)는 계직(季直)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달리 학문을 좋아하여 늘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니며 독서에 힘을 쏟았다. 그는 노자(老子)나 좌전(左傳)에 주(注)를 달았는데, 특히 좌전에 대한 그의 주석(註釋)은 널리 알려져 당(唐) 시대까지 폭넓게 읽혔다고 한다.
그가 좌전에 주석을 써 넣을 때에 붉은 빛깔의 주묵(朱墨)을 사용했는데, 이 때부터 주묵이라는 말이 어떤 글에 대한 주(注)나 가필(加筆), 첨삭(添削)을 뜻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후한(後漢) 헌제(獻帝) 때인 건안(建安) 초년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되었으며 헌제(獻帝)에게 시강(侍講)을 하여 신임을 받았다. 위(魏) 명제(明帝) 때에는 시중(侍中)과 대사농(大司農)의 벼슬에 이르렀다.
학문에 대한 동우(董遇)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에게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각지에서 몰려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선뜻 제자로 받아 들이려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배움을 청(請)하자 그는 “마땅히 먼저 백번을 읽어야 한다. 책을 백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며 사양했다.
必當先讀百遍 讀書百遍其義自見.
필당선독백편 독서백편기의자현.
그 사람이 “책 읽을 겨를이 없다(苦渴無日)”며 다시 가르침을 청(請)하자, 동우는 “세 가지 여가만 있으면 책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當以三餘)”고 답했다.
옆에서 듣던 사람이 삼여(三餘), 곧 세 가지 여가가 무엇인가를 묻자, 그는 “겨울(冬)은 한 해의 여가이고, 밤(夜)은 하루의 여가이고, 오랫동안 계속해 내리는 비(雨)는 한 때의 여가”라고 대답했다.
冬者歲之餘, 夜者日之餘, 陰雨者時之餘也.
동자세지여, 야자일지여, 음우자시지여야.
독서백편의자현은 한자로 쓸 때 원문과 달리 의(義)와 현(見) 자를 뜻 의(意)와 나타날 현(現) 자로 바꾸어 쓰는 경우가 많다. 의(義) 자가 옳을 의, 현(見)자가 볼 견 자로만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義) 자는 옳을 의 만이 아니라 뜻 의(意) 자로도 쓰이며, 어떤 글이나 말이 지니는 속뜻을 가리킨다.
그리고 현(見) 자는 '보다'의 의미를 지닐 때에는 '견'으로 읽지만 '뵈다, 나타나다'의 뜻을 지닐 때에는 '현'으로 읽으며, 고문(古文)에서는 현(現) 자를 대신해 '나타나다'의 뜻으로 널리 쓰였다.
맹자(孟子)의 이루하(離婁下)에 좌우봉원(左右逢源)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자신의 좌우, 곧 가까이에 있는 것을 취해 그 근원까지 파악한다는 뜻으로, 가까이에 있는 사물이 학문의 근원이 되거나 또는 모든 일이 순조로워짐을 뜻하는 말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맹자가 말하였다. ‘군자가 올바른 도리로 깊이 탐구하는 것은 스스로 그 도리를 얻고자 해서이다. 스스로 얻게 되면, 일에 대처하는 것이 편안하게 된다. 일에 대처함이 편안하게 되면, 그 일에서 얻는 것 역시 깊이가 있게 된다. 그 일에서 얻은 것이 깊이가 있게 되면, 자신의 좌우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취해 그 근원까지 알게 된다(資之深 卽取之左右逢其原). 그런 까닭에 군자는 스스로 얻고자 하는 것이다.’
맹자가 학문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 대목이다. 곧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으로 하되, 가까이에 있는 것부터 깊이 연구해 그 근원까지 탐구해야 한다는 것을 간곡하게 이른 것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차근차근 깊이 연구하다 보면 자연히 그 핵심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원(原)은 원(源)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좌우봉원(左右逢源)은 곧 가까이 있는 것을 취해 쓰면서 그 근원과 만난다는 말이므로, 모든 일이 순조롭다는 뜻으로 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어려운 글이라도 계속 반복해서 읽다 보면 저절로 그 뜻을 알게 된다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나 글의 속뜻까지도 훤히 안다는 철지배(徹紙背)와도 일맥상통한다.
기적의 독서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한 권의 책을 백번 읽으면 그 뜻이 통하게 된다. 비슷한 말로 독서백편의자통(讀書百遍義自通)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알지 못하는 책을 백번을 읽으면 뜻이 통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것일까? 아무래도 억지스러워 보인다.
중국 후한(後漢) 말기 사람인 동우(董遇)는 글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게서 배우기보다는 집에서 자네 혼자 읽고 또 읽어 보게, 그러면 저절로 뜻을 알게 될 것이네.”라고 하면서 가르침을 거절했다고 한다. 같은 글을 백 번을 반복하게 되면 그 의미가 저절로 통하게 된다는 것이 요지다.
고대와 근대의 교육습득 방법
조선시대 교육 방식은 무식할 정도록 단순하고 간단했다. 그 방법은 한 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 것이다. 읽을 때는 눈으로만 읽지 않고 입과 귀로 읽는다. 낭독을 통한 독서법이 그것이다.
서당을 생각해보자. 훈장님이 앞에 앉아 계시고 천자문을 날마다 소리내어 읽도록 가르친다. 아이들은 모두 앉아서 소리내어 천자문을 읽기 시작한다. 한 목소리로 소리내어 말이다.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루 황...’이런 식으로 말이다.
비록 초급에 해당되는 공부법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낭독 독서는 고대 그리스와 헤브라이즘과 라틴사상의 기초과정에 속한다. 그리스 이후 철학사를 집대성하고 기독교 철학을 완성한 어거스틴은 그의 스승인 암브로스가 소리내지 않고 묵독으로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만큼 낭독 독서법은 보편화 되어 있었고 누구나 그렇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낭독 독서법은 현대에 와서 소외되고 구시대적 교육법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유는 근대화 되면서 속도의 개념으로 학습에 대한 이해가 변화 되었기 때문이다. 속도와 양을 중요시하는 근대 교육에서 낭독은 느리고 시끄럽고 효율적이지 못했다. 효율과 양이 곧 질이라는 이해가 팽배했기 때문에 한 권의 책을 백번 읽는 것이 아니고 백권의 책을 읽는 것을 선호했다.
이러한 학습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자 공부도 효율적이고 양적인 것을 절대화 시키며 본질적인 부분들을 소외 시키는 방식으로 진행 되었다. 그러한 결과가 바로 공교육이며 잡학식 커리큐럼을 지향하는 근대적 교육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이다.
벤덤의 절대 다수의 절대 행복은 영 다른 개념이 아니라 옅은 행복을 모두에게 이다. 공부도 그렇다. 잡다한 지식을 모두에게 이다. 둘은 함께 생각하고 함께 통하게 된 것이다.
낭독의 가진 의미
(1) 뇌는 소리를 좋아한다
먼저, 뇌를 생각해 보자. 뇌는 소리를 좋아한다. 정말일까? 그니다 뇌는 소리를 좋아한다. 언어 학자들은 아이들이 어떻게 언어를 습득하는가를 연구해 왔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는데 말하기 전에 먼저 듣기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사가 아닌 명사로부터 시작하며 명사와 명사가 만나고, 후에 명사와 동사가 만나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정리해 보자. 아이는 처음 누군가로부터 소리를 듣는다. 태중에서도 보이기 전에 먼저 듣기가 시작되며, 반복되는 것에 주의를 끌게 된다.
태중 아이에게 태명으로 '길동아!'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모르지만 그것이 반복되어 자신을 부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은 영혼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쁜 의미인지 좋은 의미인지를 금새 알아 차린다.
특히 아직 엄마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의 느낌이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의 느낌을 그대로 받아 사랑하는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좋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들음으로 자신을 스스로 정리해 나간다. 이곳에서 소리와 반복의 문제가 거론된다.
칵테일파티 현상이란 심리학적 용어가 있다. 이것은 시끄러운 파티장에서도 엄마는 자신의 아이가 우는 소리를 알아 챈다는 것이다. 시끄러워서 도저히 알아 들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엄마는 우는 아이가 다른 아이인지 다른 사람의 아이인지를 알아낸다. 물론 100%는 아니다.
어쨋든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칵테일 파티현상이 말하는 것은 사람은 저마다 자신에게 강한 영향을 주는 소리가 있으며, 모든 소리가 동일한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일까? 답은 간단하다. 자신을 좋아해 주고, 사랑해 주고, 인정해 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부정적으로는 자신을 욕하거나 비판하는 소리를 잘 듣는다. 즉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있는 소리를 잘 듣게된다. 이것은 소리뿐만 아니라 동작이나 이미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책을 보면 이것을 잘 알 수 있다.
어쨌든 뇌는 소리를 좋아하고 잘 인식한다. 예를 들어 볼까? 우리가 전화번호를 몰라 114에 전화 했다고 하자. 만약 메모지가 없다면 들려준 전화번호를 입으로 계속 되뇌이며 기억하려 한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입으로 중얼거리면 훨씬 잘 외워 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하지만 뇌는 소리를 잘 기억하고 특히 행동으로 나타내면 더욱 잘 기억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전에 두명의 피터슨이라는 분이 단기기적이 어떻게 쉽게 망각되는가를 실험했다. 숫자를 보여주면서 기억하도록 했다. 그러자 불과 20-30초가 지나가 거의다 잊어 버렸다. 그러나 시언을 한 아이 즉 입으로 중얼거린 아이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했다고 한다. 소리는 눈으로만 하는 교육보다 훨씬 더 높은 기억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소리를 통해 독서하는 것은 눈으로 읽는 독서보다 훨씬 더 기억에 남는 것이며, 눈과 입, 귀가 함께 공부하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
(2) 몸으로 익히는 공부
낭독의 힘은 몸으로 익힌다는 것에서 배가의 효과를 가져다 준다. 독서는 분명 정보를 담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독서를 단편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근대 이후 독서의 의미가 달라지면서 독서를 정보를 습득하는 수단으로만 이해한 오류이다.
독서는 자기 수양이며, 그것은 정신으로만이 아닌 몸으로서의 수양을 함께 담는 것이다. 독서는 정보가 아닌 가기 수양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낭독은 마음과 정신 그리고 눈과 입이 함께 어우러진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덱거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그 사람의 존재를 드러내 준다. 그러나 이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마음이 언어를 창조하지만, 언어는 행동을 지배한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각이 자신이 한 말에 사로 잡히게 되고 그 언어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된다.
마음과 언어는 서로 다른 별개의 것도 아니고 어느 무엇이 앞서는 것도 아니다. 마음과 언어는 서로 상호관계에 있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에 있어서 낭독의 방법을 통해 독서하게 되면 책의 내용이 입으로 고백하고 그것이 마음을 지배하여 결국 수양의 의미를 함께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할 때 조상들이 낭독법을 이용하여 탁월한 정신수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뜻이 깨달아지는 원리
(1) 몸으로 익한 교육는 정신과 영혼까지 변화시킨다.
낭독이 가진 힘을 알았으니 이제 스스로 깨달아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 유교사상의 8단계 교육단계를 보자.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濟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이다.
우리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만을 알고 있지만 유가(儒家)에서 가장 먼저 할일은 격물(格物)이다. 격물은 물질의 원리를 깨치고 의미를 파헤치는 것이다. 언어로 표현하기 전에 먼저 그 뜻과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죽(竹), 대나무를 말하려고 한다면 대나무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가지고 있어야 진정한 학문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격물은 그 물건을 대면하여 보고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면 그 뜻을 알게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곳에는 오해의 요소가 다분해 보인다.
실제로 양명학(陽明學)은 창시한 양명은 격물하기 위해 하루종일 대나무 앞에 있었으나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고 불평하여 이론이 삶이 뒤따르는 양명학을 주창하게 된다. 이것은 당시의 유가사상이 행함이 없어진 이론적인 사상이 된 때문도 있다.
거두절미하고 양명학의 시작은 공부란 이론과 삶이 분리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삶이 없는 이론이나 공부는 죽은 공부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공부가 몸으로 나타날 때 진정한 공부가 되며, 책으로 읽은 것이 삶이 될 때 모두 읽은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논어를 읽고 논어에서 가르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는 논어는 읽지 않는 것이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르지 않아야 한다. 언행일치의 의미도 바로 이곳에 있는 것이다. 안다고 하면서 앎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앎은 거짓된 것이다. 사기요 기만이며 자기 속임에 불과한 것이다. 독서백편의자현의 의미는 바로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채근담(菜根譚)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자기를 반성하는 사람은 부딪치는 일이 모두 약이 되고, 남을 원망하는 사람은 생각을 할 때마다 모두 창이 되리라. 하나는 모든 선의 길을 열고, 하나는 모든 악의 근원을 파헤치니,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니라
어려움이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남이나 환경을 탓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를 반성하며 모든 것을 넓게 생각하여 행동하라는 뜻이다. 이 글을 읽고도 계속하여 남을 탓하고 환경을 비관하여 산다면 그 사람은 채근담을 읽지 않는 것과 같다.
책의 내용으로 몸으로 살아보지 않는 사람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할 뿐더러, 진정한 앎을 가지고 있지도 못한다. 이러한 지식을 죽은 지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앎과 삶이 하나이어야 진정한 앎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 행동으로 읽힌 공부는 알지 못하는 것도 깨닫게 한다.
먼저 모방(模倣)하라.
무예에는 단계가 있다. 처음에는 기본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모방하는 것이다.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훈련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몸에 완전히 익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즉 모방이야 말로 가장 훌륭한 창조적 활동의 시작이다.
기본기를 깔보는 이들이 있지만 그건 어리석은 수치일 뿐이다. 기본기는 어느 날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백년, 수천년의 무예도인이 최고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해야 하는 것으로 정하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완전한 모방이 가능하다면 그는 이제부터 무예를 배울 기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번 송창식씨가 하루에도 수십분을 기타를 상하로 치는 장면이 나왔다. 그는 말하기를 하루라도 기타를 치지 않으면 금새 잊어 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계속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기본기는 그것이 완전히 자신과 하나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응용(應用)하라.
태권도를 배우면 처음 태극8장 하는 식의 기본기가 있고, 대련시간이 있다. 대련시간은 지금까지 배운 것으로 응용하여 싸우는 것이다. 만약 기본기에 나오지 않는 행동은 하지 못하도록 한다. 기분기를 통해 몸에 완전히 익은 다음은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어떻게 기본기를 배워서 실전에서 응용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기본기 안에 싸움의 기술을 모두 담고 있다. 다만 기본기는 사이사이 끊어져 있다. 태극 1장이 다르고 태극8장이 다른 것이다. 고려와 금강 또한 다른 기본기이다.
무도에서는 이렇게 분리된 행동들을 단권(單券)이라고 말한다. 단권 단권 나누어진 것들을 몇개 합한 것이 소위 말하는 기(技)라고 말한다. 중국의 십팔기(十八技)라는 것이 이것에 속하며, 태권도의 고려나 금강의 기본기들도 이에 속한다.
기본을 완전히 몸에 익히고 단권들을 몸에 완전히 익혔다면, 몸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동작으로 나타나게 된다. 몸은 알아서 다른 동작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내용을 보면 한동작 한동작이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무예를 어느 정도 한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의 연속동작으로 시연해 낼 수 있다고 한다. 단권들을 따라해 보면 몸에 익은 동작들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점이 선으로 변화되어 하나의 긴 연속동작이 되는 것이다.
좀더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보자.
자전거 타기를 예로 들어보자. 학교에서 자전거 타는 방법을 책으로 공부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실제로 자전거를 타지는 못한다. 아직 몸으로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으로 하는 공부와 몸으로 익히는 공부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많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낭독함으로 책의 내용이 마음에도 영향을 끼치지만 몸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아직 책의 내용대로 살아가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입술의 고백을 통해 자신을 더욱 강화시키며 행동으로 나타내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독서를 이야기 하면서 이곳까지 오는 것이 무리이기는 하지만, 좀더 풍부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예로 든 것이다. 그러면 독서로 넘어가 보자.
잘 알지 못하는 다른 두개의 단어와 문장이 점처럼 이어진다고 생각해 보자. 처음 읽을 때는 몸에 완전히 익지 않았으므로 낯설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수십번, 수백번을 읽으면 전혀 달라 보이는 두 단어와 문장들이 이어져서 하나의 의미로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독서백편의자현의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예전에 서울대에 수석 합격한 어떤 분의 수기를 읽어보니 공부한 방법이 정말 간단했다. 구두닦이를 하면서 참고서 살만한 돈도 시간도 없었던 그는 이해하지 못한 곳이 나오면 읽고 또 읽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자연스럽게 그 뜻이 이해가 되고 자신도 모르게 입에 붙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복 독서법은 세종대왕(世宗大王)의 공부법이기도 하다. 세종대왕은 책을 다독하기로 유명하지만 당시의 다독가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그럼에도 세종대왕이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것은 바로 반복 읽기였다.
세종대왕은 한권의 책을 들면 그 뜻이 완전히 이해가 되고 입에 붙도록 수십번에서 수백번을 반복하여 읽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의미가 깨우쳐지고 습관적으로 입에서 흘러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독서법으로 인해 세종대왕은 언어학에서 조선의 제일가는 학자가 되었다. 한글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세종의 끊임없는 반복적 공부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때까지 파헤치는 집념에서 나온 것이다.
위대한 바보
흔히 바보라고 하면 조롱의 대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바보는 조롱과 비아냥거림의 대상이라기보다 바보스러움과 우직함으로 교훈적일 뿐 아니라 존경심까지 우러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더러는 자신을 낮춰 바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그랬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다. 이번에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조선 중기의 김득신(金得臣)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까 한다. 독서백편의자현이란 책이나 글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이해된다는 뜻이다.
학문을 열심히 탐구하면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 노력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독서백편의자현이 바로 그런 경우를 나타낸다. 이 말은 당(唐)나라 시대의 두보(杜甫)가 쓴 시(詩)에 나온다.
두보는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흔히 시성(詩聖)이라고 불린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시를 잘 지어 시성으로 명성을 누렸는데, 과거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과거시험은 공무원이 되는 시험이다. 옛날에는 과거시험에 합격해 공무원이 되는 것이 최고였다.
두보는 평생 방랑을 하다 결국 59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시는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두보가 만약 과거시험에 붙었다면 시인으로서는 크게 이름을 떨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연일까. 김득신(金得臣)은 59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59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한 김득신
김득신은 두보처럼 소년 시절부터 시를 참 잘 지었다고 한다. 두보가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반면 김득신은 과거시험에 합격을 했다. 그런데 김득신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나이가 상상을 초월한다. 자그마치 59세에 비로소 과거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30대까지 과거시험에 응시하다 계속 떨어지면 포기를 하는데 김득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 포기란 없었다. 도전하고 또 도전해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합격을 했다. 인간 승리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는 과거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과거시험을 때려치우라는 비아냥거림과 조롱을 들어야 했다. 이렇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은 자포자기하기 쉽다. 예전에는 사람의 수명이 60세도 넘기기 어려웠는데, 죽는 날이 다가오는데도 과거시험에만 매달렸으니 어쩌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득신은 결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다. 생전에는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죽어서는 끈기의 아이콘이자 집념의 화신으로 회자되었다. 김득신이 끝까지 과거시험을 포기하지 않고 합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평소 아들이 총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책을 읽어도 이내 이해를 잘 못하기 일쑤였다. 아들이 비범하지 못하고 평범한 아이들보다 어리석은 듯이 보였다.
그는 아들을 노둔하다고 표현했다. 한마디로 어리석고 우매하다는 것이다. 아이가 똑똑하고 총기가 있기를 바라는 게 모든 부모의 한결같은 소망인데 소년 김득신은 그렇지 못했다. 과거시험에 번번이 낙방하자 아버지는 보다 못해 아들에게 하나의 지침을 내렸다. “예순 살까지는 과거에 응해보라”
이 말을 들은 김득신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 같아 아버지가 밉기도 했다. “아, 나는 왜 이리 머리가 나쁜 걸까. 외워도 외워도 돌아서면 까먹다니….”
때로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책을 펼쳤다. “그래, 끝까지 해보는 거야. 아버지 말씀처럼 예순 살까지 과거시험을 보지 뭐. 밑져봐야 본전 아니겠어.”
김득신은 아버지의 지침을 늘 마음속에 되새기며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과거시험 공부에 전념했다. 김득신은 점점 끈기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아무리 주변에서 비아냥거리고 멸시해도 끄덕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책을 읽고 또 읽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반복하며 읽었다. 그러다가 몇 번 반복해서 읽었는지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 횟수를 보면서 자신이 놀라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자신감이 불끈불끈 생겼다. “그래, 나만큼 책을 반복해서 읽은 사람이 있다면 나와보라지!”
그런데 과거시험에는 번번이 낙방을 했다. 요즘 말로 하면 김득신은 시험 울렁증이 있었던 것이다. 과거시험장에서 시험관이 문제지를 거는 순간 김득신은 너무나 긴장한 탓에 외우고 있던 내용조차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럴수록 김득신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책의 내용을 전부 외울 때까지 반복해서 읽었다. 얼마나 읽었는지는 그가 직접 쓴 독수기(讀數記)에 나온다. 독수기란 책을 몇 번 읽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그는 1634년부터 67세인 1670년에 이르기까지 36년 동안 고문을 읽으며 1만 번 이상 읽은 36편의 이름과 횟수를 기록했다.
- 백이전은 1억1만3000번
- 노자전, 분왕, 벽력금, 주책, 능허대기, 의금장, 보망장은 각각 2만 번
- 제책, 귀신장, 목가산기, 제구양문, 중용서는 1만8000번
- 송설존의서, 송원수재서, 백리해장은 1만5000번
- 제약어문은 1만4000번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백이전(伯夷傳)은 무려 1억1만3000번을 읽었다. 오늘날로 보면 기네스북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이해된다
김득신이 가장 좋아한 작가는 중국의 한유였다. 그가 1만 번 이상 읽은 36편 가운데 한유의 책이 20편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는 사마천, 유종원, 소식, 유향, 소순 등의 순이다. 시인답게 사서삼경보다 문장가의 글을 많이 읽은 게 특징이다.
김득신은 독수기에 “만약 훗날 나의 자손들이 나의 독수기를 보면, 내가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또한 “나는 태생이 노둔해서 다른 사람보다 배나 읽었으니 (…) 그중에서 백이전을 가장 좋아해서 일억 일만 삼천 번이나 읽고는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 지었다.” 그가 남긴 문집인 종남총지(終南叢志)에 나오는 말이다.
그의 말처럼 김득신은 노둔(어리석고 둔함)한 자신을 알고 스스로 애써서 공부를 한 것이다. 과거시험을 볼 때도 자신의 문장력이 모자람을 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집요하게 반복해서 읽은 것이다.
김득신의 독서 열정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글자가 생겨난 이후로 상하 수천 년과 종횡 3만 리를 통틀어 독서에 부지런하고 뛰어난 이로는 당연히 백곡(柏谷; 김득신의 호)을 제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칭찬했다.
김득신은 죽기 1년 전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애써서 터득한 사람이다. 결국에는 성공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으니 뜻과 소원을 다 이루었다.”
김득신은 후대에 조선시대의 8대 문장가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높은 벼슬은 하지 못했지만 시를 416수를 남기고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김득신은 ‘노력하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주기에 충분한 인물이 아닐까.
▶ 讀(읽을 독, 구절 두)은 형성문자로 読(독)의 본자(本字), 读(독)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賣(매, 독)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讀(독, 두)은 ①읽다 ②이해하다 ③세다 ④계산하다 ⑤구절(句節) ⑥읽기 그리고 ⓐ구절(두) ⓑ구두(읽기 편하게 구절에 점을 찍는 일)(두) ⓒ이두(두) ⓓ풍류의 이름(두)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지도나 도면을 보고 그 내용을 해독함을 독도(讀圖), 책을 그 내용과 뜻을 헤아리거나 이해하면서 읽는 것을 독서(讀書), 글을 읽은 횟수를 독수(讀數), 책을 읽고 난 뒤의 소감을 독후감(讀後感), 얼굴의 표정이나 근육에 나타나는 미세한 운동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사념을 알아내는 법술을 독심술(讀心術), 책을 읽도록 따로 차려 놓은 방을 독서실(讀書室), 경문을 소리 내어 읽음을 독경(讀經), 통속적으로 읽도록 쓴 글이나 책을 독물(讀物), 글을 읽는 법을 독법(讀法), 글을 읽어서 익히기 위한 책을 독본(讀本), 글을 읽어서 익힘을 독습(讀習), 책이나 신문 잡지 따위의 출판물을 읽는 사람을 독자(讀者), 축문이나 제문을 읽음을 독축(讀祝), 글을 막힘없이 죽 내려 읽음을 독파(讀破), 그림을 관상하며 음미함을 독화(讀畫), 읽어서 욈을 독송(讀誦), 글을 읽는 소리를 독음(讀音), 글을 읽어서 이해함을 독해(讀解), 책을 읽느라 양을 잃어 버렸다는 독서망양(讀書亡羊), 글 읽기를 백 번 한다는 독서백편(讀書百遍), 아무 생각 없이 오직 책읽기에만 골몰하고 있는 상태를 독서삼매(讀書三昧), 독서를 하기에 적당한 세 여가를 독서삼여(讀書三餘), 책을 읽음으로써 옛 현인과 벗함을 독서상우(讀書尙友), 다섯 대의 수레에 가득히 실을 만큼 많은 책을 읽음을 독오거서(讀五車書), 만 권의 책을 막힘없이 읽는다는 독파만권(讀破萬卷) 등에 쓰인다.
▶ 書(글 서)는 회의문자로 书(서)는 간자(簡字)이다. 성인의 말씀(曰)을 붓(聿)으로 적은 것이라는 뜻이 합(合)하여 글을 뜻한다. 그래서 書(서)는 성(姓)의 하나로 ①글, 글씨 ②글자 ③문장(文章) ④기록(記錄) ⑤서류 ⑥편지(便紙) ⑦장부(帳簿) ⑧쓰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책 책(冊), 글월 문(文), 글 장(章), 문서 적(籍)이다. 용례로는 책 또는 경서와 사기를 서사(書史), 편지를 서신(書信), 글 가운데를 서중(書中), 남이 하는 말이나 읽는 글을 들으면서 그대로 옮겨 씀을 서취(書取), 책을 넣는 상자 또는 편지를 넣는 통을 서함(書函), 글씨를 아주 잘 쓰는 사람을 서가(書家), 글방을 서당(書堂), 글씨와 그림을 서도(書圖), 책의 이름을 서명(書名), 대서나 필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을 서사(書士), 글자를 써 넣음을 서전(書塡), 책을 보관하여 두는 곳을 서고(書庫), 남편의 낮은 말서방(書房), 책을 팔거나 사는 가게서점(書店), 이름난 사람의 글씨나 명필을 모아 꾸민 책을 서첩(書帖), 글씨 쓰는 법을 서법(書法), 유학을 닦는 사람을 서생(書生), 글방에서 글을 배우는 아이를 서동(書童), 글씨와 그림을 서화(書畫), 문서를 맡아보거나 단체나 회의 등에서 기록을 맡아보는 사람을 서기(書記), 글씨 쓰는 법을 배우는 일을 서도(書道), 책 내용에 대한 평을 서평(書評), 글자로 기록한 문서를 서류(書類), 책을 갖추어 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방을 서재(書齋), 문자의 체제를 서체(書體), 책은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다는 서불차인(書不借人), 편지로 전하는 소식이 오고 간다는 서신왕래(書信往來) 등에 쓰인다.
▶ 百(일백 백, 힘쓸 맥)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동시에 음(音)을 나타내는 흰 백(白; 희다, 밝다)部와 一(일)의 뜻을 합(合)하여 일백을 뜻한다. 그래서 百(백)은 열의 열 곱절. 아흔 아홉에 하나를 더한 수(數). 일백(一百) 등의 뜻으로 ①일백(一百) ②백 번 ③여러, 모두, 모든 ④온갖 ⑤백 배 하다 그리고 ⓐ힘쓰다(맥) ⓑ노력하다(맥)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백 번째의 대 또는 오래 이어 내려오는 여러 세대를 백대(百代), 백 갑절을 백배(百倍), 여러 가지의 일이나 온갖 일을 백사(百事), 백 대의 수레를 백승(百乘),백 사람이나 갖가지로 다른 많은 사람을 백인(百人), 어떤 수를 백으로 나눔을 백분(百分), 언제든지 이김을 백승(百勝), 여러 가지로 많이 나옴을 백출(百出), 많은 가족 또는 여러 가지 변명을 백구(百口), 일반 국민을 백성(百姓), 여러 학자들이나 작가들을 백자(百子), 높고 낮은 모든 벼슬아치를 백관(百官), 온갖 과일을 백과(百果), 온갖 방법이나 갖은 방법을 백방(百方), 모든 것 또는 여러 가지를 백반(百般), 여러 사람이 서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일을 백가쟁명(百家爭鳴), 몇 백년 후까지도 마멸 되지 않고 남음을 백고불마(百古不磨), 오래 전부터 가깝게 지내오는 일가 사이의 친분을 백대지친(百代之親), 여러 가지 좋은 맛으로 만든 음식을 백미음식(百味飮食), 모든 일이 다 실패됨 또는 아무 일도 아니 됨을 백사불성(百事不成), 모든 일이 뜻대로 됨을 백사여의(百事如意), 해롭기만 하고 하나도 이로울 것이 없음을 백해무익(百害無益), 후세까지 오래도록 모든 사람의 스승으로 숭앙되는 덕과 학문이 높은 사람이라는 백세지사(百世之師) 등에 쓰인다.
▶ 遍(두루 편)은 형성문자로 徧(편)과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책받침(辶=辵; 쉬엄쉬엄 가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덮는다는 뜻을 가진 扁(편)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遍(편)은 남김없이 두루 미치다의 뜻으로 ①두루 ②모든, 전면적인 ③번, 횟수(回數) ④두루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⑤두루 퍼지다 ⑥널리 퍼져 있다 ⑦널리 ~하다 ⑧보편적으로 ~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곳 저곳을 돌아다님을 편력(遍歷), 널리 돌아다님을 편답(遍踏), 한 편만을 편벽되게 믿음을 편신(遍身), 온 세계를 편계(遍界), 두루 봄을 편관(遍觀), 두루 퍼져 있음을 편재(遍在), 두루 나누어 줌을 편급(遍給), 교화를 두루 미치게 함을 편수(遍垂), 여러 곳으로 두루 돌아 다니며 놂을 편유(遍遊), 널리 말함이나 빠짐없이 말함을 편담(遍談), 두루 읽음을 편독(遍讀), 널리 참아나 꽉 참을 편만(遍滿), 온 산에 두루 퍼짐을 편산(遍山), 곳곳에 널리 흩어져 있음을 편산(遍散), 두루 해침을 편해(遍害) 등에 쓰인다.
▶ 義(옳을 의)는 회의문자이나 형성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나(我)의 마음 씀을 양(羊)처럼 착하고 의리있게 가진다는 뜻을 합(合)하여 옳다를 뜻한다. 羊(양)은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양으로 양을 바쳐 신에게 비는 의식(儀式)이 나중에 바르다, 의로운 일의 뜻이 되었다. 그래서 義(의)는 (1)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떳떳하고 정당(正當)한 도리(道理). 오상(五常)의 하나임 (2)남과 골육(骨肉)과 같은 관계를 맺음 (3)글이나 글자의 뜻, 의미 (4)경서의 뜻을 해석시키던, 과거(科擧)를 보일 때의 문제 종류의 한 가지 등의 뜻으로 ①옳다, 의롭다 ②바르다 ③선량하다, 착하다 ④순응하다 ⑤맺다 ⑥해 넣다 ⑦섞다, 혼합하다 ⑧간사하다(마음이 바르지 않다), 옳지 않다 ⑨의(義), 정의(正義), 올바른 도리(道理) ⑩의리(義理), 우의(友誼) ⑪뜻, 의미(意味), 의의(意義) ⑫거둥(擧動: 임금의 나들이), 예절(禮節), 의식(儀式) ⑬정의에 합당한 행동, 의로운 일 ⑭명분(名分) ⑮법도(法道) ⑯용모(容貌), 행동거지(行動擧止: 몸을 움직여 하는 모든 짓) ⑰의로 맺은 친족 관계, 의리(義理)의 관계 ⑱공적인 것, 공익을 위한 것 ⑲인공적인 것 ⑳가짜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의로운 사람을 의인(義人), 義로 맺은 형제를 의형제(義兄弟),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을 의무(義務), 정의를 위하여 거사함을 의거(義擧), 수양 아버지를 의부(義父), 의기에 불타 일어나는 용맹을 의기지용(義氣之勇),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당연함 의리당연(義理當然), 義가 있는 사람은 어버이를 거역하지 않음을 의불배친(義不背親), 義로써 利의 근본을 삼음을 의이건리(義以建利), 義는 바다와 같고 은혜는 산과 같다는 의해은산(義海恩山) 등에 쓰인다.
▶ 自(저절로 자)는 상형문자로 사람의 코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코를 말한다. 사람은 코를 가리켜 자기를 나타내므로 스스로란 뜻으로 삼고 또 혼자서 ~로부터 따위의 뜻으로도 쓴다. 나중에 코의 뜻에는 鼻(비)란 글자가 생겼다. 그래서 自(자)는 어떤 명사(名詞) 앞에 쓰이어 ~부터, ~에서(~서)와 같은 뜻을 나타내는 한자어. 시간(時間)이나 공간(空間)에 관한 낱말 앞에 쓰임 등의 뜻으로 ①스스로, 몸소, 자기(自己) ②저절로, 자연히 ③~서부터 ④써 ⑤진실로 ⑥본연(本然) ⑦처음, 시초(始初) ⑧출처(出處) ⑨코(비(鼻)의 고자(古字)) ⑩말미암다, ~부터 하다 ⑪좇다, 따르다 ⑫인하다(어떤 사실로 말미암다) ⑬사용하다, 쓰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몸 기(己), 몸 신(身),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를 타(他)이다. 용례로는 남의 보호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하여 행함을 자주(自主), 어떤 일을 스스로 자기의 임무로 맡는 것을 자임(自任), 자기의 능력이나 가치를 확신함을 자신(自信), 손수 짓거나 만든 작품을 자작(自作), 자기 스스로의 힘을 자력(自力), 스스로 자기의 감정과 욕심을 억누름을 자제(自制), 스스로 움직임을 자동(自動), 자기 힘으로 자기를 도움을 자조(自助), 남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어려움을 타파하여 더 나은 환경을 만드는 일을 자력갱생(自力更生), 같은 패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을 자중지란(自中之亂), 처음부터 끝까지 이르는 동안 또는 그 사실을 자초지종(自初至終), 자기의 언행이 전후 모순되어 일치하지 않음을 자가당착(自家撞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한다는 자문자답(自問自答),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인다 라는 자기기인(自欺欺人), 자기의 줄로 자기를 묶다는 자승자박(自繩自縛) 등에 쓰인다.
▶ 見(나타날 현, 볼 견)은 회의문자로 见(견)은 간자(簡字)이다. 안석궤(几; 책상)部는 사람을, 目(목)은 눈을 뜻한다. 見(견)은 눈의 기능으로, 보는 일을 말하는데, 이쪽으로 부터 보는 것을 視(시), 저쪽으로 부터 나타나 보이는 것을 見(견)으로 나누어 썼다. 그래서 見(견, 현)은 ①보다 ②보이다 ③당하다 ④견해(見解) 그리고 ⓐ뵙다(현) ⓑ나타나다(현) ⓒ드러나다(현) ⓓ보이다(현) ⓔ소개하다(현) ⓕ만나다(현) ⓖ현재(현) ⓗ지금(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타날 현(現), 볼 시(視), 뵐 근(覲), 볼 관(觀), 뵐 알(謁), 나타날 현(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숨을 은(隱)이다. 용례로는 보고서 깨달아 앎을 견해(見解), 듣거나 보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을 견문(見聞), 남에게 거절을 당함을 견각(見却), 실지로 보고 학식을 넓힘을 견학(見學), 남의 일을 보고 배워서 실지로 연습하는 것을 견습(見習), 사물을 관찰하는 입장을 견지(見地), 남에게 미움을 받음을 견오(見忤), 얼른 스쳐 봄을 별견(瞥見), 분실이나 유실을 당함을 견실(見失), 책망을 당함을 견책(見責),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견금여석(見金如石), 눈앞에 이익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 모기를 보고 칼을 뺀다는 견문발검(見蚊拔劍),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 항상 잊지 않음을 이르는 견요어장(見堯於墻),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견물생심(見物生心),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 몸을 바친다는 견위치명(見危致命) 등에 쓰인다.
첫댓글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은 '슬로리딩'과 유태인의 '하브루타'와 도 비슷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