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이를 알리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요한 12,23)하시면서,
당신의 때가 왔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대체 어떤 힘이 이 ‘밀알’을 죽음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묘하게도 죽음으로 밀어붙이는 그 힘은 ‘생명력’입니다.
생명의 힘이야말로 ‘밀알’을 죽게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죽을 수 있는 힘’, 그것은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입니다.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이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밀알’이 땅에 떨어져야 하고,
죽어 묻혀야 하고, 묻혀 사라져 자신이 없어져야 하고,
그러고서야 비로소 생명의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죽음의 고통은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곧 죽음의 고통은 자기를 벗게 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요,
새 생명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요한 12,25)
여기에서 셈족의 언어 관습에서 '미워하다'라는 단어는
'사랑하다'라는 말과 관련하여 쓰여서 '덜 사랑하다',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다'라는 의미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대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당위성을 말해줍니다.
곧 땅에서의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바로 참된 실재를 보존하는 길이며,
미래에 대한 신뢰와 의탁,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방이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요한 12,26)
이는 ‘섬긴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의 긴밀한 연관성을 말해줍니다.
누군가가 따른다고 말하면서 따르는 그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따름이 아닐 것입니다.
또 섬긴다고 말하면서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진정한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
곧 따라 나서서 그분을 섬길 때라야 진정 따르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의 성소의 길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분을 섬기지 않고 여전히 ‘따라 나선 자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집과 가족을 떠나는 왔지만
‘떠나온 자기’를 아직 떠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요한 12,23)고 알립니다.
그리고 ‘당신을 섬기는 사람은 당신을 영광스럽게 할
그 죽음의 길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죽음의 길에 함께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형제를 존중하게 하소서!
형제를 섬김으로 당신을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