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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국사삼환(國師三喚)
- 국사가 세 번 부르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한 존재한 알 모래에서 우주를 보라
집착하는 마음도 내 마음 그대로 보는 것도 내 마음
선입견이나 집착을 버리고 여러 면 보면 분쟁 사라져
혜충(慧忠) 국사(國師)가 시자(侍者)를 세 번 부르자, 시자는 세 번 대답했다. 그러자 국사는 말했다. “내가 너를 등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고 보니 네가 나를 등지고 있었구나!”
무문관(無門關) 17칙 / 국사삼환(國師三喚)
* (풀이) 스승이 제자를 등진다는 것은 제자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방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제자가 스승을 등진다는 것은 제자가 이미 깨달음에 이르렀지만 마치 배울 것이 있는 것처럼 스승 곁에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1. 생멸문도 진여문도 모두 한 마음
불교는 ‘집착’에서 벗어나 세상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합니다.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걸 벗어던지고 보는 것, 이것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진여(眞如)나 여여(如如)란 경지를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극단적으로 두 가지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집착하는 마음’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 물론 평범한 우리는 이 극단적인 마음 사이에서 그네를 타는 것처럼 왔다갔다하는 삶을 살고 있지요. ‘집착하는 마음’이 우리의 삶에 불만족과 고통을 가져다준다면,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은 우리의 삶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줄 겁니다. 집착하는 마음도 내 마음이고,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도 내 마음입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하나 뿐인 우리 마음[一心]’에 두 가지 양태, 즉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이 있다고 이야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외모에 집착하는 여자가 있다고 해보세요.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에 무언가 잔뜩 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녀는 하루 종일 우울해지고 심지어는 타인에게 히스테리적인 반응도 보이게 될 겁니다. 반대로 아침에 자신의 얼굴 피부가 너무 탱탱하고 뽀송뽀송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그녀는 자신감에 가득 차서 평상시와는 달리 타인들에게 너그럽게 될 겁니다. 이처럼 우울함과 명랑함이 파도가 치는 것처럼 생겼다가 사라지는 마음이 바로 생멸(生滅)의 마음인 겁니다. 그렇다면 진여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외모에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마음, 심지어는 더러운 외모를 당당히 과시하고 다니는 마음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진여(眞如)의 마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더러운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마음은 그저 무관심한 마음이자 죽은 마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마음도 문제지만, 외모 자체를 완전히 무시하는 마음도 문제입니다. 왜냐고요. 외모는 내가 타인과 만나는 첫 단계이기 때문이지요. 타인과 처음 만날 때, 외모에 신경을 안 쓰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외모에 대한 무시는 타인에 대한 무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하긴 상대방이 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가급적 깔끔한 외모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물론 상대방은 이런 단정한 모습에서 우리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를 확인하며 뿌듯한 행복감에 젖을 겁니다. 사실 ‘외모가 무엇이 중요해!’라는 마음 자체가 이미 외모에 집착하는 자신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왜,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나요. 자신이 외모에 쿨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과도하게 옷을 볼품없이 입고 다니는 사람들 말입니다.
2. 하나의 특징으로만 보는 것이 집착
외모에 과도하게 신경을 쓰는 것이나 외모에 지나치게 무관심한 것이나, 모두 외모에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세상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진여의 마음은 어떻게 외모를 볼까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봅니다. 무슨 말인지 당황스럽다면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여기 어떤 여성 한 명이 있다고 해보지요. 그녀에게는 시크한 외모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 이외에 그녀가 갖고 있는 특징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녀는 김수영 시인의 시를 좋아합니다. 그녀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좋아합니다. 그녀는 김치찌개를 좋아합니다. 그녀는 산보다는 바다를 좋아합니다. 그녀는 일본어를 능통하게 합니다. 그녀는 탱고를 좋아합니다. 그녀는 책을 만드는 편집자입니다. 그녀는 자전거 타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녀는 홀어머니와 남동생 한 명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등등.
이제 집착이 무엇인지 보이시나요. 그것은 외모만 보느라고 다른 모든 가치들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아니 정확히 외모에 집착하느라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나 타인은 하나의 잣대로만 평가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관계망을 통해 존재하는 인연(因緣)의 존재니까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 즉 진여의 마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상대방도 의식하지 못한 그의 모든 가치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니까요. 외모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가진 나머지 훌륭한 가치들을 돌보지 않기 쉽고, 당연히 그것들은 무관심에 방치된 채 시들고 마침내 우리 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외모 때문에 자전거도 타지 않고, 바다에 가지도 않고, 슈베르트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례를 생각해볼 수 있네요. 한때 자전거를 타며 해맑게 웃던 모습, 바다의 장엄한 풍경에 감동하던 모습, 그리고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에 삶의 허무를 느끼던 모습은 이제 천천히 사라지게 된 운명인 셈이지요.
사실 진여의 마음을 갖게 되면, 우리는 쓸데없는 갈등과 대립도 피할 수 있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식민지라는 역사적 경험과 정치경제적 갈등 때문인지, 우리는 일본 사람이라면 몹시 싫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일본이란 국적에만 집착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요. 와타나베라는 일본 남자가 있다고 해보지요. 그냥 우리는 이 사람을 만나자마자 반감을 가지기 쉽습니다. 일본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말입니다. 그렇지만 집착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와타나베를 보면, 우리 눈에는 와타나베라는 사람의 정체가 제대로 들어오게 됩니다. 나처럼 그는 베토벤을 좋아합니다. 나처럼 그는 산책을 좋아합니다. 나처럼 그는 전쟁과 억압을 미워합니다. 나처럼 그는 사랑에 소극적인 사람입니다. 심지어 나처럼 그는 식민지를 지배했던 일본 과거사를 미워합니다. 자, 이런 모든 그의 특징들이 있는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를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3. 작은 티끌 속에 전체가 들어있다
집착(執着, abhiniveśa)이 작동하는 내적 논리가 눈에 환히 들어옵니다. 나나 타인이나 모두 단순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우주에 가까운 수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런 특징들을 수많은 인연들과의 마주침에 의해 만들어진 것, 즉 연기(緣起, pratityasamutpada)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들이지요.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하나의 특징으로 하나의 사물을 보는 것이 집착의 마음, 즉 생멸의 마음이라면, 그렇지 않고 하나의 사물을 마치 완전한 하나의 우주인 것처럼 보는 것이 바로 진여의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화엄종의 대표자 법장(法藏, 643~712)이 ‘화엄의해백문(華嚴義海百門)’이란 책에서 “하나의 조그마한 티끌만 보아도 전체가 갑자기 나타나며, 이것과 저것은 서로 받아들이니 가느다란 머리카락 하나만 보아도 모든 사물이 함께 나타난다”고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이제 마침내 ‘무문관(無門關)’의 열일곱 번째 관문에서 펼쳐지는 사제 간의 아름다운 풍경을 음미할 차례가 된 것 같습니다.
혜충(慧忠, ?~775) 스님은 선사(禪師)임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황제가 제자를 자처할 정도로 명망이 높아 국사(國師)라고 불렸습니다. 아마도 황제를 포함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빛을 전하려고 했지만, 자기와 그렇게도 오랜 시간 함께 있었던 시자(侍者) 스님에게는 무관심했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합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이야기가 맞기는 맞는가 봅니다. 그래서 혜충 스님은 자신을 아주 오랜 동안 보필하던 시자 스님을 부릅니다. “애야!” 그러자 시자 스님은 대답합니다. “예!” 이어서 혜충 스님은 또 부릅니다. “애야!” 이번에도 시자 스님은 “예!”라고 대답합니다. 곧이어 혜충 스님은 “애야!”라고 부르자, 이번에도 여지없이 시자 스님은 대답합니다.
“예!” 바로 이 순간이 혜충 스님의 우려가 봄눈 녹듯이 사라지는 순간, 즉 등잔 밑이 환하게 밝아지는 순간입니다. 혜충 스님에게는 다행인 일입니다. 시자 스님은 어느 사이엔가 깨달음에 이르러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혜충 스님은 이야기했던 겁니다. “내가 너를 등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고 보니 네가 나를 등지고 있었구나!”
스승이 제자를 등진다는 것은 제자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방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제자가 스승을 등진다는 것은 제자가 이미 깨달음에 이르렀지만 마치 배울 것이 있는 것처럼 스승 곁에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제자는 스승을 스승이라고 집착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승으로 있는 그대로 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제자의 눈에는 혜충이 가진 모든 특징들이 환히 보였던 셈이지요. 비오는 날 차를 좋아하는 것, 장이 안 좋은지 자꾸 방귀를 끼는 것, 푹 익힌 채소를 좋아하는 것 등등. 한 마디로 시자 스님은 혜충 스님을 스승이라고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앞에 있는 저 늙은 스님의 한 가지 특징에 불과한 것이 바로 ‘선생’이란 지위였으니까요. 이렇게 진여의 마음을 얻었는데도, 그는 스승 앞에서 제자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늙어가는 스승에 대한 자비의 마음일 수도 있고, 혹은 다른 곳에서 주지(住持)가 되어 제자를 키우는 것이 성가신 일이라는 초탈한 마음 때문일지도 있습니다. 그나저나 혜충 스님은 늙기는 늙었나 봅니다. 세 번이나 물어본 뒤에 간신히 시자 스님이 이미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노파심(老婆心)의 화신, 혜충 스님. 귀여운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