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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의 꿈을 향한 시적 순례
이 재 훈
(시인, 문학 평론가)
우리들은 모두 새로운 세계, 즉 위무와 피안의 신생을 꿈꾼다. 그 꿈은 현실세계의 각박함에서 나오기도 하며 또 다른 구원에의 욕망 때문에 나오기도 한다. 배태의 기원이 어떠하든간에 유토피아를 향한 인간의 고투는 숙명과 같은 것이다. 시에서는 새로운 유토피아의 욕망이 종종 담론 체계 속에서 규명되곤 하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유토피아에 이르고자 하는 시적 도정이다. 또한 그 지난한 길을 함께 동행하는 시적 자아의 태도가 의미 있을 것이다. 이민화의 시집은 지금, 현재 이곳의 삶을 투영해 신생(新生)의 꿈을 꾼다. 그것은 긍정적인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을 담보하지 않은 유토피아는 허망한 수사가 되기 쉬우며, 자신의 세계 속에 갇힌 선문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민화는 유토피아의 욕망을 ‘꽃놀이 가자’는 말로 집약하고 있다. 自序는 한 편의 시로 읽어도 무방할 만큼 자신의 시적 지향점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꽃놀이 가자
공해 낀 도시를 떠나
방대한 우주가 내리는 선사시대
널따란 감나무 잎들이 이마를 마주 대고
우거진 숲엔 생물이 구름을 물고 노는
그곳으로 꽃놀이 가자
선들바람이 자연스레 흘러들어
자잘하게 부슨 햇빛을
살강에 따닥따닥 붙인 집
두건을 두른 시냇물이 아리랑을 부르고
산그늘이 학춤을 넉살스럽게 추는
가난하지만 사랑이 충만한
나의 땅으로 꽃놀이 가자
아버지 등짝 같은 터앝이
갖가지 꽃을 등이 휘도록 꽂고도
후박나무처럼 문명을 받아들이는 곳
장독대 지나 모퉁이를 돌아가면
어머니 닮은 붉은 작약이
절구질을 하고 있는 마당 깊은 집
내 본적 지번으로
꽃놀이 가자
“꽃놀이 가자”는 말은 현실세계를 떠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싶은 시적 화자의 열망이 담긴 핵심어이다. 그러면 지금 이곳의 현실은 어떤 곳인가. 바로 “공해 낀 도시”로 대변되는 문명의 공간이다. 도시 문명사회에서 꿈꾸는 세상은 “방대한 우주가 내리는 선사시대”이며 “가난하지만 사랑이 충만한” 곳이다. 또한 그곳은 자잘한 햇빛과 시냇물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땅이며 “아버지 등짝 같은 터앝”이 있고 “어머니 닮은 붉은 작약”이 배경을 이루는 “마당 깊은 집”이다. 그곳은 시인의 “내 본적 지번”이다.
시인이 꿈꾸는 세상은 문명을 떠난 자연, 혹은 문명의 이기와 인간의 세속적 욕망과는 절연된 곳이다. 세속과 반대편에 있는 공간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듯 이승의 삶의 조건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무릉도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이민화의 유토피아가 지금, 현재 이곳의 삶을 통해 꿈꾸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그가 꿈꾸는 곳은 “내 본적 지번”으로서의 공간이다. 결국 이민화가 늘 그리워왔던 것은 안빈낙도나 무릉도원의 공간이 아니라, 이전 세대에 겪어 왔던 평화로운 공동체적인 삶의 공간이다.
같은 맥락 하에서 살펴볼 때 이민화의 시편에서 자신의 현재적 삶을 성찰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과정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현존재를 지속적으로 탐색하는 자기해부 내지는 성찰을 통해 자아의 본래적 속성과 지향점을 더듬어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생으로 향한 욕망의 단초를 현재의 공간에서부터 출발하는 일은 시 속에서 더욱 신뢰와 설득력을 갖게 한다. 이민화는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모성적 자아의 본연을 독특한 상상력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보슬비 내리고 나니
산부인과 수유실에 바다소리가 들려요
양털 같은 햇빛이 아가의 볼을 스윽 닦으면
분홍빛 입술은 잔잔한 파도를 타고
따끈한 두 섬에 도착해요
퉁퉁 부은 양 섬을 둥글게 마사지 하는
엄마의 손등 사이로 모유가 주르륵
우주 물고기 닮은 배가 수없이 쏟아져요
파도에 휩쓸리는 배들을 순식간에 삼키는 아가들
새하얀 팔다리를 신나게 풀어 놓은 오디오에 올라
샛노란 방귀를 끼기도 해요 커튼에 그려진
꽃밭에 들어가 꽃술을 건드려보기도 하는
나비보다 아름다운 장난을 쳐요 까르르 까르르
아가의 배냇짓, 봄바람에 꽃잎편지를 띄워
파도가 양수임을 알려주네요
― <환상특급 수유실> 부분
산다는 것은 호흡이 낮아지는 순간까지
제 것이 아닌 목숨을 껴안는 일
늙어가면서도 가장 예민한 쪽을 견인해
씨앗을 틔우는 어미가 되는 것일까
스스로 제 속살 문질러
달콤한 수액을 공급하는 주름진 몸
늦은 겨울 새벽까지
옹골진 싹 하나 만든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 <감자> 부분
<환상특급 수유실>은 생명을 가진 아기의 어미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산부인과 수유실에서 아가에게 젖을 먹이는 체험을 통해, 그 체험이 일상적인 체험을 넘어서 환상의 경계에까지 다다르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은 바로 모성의 힘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모성의 힘은 아가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순수성을 통해 더욱 증폭된다. 어미와 아가의 관계는 일방향성이지만 그것은 아가가 가진 천성적인 생명에서 기인한다. 시에서 아가는 “샛노란 방귀를 끼기도” 하고 “나비보다 아름다운 장난”을 치기도 한다. 또한 “있는 힘을 다해 젖을” 빤다. 그러한 본성적인 행위들이 아이의 엄마로 하여금 더 애틋한 감정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 감정은 바로 생명에 대한 본성적인 대응감정이다. 이러한 모성의 힘을 통해 환(幻)을 경험하는 특수한 경험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환상은 자아의 갱신을 통한 새로운 개체적 환상이 아니라, 아가를 통해 이루어지는 즐겁고 유쾌한 환상이다. 그러므로 환상특급 수유실은 감각적인 공간이기 이전에 현실의 자신을(즉 아가의 어미로서의 정체성) 확인해가는 행복한 환상의 열차라고 할 수 있다.
<감자>는 어미의 희생을 통해 산다는 의미를 일깨우게 한다. 즉 “산다는 것은 호흡이 낮아지는 순간까지/제 것이 아닌 목숨을 껴안는 일”이라고 단적으로 말한다. 어미가 아가를 품에 안는 일 또한 이러한 일일 것이다. 희생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예감하는 일이다. 또한 희생은 새로운 탄생을 위해 거쳐야 할 관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스스로 제 속살 문질러” 생명에게 이어주는 것은 신성하고 고귀한 일이다. 감자가 가진 속성을 진단하여 ‘발견’으로서의 시를 이끌어낸 좋은 시에 해당한다.
앞의 자서에서처럼 이민화는 ‘꽃’이라는 시적 대상을 통해 자아의 정서를 대리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시 <화몽(花夢)>에서 꽃의 꿈, 혹은 꿈 속의 꽃을 얘기한다. 이 시에서 꽃이라는 상징은 여러 각도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상징의 실체적 의미가 자아 혹은 자아의 객관적상관물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자아와 관계된 시적 대상이 꽃이라는 점은 꽃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의 원형 때문일 것이다.
꽃을 통하여 자아의 심정을 대변하고 혹은 꽃이 지닌 속성에 기대 새로운 신생의 장(場)을 마련하는 일은 여러 편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일개미>에서 개미 한 마리가 아카시아꽃길을 걸어가는 사건을 통해 여성의 몸을 보여주는 점이 그렇다. 여기서 아카시아는 단순한 소재일 뿐이지만, 개미의 주변을 채우고 있는 소재로 꽃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방점을 찍을 수 있겠다.
<이팝꽃>이라는 시에서는 할머니의 삶을 ‘이팝꽃’에 비유하고 있다. <찔레꽃>에서는 꽃을 통해 흑백 사진 한 장과 같은 과거의 추억을 떠올린다. <아이스버그의 여행자>에서는 순백색의 장미인 아이스버그를 통해 카메라의 시선으로 이미지의 이동을 보여준다. 또한 <소란한 가족>에서는 꽃씨들이 의인화의 옷을 입고 벌이는 수다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 삶의 조건으로 점철된 지금 이곳에서의 삶은 중요한 시적 원천이다. 또한 시원을 향한 인간의 그리움은 본성적인 것이다. 이때 고향은 한 인간이 새로운 개체로 태어나 삶을 시작하는 공간의 원적지이다. 영혼의 원적지로서 고향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거나, 아직 존재해 있다면 그 공간을 들여다보고 그리움의 애절함을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고향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고 훼손되거나 상실되어버린 경우 그 상실로부터 그리움은 더욱 증폭되거나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공간이 된다.
특히 이민화는 우리네 가족사가 그러하듯이 슬프고 아픈 가족사와 그것을 극복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삶에 관심을 가진다.
아버지라는 말 속에는
지리산 자락이 펄럭이고 있다
그 산길 거슬러 오르다 보면
그림 같은 섬진강 풍경이
가만가만 고무신을 물고 나온다
화개장터를 거닐다가
아버지 즐겨 신던 흰 고무신을 본다
세상을 등진 아버지가
내 좋아하는 부채 과자를 듬뿍 사서
고무신 앞세우고 금방이라도
달려오실 것 같은 거야
"늙은 아버지라 미안하구나!"
뿌리 없는 하얀 틀니로 다가와선
말없이 내 어깰 만져 주시던 까칠한 손,
은어회 납작해지도록 젓가락 누르며
어여 먹으라고 재촉하시던 그 눈빛
안개처럼 장터어름을 맴돌 뿐...
- <아버지의 고무신 2>
물무늬 찻잔을 저만치 밀치고 큰 냄비에 아무렇게나 자른 야채를 섞으니 내 짓무른 가슴의 무늬, 아버지가 지리산 바람을 한껏 몰고 나오시는 거다 또, 허연 거품이 자박거릴 때면 마른 채마밭에 물을 주며 웃으시던 아버지 하얀 고무신을 들고 유유히 사라진다 아버지의 등뒤로 수많은 노랑나비가 팔랑거린다
- <아버지의 고무신 3>
아버지라는 존재는 그리움의 대표격인 대상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아버지의 그리움은 좀 남다른 데가 있다. 눈에 밟히는 희생과 고난의 기억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본심은 쉽게 파악하기 힘들다. 그 속내를 알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과 오해의 삯을 감내해야만 한다.
이민화는 <아버지의 고무신>이라는 연작시를 통해 여성적 화자가 품을 수 있는 섬세한 감성의 면면들을 파헤친다. 시에서 아버지는 지리산 자락과 함께 떠오르는 아련한 이름이다. 특히 ‘고무신’으로 매개되는 아버지와의 기억의 소통은 아버지와 함께 나눈 일상을 현재의 기억으로 재생시키고 있다. 그 아버지는 “늙은 아버지라 미안하구나!”라고 자책하거나 “은어회 납작해지도록 젓가락 누르며/어여 먹으라고 재촉하시던 그 눈빛”을 가진 아버지이다. 어찌 그러한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런 아버지를 통해 시인은 “내 짓무른 가슴의 무늬”를 가지고 있게 된다. 아버지는 꿈을 통해 지금 이곳의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시적 화자에게 다가온다. 그것으로 잊혀진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이제야 더 진실하게 느끼는 것이다. “마른 채마밭에 물을 주며 웃으시던 아버지”는 꿈속에 나타나며 가슴에 절절한 무늬 한 자락을 남기고 간다.
아버지에 대해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버지가 두고 가신 사랑 때문이라면 누구나 큰 사치라고 생각할 일”이라고. 또한 “인격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혈연, 지연을 비평의 도마에 올려놓고 밤마다 썰진 않을 거라고” 말한다.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시적 소재로 쓰기에, 또 자신의 시적 토대 위에 두기에는 너무 크다는 예증이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에 대해 쓸 수밖에 없는 그 필연성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오늘도 나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뱀처럼 내 귀를 휘감아 오는 직장 동료의 험담을 듣기만 했을 뿐
그저 바람 빼는 풍선처럼 피식, 쓴 미소로 답을 전했을 뿐
갓 태어난 아기들의 체온을 묵묵히 재고 있었을 뿐
아기의 배냇짓에 내 두 눈을 반짝여 세상을 둥글게 말아 보태 주었을 뿐
간간히 창틈 사이로 일렁이는 달빛의 비늘을 거두어
한 쪽 커튼에 조용히 걸어두었을 뿐
오래전 내가 무심코 안아 본 갈대의 숨소리처럼
또 하나의 계절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을 뿐
어제의 상처를 억지로 끄집어내지 않았다
- <어떤 침묵 2>
시에서 공간은 중요한 시적 토대이다. 공간은 시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시의식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의 공간을 사유하고 성찰함으로써 상실된 공간을 새롭게 부활하고 탄생시킨다. 지금 이곳의 흙을 담아 잊혀진 땅의 흙냄새를 맡는 것이다.
시인은 소소한 일상을 통해 자아의 내밀한 정서를 드러낸다. “오늘도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직장동료의 험담과도 담을 쌓는 일상을 보낸다. 시적 자아가 보내는 “쓴 미소”는 자아의 일상적 모습을 잘 드러내주는 표정이다. 그의 일상은 아가들을 돌보는 일을 충실하게 수행할 뿐이다. 시적 자아가 지어보이는 “쓴 미소”는 이미 다 삭아버린 상처 때문일 것이다. 이제 “어제의 상처를 억지로 끄집어내지 않”겠다는 시적 자아의 다짐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미소일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이
옆에 있음을 왜 이제야 안 걸까
한동안 그의 어깨는 날 가만두지 않느니
단단한 뼈를 겸비한 서른 해엔
무거움도 가벼운 깃털이라고 우기던
늠름한 이마에도 어느새
굵은 주름이 몇
요번 일만 끝나면 꼭 등산화를 신고
둘이 함께 햇빛 만발한 풀꽃 산에
자주 갈 거라며 내 손을 꼭 잡느니
만질수록 진한 향을 내미는 허브처럼
순식간에 피어난 퍼런 혈관들
내 몸 위로 단물을 그리고 있나니
- <남편 2>
시인의 일상은 남편에 대한 애틋한 감정에서도 살필 수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남편을 통해 찾고 있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가장 소중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한동안 지나치고 마는 존재이다. 그래서 시인은 “둘이 함께 햇빛 만발한 풀꽃 산”으로 등산을 가자는 약속을 한 남편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마치 “만질수록 진한 향을 내미는 허브처럼” 서로의 존재를 더듬어 본다.
과거의 시공간을 재생해서 현재의 시점에서 추체험하는 것은 시인에게 새로운 성찰의 길을 제공해준다. 이 성찰의 시선은 자아의 현재적 삶으로 회귀한다.
대마도에서 구입한 칼에
가운데 손가락을 스윽 베었다
울컥 솟은 피가 멜론에 꽃잎처럼 떨어진다
엄마 엄마, 피가 흘러요
어서 소독하자는 딸아이의 말끝에
자연스레 따라붙는 쯧쯧,
이놈의 칼이 결국 일을 쳤네 쯧쯧
엄마 손이 이젠 물고기로 보이는감?
대마도 물고기가 보고 싶어
여태 어찌 참았을꼬 쯧쯧
지혈을 한답시고 거즈 위 반창고를
꾹 눌러주며 또 다시 쯧쯧,
언젠가 아버지가 흰 고무신을 신고
혀를 끌끌 차시는 모습을 내 딸이
그대로 흉내 내고 있는 게 아닌가
- <쯧쯧!> 부분
일상의 발견 속에서 추억을 기억해내었을 때 시인은 그 일상을 의미있는 순간으로 만든 장본인이 된다. 위의 시에서도 칼에 베인 사소하다면 사소한 사건을 통해 예전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 아버지의 모습을 단순히 기억 속에서만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혀를 끌끌 차시는 모습을 내 딸”을 통해 발견해 낸다. 아버지가 쓰시던 “쯧쯧!”이라는 말이 자신도 모르게 전승되는 모습을 발견하며 과거로부터 지금의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의미를 제공받는다.
시인은 일상의 체험을 통과하여 사물과 내밀한 대화를 시도한다. <붉은 반란>은 그러한 소통의 연장선상에 있는 시이다. 동학사를 밟고 내려오는 행위를 통해 “벗의 눈빛을 완전히 가늠하지 못해 눈물이” 난 자신을 발견한다. 이렇게 눈물이 나고 있는 행위는 사물을 통해 자신의 정서를 깨우친 결과물이다. <백목련>을 통해서도 목련꽃이 피는 모습을 보며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 즉 꽃이 피는 것을 “옷고름을 푸는” 모습으로 비유하고, “하나의 봉오리를 수없이 갈라놓는/혁명 아닌 혁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간월산에서>는 삶의 여정을 산에 오르는 행위를 통해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질긴 오르막이 겹쳐 있듯이/구겼다 폈다 구르는 세월”과 산이 가진 모습과 오르는 행위가 겹쳐 우리에게 깨달음을 준다.
이민화의 시는 신생의 꿈을 향한 시적 순례를 보여준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신생의 공간이 다시 옛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의 주체험을 통해 지금 이곳의 삶을 역설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것이 이민화의 시이다.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꽃이 꾸는 꿈, 즉 花夢의 세계는 이민화가 가진 예민한 감성의 촉수로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이러한 점이 앞으로 그의 시를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일 것이다.
이재훈 프로필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인. 문학평론가 <현대시> 편집장. <시와세계> 편집위원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