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후는 경기도 평택 지역에 소재하는 백현원(白峴院)의 승려였으나 1232년(고종19) 몽고군이 침입하자 인근 처인부곡(용인시 남사면)의 처인성으로 몸을 피하여 입보민들을 지휘하여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하였다. 살리타이를 사살한 것은 1232년의 12월 16일이었고, 이로 인하여 몽고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철군하고 말았다.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정부는 그의 공을 포상하여 상장군을 제수하였으나 자기 혼자만의 공이 아니라고 하여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섭랑장(攝朗將)의 무반직을 받았고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하였다. 부곡은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웠듯이 향, 소, 부곡중의 하나로 천민의 집단 거주지였다.
김윤후는 이후 무반으로 입신하여 1253년(고종40) 충주산성의 방호별감(防護別監)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몽고의 5차 침략군은 예쿠(也窟)의 지휘 하에 10월 충주성을 포위하였으며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김윤후는 충주성에 입보한 충주의 관민을 지휘하여 70여 일을 저항하였다. 항전이 장기화하자 성안의 식량이 바닥나고 민심도 동요하자 노비문서를 불태우며 공을 세운 자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포상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위기를 극복 하였다. 충주성 함락에 실패한 몽고 주력군이 결국 포위를 풀고 고려에서 철군하였기 때문이다. 김윤후를 따른 것은 명백히 김윤후를 따르도록 한 그의 권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공으로 김윤후는 감문위(監門衛)의 섭상장군(攝上將軍)으로 크게 승진하였으며 충주는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 되었다. 고종 말년에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임명되고, 원종조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로 퇴임하였다.
김윤후는 천민부락인 부곡(部曲)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불법(佛法)을 전하던 승려였다. 그는 전혀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고려사' 기록을 전부 훑어보아도 몽고군 침입시 처인성 전투에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다. 처인성 전투에 참여할 당시에도 그는 승려의 신분이었다. 고려 시대만 하더라도 아무나 승려가 될 수는 없었다. 광종 때부터 시행된 불교 분야의 과거제인 승과(僧科)제도를 통해 승려로 발탁되든지, 아니면 왕족이나 특권 귀족 출신만이 승려가 될 수 있었다. 고려시대의 과거제도를 굳이 살펴보지 않는다 해도 명백히 승과는 과거시험 제도의 하나였다. 예컨대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문종의 넷째아들이자 선종의 동생이었으며, 보조국사 지눌(知訥)은 명종대에 승과를 통해 승려가 된 당대 최고의 승려이자 선각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면세·면역의 특전이 부여됐기에 승려의 세속적 권위 또한 적지 않았다.
당시 2800간이나 되는 대규모의 흥왕사를 비롯해 수많은 사찰이 즐비한 왕도 개경을 떠나 자진해 천민 부락인 처인부곡(處仁部曲:오늘날의 경기도 용인)의 성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불법을 전한 김윤후는 분명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1232년(고종 19년) 몽고의 제2차 침입 때 김윤후는 처인성 부곡민들과 함께 몽고군과 맞서 싸웠고 끝내 적장 살리타(撒禮塔)를 사살하는 전과를 세우고 그들을 격퇴했다. 이처럼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비록 부곡민들이지만 이들을 결집시켜 적과 싸운 호국의 의지로 충만한 인물이었다. 이 전투에서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고 몽고군을 물리친 공로로 국가는 그를 상장군으로 임명했으나 그렇게 큰 직책을 받을 수 없다며 끝내 사양하면서 섭랑장(攝郞將) 정도의 미관말직만을 자청했으니 그 겸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조그마한 공적을 세우고도 이를 침소봉대해 자랑하고 과도한 국가포상을 요구할 터인데 김윤후는 그와 정반대였다.
이와 같이 김윤후는 처인성 전투를 계기로 승려에서 무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 후 21년의 세월이 흐른 1253년(고종40년) 몽고군의 제5차 침입 때에도 김윤후는 방호별감랑장(防護別監郞將)이 돼 충주성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충주성 전투의 주역 또한 천민들이었고 이들의 지휘자 또한 김윤후 장군이었다.
처인성 전투에서 부곡에 사는 천민들의 애국심과 과감한 전투력을 직접 체험한 바 있는 김윤후는 인간의 기본적인 심성을 꿰뚫어 보는 지장이자 덕장이었다. 그는 관노의 문서를 모두 불태워 그들의 신분 해방을 입증했고 몽고군으로부터 빼앗은 소·말 등의 노획품을 골고루 나눠 주자 관노들은 감격, 용전분투했고 끝내 몽고군을 격퇴한 것이다. 이처럼 자유란 실로 놀랍고도 무서운 인간 능력을 발휘케 하는 요소다. 김윤후 장군의 승전 배후에는 전투 주역인 천민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 이를 꿰뚫어 보고 적절히 활용한 그의 지략과 뜨거운 호국의지가 결합해 있었던 것이다. 즉 신분 해방을 통한 자유에의 갈망이 대몽항전의 큰 원동력이 됐다. 그리하여 김윤후 장군이 지휘하는 천민들의 항전태세는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왕공·귀족·관료 등 특권계급의 임전태세에 비해 몇 배나 견고하고 의연했다.
백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피한 특권층이 환락과 안일에 빠져 있는 동안 목숨을 걸고 굶주려 가면서 몽고군과 결사적으로 싸운 사람들이 바로 김윤후 장군과 그 휘하의 천민 출신 군사들이었다. 그들이 갖춘 무기·장비는 보잘것없었다. 우리는 김윤후 장군을 통하여 우리역사에도 이러한 훌륭한 인물이 있었나? 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러나 명백히 이렇게 훌륭한 인물도 우리역사에는 있었다. 응분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옳은 것을 위하여 싸운 무수히 많은 민중들로 인하여 이 역사는 이어져 온 것이다. 우리 역사는 분명히 김윤후 장군과 같은 분들로 인하여 이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싸웠던 진정한 백성 부곡의 천민들이 바로 역사의 주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