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봄이 왔다. 우리 집 마당에도 봄날의 꽃 파도가 넘실거렸다. 한두 번의 꽃샘추위가 더 다녀가겠지만, 가지마다 매화 꽃망울들 환하게 터지는 봄은 분명코 ‘탄핵의 봄’이었다.
지난 2월 19일, 지리산행복학교 입학식과 더불어 우리 집 ‘예술곳간 몽유’의 집들이가 열렸다. 격식을 갖춰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페이스북에만 살짝 공개했는데, 너무 많은 분들이 찾아와 응원과 격려를 해주었다. 광주의 풍물놀이패 ‘울림’의 대표 김태훈씨가 단원들과 함께 와 지신밟기 꽹과리를 치고 징소리, 북소리를 울렸다. 모두들 한바탕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봄이 와도 아직은 봄 같지 않은 ‘춘래불사춘’이라지만 그 봄의 기운만은 감추거나 숨길 수 없었다. 내 집을 갖는다는 것이 아직은 어색한 감도 없지 않지만, 집들이에 참석한 마을 어르신들과 100여 명 이상의 벗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집들이를 끝내고 조금 차분해지자 봄 마중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가고 봄비가 내리자 우리 집 앞마당의 매화꽃도 맑디맑은 눈망울을 보여 줬다. 이런 눈빛들 참 오랜만이었다. 모처럼 야생화를 찾아 그 산 그 숲속에 들었다. 나의 ‘야생화 사부’ 김인호 시인과 천안의 정택근 형, 군산의 쑥국님 모자와 더불어 변산아씨를 만나고 복수초 일가의 안부를 물었다. 그날 밤 영동의 양문규 시인, 경북 상주의 황구하 시인, 하동의 친구 김종관씨 등도 합류해 하룻밤 회포를 풀었다.
야생화를 만나러 가던 날 군산의 쑥국님-초등학교 선생인 송숙씨와 어여쁜 아들 진우와 변산바람꽃과 복수초 앞에서 나눈 얘기가 한 편의 동화처럼 떠올랐다. 쑥국님은 지난해 초등학교 4학년들에게 동시를 쓰게 해 동시집 <시똥누기>를 펴내기도 했다. 그녀의 페이스북에서 빌려왔다.
진우 : 엄마, 원규 아저씨 콧봉오리는 왜 빨개요?
엄마 : 응. 술코야…ㅋㅋ
진우 : 아저씨! 술 많이 드시면 집에서 안 쫓겨나요?
원규아저씨 : 아저씨 부인은 아저씨보다 더 잘 마셔. 하하하~.
엄마와 꽃봉오리 얘기하던 진우가 내 코를 보고 ‘콧봉오리’라는 신조어를 불쑥 던지는 것이었다. 시인은 내가 아니라 진우였다. 교사 엄마인 쑥국님의 ‘술코’라는 재치도 좋고, 진우의 돌발적인 질문에 나는 적잖이 당황하다가 얼떨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물론 그날 밤 온 세상에 알린 죄로 아내 ‘고알피엠 여사’ 신희지의 경고를 받았다.
봄바람 따라 모처럼 서울에 다녀왔다. 바이크를 세워두고 서울행 새벽 버스를 탔다. 당일치기 일정이 만만치 않지만 성동구치소에 강연 가는 길이었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도대체 무슨 자격이나 있을까, 참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여전히 교도소엔 죄인들이 많고, 병원에 가보면 환자들도 참 많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교도소 밖에 더 큰 죄인들이 있고 병원 밖에 더 아픈 사람들이 많아보였다. 나 또한 크게 다를 바 없겠지만, 그래도 청와대와 국회 등 권력 가까이, 그리고 재벌 등 돈 가까이 두 눈 치켜뜬 중범죄자들이 살모사처럼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3·1절 백주대낮에도 일부의 무리들이 태극기를 모욕하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 또한 제대로 봄을 맞아야겠다는 다짐으로 몇 년 전에 쓴 졸시 ‘꽃피는 그대에게’를 떠올렸다.
꽃피는 그대
먼 길 오시는데
이것 참
예의가 아니다
보살행의
황어 떼가 오르고
매화 꽃망울 막 벙그시는데
백태 낀 눈으로
반기려니
이것 참, 예의가 아니다
목욕재계하고
맞아야 할 분들이
어디 꽃피는 그대뿐이랴
달래 돈나물 돋으시는데
소화불량의 아랫배 움켜쥐고
이것 참, 이것 참
3월 초엔 지리산 촌놈이 뒤늦게 캄보디아를 다녀왔다. 대전의 벗 설산 김영기의 주선과 도움으로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었던 앙코르와트 사원을 둘러봤다. 영상 37℃를 넘나드는 캄보디아는 견딜 만했지만, 여행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의 가난했던 1960년대 풍경과 다르지 않았고, 대학살의 현대사가 도사린 킬링필드와 한국전쟁 전후의 현대사가 자꾸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신과 왕과 인간의 영역이 공존하는 앙코르와트의 거대한 사원들, 세계적 문화유산이라는 것이야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찬란한 유산 뒤에 숨겨진 참극과 비극의 만행들을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는가.
무거운 발길의 나를 사로잡은 것은 거대한 사원이 아니었다. 니악뽀안이라는 ‘물 위의 사원’ 가는 길에서 만난 나무들이었다. 기도하는 자세로 서있는 물 위의 나무들, 죽어가는 나무와 아직 살아 있는 나무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인간 대신 참회하는 모습이었다. 언젠가 다시 캄보디아에 간다면 웅장한 사원들 말고 이곳에서만 머물고 싶었다. 열대성 소나기 스콜이 마구 쏟아지는 수중사원 니악뽀안에서 하루종일 거닐고 싶었다.
그리고 수상가옥을 찾아갔다. 캄보디아 톤레삽호수에서 부레옥잠처럼 물 위에 사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베트남 출신의 ‘보트 피플’, 지구 그 어느 땅에도 두 발을 내디딜 수 없고 송곳 하나조차 꽂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쪽배를 타고 가혹한 운명의 그들에게 관광의 이름으로 마치 점령군처럼 다가갔다. 이따금 아이들이 작은 배나 큰 고무대야를 타고 와 한국말로 구걸을 하였다. 1달러를 줄 수도 없고, 안 줄 수도 없었다. 전쟁 직후 미군들에게 “기브 미 쪼꼴레트”를 연발하던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모습이었다.
가난하다고 반드시 불행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상대적 빈곤일 뿐이지 절대적 불행은 아닐 것이다. 땅 위에 몇 평의 집을 가졌다고 우쭐 할 것도 아니고 먼저 조금 더 부유해졌다고 개폼 잡을 일도 아니다. OECD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의 나라 대한민국, 과연 행복지수는 어디가 더 높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비록 구걸하는 어린 아이들이지만 눈빛은 더없이 맑기만 했다. 물 위의 사람들, 그 누구나 자주 환하게 웃었다. 나는,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잃고 사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우리는 너무 멀리, 잘 못 온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황톳빛 톤레삽호수의 수상가옥, 쪽배 위에서 가난한 시절의 아직 어린 나를 만난 것이다.
4박5일의 일정을 끝내고 섬진강에 돌아오니 꽃샘추위 눈발이 날렸다. 매화꽃 위로 눈발이 날리더니 다음날 아침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토종벌들이 날아왔다. 마침내 탄핵의 봄기운이 도처에 당도한 것이다.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몰상식에서 상식으로, 불법에서 합법으로, 역주행의 반역사에서 선순환의 미래로 봄이 오고 있었다. 지리산행복학교 미술반 학생들이 우리집 벽에 그린 매화와 고양이 벽화와 실제로 매화나무에 오른 고양이를 사진으로 찍으니 상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졌다.
마침내 3월 10일이 되자 역사적인 ‘탄핵꽃’이 피었다. 국가적으로 보면 실로 비극적인 일이지만 참으로 오래 기다렸다. 기다리다 미치고 미쳐 날뛰다 숨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이제 겨우 치유의 단초가 열렸다. 한줌도 안 되는 무리들이 온 국민을 제정신이 아닌 병자로 만들었다. 민주주의만 꽃인 줄 알았더니 탄핵도 꽃이 되고 헌법재판관들의 8:0 만장일치는 꽃다발이었다. 아랫동네 작은 저수지의 파문 속에도 매화꽃들이 만발했다.
그 다음날엔 광화문 미술행동 캠프촌에서 판화가 김준권, 유연복 형과 가수 김가영씨가 다녀갔다. 겨우내 너무나 고생이 많았다. 마음뿐 뭐 하나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해 늘 미안했다. 더불어 술잔을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모두들 돌아가고 오후에 마을산책을 나갔더니 매화 꽃그늘 아래서 홀로 쑥을 캐는 윗집 할머니가 꽃보다 더 환했다. 허리에 복대를 감고 다리관절이 아파 유모차를 몰고 나왔다. 나무 뒤에서 몰래 찍으려다 들키고 말았다.
“할매요, 쑥 마이 캤어요?”
“새로 이사왔다는 그 양반이구먼. 다 찌그러진 할망구를 뭐 할라고 자꾸 찍어싸, 허허. 저 아래 외압에서 이사 온 지 40년 넘었당게. 아들이 재혼해서 도시에서 사는데 나가 손주들을 대신 키우느라 병원에도 못 가. 다리 수술해야 하는데 에휴. 그래도 아그들 인자 다 컸어. 고등학교 2학년이여.”
아픈 허리, 다리 끙끙 앓으면서도 연신 허허 웃는다. ‘쑥 캐는 소녀’에게 말동무라도 해주고 싶은데 자꾸 입술이 마르고 목이 메었다. 마치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난 듯했다. 그날 밤엔 눈 버릴까봐 뉴스를 보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보니 우리집 마당 앞이 환해졌다. 마당 아래 수천 평의 매실밭이 있는데, 순식간에 매화꽃들이 피어난 것이다. 외압마을의 어르신이 이 밭을 가꾸는데, 나는 그저 공짜로 수천 평의 정원을 가진 셈이다. 앞마당의 토종매화가 일찍 피었다가 슬슬 지기 시작하자 이를 이어받아 화르르 피어난 것이다.
지은 지 40년 다 된 누옥에도 매화 만발하니 별유천지비인간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돌이켜보니 그동안 지리산의 빈집을 7번 전전하며 살았다. 지난해 벚꽃 환하던 ‘밭두렁 사진전’ 마지막 날 밤에 “한 달 내에 집을 비워 달라”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그런데 새옹지마였을까, 그 덕분에 떠돌이신세를 면했다. 지리산 입산 20년 만에 섬진강 건너 백운산 자락에 철새가 아닌 텃새의 새 둥지를 틀게 됐다. 입산 20년 만의 8번째 집이다.
전라남도에서 전라북도로, 다시 경상남도에서 전라남도로 이사를 했다. 구례 용두리와 피아골- 남원 실상사- 함양 칠선계곡- 구례 문척면과 문수골- 하동 화개면- 광양 다압면으로 수시로 현주소가 바뀌었다. 그동안 피아골에서 살 때 얻은 ‘피아산방(彼我山房)’을 당호로 삼아 이사를 다녔다. 피아간의 전투, 반공영화의 피아골 이미지를 지우고 ‘너와나, 우리들의 산방’이라는 뜻으로 삼았다. 어차피 생의 한철 빌려 사는 집이니 내 집도 아니었다. 열쇠도 없고 대문도 없이 누구나 들락거리는 열린 집들이었다.
이제 ‘피아산방’이라는 당호를 내리고 ‘예술곳간 몽유(夢遊)’를 새로 내걸었다. 이 집은 나의 집이 아니라 우리 집, 우리들의 집이다. 지난해 다급하다 못해 시도한 ‘페이스북 사진전’, 이 최초의 디지털 사진전에서 수많은 이들이 성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인사동 모 갤러리의 초대전을 취소하고, 그 결례를 무릅쓰고 ‘땅 한 평 구하기 사진전’을 했었다. 1주일 동안 하기로 했는데 너무 폭발적인 응원에 당황했다. 결국 3박4일 만에 사진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 이사할 집의 반 채를 구할 정도의 큰돈이었다. 새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가까스로 이 집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집은 오지의 야생화 ‘깽깽이풀’이 인연 줄을 이어주었고, ‘페이스북 사진전’이 초석을 다지게 했다. 100여 명 가까운 이들을 다 공개할 수 없으니 그 이름 하나 하나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일일이 초대해 집들이를 하고도 싶지만 그보다는 언제든 와서 차도 마시고 쉬었다 가기를 바랄 뿐이다. 지리산행복학교 입학식 날 자연스럽게 집들이는 한 셈이니 이제 한 분 한 분 차분하게 잘 모실 일만 남았다. 겨우내 집수리 과정에 도움을 준 분들과 더불어 성원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큰절을 올린다.
사실 섬진강 건너로 이사 오기 전에 하동군청의 끈질긴 여러 가지 제안도 없지 않았다. 몇 억을 들여서라도 악양 최참판댁의 김훈장네집을 리모델링해 주겠다거나 폐교된 축지초등학교의 교장 관사를 리모델링해 주겠다는 등 너무나 고맙지만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들이었다. 그 유명한 이외수 선생도 아니고 참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부랴부랴 도망치듯이 매화마을 근처로 이사를 와 강 건너 지리산을 바라보며 살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가파른 산지가 아니라 평지에 깃드니 바람도 세차지 않고 정남향의 햇볕도 좋고 평온했다. 페이스북에 이런 감사의 말을 남겼다.
“지난해 큰마음을 내어 성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큰절을 올립니다. 언제든 지리산과 백운산, 섬진강에 오시게 되면 ‘예술곳간 몽유’에 들러 차나 술도 마시며 잠시라도 쉬었다 가시길 바랍니다. 다소 불편하겠지만 마음만은 환하게 반기겠습니다. 혹시 잠시 집이 비어 있더라도 주인장이 되어 머물다 가시길 바랍니다.”
40년 다 된 누옥도 매화향 속에서는 구중궁궐이 아닐 수 없다.
이원규
언제나 너의 왼쪽에 앉고 싶었어
오른팔로 너의 어깨 감싸며
슬픈 표정을 숨기려 했지만
네가 먼저 왼쪽에 앉아 먼 산만 바라보았지
나는 맨날 들키고
너는 맨날 숨기고
어쩌다 마주봐도 좌우 눈빛이 엇갈렸어
권태기였을까
너의 왼쪽 얼굴에 통증이 왔지
목근육 흉쇄유돌근이 조금씩 짧아져
아래턱의 각도가 오른쪽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야
좌광우도라는 말 들어봤어?
너무 한쪽만 바라보다
봄 도다리는 쑥국 속으로 들어가고
삼월 광어는 개도 먹지 않게 된 거야
갈 때는 가더라도
열두 개의 얼굴 중에서
낯익은 열한 개의 오른쪽 가면 말고
검은 머리카락으로 가려온
단 하나의 표정을 보여줘
가서는 영영 안 오더라도
밤하늘의 시베리아행 철새처럼
잠시 고개 돌려 왼쪽 얼굴을 보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