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ident Azaña and Negrín (wearing a light-coloured coat in the middle) visit a republican front on the outskirts of Barcelona accompanied by two of the main military authorities of the Republic
Homage to Catalonia. pp.138-141
CHAPTER X
우리가 전선으로 돌아간 것은 바르셀로나 전투가 끝난 3일 후였었다. 전투 후에는- 좀더 특별하게는 신문을 통한 욕설 퍼붓기 싸움slanging match 후에- 이 전쟁에 대하여 이 전과 같은 상당히 순진하고 이상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기 어려웠다. 나는 어느 정도의 환멸을 느끼지 않고 스페인에서 몇 주를 지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은 바르셀로나에서의 첫 날 만났던 신문사 통신원으로 돌아갔고, 그리고 그는 내게 ‘이 전쟁은 다른 모든 것들처럼 시끄럽죠,’라고 말했었다. 그 말은 내게 깊은 충격이었고, 그 때(12월)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지 않았으며, 심지어 5월인 지금도 사실은 아니지만, 그것은 점점 더 사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든 전쟁에서 개인의 자유와 진실한 언론과 같은 것들은 단지 군사적 효용성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전쟁이 계속되는 매달 마다 일종의 점진적 퇴보를 겪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추측을 시작할 수 있었다. 카바예로 정부가 무너지고 공산주의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강한 좀 더 우파적인 정부로 대체되어 (그 일은 한 두 주 후에 일어났다), 최종적으로 노동조합의 권력을 완전히 분쇄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는 것은 쉬웠다. 그리고 그 후에, 프랑코가 패배했을 때- 스페인의 재조직으로 일어난 엄청난 문제들을 버려둔 채 - 전망은 장밋빛이 아니었다. 그것에 관한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라는 신문의 말은 명백한 허풍이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스페인처럼 분열되고 기진맥진한 나라에 우리가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그것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민주주의의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독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노동계급의 독재의 기회는 지나가 버렸다. 그것은 일반적인 움직임이 파시즘의 일종으로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파시즘은 의심의 여지없이 정중한 이름으로 불렸고- 그곳이 스페인이었기 때문에-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변종 보다는 더 인간적이었고 덜 효율적이었다. 유일한 대안은 프랑코에 의한 더 나쁜 영원한 독재이거나 (항상 가능성이 있는) 사실상의 국경이나 경제구역으로 스페인이 분할되면서 전쟁이 끝나는 것이었다.
어느 방법을 선택하든 전망은 우울하였다. 하지만 정부가 더욱 노골적이고 발전된 프랑코와 히틀러의 파시즘과 맞서 투쟁하는 것이 가치 없는 것이라고 이어지지는 않았다. 전후의 정부가 어떤 실수를 했든지 프랑코 체제가 분명히 더 나빴다. 노동자들에게는 - 도시 노동자들- 누가 이기든 결국에는 거의 차이가 없겠지만, 스페인은 기본적으로 농업 국가이며 농부들은 거의 틀림없이 정부의 승리로 인해 이익을 볼 것이다. 적어도 점거한 토지의 일부는 그들의 소유로 남을 것이며, 또한 이러한 경우 프랑코의 것이었던 영토의 토지도 분배될 것이고 스페인의 일부 지역에 존재했던 가상의 농노제도는 다시 복구되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끝났을 때 통제하는 정부는 어쨌든 반종교적/ 반관료적anti-clerical이고 반봉건적일 것이다. 최소한 당분간은 교회를 견제하면서 예를 들어 도로를 건설하고 교육과 공중보건을 증진할 것이다. 특정한 정도는 전쟁 중에도 그러한 방향으로 행하여 졌다. 반면 프랑코는 단순한 이탈리아와 독일의 꼭두각시가 아니었으며, 그는 봉건 대지주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고루한 성직자 군부의 반동세력의 편에 서 있었다. 인민전선은 사기를 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프랑코는 시대착오였다. 오직 백만장자나 낭만적인 자들만이 그가 승리하기를 원하였다.
더욱이, 1-2년 전부터 내게는 악몽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파시즘의 국제적 위신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1930년 이후 파시스트들은 모든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제는 그들이 맞을 차례였으며 누구에게 맞을 지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프랑코와 그의 외국인 용병들을 바다로 밀어내 버린다면 비록 스페인 자신이 독재에 억압당하고 모든 최고의 인물들이 감옥에 있는 채로 등장하더라도 세계의 상황은 크게 개선되게 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전쟁에 승리할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당시에 내가 상황을 보는 방식이었다. 나는 이제 네그린 정부가 집권했을 때 보다는 훨씬 더 높게 평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정부는 대단한 용기로 어려운 싸움을 계속하였고 모두가 기대하였던 것 보다 더 큰 정치적 아량을 보여주었다. 나는 여전히 -스페인이 예측할 수 없는 결과로 분열되지 않는 한- 전쟁 후의 정부는 파시스트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 의견을 그대로 두고 시간이 대부분의 예언자들에게 하는 일을 나에게도 할 기회를 가지겠다.
밥 스마일리가 영국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국경에서 체포되어 발렌시아로 끌려가 투옥되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우리는 막 전선에 도착하였다. 스마일리는 10월 이전부터 스페인에 있었다. 그는 몇 달 동안 POUM 사무실에서 일했으며 다른 ILP 단원들이 도착했을 때 영국으로 돌아가 선전여행을 하기 전 석 달 동안 전방에서 근무한다는 조건하에 민병대에 입대하였다. 그가 체포된 이유를 알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는 계속 연락두절 상태였고 그래서 변호사조차도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스페인에는 -실제로는 어떻던- 인신보호법이 없었으며, 그래서 심지어 재판은 고사하고 기소도 되지 않은 채 몇 달 동안 감옥에 갇힐 수도 있다. 마침내 우리는 풀려난 수감자로부터 스마일리가 ‘무기소지죄’로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우연히 알게 된 바로는, 그 무기들은 집으로 가져가 강의를 할 때 보여주려던 전쟁 초에 사용되었던 원시적 형태의 수류탄 두 개 외에 포탄 파편들과 그 밖의 기념품들이었다. 충진재와 신관이 제거된 그것들은 단순한 강철 통이어서 완전히 무해한 것이었다. 그것은 핑계일 뿐이고 알려진 그의 POUM 과의 관계 때문에 체포된 것이 분명하였다. 바르셀로나 전투는 이제 막 끝났을 뿐이고 당시에 당국자들은 공식적인 입장과 반대되는 어떤 사람이나 스페인 밖으로 극도로 내보내지 않으려고 극도로 예민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은 국경에서 이런저런 사소한 핑계로 체포되기 쉬웠다. 처음에는 다만 며칠 동안 스마일리를 억류하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하지만 문제는 스페인에서 일단 감옥에 갇히면 재판을 받든 안 받던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