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73
9월7일[연중 제2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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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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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MVmb1IrF0Y
[서울대교구 박성준 모세(도봉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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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행과 단식은 기쁜 얼굴로 행해야만 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롭고 따뜻한 아버지로 다가가신 예수님이었지만, 율법 지상주의에 깊이 함몰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분이 또한 예수님이셨습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언제 들어도 유쾌, 상쾌, 통쾌합니다. 그들은 특히 안식일 규정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규정들을 셀수도 없이 많이 만들고 나서는, 누가 규정을 어기는지 매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조금이라도 어기만 가차없이 잣대들 들이대며 단죄하고 처벌했습니다.
그들의 과도한 가르침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극히 사소한 일도 절대 금지였습니다. 미쉬나(Mishnah)에는 안식일에 금지된 39개의 주요 노동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밭갈이, 파종, 수확, 단묶기, 타작, 키질, 선별, 분쇄, 체질, 반죽, 굽기, 글쓰기, 건축, 이사, 점등, 소등 등등.
너무나 웃기는 부분도 수두룩합니다. 안식일에 촛불을 켜는 것은 금지되지만, 촛불을 켜기 위해 이방인을 고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손수건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지만, 손수건을 옷에 달고 사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땅에 침을 뱉는 것도 금지요, 벽에 고정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도 금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웃기는 짬뽕같은 규정입니까?
안식일에는 약 1킬로 미터 정도까지 걷는 것은 가능하나 그 이상 걷은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엿새간 열심히 일했으니 하루 편안한 몸과 마음을 쉬라는 의미에서 제정된 안식일 규정입니다. 안식일 날 편안한 복장으로 호젓한 산길 3~4킬로 천천히 걸으면 그 얼마나 편안한 휴식이겠습니까? 그런데 안식일 규정에 따르면 큰일 날 일이었습니다.
밀이삭을 추수하는 규정도 꽤나 까다로웠습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이웃집 밀밭에 심어져 있는 밀 이삭을 그 자리에서 잘라 먹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낫을 대는 것을 금지되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된다.”(신명기 23장 26절)
그러나 율법학자들의 잣대는 점점 수위가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배배꼬인 시선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현미경처럼 관찰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신명기의 가르침을 위배한 것도 아닌데, 마구잡이로 들이대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 12,2)
고지식한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날카롭습니다.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 5-8)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실수는 참으로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고생하는 인간의 휴식을 위해 제정한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 규정이 인간을 속박하는 규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든 안식일 규정이 사람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가는 규정이 되고만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 근본 정신이 사라진 법과 강제력은 얼마나 위험한 것이지 모릅니다. 기쁨 없는 봉사 역시 위험합니다. 자비없는 선행의 실천 역시 부담입니다. 고행과 단식은 기쁜 얼굴로 행해야만 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 역시 행복한 얼굴로 행해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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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qUFayjZZ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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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는 사람은 화내기 전부터 화가 나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또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이번엔 안식일에 남의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 때문입니다. 과연 바리사이들이 안식을 참으로 지내고 있는 것인지, 제자들이 안식을 지내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도 화가 나 있습니다. 그들은 어째서 안식일에도 안식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요?
‘tvN 어쩌다 어른’에서 상담학 전문가 ‘권수영 교수’가 나와 강의한 내용 중 ‘분노 조절 못 하는 아빠의 충격적 비밀’에 관한 것을 소개해드립니다.
경제적으로도 유복하고 자녀들도 잘 성장한 평범한 집의 가장입니다. 근데 이분이 권 교수에게 상담을 받으러 왔습니다. 분노 조절 장애 때문이란 것입니다.
차가 깜빡이 켜지 않고 끼어들면 보복 운전을 하고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휴게소까지 쫓아 들어가 폭력을 행사하여 벌금과 구금, 심지어 감옥까지 갈 정도였습니다.
두 자녀에게 물질적 지원은 충분히 했지만,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두 자녀는 각자 방으로 그냥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분은 “너희가 아빠를 무시하는 거야?”라고 하며 급기야 아들에게 손찌검까지 합니다. 그렇게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고, 이혼하기 전에 상담 한번 받아보라고 해서 권 교수를 찾아온 것입니다.
상담하던 중, 어린 시절 두번의 큰 상처를 기억해냅니다. 어렸을 때 바쁜 어머니가 큰아들을 묶어놓고 다녔습니다. 그때 엄청난 공포와 좌절, 분노 등이 자신에게 내재하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다음은 엄마가 외삼촌에게 애가 말을 안 듣는다고 혼내주라고 하였습니다. 외삼촌은 어린아이의 머리를 흙탕물에 들이박고 숨이 멎어서 죽기 직전까지 가게 체벌하였습니다. 이 두 사건이 그의 심장에 커다란 분노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권수영 교수는 자녀에게 사과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사과하였습니다. 그러나 건성으로 하였습니다. 자녀도 건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권 교수는 제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자신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말하면서도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입니다. 아직도 그것 때문에 영향을 받는 자신이 부끄러웠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자녀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자신이 싫었을 것이고, 그렇지만 그렇게 한 이유를 제대로 보게 되어 마음이 편하기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더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군대 가기 전 아버지와 단둘이 여행을 갔습니다. 그때 아들이 한 번도 못 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아빠, 사실 나 중학교 때 자살하려고 했어. 아빠 때문에. 근데 엄마가 불쌍해서 못 했어.” 이젠 아버지가 폭풍 눈물을 흘렸고 둘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나의 상처를 타인에게 털어놓으면 이젠 나는 그 상처의 주체가 아니라 제삼자가 됩니다. 사실 상처는 내가 받은 것이 아니라 내 자아가 받은 것입니다. 그 상처 입은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 믿어온 것이 문제입니다.
두 물통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똑같습니다. 그런데 한 물통은 상온이고 한 물통은 들어가서 오래 버티기 어려운 온도입니다.
어렸을 때의 상처를 안고 용서가 안 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다시 그 고통을 느끼기를 두려워합니다. 거의 온천수의 온도의 물에 들어가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1도만 더 높아져도 그때의 고통이 되살아납니다. 그래서 그 1도의 온도를 높일만한 일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이 표출되는 것이 분노입니다.
그러면 과거의 모든 상처를 다 용서하면 그만이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그런데 용서가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용서를 위해서는 ‘피’가 필요합니다.
이철환 작가의 예를 많이 드는데, 태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소매치기하며 사는 청년이었습니다. 동생을 통하여 어머니가 아파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는 말을 듣고도 병실에 올라가지 못합니다. 담배만 피우다 지하철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한 여자의 핸드백에서 돈뭉치를 소매치기합니다.
몇 달 뒤 동생에게 전화가 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왜 돌아가셨느냐고 묻자 병원비가 없어서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태수는 펄펄 뛰었습니다. 돈 없으면 죽어야 하는 나라, 이러니까 내가 이 꼴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그러나 동생도 말합니다. 여자친구가 찾아오던 결혼자금만 있었어도 엄마를 살릴 수 있었다고. 그리고 그것을 소매치기한 장본인이 자신임을 안 태수는 더는 말을 잊지 못합니다.
어머니의 피가 자신의 심장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때 얻는 것이 ‘안식’입니다. 자기 심장에 그리스도의 피가 떨어지면 두 가지 큰 효과가 일어납니다. 내가 더 큰 죄인임을 알아 용서하게 되고, 또 그 피가 떨어져 죽은 내가 참 내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자아가 나인 줄 알고 살았던 것을 알게 됩니다. 마치 이집트에서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문설주에 피가 발라진다고 집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당사자임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용서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그렇게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내가 바로 자아였음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설설 끓고 있던 물에서 나와 그 물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개미가 물고 뜯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집의 문설주였습니다.
상온의 물통이든, 뜨거운 물통이든 들어가 있지 말고 나와야 합니다. 상온의 물도 오래 끓이면 끓습니다. 나와서 제삼자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이 끓든 말라버리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더는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참된 안식입니다. 파라오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끓는 물속에서 빼내 주실 분은 나를 위해 피를 흘린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나의 구원자요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안식을 얻은 이는 그래서 나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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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바둑에서 중요한 부분은 ‘형세판단’입니다. 형세판단을 잘 하는 사람은 국면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신문의 사설을 읽을 때 중요한 부분은 ‘맥락’입니다. 맥락을 잘 아는 사람은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형세판단과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자성어로 “견지망월(見指忘月)”이 있습니다. 견지망월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혜능은 글을 모르는 스님이었습니다. 까막눈임에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혜능은 어느 날 한 비구니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글을 모르면서 어떻게 진리를 안다는 말씀인지요?’ 그러자 혜능은 ‘진리는 저 하늘의 달과 같고,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고 답했습니다.” 깨달음은 능력의 순서대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배움의 순서대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직책에 따라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는 것도, 햇빛이 비추는 것도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도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자본과 물질의 원리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자본과 물질이 추구하는 목표는 이익과 풍요입니다. 자본과 물질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폭력과 전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자본과 물질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생태계의 파괴와 난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3년째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있습니다.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있습니다. 자본과 물질의 원리에는 인간의 생명과 인류가 쌓아온 문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풍요의 나라, 세계 최고의 강대국인 미국에서 매년 총기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있습니다. 깨끗하고, 부유한 나라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된 물을 바다로 방출하고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에서 많은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낙태되고 있습니다. 어제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물질과 자본이 아닙니다. 새 포도주는 자비와 사랑입니다. 새 부대는 욕망과 탐욕이 아닙니다. 새 부대는 십자가와 나눔입니다.
안치환의 노래 중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시인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샛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 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사람만이 희망인 것은 어째서일까요?
저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숨’을 넣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받아서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그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는 가련한 이를 측은하게 여깁니다. 잘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식별합니다. 겸손하게 고개를 숙입니다.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받아주신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다윗이 뉘우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니네베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회개의 눈물을 흘린 베드로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기에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비록 잘못하였을지라도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규정하는 법과 질서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가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들이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에 기초를 두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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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1-5: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을 잘못 알고 있음을 지적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밀밭을 지날 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1절)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2절) 주님께서는 율법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또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율법을 어기셔도 놀라지 않았다. 안식일에도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는 서슴없이 하시는 것을 늘 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안식일에도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셨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은 그들을 풍성하게 익은 곡식들 사이로 데리고 가신 것이다. 안식일과 풍성한 결실을 본 이삭은 큰 신비를 의미한다. 땅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고, 하늘 씨가 뿌려진 밭은 풍성한 결실을 보았다. 인간 구원에 굶주린 제자들이 놀라운 활동으로 밀 껍질을 벗기고 알곡을 거두듯이, 그 몸에서 믿음의 빛을 향한 마음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지만, 예수께서는 새로운 은총의 선물을 주셔서 율법의 나태를 은총의 수고로 바꾸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1사무 21,1-6을 인용하여 이에 대해 응답을 하신다. 그 내용은 다윗과 그 일행이 보통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지성소의 떡을 먹었지만, 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다윗과 그 일행의 배고픈 상황은 율법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관례에 매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의 준수보다도 현실적으로 더 절박한 인간적 요구를 채워주는 것이 우선이다. 인간이 있고 나서의 율법이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율법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의 필요가 희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율법 그 자체를 지키는 것보다, 율법에 담겨있는 근본정신을 잘 깨달아야 한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우선 인간을 위한 사랑이 담겨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마태 12,11)라고 책망하시면서 인간을 무시한 율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법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고 율법이 있다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이미 “안식일의 주인이다.”(5절) 하신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올바로 실천하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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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코린토 신자들은 바오로 편과 아폴로 편으로 갈라졌지만, 바오로와 아폴로는 편을 가르고 세력을 모으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힘과 영예를 가진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을 교회의 기초라고 생각하지만, 바오로 자신은 하느님께서 사도들을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1코린 4,9)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사도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면 오직 그가 멸시와 박해를 받았던 것, 중상을 받아도 그것을 반박하며 스스로 정당함을 밝혔던 것이 아니라 모욕을 견디었던 것, 쓰레기 취급을 받았던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일까요?
사도는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고, 자신이 약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음과 약함은, 코린토 1서 1장에서 하느님의 속성으로 일컬어졌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힘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키시거나 지혜로 사람들을 논박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셨다면 인간은 자신의 힘과 하느님의 힘, 자신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를 겨루어 보고, 자신의 힘과 지혜를 다 써 보고 나서야 하느님 앞에서 패배를 인정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힘과 지혜가 아니라 십자가의 약함과 어리석음으로 인간에게 도전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께서 자신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이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하느님을 선포하는 사도는 약하고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리석음과 약함으로 경쟁합니다. 누구보다 약하고 누구보다 어리석어질 수 있는 것, 그것이 사도의 힘입니다. 그런 사도에게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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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자비 없는 종교는 폭력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1-5)
1)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12,1) 예수님께서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한 일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변호해 주신 것도,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그랬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심심해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의 기준으로는, 배가 고파서 그랬더라도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입니다. 탈출기와 신명기의 ‘십계명’을 보면,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이 분명히 있습니다.(탈출 20,10; 신명 5,14)
밀 이삭 몇 개를 뜯어 먹은 것을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리사이들은 그것도 곡식을 추수하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되는데, “밀 이삭 몇 개라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가 바리사이들의 엄격하고 철저한 율법 준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엄격하고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2) 바리사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좋은 예가 마카베오기 상권에 있습니다. “...... 그들은 대항하지 않았다. 돌을 던지지도 않고 자기들의 피신처를 봉쇄하지도 않고, ‘우리는 모두 깨끗한 채로 죽겠다. 너희가 우리를 부당하게 죽였다는 것을 하늘과 땅이 증언해 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아내와 자녀와 가축과 더불어 죽어 갔다. 죽은 이는 천 명이나 되었다.”(1마카 2,36-38)
천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는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적군이 공격하는데도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죽었습니다. <최소한의 방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은, 안식일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사이들보다 더 대단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마타티아스와 그의 벗들이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며, 서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 형제들이 한 것처럼 한다면, 우리가 모두 목숨과 규정을 지키기 위하여 이민족들과 싸우지 않는다면, 이제 곧 그들은 이 땅에서 우리를 몰살시킬 것이다.’ 그날에 그들은 이렇게 결의하였다. ‘안식일에 우리를 공격해 오는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든 맞서 싸우자. 그래야 피신처에서 죽어 간 형제들처럼 우리가 모두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1마카 2,39-41)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에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이유로 그냥 죽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안식일이라고 해도 전투를 해서 국가와 민족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3) 마르코복음을 보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마르 2,27) 안식일 계명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들은 전부 다 사람들을 구원하고 살리기 위해서 내려 주신 것이지, 억압하고 죽이려고 내려 주신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항상 ‘법’보다 ‘사람’이 위에 있습니다.> 사실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명령의 본래 취지는,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만 해야 하는 종들을 쉬게 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4-15)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아도 굶을 걱정이 없는 사람도 있고,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차이를 무시하고 양쪽에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과 뜻이 같습니다. ‘사람의 아들’, 즉 메시아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구원 활동이 안식일 규정 적용의 기준이라는 것, 즉 안식일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마태오복음을 보면,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마태 12,7) 자비 없는 법, 자비 없는 종교는 폭력일 뿐입니다. 그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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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한만옥 토마스 신부님]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의 일이다. 마침 금요일이었는데 오후가 되자 온 거리가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의가 유다교 신자이고, 그래서 지금도 안식일을 지킨다.
해가 지면서 하루가 시작되고 다음날 해가 질 때 하루가 끝나는 그들의 전통 관습에 따라 금요일 저녁에 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안식일은 하느님께 바쳐진 날이고, 허용된 것이 아니면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는 것이 안식일법이다.
금요일 저녁 호텔에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몇 명 탔는데 그들은 우리 일행에게 “6층 좀 눌러주세요” 하고 청하는 것이었다. 안식일법에 엘리베이터 단추를 눌러도 된다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란다. 당연한 일이다. 안식일법이 만들어질 때는 엘리베이터가 없었으니까.
오늘날에도 그들은 그렇게 철저하게 안식일법을 지키고 있었다. 율법을 지키려는 그들의 자세가 감탄스러웠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은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하고 묻는다. 율법을 법조문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는 물론 경계해야 하지만 율법을 지키려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들이나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세만큼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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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루카 복음은 구원의 완성과 그 기쁨을 노래하는 복음입니다. 더 이상의 기다림도, 더 이상의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신 주님을 맞이할 넉넉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애써 가꾸어야 할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신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만끽할 여유가 있으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 스며든 시간적 배경도 끝자락의 완성을 암시합니다.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비는 것은 추수할 때의 행동이지요. 대개 성경 안에서, 추수는 이른바 종말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과도기가 아니라 이제 다 이루어졌음을, 예전의 약속이 이제 다 이루어졌음을 ‘추수’라는 이미지가 밝히 드러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래라저래라 할 이유도,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가릴 이유도, 좀 더 나은 내일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논박할 이유도 없습니다. 완성의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고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완성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많이 부족해 보이고, 아직 멀었다 싶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모두 부자고 성공하였으며, 그래서 값진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서로 위로하고 배려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행여 누가 배고플까, 행여 누가 울고 있을까, 그래서 행여 누구라도 완성의 시간에 누릴 기쁨의 잔치에서 소외될까 고민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입니다.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배고프지 않게 우리를 먹여 주십니다. 그리고 변호해 주십니다. 우리는 뒷배가 아주 든든한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넉넉하여 나눌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멋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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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가난한 이가 남의 밭에서 아직 추수하지 않은 곡식을 얼마간 잘라 먹는 것은 율법상 허용된 일입니다(신명 23,26 참조).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 남의 밭에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일 자체는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바리사이들은 그것이 ‘안식일에 행한 노동’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와 관련한 명백한 규정이 오경의 율법에는 없으며, 바리사이 자신들이 지키던 구전 율법을 근거로 내세운 것이었습니다.
구전 율법을 집대성한 미쉬나에는 안식일에 금지된 서른아홉 가지 노동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안식일에 꽃이나 열매를 잘라서는 안 된다거나 알곡 한 톨도 까부를 수 없다는 세부 규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확과 탈곡에 관한 이런 규정들은 본래 노동을 금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성소에서 하느님께 봉헌하는 거룩한 빵을 합당한 절차를 통하여 마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과거에 이 거룩한 빵을 속인인 다윗과 그의 일행이 허기져 먹은 일이 있었는데(1사무 21,1-7 참조), 바리사이들이 이를 두고는 아무 비난도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다윗의 주님’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당신께 사람이 만든 안식일 규정들을 덧씌우고 속박하려 들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아집과 완고함을 짚어 깨우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경직된 사고와 잣대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옥죄고 단죄하는 마음으로는 주님의 길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되는 길’(제1독서 참조)은, 비록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어 먹을지언정, 착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 가까이에서 황금빛 밀밭을 자유로이 따라 걷는 그 삶 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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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6,5)
우리 말 속담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 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속담의 뜻은, 팔은 안으로는 굽혀도 팔꿈치 있는 바깥쪽으로는 굽히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편들게 마련이고 정이 쏠림은 인지상정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속담의 의미처럼 자신과 관계의 거리에 의해서 안팎을 구분 짓고, 가까운 사람들만이 곧, 끼리끼리 교류하고 관계하고 살아간다면 집단이기주의나 특정 집단의 해괴한 문화로 변질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지적하는 율법 학자들 앞에서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도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은 제자들을 보고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6,2)라고 바리사이파 사람 중 몇 사람이 지적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야단치시기보다는 오히려 제자들을 두둔하시고 감싸시며 바리사이파들을 오히려 야단치셨습니다. 혼란스러운데, 왜 예수님은 잘못한 제자들을 나무라시거나 교정시키시기보다 두둔하신 걸까요? 아무튼 이런 계기를 통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에 오래도록 걸린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시작됩니다.
이 안식일 논쟁은 예수님의 공생활 내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지속된 갈등이자 논쟁의 쟁점이었으며 급기야 죽음에까지 이를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담론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생각하는 안식일과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자 했던 안식일은 관점의 차이뿐만 아니라 그 실행에 있어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어서 그토록 집요하고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게 되었었죠. 이런 배경에서 성서에는 안식일 법에 얽힌 예수님과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대립이 여러 군데 묘사되어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안식일 법을 약자들에게만 혹독하게 적용하였고 그 결과 사람을 살리는 법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법으로 안식일 법을 악용하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법의 본래 의도를 회복해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살리는 법으로 해석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차단된 관계를 허물고 소통하시기 위해서 그 장벽을 치우려 했던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7)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의 안식일 법에 대한 의도와 의지가 잘 드러나 있고, 상대적으로 이 말씀은 그 시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도전이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지만도. 결국 예수님의 의도는 안식일 법을 포함한 어떤 법도 인생의 목적과 같이 절대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곧 안식일 법을 포함한 율법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중요하기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안식일 법을 포함한 율법에다 구멍을 뚫고 벽을 허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명이 아닐까, 라고 저는 믿습니다.
편안하게 숨을 쉬는 날인 안식일을 회복하기 위해선,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시130,2)라는 시편이 제시한 그림처럼, 하느님의 따뜻한 품에 안기어 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편안하게 숨을 쉬기 위해서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전부를 내어 맡길 수 있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하느님의 품으로 나가야 하고, 그 품에 안겨서 자신이 했던 것을 즐기고 만끽하며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곧 안식일이라 봅니다. 주일 미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소극적인 차원 보다 하느님의 품에 편안하게 숨을 쉬고 머물며,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고 체험하면서 살아왔고 살아가야 할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며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일깨워 주는 거룩한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주일을 귀하게 여기고 지켜나갑시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6,5),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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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언자’라는 책의 작가로 유명한 칼릴 지브란은 ‘우리의 불안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통제하는 데서 시작된다’라고 말했습니다. 크게 공감되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통제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공부만이 아니라 취미 등의 일상생활까지 통제합니다. 자녀의 미래를 위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아이가 ‘잘못되지 않을까?’라는 불안 때문입니다. 하지만 통제할수록 더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자기의 통제로 아이가 잘못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더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큰 질병 중 하나가 마음의 병입니다. 이 마음의 병 한 가운데에는 늘 불안이 있습니다. 단순히 미래에 관한 생각, 걱정 때문이 아니라, 나와 가족과 또 만나는 이웃을 통제하려는 욕심에서 마음의 병이 더 커지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많이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남보다 잠도 줄이는 등 더 나 자신을 채찍질했었습니다. 미래를 통제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미래는 나의 시간이 아닌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는 시간입니다. 결국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을 더 의미 있게 사는 데 집중하다 보니 저절로 미래의 ‘나’가 바뀌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미래를 통제하려고 해서 굳이 불안 속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통제가 필요한 유일한 시간은 지금. 바로 ‘현재’뿐입니다.
바리사이 몇이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바리사이를 비롯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불안했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미래가 불안해집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었고, 군중이 모이는 것을 싫어했던 로마는 군대를 보내서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불안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봐야 할 것은 ‘지금’이었습니다. 지금 자기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을 알아야 했고, 지금 예수님 뜻에 맞춰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불안으로 통제를 계속해서 합니다. 자기를 통제하고, 가족을 통제하고, 이웃을 통제하고…. 이렇게 불안으로 통제하려고 할 때, 지금 자기가 해야 할 것을 떠올려야 합니다. 분명히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지금에 충실한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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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간혹 신자 분들이 ‘미사 참례를 어디부터 해야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글쎄요? 병자 봉성체를 하게 되면 전례문은 짧지만, 참회와 복음 말씀 듣기, 그리고 주님의 기도 후 영성체 예식을 합니다. 준비된 마음으로 영성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미사 참례를 하러 왔는데 시간을 잘못 알고 온 거예요. 벌써 신부님 강론도 끝나고… 주님은 모시고 싶고…어쩌면 좋을까?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어서 준비하고 왔건만, 주님과의 일치를 갈망하는가? 성체를 모셨다는 나의 만족을 위해서 영성체하는가? 무슨 답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가슴에 답이 있습니다.
법은 함부로 어겨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인간이 만든 실정법도 존중해야 합니다. 법은“공동선을 지향하면서 반포한 이성의 명령”(성 토마스 아퀴나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거나 억압할 때는 어길 수 있습니다. 그래야 법의 의미를 지킬 수 있고 사람도 살기 때문입니다. 법의 자구에 매여 있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법의 해석방법을,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6,5). 하시며 확실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받은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안식일의 휴식 규정과 해석에 관한 결정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마태12,5-7). 자비를 거스르는 법은 어길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파괴해야 하는가? 그 누구도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법의 자구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못살게 구는 법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2,16). 그리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법규에 얽매여 사랑하기를 멈춰서도 안 됩니다. 미사 참례를 하시면 정성껏 준비하여 성체를 믿음으로 모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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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을 만나는 사람>
루카 6,1-5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을 만나는 사람>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루카 6,1)
밀 이삭 뜯어
비비던
손에
꽂힌
차가운
눈으로
사람을 만나는 사람
참을 수 없는
굶주린
배를
품는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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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비움의 사랑, 비움의 여정>
-주님은 분별의 잣대-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시편145,18)
새벽 일어나자 마자 인터넷을 열어 보는 것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대략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참으로 다양하고 깊게 전개되는 양상입니다. 새삼 삶의 중심인 하느님 안에 확고히 자리잡고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교황님 기사도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변두리의 교황은 드디어 파푸아뉴기니에 도착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45차 해외 사목 방문중 3일간 일정으로 두 번째로 오세아니아주 파푸아뉴기에서 여행이 시작되었다. 파푸아뉴기니는 바티칸으로부터 19,047km 떨어진 곳이다. 비행기로 가장 멀리 여행중인 교황 프란치스코이다. 참으로 얼마나 큰 일이 일어나는지, 그가 얼마나 많이 배려하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세계 중심부의 바티칸에서 변두리 파푸아뉴기니까지 미치는 교황님의 넓고 깊은 시야가 경탄스럽습니다. 교황님의 비움의 사랑, 사랑의 절정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을 보는 듯 합니다. 날로 비워가면서 내면을 넓혀 주님을 닮아감이 답입니다. 비움의 사랑, 사랑의 절정은 다음 바오로 사도의 고백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있고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집없이 떠돌아 다니고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된 비움의 절정을 보여주는 바오로 사도요, 파푸아뉴기니 사목여행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케노시스 즉 하느님의 비움의 절정인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 역시 이런저런 비움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을 닮아갑니다. 삶에서 오는 모든 고난과 시련, 고통을 비움의 계기로 삼아 날로 겸손해지면서 주님을 닮아감이 지혜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공감이 갑니다.
“눈과 귀가 끌리는 곳보다 마음의 중심이 원하는 바를 잘 살펴보라.”<다산>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색을 좋아하듯 하는 자를 보지 못했다.”<논어>
마음의 중심이 원하는바 하느님이요, 덕을 사랑하는 자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안식일에 밀밭사이를 가로 질러 지나던 예수님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자 시비를 거는 바리사이입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오?”
하느님 마음에, 사랑에 정통해 있는 예수님입니다. 안식일법이 아닌 사랑의 법으로 분별하는 예수님입니다. 안식일법이 아닌 사랑의 잣대로 보면 배고픈 현실에서 밀이삭을 뜯어 비며 먹은 제자들은 무죄입니다. 다윗의 예를 들어가면서 제자들을 옹호하는 예수님입니다. 다윗 또한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해 있기에 사제만이 할 수 있는 이런 제사 빵을 나눕니다. 자신을 비워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한 예수님이었기에 이런 용기와 분별의 지혜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자신을 비워 하느님과 일치되었기에 이런 확신에 넘친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였을까?” 물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답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비움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과의 일치를 깊이해 주며 올바른 분별의 지혜를 지니게 합니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시편31,20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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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버지가 필요해>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을 질타하는 내용입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질책성 질문을 하면서 자기가 벌어서 부자가 된 양 우쭐거리고 자랑하는 신자들을 질타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들 자신은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다.”라고 하며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신자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로 생각하며 타이르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옛날 우리 부모들이 자신은 못 먹고 못 쓰며 자식을 서울로 보냈는데 자식들은 그 돈으로 마치 부잣집 자식처럼 행세한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아무튼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복음을 통해 그들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이는 신자들이 세속적으로 교만해지지 않고 영적으로 겸손해지게 하기 위함이지요.
아버지의 진정한 역할은 그저 자식들 배부르게 하고 학교에 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식이 자기 인생을 겸허하고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인생 길잡이 하는 거지요.
그리고 세속 아버지가 자녀의 참 행복을 위해 이러해야 한다면 영적인 아버지는 더더욱 그래야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코린토 신자와 달리 영적인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바오로 사도와 같은 영적인 아버지가 이 땅에서 필요하고,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영적 아버지를 필요로 해야 합니다.
이 말은 다른 누구보다 저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저야말로 영적으로 교만하기에 영적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저는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 없이 컸고 그것이 어렸을 때는 작지 않은 콤플렉스였습니다.
이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곧 아비 없는 후레자식 소리 듣지 않기 위해 저는 늘 아버지를 대신할 ‘제 안의 아버지’를 두고 살았습니다. 제가 저도 되고 제가 저의 아버지도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생을 살아와서 그런지 아니면 아버지의 교만 유전자가 제게도 있기 때문인지 저는 인간적으로 교만하고 영적으로는 더 교만합니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필요한데 문제는 제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저는 여러 사람의 영적 동반이라는 것을 해주면서 영적 아버지 소리를 듣는데 저는 누구의 영적 동반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여러 말 가운데서 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이 유독 제 마음에 와닿았고 마음을 찌르는데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가기 위해서는 저뿐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 사는 동안 영적 아버지가 필요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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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법의 존재 이유!>
오늘 복음(루카6,1-5)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6,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루카 6,3-4) 그리고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루카 6,5)
'법의 존재 이유!'
법의 존재이유는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인 율법의 본질은 '너를 살리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법의 문자적인 적용보다 법의 본질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곧 법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법 그 자체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런 예수님께 들이댔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법(규정) 그 자체에만 얽매이게 되면, 법의 노예, 규정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면 법(규정)의 본질에 이르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법과 규정의 본질은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고 보호하는 것이며, 너를 살리는 일'입니다. 법과 규정 그 자체에만 머무르지 말고, 그 너머에 있는 본질을 바라보고 본질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내가 되도록 오늘도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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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루카 6, 2)
소중한 가을의
시작입니다.
안식일은
삶의 자세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사람을
존중하는
평화로운
가르침이
안식일입니다.
개개인을
속박하고
규제하는
억압이 아니라
안식일은
화합이며
관계의 진실한
대안입니다.
어떤 규정이든
기계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현시대에
맞지않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흘러가서는
안됩니다.
사랑과 연민을
없애는
안식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바르게 사는
방법을
일깨워주는 것이
안식일의 참된
규정입니다.
안식일이란
그래서
얽매임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도움을
주고 베푸는
위기의 진실한
치유입니다.
세속적인
이해 관계로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의
마음을 기르듯
지혜롭게
그릇된 견해를
극복하는 것이
안식일이
나가야 할
방향입니다.
안식일은
참된 생활을
지향합니다.
지킬 것을
지키는 것이
깨어있는
안식일의
정신입니다.
복음의 삶을
위하여
해야할 일을
하며 복음으로
나아가는
안식일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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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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