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기차의 도착'
세계적으로 영화의 시작은 1888년, G.이스트먼이 셀룰로이드에 의한 ‘롤 필름(roll film)’을 제조하면서부터이고, 몇 가지 실험 등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L.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라프라는 촬영기와 영사기를 발명해 1895년, 그들의 첫 영화 기록물인 <공장의 출구>와 <기차의 도착>을 각각 1분 정도씩의 영상으로 제작해 상영함으로써 최초의 영화가 탄생하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로 영화를 본 사람은 조선 왕조 제 26대 임금 고종이다. 1899년 미국인 여행가 엘리아스 버튼 홈즈(Elias Burton Homes)가 고종앞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상영하였다고 하는데 이 신기한 영상을 본 고종은 엘리야 버튼에게 각종 하사품을 내려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 외에도 고종은 전구 사용, 전화 통화, 레코드판 사용등 각종 부분에서 한국 최초 이용자로 기록되고 있다.
↑ 대열차 강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봉된 영화는 에드윈 포터가 만든 '대열차 강도'가 1903년에 개봉을 합니다.
↑ 의리적 구토 기사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라 하면 1919년에 만들어진 의리적 구투(義理的 仇鬪)입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탈해 간 1910년대에 유입된 일본의 신파극(新派劇)이 당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 뻔한 내용에 식상해하는 관객들을 잡기 위해서 연쇄극((連鎖劇, kinodrama)이라는 게 나타나게 되었다.
연쇄극이란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야외장면이나 활극 장면을 영화로 찍어 연극과 연극 사이, 무대 위의 스크린에 삽입함으로써 영화와 연극이 연쇄되어 줄거리를 이어가는 형식으로 영화라기보다는 연극이라 할 수 있는데, 최초의 연쇄극은 김도산 감독의 <의리적(義理的) 구투(仇鬪)>로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영화라 할 수 있는 <경성시가(京城市街)의 경(景)>에 삽입 되었고, 이로써 1919년 10월 27일은 한국 영화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연쇄극은 완전한 의미의 영화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한강철교, 장충단, 청량리, 전미교, 남대문 정거장, 뚝섬, 전곶교, 전차, 기차, 자동차, 노량진, 공원, 기타 경성의 명승지를 찍은 활동 사진이 연극 중간에 상영되었다고 합니다.
↑ 단성사 사장 박승필
상영된 필름은 35㎜ 1권 분량이었다고 하지만 남아 있는 것은 단 한 컷도 없다.
'의리적 구토'는 단성사 사장이었던 박승필이 제작 하고 김도산이 각본, 연기, 연출을 담당하였다. 촬영과 편집은 단성사의 후원을 받아 일본인 미야가와 소우노스케를 초청하여 이루어졌다.
이 극의 그 내용은
「 송산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불우하게 자란다. 재산을 욕심내는 계모의 간교한 계략으로 인해 집안에서 재산을 둘러싼 알력이 심하였다. 송산은 복잡한 집을 떠나 보람있는 일을 하려고 결심한다. 그는 뜻을 같이
하는 죽산과 매초를 만나 의형제를 맺는다. 계모는 재산을 차지하려고 송산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죽산과 매초는 분노하며 칼을 휘두르려고 하는데 송산이 만류한다.
송산은 가문과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참지만 매일 괴로운 마음을 술로 달랜다. 계모 일당에
의해서 송산의 가문이 위기에 처하여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송산은 눈물을
머금고 칼을 든다.」였다.
↑ 김도산
박승필과 김도산은 이 영화 이후로도 시우정(是友情), '형사 고심' '의적' 등의 연쇄극을 더 만들었으며,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지기(知己), 장한몽(長恨夢), 학생절의(學生節義) 등의 연쇄극이 만들어지는 등 1919년과 1920년에 연쇄극 형태의 활동사진들은 계속 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연쇄극이 완전한 영화가 아니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일단 연극 중간에 들어간 상영필름이었으며, 분량이 너무 짧고 그 필름에 연극 제목을 붙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 당시의 단성사
최초의 한국 영화로 언급되는 작품들로는 의리적 구토와 같은 시기에 상영한 경성 전시의 경(京城全市의 景)과 1923년에 상영한 국경, 월하의 맹서 등이 있다.
'경성 전시의 경'은 역시 박승필이 제작하고 일본인 미야가와 소우노스케가 만든 다큐멘타리였는데,
의리적 구토와 동시 상영되었다.
'국경'은 1923년 1월 13일 단성사에서 단 하루 상영된 후 곧바로 중지되었는데, 출연진은
신극좌 단원 중심의 조선인이었던 반면, 다른 스탭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 작품이 1922년에 일어난 일련의 항일사건들과 관련이 있어서 총독부에서 상영중지를 했다. 게다가 아쉽게도 이 영화의 필름도 이젠 찾을 수 없다.
영화 '국경' 상영금지 기사
이때까지는 대부분 모두 일본인과 함께 하는 등 순수 한국인만의 영화가 없었다. 최초로 한국인들이 모여서 만든 영화는 바로 '월하의 맹서' 이다.
이 영화는 조선총독부 체신부가 지원한 저축 장려 영화인데 각본, 감독, 출연이 모두 한국인에 의해 이루어진 영화였다.
↑ 월하의 맹서로 추정되는 사진
1923년에 이르러 비로소 일관된 극적 내용을 가진 영화가 일반에게 공개되었는데, 비록 조선총독부 체신국의 돈으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윤백남(尹白南)의 <월하의 맹서>는 극영화로서 한국 영화의 효시라고 할 수 있으며 무성영화 시대의 막을 열었다.
월하의 맹세(1923년)
장화홍련전(1924년)
최초의 흥행용 장편 영화는 1923년에 만들어진 춘향전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순수 한국인이 만든 건 김영환 감독의 '장화 홍련전'으로 1924년도에 만들어졌다. 이것은 제작진과 배우가 모두 한국인이었다.
최초의 발성영화로는 1935년 이명우 감독, 이필우 촬영의 '춘향전'이다. 당시 상황과 맞물려서 순수하게 한국인들로만 이루어져서 찍은 건 별로 없는 것 같다. 월하의 맹서도 따져보면 조선 총독부가 의뢰해서 만들어진 영화였기에.
하지만 영화계에서는 최초로 제작하고 상영한 것에 의의를 두어 의리적 투구가 개봉한날인
1919년 10월 27일을 현재 '영화의 날'인 10월 27일로 제정합니다.
↑ 영화 아리랑
같은 해에 일본인 하야가와(早川松次郎)에 의하여 만들어진 <춘향전>은 비록 제작, 각본, 연출 등 중요한 부분을 일본인이 맡아서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고 한국 배우가 출연하였으며 한국 관객을 대상으로 하여 흥행에 크게 성공함으로써 본격적인 한국 영화의 출발점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연기자로서 두각을 나타낸 나운규는 1926년 <아리랑>에서 시나리오, 감독, 주연을 겸함으로써 강렬한 개성을 영화 속에 부각시켰다. 그때까지의 영화가 호기심의 반복과 기술적 습작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느낌을 주었다면, 나운규는 처음으로 한국 영화를 예술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았다.
<아리랑>이 나온 1926년에서 최초의 발성영화인 이용우(李用雨) 감독의 <춘향전>이 나온 1935년까지 10년 동안을 무성영화의 전성기라고 하면, 나운규의 영화가 한국 영화의 정점을 이룬 것이다.
↑ 홍성기
한국 최초의 컬러 영화는 1949년에 만든 홍성기 감독이 만든 16mm 컬러 영화 '여성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