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영웅들>(1980)
우리와 나 자신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부조리한 죽음의 상황은 무엇일까? 그 상황의 이유와 결과에 정말이지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어 허무하고 허탈하고 허깨비 같은 죽음. 멀쩡히 가게에서 파는 제품을 구입하여 쓴 결과로 사람이 죽고 성별이 살인의 이유가 되는, 이미 상상 따위 필요 없는 현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와 시인 자크 드뉘망이 말했듯 자연사란 없고 그래서 모든 죽음은 자연사이지만. 그래도 부득부득 더욱 부조리한 상황을 찾는다면 나는 결국 전쟁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이 땅이 아직도 공식적으론 휴전 상태임을 고민하며 살지 않는다. 북의 사회주의 지옥과 남의 자본주의 지옥, 양쪽 모두 세습의 나라에서 각자의 입장으로 지옥을 버티느라 애써 전쟁까지 상상할 겨를이 없다. 그런데 왜 하필 전쟁인가? 어쩌면 나는 그 상황을 피하지 못할 나 자신의 부조리함이 더 두려운 것인지 모른다. 동원령에 따라 정해진 집결지에 순순히 모일 나와 우리의 모습. 거절할 용기보다 더 큰 두려움을 따라서, 죽지 않기 위해 죽으러 가는, 병역을 통해 잘 훈련된 기이한 죽음의 억지력.
전쟁영화를 만드는 목적은 관객에게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희생자들의 숭고함을 전하여 지난 전쟁의 의미와 평화의 소중함 같은 걸 깨닫게 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제대로 만든 전쟁영화는 사실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 훌륭한 전쟁영화는 오직 부조리만을 전한다. 위대한 전쟁 영웅을 내세워 전하는 메시지 같은 것은 없다. 연쇄하는 죽음의 상황에서 영웅적인 희생이란 훗날에 덧붙여진 의미 부여다.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겨우 살아남았다면 운이 좋았던 것이다. 전쟁은 결코 좋은 의미가 있을 수 없다. 바트 심슨의 말대로 인류 역사에서 좋은 전쟁이란 <스타워즈>뿐이다. 영웅만 있는 가상의 전쟁. 현실의 전쟁엔 지옥만 있었다. 한국에 DVD로 출시되어 있는 <지옥의 영웅들>은 두편이 있다. 하나는 돈 시겔의 <지옥의 영웅들>(Hell Is for Heroes, 1962)이고, 다른 하나는 새뮤얼 풀러의 <지옥의 영웅들>(The Big Red One, 1980)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한글 제목에 ‘지옥’과 ‘영웅’이 들어가는데, 두편 다 분명히 지옥은 보이지만 영웅은 나오지 않는다.
실제 죽음에 근거한 허구적인 삶
돈 시겔 영화에서 스티브 매퀸이 연기한 리스는 극의 초반부 행정병이 잘못 쏜 총알에 죽을 뻔한다. 때는 2차 세계대전. 잘못을 저질러 부사관에서 병사로 강등되어 지크프리트 전선으로 배치된 그에게 죽음이 그렇게 슬쩍 지나쳐간다. 적보다 병력과 물자 모두 열세인 상황에서 부대는 1개 분대만을 남겨둔 채 지원을 청하러 떠났고, 남은 인원들은 아직도 참호에 많은 병력이 있는 것처럼 꾸며내 하룻밤을 버텨야 한다. 지프를 탱크인 척 몰아대고, 돌멩이를 담은 탄 박스를 흔들어 병력이 많은 척하고, 독일군이 설치한 감청 마이크에 들으라고 가짜 보고를 하는 전개는 코믹하지만, 곧 판단과 선택의 상황이 온다. 아군 참호에 접근한 적과의 조우 이후, 이쪽의 병력이 본진에 읽혔다면 바로 전멸당할지도 모르는 상황. 남은 대원들은 중대가 온다는 소문을 믿고 버틸 것인가, 적의 기관총 토치카를 과감히 공격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한다. 분대장이 죽자 리스의 판단에 따라 공격을 택한 세 대원은 용감히 폭약을 메고 지뢰밭을 기어가다 지뢰와 적의 총탄에 리스만 살고 둘은 죽는다. 죽음이 또 리스를 지나쳤다. 총에 맞은 대원이 죽어가며 “내 창자!!”(My Guts) 하고 외치는 비명이 “My God”처럼 들리는 와중에, 중대를 데리고 돌아온 소대장은 리스를 군사재판에 세우겠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날이 밝자 시작된 전면전. 뜬눈으로 기다린 리스는 전날 자신을 두번이나 놓친 죽음을 향해 다시 간다. 간밤에 실패한 토치카 파괴 작전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지뢰밭을 지나 그 자리에 그대로 떨어져 있는 폭약을 집어 토치카에 마침내 던져넣지만, 적은 들어온 폭약을 곧바로 내뱉어버린다. 그러자 기관총 세례를 온몸에 뒤집어쓴 리스는 직접 폭약을 안고 토치카 안으로 굴러들어간다. “난 안 보이는 건 안 믿어요”라며 교회에서까지 전리품을 챙기던 분대원 하나가 리스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성호를 긋는다. 지크프리트 전선의 그 많고 많은 참호와 토치카 중에 딱 하나의 토치카를 파괴하면서 끝나는 영화. 러닝타임 딱 90분인 영화가 한 이야기는 정말로 이것뿐이다. 리스는 위대한 영웅일까? 그는 그저 자기 판단에 책임을 졌고 그것만으로도 그는 영웅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지옥은 영웅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
새뮤얼 풀러의 영화에서 리 마빈이 연기한 분대장은 이미 1차대전을 겪었고, 전쟁에 지칠 대로 지쳤다. 그의 1분대원들도 소년에서 군인으로 똑같이 지쳐간다. 처음엔 살인(murder)과 죽이는(kill) 것 사이에서 갈등하던 분대원 그리프(마크 해밀)는 말미에는 홀로코스트 현장에서 조우한 독일군 병사에게 탄창을 갈아 끼워가며 총알을 박는다. 실제로 2차대전에 제1보병사단(Big Red One)으로 참전한 감독이 자신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거의 자전적인 전쟁영화. 개전에서 종전까지 분대원들을 따라 거쳐가는 전장들 중 노르망디상륙작전의 오마하 해변은 특히 인상 깊다. 감독은 부족한 예산 대비 반드시 필요했을 스펙터클을 도리어 시(詩)적인 이미지로 채운다. 그는 죽은 병사들의 쏟아진 내장을 보여주는 대신 피로 물든 바닷물 속 그들 손목의 시계를 보여준다. 같은 시각에 멈춰진 그들의 시곗바늘. 이곳에 영웅은 없고, 연대장의 말처럼 두 종류의 인간― 이미 죽은 자와 곧 죽을 자만 있다. 전장의 시간은 그 사이에 멈춘다. 앞의 영화에서 스티브 매퀸이 어느 정도 반영웅(anti-hero)이라면, 이 영화의 분대장과 분대원들은 전적으로 영웅이 아니다(non-Hero).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감독이 시나리오 첫머리에 적어놓았다는 글귀처럼, ‘실제 죽음에 근거한 허구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문장은 모든 전쟁영화의 시작 화면에 넣어야 마땅할 것이다.
군인들이 도착할 사후세계
시드니 폴락의 <고성을 사수하라>(Castle Keep, 1969)는 앞의 영화들에서 만났던 군인들이 도착할 사후세계처럼 느껴진다. 덜 사실적인 대신 더 부조리하고, 형이상학적인 전쟁영화인 이 작품에선 부상당한 미군 8명이 벨기에의 어느 고성에 도착한다. 작가 지망생인 흑인 벤자민 일병이 화자가 되어 “우리 모두는 두번 죽었고 어떤 이는 세번 죽었다”고 내레이션을 한다. 10세기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성 안에는 수많은 벽화와 회화와 조각이 있고, 백작과 그의 누이인지 조카인지 아내인지 모를 여인이 천년 동안 성을 지키고 있다. 유령 부대를 맞이한 흡혈귀의 성? 애꾸눈 팰코너 소령(버트 랭커스터)은 예배당에서 꽂을대를 지휘봉 삼아 부하들에게 이 성을 독일군의 전진을 막을 최후의 거점으로 삼을 것을 명한다. 앞서 똑같이 독일군을 맞이했던 백작은 점령자가 누구건 간에 성을 지키기만 하면 되는 입장이다. 소령은 곧장 백작의 아내와 잠자리에 들고, 병사들은 마을로 나가 세계의 끝, 여자친구가 아니라 매음굴 ‘레드 퀸’으로 향한다.
레드 퀸의 늙은 마담은 병사들에게 묻는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중이죠?” 이 영화의 군인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이지만 어디론가는 가려고 한다. 레드 퀸 대신 맞은편의 베이커리로 들어간 로시 중사(피터 포크)는 남편이 죽고 없는 제빵사의 아내에게 자신이 제빵사라고 말한다. 그녀가 뭘 원하는지 묻자 그는 “제빵사의 아내와 자식, 그래서 가족과 집”이라고 대답하고 그녀의 남편이 된다. 매음굴 밖에선 전쟁을 거절하고 이탈한 양심병들이 고래고래 찬송을 부르고, 로시 중사는 그들의 머리 위로 총을 쏘며 제발 시민들의 단잠을 깨우지 말라고 일갈한 다음 매음굴에 늘어져 있는 병사들에게 갓 구운 따뜻한 빵을 먹인다. 성으로 돌아온 병사들에게 미술사학자인 대위는 벽화 앞에서 예술사 강의를 하며 ‘전쟁은 절정에 이른 예술’이라 논하면, 병사들은 오로지 섹스만을 떠올리며 되묻는다. “전쟁은 주관적인가요?” 토론의 결론은 ‘군인은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고, 그들은 성을 지키거나 적을 막거나 어느 쪽이든 결국 성을 파괴시킬 것임을 안다. 군인은 싸우지만, 아름다움은 싸우지 않으니까.
성직자인 중위가 성 앞의 장미 정원에서 플루트로 브람스의 자장가를 연주하는 장면이 있다. 근처로 정찰을 나왔다 연주를 들은 독일군이 숲속에 숨어 중위에게 말을 건다. 그는 자신을 런던에서 음악 공부를 했다고 소개하곤 플루트를 넘겨받아 제대로 된 자장가를 들려준다. 중위는 그의 아름다운 연주를 경청하는데, 로시 중사가 그를 총으로 쏴버린다. 피 묻은 플루트를 닦으며 중위는 왜 죽였냐고 묻고, 로시는 대답한다. “살려고요.” 군인도 예술과 문학과 아름다움을 알지만 전장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름다움이 목숨을 구해주지는 않으니까. 살려고 했던 이들은 결국 최후의 공성전에서 우르르 죽어나간다. 피 묻은 빵과 붉은 장미 위로 나치의 탱크와 수천 병력이 밀고 들어오고, 대위는 무너지는 성과 그 안에 담긴 인류의 역사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애꾸눈 소령은 벤자민 일병에게 “작가가 될 거지? 상상력과 통찰력을 가져봐”라고 충고하며 그를 백작 부인과 함께 지하 통로로 도망치게 하고, 성과 함께 기쁜 최후를 맞이한다.
돈 시겔의 영화에서 어느 병사는 말한다. 나쁜 일이 닥쳤을 때는 더 나쁜 일을 상상해 봐, 그럼 견딜 수 있어. 굳이 최악의 죽음을 상정해보는 나의 나쁜 버릇도 이러한 맥락인 것 같다. 치사한 일 같지만, 사실은 영화도 그런 기능을 한다. 밤에 꿈을 꾸지 않는다면 인간은 미치고 말듯이, 영화가 지옥을 다루지 않는다면 세상은 무너질 것이다. 이것이 영화의 억지력이다. 글 박수민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