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대륙횡단철도 건설 이후에도 동서 간의 경제격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철도의 운송능
력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었다. 해운이라는 정답은 일찌감치 나와 있었는데, 동부의 뉴욕에서 남
아메리카의 땅끝 케이프 혼을 돌아 샌프란시스코까지 이르는 거리가 무려 2만 2500㎞나 된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이를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오랜 탐색 끝에 찾아낸 대안이 파나마운하 건
설이었다. 파나마운하를 통과하는 거리는 8500㎞에 불과했다. 파나마운하는 경제적 효과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대서양과 태평양의 해군력을 통합시키는 효과를 불러올 터였다. 이는 미국이 유럽과
아시아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해군은 멕시코전쟁(1846~1848) 때 이미 그 위력이 입증되었다. 미국 군함들은 멕시코의 모든 항구를
철저하게 봉쇄했으며, 1847년에는 육군이 베라크루스에서 멕시코시티까지 진군할 수 있도록 함포사
격으로 길을 터주었다. 함정을 통한 육군의 상륙작전도 승리에 한몫했다. 그 결과 미국은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및 현 미국 남부 일대를 차지했다. 멕시코 영토의 절반을 미국 영토로 만든 것이다. 1853
~1854년에는 흑선함대(왜국 용어)를 이끌고 동경만에 진입하여 왜국의 항복을 받아내기도 했다. 북
군이 남북전쟁에서 승리하는 데도 해군력은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해외기지를 건설하여 해양무역을
진흥시키는 데도 해군력은 꼭 필요했다.
1896년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에 의해 해군차관에 임명된 시어도어 루스벨트(훗날 제26대 대통령)는
강력한 해군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국-스페인 전쟁 때 쿠바전투에서 큰 전공
을 세운 전쟁영웅이기도 했다. 바로 이 전쟁이 파나마운하 건설의 도화선이 되었다. 태평양함대 소속
전함 오리건호가 케이프 혼을 돌아오느라 전투 참가가 늦어지면서 해군 지도부 사이에 대서양‧태평
양 함대의 통합운영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된 것이다. 이는 국가안보를 위해서도 절대로 필요하다
는 인식하에 대통령 직속 <대양연결운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파나마가 아니라 니카라과
운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시진핑의 중국은 이러한 가치를 알고 홍콩의 한 회사를 앞세워 파나마운
하를 무력화시킬 니카라과운하를 건설 중이다.
1901년 대통령에 당선된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니카라과운하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조사에 착수
하려던 때, 프랑스 토목업자 페르디낭드 레셉스는 콜롬비아 정부와 계약을 체결하고 이미 파나마운
하 건설에 착수한 뒤였다. 레셉스는 1869년 수에즈운하(192㎞)를 건설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82㎞에
불과한 파나마운하 건설쯤이야 식은 죽 먹기일 것으로 여기고 건설에 착수했다. 그러나 기후가 온화
한 평원지역을 순조롭게 연결한 수에즈운하와 달리 험준한 산맥을 뚫고 열대우림을 통과하는 파나마
운하 건설은 천양지차였다. 게다가 맹수‧독사‧독충‧모기 등도 비협조적이었고, 말라리아와 황열병도
한때 노동력의 80%를 무력화시키는 등 공사를 방해했다. 프랑스 화가 폴 고갱도 노동자로 참여했다
가 견디지 못하고 남태평양의 낙원 타히티섬으로 떠나버렸다.
1889년 6월, 레셉스가 창업한 회사는 수에즈운하 건설비의 3배에 달하는 2억 8700만 달러의 공사비
를 투입하고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파산하고 말았다. 사고와 질병으로 죽은 노동자도 2만 1900
명에 달했다. 1901년 루즈벨트 대통령이 취임하자 프랑스 투자자들은 투자금의 일부라도 회수하기
위해 파나마운하 건설권을 4천만 달러에 팔겠다고 제안했다. Call! 루즈벨트는 대통령자문회의를 움
직여 니카라과운하 건설계획을 취소하고 파나마운하를 택하기로 결정했다. 1902년 6월 의회는 파나
마운하 건설계획을 승인했다. 콜롬비아는 매년 1025만 달러의 사용료를 받기로 하고 파나마운하 건
설 및 100년 간 사용권을 팔았다.
그러나 콜롬비아 상원이 승인을 거부하자 격노한 루스벨트는 미국 대통령답게 통 큰 우회전략을 썼
다. 파나마 독립군을 지원하여 콜롬비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시킨 것이다. 1903년 11월 4일 파나마가
독립을 선포하자 미국은 11월 6일 파나마공화국을 승인하고 훨씬 유리한 조건에 파나마 정부와 운하
건설 및 사용계약을 체결했다. 미국이 파나마운하의 소유권을 가지고 운하 임대기간을 영구히 연장
한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이 수탈계약에 파나마 국민들의 반대가 점점 거세지자 1999년 12월 14
일, 미국은 파나마운하의 소유권을 파나마에 돌려주었다.
공사가 재개되었지만 고질적인 난공사와 질병은 여전했다. 새 책임자로 부임한 존 스티븐슨은 공사
를 중단시킨 뒤 주변의 습지를 메우고 대대적인 방역을 실시하여 모기부터 박멸한 뒤 공사를 재개했
다. 스티븐슨의 조치로 1905년에는 말라리아와 황열병 환자가 거의 사라졌다. 스티븐슨은 공사장 양
쪽에 철로를 건설하여 물자 소통도 원활하게 했다. 운하도 직선수로식에서 갑문식으로 변경했다. 그
러고도 최대 난공사 구간인 대륙분수령의 수로로 연결하는 데만 7년이 걸렸다. 1913년 5월, 대륙분수
령 양쪽에서 터널을 파 들어가던 두 대의 굴착기가 마주쳤다. 1914년 8월 15일, 운하는 모든 공사를
마무리하고 개통되었다. 1879년 프랑스인 페르디낭드 레셉스가 공사를 시작한 지 35년, 1904년 5월
미국이 공사를 재개한 지 10년 만이었다. 총 공사비는 6억 4천만 달러가 들었다.
2010년, 이명박 대통령이 파나마운하를 시찰하면서
좌절된 한반도대운하의 꿈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대운하는 경제성이 없어 수자원공사도 몇 번 포기한 주먹구구 계획이었다.
대신 이 대통령은 4대강 정비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는데,
좌파 정권이 그 경제적, 환경적 효과를 폄훼하고 마구다지로 보를 부수고 있다.
이 인간들은 지들에게 유리하다 싶으면 국가경제고 국민의 귄리나 이익이고 마구 짓밟는다.
4대강사업은 반드시 필요하고 시급했지만,이명박이 자신의 모교인 동지상고 출신
업자들에게 공사를 몰아준 폐단이 컸다.
개통 후 10년 이내에 파나마운하는 매년 5천여 척의 선박이 왕래하는 성공적인 수로로 정착했다. 이
후에도 미국은 주기적으로 확장과 개선작업을 진행하여 대형 전함‧유조선‧컨테이너선 등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만들었다. 파나마운하는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성장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
라, 세계 경제를 빠른 속도로 통합시키고 성장시키는 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 패권을
노리는 중국은 2014년 12월 니카라과운하※ 건설에 착수했다. 2020년 운하가 준공되면 미중 관계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파나마운하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적어도 긍정적인
효과만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 니카라과운하 ; 니카라과운하는 19세기 초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처음으로 타당성을 제시
하여 미국이 건설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프랑스가 건설을 포기한 파나마운하 건설권을
사들이면서 니카라과운하 건설계획은 백지화되었다. 2013년 6월 니카라과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홍콩의 홍콩니카라과운하개발그룹(HKND)에 총연장 278㎞의 운하 건설권을 파는 계약을 체결
했다. HKND이 100% 자체 자본금으로 운하를 건설하는 대신 매년 니카라과에 1천만 달러의 사용권을
지불하고 100년 동안 수익을 독점하는 조건이다.
아메리카대륙에서 아이티공화국 다음으로 가난한 니카라과는 운하 건설로 인한 일자리 창출 및 운하
를 통과하는 선박과 관련한 부대수익으로 국민소득이 크게 증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니
카라과는 환경영향평가도 생략하고 HKND에 원주민 소유의 땅을 무상으로 사용하도록 허가하는 등
공사 시작 전부터 여러 가지 잡음이 일었. 국제사회에서는 HKND로부터 은밀하게 전해졌을 천문학적
인 뇌물 때문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의 음흉한 속내다. 중국 정부는 운하 警備를
핑계로 소규모 군대를 파견한 뒤 니카라과의 동의도 없이 차츰 병력을 늘려나갈 것이며, 종당에는 흐
루시초프의 쿠바 미사일기지 건설 시도처럼 니카라과를 미국 공격의 교두보로 삼으려 할지도 모른
다. 그때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에 접근하는 소련 선박에 공격 명령을 내렸던 것처럼, 제3차 세계대전
을 각오하고 중국의 미사일기지 건설계획을 저지할 용기 있는 미국 대통령이 나올지는 미지수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가을 찾아 일부러 나선 충북 진천 그리고 경기 여주 의 단풍 이었지만 좀 이른 감으로 제대로 의 감탄을 자아내지 못했는데 어제 한낮 동네 주변의 가을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가까이한 이 단풍이 제 색감으로 근사한 풍경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먼곳 아닌 주변 에서의 가을이 제일 입니다. 많이 걸으시며 즐감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