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
송승환
메마른 나뭇가지 끝에 새가 앉아 있다 무리를 잃고 부리도 발톱도 둥근 머리 속에 파묻은 붉은 새 한 마리 어두워지는 저녁을 응시한다
일어나는 불꽃 타오르는 불길 검게 타들어가는 나무 위로 새가 날아간다 바닥에 떨어지는 재
인큐베이터 갓난아이가 가파른 숨을 쉬고 있다
-송승환 시집 <드라이아이스>, 문학동네, 2007.
-2003년 문학동네신인상 당선. 200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평론부문 당선.
성냥
임영조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출옥하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다
오랜 연금으로
흰 뼈만 앙상한 체구에
표정까지 굳어버린 돌대가리들
언제나 남의 손끝에 잡혀
머리부터 돌진하는 하수인이다
어둠 속에 갇히면
누구나 오히려 대범해지듯
저마다 뜨거운 적의를 품고 있어
언제든 부딪치면 당장
분신을 각오한 요시찰 인물들
(주목받고 싶은 자의
가장 절실한 믿음은
최후의 만용일까?
의외의 죽음일까?)
그들은 지금 숨을 죽인 채
어두운 관 속에 누워 있지만
한순간 화려하게 데뷔할
절호의 찬스를 노리고 있다
빛나는 출세를 꿈꾸고 있다.
-임영조 시집 <갈대는 배후가 없다>, 세계사, 1992.
-1970년 월간문학 제6회 신인상 당선. 1971년 중앙일보신춘문예 당선.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사실 우리네 삶과 관련된 말일 게다. 사람이 변하고 사람 주변의 마을과 도시가 변할 뿐 유명한 강이나 산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내 고향에 있는 섬진강과 지리산만 해도 그렇다. 수십 년이 흘러도 변하기는커녕 갈수록 의연해지기만 하니 그래서 더욱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기만 하니 말이다.
시간적인 흐름만 해당될 뿐 그 분야는 별로 관계없을 것 같은 시에서도 이런 말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예컨대 나이가 들어 사람은 변해도 좋은 시는 변하지 않고 시를 발견하고 풀어나가는 발상 또한 변하지 않는 다는 것.
작년에 출간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읽은 송승환 시인의 시집 속 시들은 면밀한 관찰과 그에 따른 상상적 이미지의 연속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의 길이도 대부분 짧은 편이어서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특히나 소재의 관찰과 발상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적절한 시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송승환 시인의 시집에서 ‘성냥’을 택한 것은 그 시집 속에서 이 시가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십오 년 전에 읽었던 임영조 시인의 ‘성냥’이라는 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임영조 시인의 시가 떠오르지 않았다면 송승환 시인의 시는 분명 다른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산과 산 사이에는 골이 흐른다’로 시작하는 시 ‘나사’나 ‘십자가 아래 짐승의 신음소리 흘러나온다’로 시작하는 시 ‘드라이버’는 그 자체로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송승환 시인의 시를 ‘성냥’으로 택한 것이 임영조 시인의 ‘성냥’ 때문이라면 두 편의 시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 두 편의 시를 보면 시의 틀 자체가 관찰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세하고도 심도 깊은 관찰은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상상의 날개를 달 수 있었고 그 상상 또한 사물에 대한 관찰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으니 상상의 얼개도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사물의 관찰에서부터 시작된 시에서 이야기나 드라마적 요소가 충분히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은 이미 사물 속에 내재되어 있는 요소라고 할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은 완전한 집합체로서의 예술적 총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는 그 사물의 속성을 자기 방식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일 뿐이고. 물론 이쯤해서 되새겨볼 것은 그 사물과 시의 거리나 균형이 대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물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시는 시 자체가 주목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가 매개체로 삼은 사물 또한 부각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을 또는 대상이나 지역을 발판으로 하여 시적 성취를 이뤘을 경우에는 말이 전혀 달라진다. 사물이 새롭게 보이고 대상이 친근하게 느껴지고 지역은 문학을 넘어서는 관광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혹시 이야기가 어려울까? 어려운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런 생각이 기우에 불과할 테지만, 한번쯤은 아니 가다가 몇 번쯤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적어도 3개월 동안 시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연재물이라고 할 때 이러저러한 구색을 맞춰 다양한 시식코너를 운영하는 것도 좋을 듯해서다. 그러니 독자와 대화하는 듯한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거고.
송승환 시인도 그렇고 임영조 시인도 그렇다. ‘성냥’이라는 대상을 시적으로 드러내어 하나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그 이야기를 통해 공감을 하기도 하고 울분을 품기도 하고 감탄을 하기도 한다는 것. 하나만 더 말하자면 ‘소재에 대한 발상의 기본기’는 어느 시인이든 잘 구비되어 있다는 것, 그러나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옷 입히는 과정과 내용은 자기만의 색깔일 거라는 것.
그래서 이런 시들을 함께 읽으면서 좀 더 섬세한 관찰과 발상을, 나아가 기발하다 싶은 정도의 발상을 하고 싶은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나만의 이야기를 접목시켜보고 싶은 바램을 가져보는 것이다. (이종섶)
첫댓글 성냥이라는 시를 알고 계셨군요. 아주 오래 전에 발표되었던 시였을 텐데요.^^ 요즘 날씨가 정말 좋습니다.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시기를 바라구요, 좋은 시도 많이 빚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종섶시인님의 성냥에 대한 두 시의 공통점이 세밀한 관찰과 발상이라는 말이 눈에 확 듭니다. 성냥의 본성을 새와 감옥에 연금되어 있는 화자를 잘 은유한 맛을 새롭게 느낍니다
이시인님 반갑습니다. 곧 있으면 처처에 단풍이 터지겠네요. 이시인님의 시심도 그렇게 터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