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나온듯한 북한주민의 모습
사회주의의 특징인가? 초라해 보이는 모습에도 전혀 급한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철책 너머의 도로에도 차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자전거도 끌고 가는 모습이 태반이다. 교예단 선전물
아픈 가슴을 안고 온정리에 다다르니 문화회관에서 교예 공연이 있단다. 일금 25불, 약간 비싼 느낌이 있었지만 가장 싼 통일기금이라 생각하니, 전혀 아깝지 않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 되었다. 금강산과는 또 다른 감동이 밀려온다. 인간이 저럴 수도 있는가? 인간의 기교가 저리도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너무 아름다우니 애처러운 생각까지 든다. 써커스라 부르지 않고 교예단이라 부르는 이유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교예란 기교와 예술이 합쳐진 말이라 한다. 아니 그 이상이다. 교예를 보고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감동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복합체이다. 북한 주민들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활기가 여기에는 있다. 공연 끝에 부르는 “다시 만나요”란 노래에 가슴이 저민다. 이것이 우리의 분단현실이라면 손바닥이 부서지게 박수를 치는 일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랴?
교예단원들의 인사
나오는데 이층의 악단원들이 손을 흔든다. 사람의 마음이랑 거의 대동소이한 것일까? 문 밖을 나서니 모두가 입에 침이 마른다. 문화예술 회관 측에 이야기를 해서 입장료를 올려야 한단다. 입장 전의 비싸단 느낌이 한 없이 부끄러웠다. 온천욕을 마치고 온정리에 다시오니 북한의 가게들이 장사를 시작한다. 가게가 아니고 우리의 노점상이다. 북한 주민을 이렇게 가까이서 오래 보기는 처음이다. 꼭 같다. 하나도 틀리지 않는 내 동생. 내 형님의 모습이다. 남자들이 검게 탄 얼굴에 약간은 마른듯 한 체형이라는 것과 여자들이 남측 보다 조금 좋게 말해 순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세련미가 덜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어찌 저리도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차이점이라곤 가슴에 달린 김일성 뱃지와 내 목에 걸린 관광증 뿐이다. 그 차이가 이리도 크단 말인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다 우리 민족인데. 같은 민족을 이질적으로 생각한 내 어리석은 생각이 안타까울 뿐이다. 소주 몇 잔에 타조고기꼬치, 조개구이 몇 점. 배갈 냄새가 나는 30도짜리 북한 술에 취하고 서러운 현실에 아파하며 금강 펜션에서 잠을 청한다. 내일을 기다리며, 금강의 진수를 상상하며. 그것만으로도 적어도 이 순간 만큼은 행복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