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 살며 주고 살자
김연주
몇 년 전 부부모임을 갖는 날이었다. 승용차로 나누어 타고 유성을 향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남편들끼리만 하던 모임에 퇴직을 하고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 의기투합이 쉬웠던 듯하다. 부인들도 불러 합세시켰다. 남편 주변 친구들과 가진 모임이라 부인들끼리는 거의 다 모르는 처지였다.
처음에는 서먹하였으나 남편 친구여서인지 곧바로 친근해져서 몇 번 모임 끝에 여기저기 관광도 하고 유명한 먹거리 찾아 섭렵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말투는 여전히 “사모님…요?”다. 하지만 대화는 부드럽고 화기애애해졌다. 바로 그날 그러니까 모임을 갖기 시작한 지 족히 1년은 지난 뒤였을 것 같다. 옆에 앉은 사모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 내용이 들릴 수밖에. 한순간 나의 귀가 쫑긋거렸다. 동명이인인가 전화 속에서 거론되는 이름이 귀에 익다. 사모님은 통화를 마치고 미안한 듯 여고 친구라는 말을 남겼다. ‘여고 친구? 그렇다면 사모님이 내 동창?’ 혹시 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전주여고 나오셨어요?” 반가운 마음에 소리가 컸나보다. 평소에 말이 너무 없다고 핀잔을 많이 받던 터라 민망했지만, 우리가 여고동창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아, 이럴 수가, 몇 번을 만나는 동안 동창임을 몰라보다니 격세지감이 일었다. 기쁨과 어색함이 교차되었지만 금세 새로운 삶의 기폭제 같던 환희의 빛이 별처럼 쏟아져 내리던 젊은 날로 돌아가 얼굴빛이 붉어졌다. 언젠가 백두산 여행을 다녀올 때도 몰라보고 그녀를 사모님으로, 이사장님으로 서로 존대하며 우린 그렇게 좋은 인연으로만 지내고 있었다니. 구름 속처럼 희끄무레 잃어버리고 잊혀졌던 젊음이 언뜻언뜻 스치며 서로 맞잡은 손에 땀이 차도록 마냥 반가웠다. 동승한 이들 모두 한바탕 웃음으로 놀리며 축하해준 건 물론이다.
겉으론 흔연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부끄럼이 일었다. 졸업과 동시에 뿔뿔이 흩어진 이후로 진학한 학교도 몸담은 직장도 다르니 절친도 남같이 되고 직장에서 같이 동고동락하던 동료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느라 그동안 동창들과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따라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무심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반세기가 넘어서 만난 셈이다. 그녀를 위시해 다른 동창들은 모임을 가지며 서로 교류하며 옛 우정을 다지고 있었다 한다. 나는 뭐하느라 수년 째 서로 만남을 이어오는 줄도 몰랐을까. 사는 게 나만 바쁘고 힘들었을까. 그들 모두도 아껴야 하는 삶이 있었고 베풀어야만 하는 세월이 있기는 마찬가지였을 텐데 여러 가지 회한이 줄줄이 따라 나온다.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직장에서 집으로 오가며 우렁각시처럼 살아 온 나에 비해 몇 동창들은 가정만을 지키며 우아하게 현모양처로 살아가는 모습이 부러웠었다.
삶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해 좀처럼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지난날의 야속함도 허전함도 세월 속에 묻어버리려니 가슴 한구석이 아리다.
긴 세월동안 소식을 모르고 있었던 몇몇 친구들의 소식도 들을 수 있어 기쁨이 두 배로 늘었다. 이 친구는 몇몇 친구들과 50여 년이 넘게 동창회를 소리 없이 이끌어 왔다고 한다. 동창회에 나오라고 쉽게 말하였지만 오랜 동안 만나지 못한 동창들을 만나기 위해 뒤늦게 나간다는 게 우렁 같은 성격의 나로서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떤 친구들이 모일까.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들은 변하고 일그러진 내 모습을 알아볼까 걱정이 앞선다. 전국 방방곡곡으로 흩어진 동창들의 소식도 궁금했다. 만나고 싶은 친구들이지만 왠지 망설여지고 선뜻 내키지 않았다. 뭐 보여줄 게 있다고, 뭘 얼마나 잘 살아왔다고 그네들 앞에 뒤늦게 나타나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머릿속으론 친구들이 하나, 둘 스치지만 막상 만나면 기억하고 반가워해 줄까 걱정이 앞섰다.
앨범을 찾아보니 아직도 마음이 소녀 같을 친구들의 밝은 얼굴이 새롭게 떠올랐다. 그냥 눈 딱 감고 나가볼까. 이리 마음을 굳히니 만남의 기쁨과 희열이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댄다. 흉허물 없던 때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며 잠이 들어선지 밤새 꿈속을 거닐었다. 꿈속에선 발도 빨랐으며 잘 웃었다. 검은 교복에 빳빳하게 풀먹여 다린 하얀 깃, 영란 배지와 백선을 달고 웃음꽃이 만발했던 여고 시절이다. 오목대 아래(현 르윈 호텔 자리) 있던 전주여자고등학교 교문을 들어선다. 팔을 한껏 펴고 맞아주던 히말라야시다와 소나무 등 상록수가 상큼하게 초록빛을 띠고 맞아준다. 참 조용하다. 여학생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도, 언덕 위 기차의 가쁜 숨소리와 기적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교정을 둘러보려니 단짝친구들의 얼굴이 어디선가 마중 온다. 모두들 무슨 말인가 속살거리며. 그런데 나는 어디쯤 있을까. 아, 생각난다. 나는 지금 그곳에 없다. 지금은 이곳 세월의 뒤안길에서 꿈을 꾸고 있다.
어느 날, 나의 소식을 알게 된 동창회 임원들이 전화로, 엽서로 동창회 안내를 해주어 주저 없이 동창회에 나갔다. 몰라봐 주어도 어떠랴. 참 오랜만의 해후였다.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던 친구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다. 서먹서먹한 건 잠시, 꿈이 많은지도 모르고 꿈속에 살던 그때. 모두들 그때였다.
기존 회원들의 소개가 시작되며 까르르 까르르 웃음 몇 번에 오랜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다. “연주야, 너 지금은 뭘 연주하냐?” 내 별명 같은 이름을 불러준다. 이 뒤안길에서 누가 나를 연주야! 불러주랴. 반갑다.
자신의 삶을 지나온 나이테를 감출 수는 없지만 단발머리 소녀시절 얼굴이 깡그리 사라진 건 아니어서 희미하게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몰라보면 어떨까 걱정했던 예감은 빗나갔다. 그리움도 같았고 기억도 그리 많이 퇴색하지 않았고, 소녀적 감성도 그대로다. 그리고 만남. 각자 삶의 방식이 조금씩 달랐을 뿐인데 지난 세월은 아름다운 기억들을 성숙시키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지난날들을 약간씩 각색하고 미화시키며, 때늦은 변명으로 세월의 맛과 추억을 더듬는 편안하고 따뜻한 시간이었다.
세월이 변하면 사람도 변한다는 말은 참말이었다. 키가 작았던 친구들이나 키가 커서 올려다보던 친구들도 고만고만하게 비슷해져 있었다. 다 같이 세월이 지나간 자리가 선명했다. 기억 속에서는 언뜻 이름과 얼굴이 같이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막상 만나보니 다 떠올랐다. 정겨운 얼굴도 세월이 같이 흘렀지만 서로 알아본다는 게 참 신기했다. 더욱 생생하게 기억되던 짝꿍을 만나서 더욱 기뻤다. 어찌 잊고 살았던가. 잡은 손에 따스함이 모든 말을 대신 해주었다.
늦게라도 나타난 나를 반겨주는 친구들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33명의 친구들이 모여 반듯한 동창회를 시작했다. 식순에 따라 출석도 부르고 교가합창에 이은 총무의 꼼꼼한 동창회소식, 그동안 이들은 물심양면으로 좋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함께했던 이런저런 추억보따리를 풀며 친구들의 세세한 살핌으로 격세지감이 없이 곧바로 동화되었다. 마침 서울에 사는 친구가 보내준 봄나들이에 알맞은 노란 조끼와 28회 동창회 수첩까지 받게 되었다. 수첩엔 각 곳에 흩어져 사는 동창들의 연락처가 빼곡히 적혀있어 더욱 반가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그대로 만큼만 건강해서 오래오래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직장과 가정에 얽매어 숨가쁘게 너무도 먼 길을 홀로 걸어온 세월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친구들과 여고 시절로 돌아가 하루를 어린 듯, 철없는 듯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제 할머니들이 되어 길에서 만나도 그냥 지나칠 친구들은 없을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나이에 휘둘리지 않겠지 하는 바람 섞어 너무도 오래 흘러간 시간의 보상으로라도 건강하기를 기도한다. 그사이 하나, 둘 빠져나간 친구들이 있다니 많이 서운하다. 앞으로는 아무리 바쁘고 할 일이 많아도 ‘친구들이 부르면 버선발로 달려가야 할까 보다’라는 다짐 같은 약속을 하고 지금까지 어기지 않았으니 근래에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 중의 하나다.
나와 동창회의 가교가 된 친구는 중학교 법인 이사장이다. 뜻있는 일을 하며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친구 내외를 만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좋은 말과 함께 여러 가지 사는 방식을 배운다. 그중 ‘지고 살고, 주고 살자.’라는 말은 나의 동감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황혼의 언덕에 서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회한과 더 많이 손 잡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던 말이 지금도 귓가를 맴돈다. 사느라 바빠서라는 이유 말고도 내가 찾아낸 핑곗거리는 많다. 그러나 꼭 그래서였을까. 생각해보면 놓치고 지나온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부처님 말씀에 여러 가지 보시 중 마음 보시가 우선이라 했는데 그 말씀을 조금이라도 실천했을까. 나 혼자만의 아성에 가둬놓은 나를 몇 번이나 반추해 보았을까. 나는 씁쓸한 향기만을 풍기는데 마음의 여유로움을 품어선지 친구는 은은한 향기를 품고 피어난 은방울꽃 같다. 아름답고 넉넉한 마음씨를 지닌 덕성스런 친구와의 만남은 아득한 그리움과 추억을 되새김하게 한다. 앞으로도 여생을 얼마나 겸손하게 살다 가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인생 내리막길에서 언제든 만날 수 있으며 귀감이 되는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