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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성경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 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요한복음 4 :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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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 ♣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원천이 되신다는 뜻이다.
물은 모든 생명의 존재 근거이기 때문이다. 물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속성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큰 물소리’(겔 43:2; 계 1:15)같다고
한 것이나 예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하신 것이 좋은 예이다. 영적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해갈의 근원이 되신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식물은
물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생태계에 혐기성(嫌氣性) 생물은
있어도 혐수성(嫌水性) 생물이 없다는 것이 그에 대한
명백한 증거이다. 아무리 많은 영양분이 있어도 물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물은 영양물질을 녹여 그것을
체내에 원활하게 공급함으로 생명체를 키우고 생존시켜 준다.
그런 점에서 물은 생명의 젖줄이다.
신체 부위의 중요성에 따라 물 분포도가 결정되는 것도
물과 생명의 함수관계를 잘 보여준다. 생명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심장 부근에는 가장 많은 양의 물이 모여 있다.
이 부족하면 신체의 기능이 마비되기 때문에, 치명적인
어려움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물의 집중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생수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근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코르’는 땅 속에서
솟아나는 지하수 샘물을 의미한다. 이 물이 흐르면서
큰 물줄기가 되고, 여러 개의 물줄기들이 모여 큰 강을
이루기도 한다. 그런 생수의 근원은 때를 따라 내리는
비와는 성격이 대조적이다. 이스라엘에서 비는 겨울
우기에만 내리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강우량의 편차가 커서 농경과 목축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생수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은 시기나 장소와
상관없이 언제 어디에서나 제한 없이 넘쳐흐르는 생수의
복을 주신다는 선언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웅덩이를 판다”는 것과 그것이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물 없이는 누구도 살수가 없기 때문에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떠나면 사람들은 스스로 웅덩이를 팔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웅덩이’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브에르’는
빗물을 모아놓는 물 저장소를 말한다. 물이 늘 부족한
이스라엘에서는, 겨울 우기 동안 내리는 빗물을 모으는
물 저장소가 집집마다 마련되어 있었다. 주로 지반
역할을 하는 바위를 파서 만든 것인데, 여러 겹의
회벽으로 방수 칠을 하여 물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그렇게 튼튼하게 만든 웅덩이 물 저장소라도 어딘가에
금이 가고 틈새가 생겨, 모아둔 물이 빠져나가는
터진 웅덩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생수의 근원을 대체할 무엇인가를
스스로 찾게 되어 있다. 그것이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노력이다. 자신의 힘으로 생명을 유지해 보려고 최선을
다하며 애쓰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런 노력으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어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안겨주는 훌륭한 인물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여도, 하나님을 떠나면 인간이
스스로 마련한 터진 웅덩이일 뿐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풍요와 즐거움을
누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과 만족을 대신할 수는 없다.
자력으로 얻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나치게 자신의 힘을 의존함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만할 수 있고, 외형적인 것에만
치우치는 가치관의 혼란을 겪을 수 있다. 생명의 풍요가
소유의 넉넉함에 있다고 믿었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그런 점을 잘 지적해 준다(눅 12:13-21).
- 권혁승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구약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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