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시는 분신과 같습니다.
저의 시는 주인을 닮아 사랑 없이 태어난 사생아 같아
늘 애처롭게 지켜보며 보살피지만, 늘 부족합니다.
열정도 없고, 노력도 없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많이 쓰지만
생각해 보면, 詩들은 제각각 이산가족이 되어
어디에 흩어져 사는지 모릅니다.
짓다만 불구의 시들이
바지 주머니에서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세탁물 속에서 동그랗게 공처럼 말려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형태로 운을 다하기도 합니다.
저는 시를 잘 쓰지는 못하지만, 시만큼은 제대로 보는 눈을 갖고 싶습니다.
대구에서 서예를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다녔고, 원장님과 술도 많이 마셨습니다.
대구에서 그분을 함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셨지요.
어느 날, 저한테 말씀하시기를 “보는 것도 쓰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글씨가 살아 있는지, 죽은 지 잘 보라 하시던 군요.
한마디로 재주가 없다는 말씀이지요.
백락(伯樂)과 지음(知音)의 고사처럼 잘보고 잘 듣고
마음까지 헤아릴 수 있는 심성을 갖고 싶습니다.
어제 문경에 내려갔다가, 오늘 늦게 올라와서 글을 씁니다.
개를 데리고 어릴 때 놀던 무덤과 산들을 두루 다녔습니다.
그렇게 오랜 된 세월도 아닌데, 무덤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자라고
많은 무덤들이 해탈을 합니다.
양 옆에 두 부인과 함께 합장된 성균관 진사의
봉분에는 상수리나무가 자라고 희미해진 비석에는 검버섯이 피고
살아온 내력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숲이 우거지고, 깊은 산 속에 누가 와서 이 비문을 읽고 갈까요?
사람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간 곳에는 늘 자연이 친구하자고
오는 것 같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보다 시를 읽는 사람이 더 적다고, 사람들은 불평하지만
그래도 꽃처럼 많은 시들이 피어나서 좋습니다.
꽃을 안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꽃을 꺾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문화라면, 바라보며 지켜보는 것이 자연이 아닐까요?
도토리님 말씀처럼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사실, 제 얘기를 오해하는 분도 많습니다.
표현력 부족도 있겠지만, 매번 설명하기도 곤란하고, 그냥 지나치면
한번 살짝 건들리고 가는 분도 계시지만, 그때는 참으로 곤혹스럽지요.
어쩌면 그런 행동들이 살아오면서 터득한 방어본능이 아닐까요?
제대로 들었습니까?! 묻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나요?
능소화란 시는 인천 경계에 있는
두부집 마당에서 능소화를 보고 쓴 시입니다.
지인과 저녁을 먹으면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 모르지만,
능소화는 아직도 뇌리 속에 선명하게 각색되어 있습니다.
시보다는 능소화가 더 예쁘지요.
두부에 막걸리 좋아 하시는 분은 언제든지 모시고 가겠습니다.
요즘, 가끔 마십니다.
사람 맛도 나고, 사는 맛도 나고, 술 맛 나면
세상은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내일 모임에 나가서 한 잔 해야, 하겠군요.
졸시에 좋은 평 감사합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으면 가끔 주제 파악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지도편달 바랍니다.
천둥산 박~달재를~~~~~도토리 묵을 싸서
막걸리 들고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