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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장 100 대 종신형 이승만
더 큰 고통은 목에 10킬로의 칼이 씌워진
사형수로서 동료들의 죽음을 봐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동료들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많이 봤다.일례로 장호익 장군은 바로 옆에서 참수를 당했는데 세 번째 칼소리가 날 때까지 만세를 불렀다.나는 요새도 꿈속에서 이런 장면이 보이곤 한다. 이승만 회고록
"나는 과거에 급제하여 성삼문 같은 충신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되고 다른 유생들은 배재학당에 입교하기 시작했으나 "그들이 전보, 기차, 비행기 등으로 천상천하의 질서를 마음대로 바꾼다 해도
나는 내 모친의 종교를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신궁 우의 집요한 설득으로 1895년 21세 결국 영어를 배우기 위한 목적으로 입교
6개월 만에 영어 교사로 발탁되는 성취를 이루었으나 아펜젤러 목사의 예배 참석은 철저히 거부 "나는 주의 깊게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들었다면, 그것은 반박을 하기 위해서였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2000년 전에 죽은 한 인간이 내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인데 어찌 그런 우스꽝스러운 말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친일 정권을 타도하자는 춘생문 사건에 가담했다가
동료들이 체포되고 쫓기는 몸이 되자 화이팅 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황해도 큰집으로 피신
"나는 선교사들을 미국 정부의 간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조선인에
대한 선의를 갖고 있음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으며 차츰 그들의 진심을 믿게 되었다."
이승만 올리버 에비슨 회고록
그 후 친러 정권으로 내각이 교체되자
1896년 22세 4개월 만에 한양의 배재학당으로 복귀 이 무렵 새로 부임한 서재필 교수의 수업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처음 듣게 된다.
"서구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사상은 내 가슴에
너무나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에비슨 선교사 앞에서 상투를 자른 이승만.
"그는 상당히 흥분하여 자신의 일생을 민주 정부를 세우는데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나는 모든 나라에서 그런 시도는 피로 얼룩졌으며 그런 상황에 맞설 각오가 되어 있는지를 물어봤다.그는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기꺼이 맞서겠다고 했다. "
올리버 에비슨 회고록
1896년 22세 서재필이 지도하는 토론 모임 "협성회" 가입.이후 협성회 회장으로 맹활약하다가 1897년 23세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영어로 대표 연설.
"조선 정부와 외국 공사의 주요 귀빈들이 참석한
이 날의 졸업식에서 이승만의 연설은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었다.그의 거침없는 말들은 열렬한 박수를 받았고 행사에 활기를 불어놓어 주었다." 아펜젤러 (조선휘보)
서재필이 졸업생들과 함께 독립협회를 만들고
대중 정치 집회인 '만민공동회'를 열기 시작하자
1898년 24세 최고의 스타 연설가로 떠오르는 이승만
1. 내정 간섭을 일삼는 러시아 고문들은 철수하라.
2. 우리 경제를 침탈하는 한러은행 해체하라.
1898.3.15. 만민공동회 이승만 연설
1898. 3.19. 성난 여론에 밀려 철수하는 러시아
만민 공동회의 승리는 조선 역사에서 민의가 민주주의 원리를 통해 국가의 중대 정책을 변경시킨 첫 번째 사례다.이승만 (독립정신)
조선인이 만든 최초의 신문 "협성회보"를 창간하고 주필로 활약하면서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렀으며 1898.3.9. 24세 조선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펜젤러 교장이 지나친 정치색을 경고하자 1898.4.9. 24세 학교를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매일신문'창간. 이는 조선 최초의 일간 신문인 동시에 조선 최초의 한글 전용 신문이었다.
"한글이야말로 문명 진보의 강력한 근본이다.
조선이 이처럼 쇠약해진 이유는 지배층이 한문으로 지식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매일신문 1898.6.17.
이승만 러시아의 부당한 이권 요구 서류를 폭로
1898.5.16.또다시 당황한 러시아 정부는
이권 요구를 철회
"신문의 목적은 안팎의 정세와크고 작은 폐단을 일일이 강구하여 백성들의 이목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다.이승만(중동 전기 본말 부록)
하지만 이로 인해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길러주신 어머니 은혜로
지금의 신체발부는 커녕 정녕 훤칠하구나
어머니 영구를 모시고 유택에 가지 못했으니
푸른 하늘 머리에 이고 어이 부끄럽지 않으리
이승만 한시선 (영구를 모시지 못하다)
1898년 12월 16일 제1차 중추원 회의에서
고종 폐위를 주도한 박영효의 복권을 주장하다가
1899.1.2 25세 파직되어 체포되는 이승만
"이승만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생각이
독립협회를 붕괴시킨 근본 원인이다."
윤치호 일기(1899.1.9.)
이승만 주시경이 반입해 준 권총으로
최정식과 함께 탈옥을 시도했으나
체포되어 무자비한 고문을 받는다.
"그때 나는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마치 원한에 사무친 짐승들 같았다."
이승만 회고록
한 번은 신문에 "이승만 옥사"라는 오보가 나서
아버지가 자신의 시체를 찾으러 오기도 한다.
"내 자식의 시체를 어서 주시오"
아버지의 비통한 목소리는 간수의 만류에도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렸다.
"아버지! 저는 살아있으니 안심하고 돌아가세요"
내가 이렇게 목놓아 외치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이승만 회고록
이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다가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나는 감방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배재학당에서 그 책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깊은 관심거리가 되었다."이승만 회고록
6개월 후 곤장 100대 및 종신형으로 감형되었으나 함께 탈옥했던 최정식은 사형을 당한다."승만아, 너는 살아남아서 우리가 함께 시작한 일을 끝맺어다오!" 동료 최정식의 유언
1899년 7월 11일 25세
한성감옥으로 이송되는 이승만
"한성 감옥의 형편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해충이 우굴거리는 흙바닥, 타인과 겹쳐 간신히 앉을 수 있는 좁은 공간, 구역질 나고 부패한 급식 상태 등 죄수들은 축사에 갇힌 가축 떼들과 같았다.셔우드 에디 선교사
"이들의 높은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영향력,
그리고 우수한 지적 능력 때문에 이들은 한국 기독교계 최초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제임스 게일(전환기의 한국)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활동이 한국 기독교 역사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였기에 당시 한성 감옥의 역사는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느낄 수 있다."서정민(한국교회 사회운동사)
이승만 김영선의 배려로 조선 최초의 감옥 학교 개설 그리고 조선 최초의 옥중 도서관 설립
"한성감옥에 간수장 김영선이 들어온 후부터는
심한 고문을 하지 않고 옥정을 밝히 살펴서
죄수들이 광명을 보게 되었다고 칭송이 자자하더라.제국신문 1900.4.2.
제국신문에 익명으로 논설을 기고하는 이승만
감옥 밖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의 글에 감화를 받았고 그 중 엄비(고종의 후궁)가 가장 열렬한 애독자였다. "일이 성취되어가는 것이 재미있어
괴로운 줄을 깨닫지 못했다"이승만 회고록
1903년 29세 이승만, 채이강의 (청일 전기)를
한글로 번역 조선 최초의 영한사전 편찬에 도전하였으나 'F'까지 작업하고 중단하고
1904년 30세 불후의 명작 (독립정신) 저술
"민주 정치란 백성의, 백성에 의한, 백성을 위한 정치로서 백성들이 직접 임금을 선택하며
정해진 연한이 찬 후에는 다른 이를 뽑는 제도이다.
이 제도를 도입하게 되면 미국과 같은 독립과 부국강병을 성취할 것이요.요순의 태평성대가 재현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더 큰 벌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이 몸이 가루가 된다 해도 두렵지 않으며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이승만(독립정신)
"김옥균, 서재필 등에 의해 시작된 초보적 수준의 개화론이 근대 민주주의로 체계화되는 전환점을 맞게 한 기념비적 저서이다."
이한우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
"내가 정치학과를 지망한 계기는 이승만의 잘못된 정치에 대한 분노였다.그러나 훗날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읽고 나는 이승만에 대한 고정관념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의 식견과 행동은
동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탁월한 것이었다."
유영익 (건국 대통령 이승만)
이후 거듭되는 선교사들의 감형 청탁
"폐하께서는 가까운 기회에 이승만을 석방시키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감히 그것을 다시 한 번 청하옵니다."
헐버트 등 5명 연명 상소문(1901.11.9.)
1904년 8월 7일 30세 6년 만에 석방되다.
"나는 6년 동안의 감옥살이에서 얻은 축복에 대해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이승만 회고록
이후 제국신문에
반일 논설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나
1904년 10월 7일 일본의 압력으로 폐간되고
1904년 10월 15일 30세 상동 청년학원 교장에
취임하는 이승만
"정치 제도의 개혁이 아무리 시급해도
그것의 성패는 백성들의 민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외국에서 수백 년간 발전시킨 제도를
갑자기 도입하는데 어찌 충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영미의 국가들처럼 교육과 학문의 진흥을 통해 사람들이 깨어날 때를 기다려야 한다." 이승만 (독립정신)
그러나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일본의 압력으로 제1차 한일협약 체결
조선의 모든 재무와 외교는 일본과 협의한다.
제1차 한일협약 1904.08.22.
이에 고종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려 하자
영어에 능통한 이승만을 대사로 천거하는 민영환
"그는 비범한 젊은이다. 감옥에 있으면서 영어를 너무나 잘 가다듬어 영어로도 훌륭한 논문을 쓸 수가 있었다." 1904.08.09. 윤치호 일기
고종의 밀서를 품에 안고 미국으로 떠나다
1904.11.04. 30세
미국의 엄청난 발전상에 경도된 이승만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느꼈던 첫인상은 나의 나라와 미국과의 대조였다.물질적 진보, 현대적 발명, 고층 건물 등등. 이승만 회고록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밀서를 전달했으나
루스벨트의 동료였던 조지 캐넌의 조선 비판
"조선 정부는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하며
거짓과 부정을 일삼을 뿐, 아무런 교육 시설도 제공하지 않는다.
도로 건설, 항만 개량, 전염병 예방도 하지 않으며
무역과 산업을 장려하지도 않으며 저속한 미신을 장려하고 유례가 없는 인권 탄압을 자행하고 있다. 조선에 대한 우리의 불신은 하나의 신념이다. 그들은 기울어진 동양 문명의
녹슨 소산물이다".조지 캐넌
이에 태프트 장관을 일본으로 보내는 루스벨트
"러시아를 막기 위해 일본이 조선을 가져야 한다.
일본이 조선을 갖는 것을 보고 싶다.조선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주먹 한번 못 휘둘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가쓰라 - 태프트 밀약 체결.
1. 일본은 필리핀을 침범하지 않는다.
2. 미국도 조선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1905.07.29)-
주미 공관에 불을 지르겠다고 날뛰는 이승만
"조미 수호조약은 한낱 외교적 제스처였다.
조선인들이 그 조약에 기대를 걸었던 것은
어리석고 순진한 탓이었다."이승만 회고록
생활비는 강연과 글쓰기로 충당.
"미지의 나라 조선의 신기한 풍속을 전하는
이승만의 강연회는 청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수백 명이 참석했으며,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1907.06.13. 워싱턴 포스트
"그의 목소리는 보통 이상으로 울리고
달콤하며 음정의 폭과 변화가 풍부하다.
그의 얼굴과 몸동작은 표현력이 강하며
연사로서 박력 있는 정열이 특징이다."
로버트 올리버
이 무렵 한 지방신문에 친일 성향의 글이 기고된다."일본은 지금 조선을 개혁하고 있다.
일본이 조선을 영원히 통치하게 되기를 바란다."
A.B 레너드,(크리스천 애드버케이트)
이에 즉각 반론의 글을 기고하는 이승만
"일본에 굴복한 조선인은 아무도 없다.
미국이 일본을 방치할 경우 미국의 친구가 되기보다는 적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억압 하에 있는 조선의 독립만이
일본에 대한 견제를 강화시키는 길이다.
이승만 1907.07.25.(모닝스타)
2년 만에 조지 워싱턴대를 졸업하고
1904년 33세 하버드대 영문학과 편입
"나는 공부에만 전념했다. 나는 조선의 갱생을 위한 유일한 희망이 기독교 교육이라고 믿었으며
내 인생의 목적은 그 일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승만 회고록
1908년 34세 콜로라도 한인 애국동지 대표자 대회에서 폐회 연설 "미국인들은 조선이 일본에 질 것이라 말한다.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이다.조선의 역사는 일본보다 뛰어나다.
조선은 반만년 이상 보존되어 왔으며
결코 지구상에서 말살되지 않을 것이다."
1908.01.01. 이승만 연설
이 무렵 외교관 스티븐슨의 친일 발언 논란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조선인들은 일본을 크게 반기고 있고
일본이 조선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스티븐스
이에 격분한 장인환과 전명운
1908년 3월 25일 샌프란시스코 역에서 스티븐스 사살 이 소식에 크게 고무된 재미 한인 사회는 이들의 재판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이고 이승만에게 재판의 통역을 부탁하였으나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의 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
이에 이승만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게 된다.
"이와 같은 방식은 독립운동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이 사건은 조선인들을 악당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선전에 대대적으로 이용되었고
미국인들로 하여금 조선인들이 다 잔인한 살인마라는 편견을 갖게 했다."
이승만의 회고록
하버드대 석사과정을 1년 만에 졸업하고
1908년 34세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이때 신학부 청강과 순회 간증을 병행하였다.
"미국 명문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5년 만에 취득한
이 진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