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김 현 준
프랑스의 철인 레비나스는 ‘나’와 ‘신’ 사이에 ‘너’가 있다고 전제하며, 인간은 끝없이 신에게 닿고자 하나 결코 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신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항상 손님의 형태로, 즉 너의 얼굴, 표정, 몸짓을 통해서 내게로 다가온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신을 공경하는 것은 ‘당신’에 대한 행위를 통해서만 간신히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당신이 나의 존재를 기뻐하면 신이 춤을 추는 것이요, 당신이 나의 존재를 슬퍼하면 신이 우는 것이며 당신이 나의 존재를 싫어하면 신이 찡그리는 것이다. 따라서 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을 때는 이웃의 얼굴을 보면 된다. 신은 이웃을 통해서만 나에게 현현한다. 타자의 얼굴이 곧 신의 얼굴인 것이다.
70대 중반을 넘어서 코로나19에 갇혀 사는 동안 이웃과 지인을 만나는 게 퍽 제한적이다. 자녀, 손주들과의 교감도 쉽지 않다. 좋아하는 카페에서의 휴식도 여러 번 생각한 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들른다.
신의 얼굴이라고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을 보기가 썩 어렵다. 어쩌다 마주쳐도 마스크와 안경, 모자까지 무장한 얼굴에서 겨우 볼 한쪽에 눈길이 스칠 뿐이다. 그러니 표정을 읽을 수 없어 신이 나를 어찌 생각하는지 알 길이 없다.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는 일도 드물어 그들이 나의 존재를 기뻐할 리 없으니 외로움 속에서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
가만히 돌아보면 즐거웠던 일을 하나 둘씩 잊어가면서, 어떻게 사는 게 지금보다 나은 것일까 헛 궁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좋은 내일을 꿈꾸는데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싶다. 그런데도 어리석게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그게 사람 사는 일이 아닌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서도 깨닫지 못하는 게 인간의 한계일지.
가슴이 답답할 때는 목적지도 없이 훌훌 털고 여행을 떠나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난겨울 사는 곳에서 10km 밖에 나가보지 못했다. 노상 개미 체 바퀴 도는 식이다. 도청에 시니어 일자리를 구해 오후 세 시간씩 활동하는 게 그나마 숨통을 틔게 할 뿐이다.
석유관리원에서 제작한 팸플릿을 건네며 가짜 석유를 신고해달라고 홍보하는 일을 한다. 맨입으로는 어려울 것 같아 특별히 제작한 볼펜이나 마스크를 제공한다. 많은 사람이 시큰둥해 하거나 종종 거부하는 사례마저 있다. 울컥하니 역겨워질 때도 있지만, 사람은 제각각인 걸 어찌하나 하며 마음을 달랜다. 그런 사람의 얼굴이 바로 내게 보여주는 신의 얼굴이 아닐까 되짚어본다.
‘그래, 그것만은 분명하다. 신이 내게 다가올 때는 험한 얼굴로 시험할 게 아닌가.’ 말이다.
세상을 사는 현명한 방법은 즐거운 마음을 갖는 일이다. 즐거운 마음을 갖는 것은 대상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스스로의 마음에 중심을 갖는 일일 것 같다. 타인이 험한 인상을 쓰고 언짢은 말을 내뱉더라도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면 하등 괴로워할 것 없다. 내가 가슴 아파하고 괴로워한다 해서 해결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TV에서 정치 뉴스를 시청하다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말만 골라 하는 인사들이 있다. 어찌 저렇게 판단하는지 의아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들도 출연료를 챙겨야 하고 지지층의 평가도 의식해야 할 게 아닌가 싶다. 하다못해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에라도 오르내리려면 그럴 수밖에 없겠거니 생각된다.
코로나가 조금씩 수그러들면서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가운데 여소야대의 정권을 이어받은 국민의 힘 정부는 다수당의 견제에 시달리고 있다. 물가고 비상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다른 에너지와 식량 수급난 등으로 지구촌의 앞날이 암담하다. 이 난국을 어찌 헤쳐 나갈 것인지.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만 가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제는 여유롭고 신나게 살아보았던가. 노상 조심조심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전전긍긍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칠흑 같이 어두운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한 잔의 소주에 타서 마시지 않았던지. 그에 비하면 현재는 호화생활이다.
자신감을 갖고 유쾌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그만인 것을….
(202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