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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은 1945년 5월 7일 전범국가인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
자 사전합의에 따라 독일의 분할통치를 시작했다. 소련의 관할권인 동독 내에 자리잡고 있는 수도 베
를린도 4개국 분할통치에 들어갔다. 그러나 연합국들이 자유진영과 공산국으로 나뉘어 냉전체제에
돌입하면서 4년간 분할통치 후 독일을 독립시키기로 했던 당초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독일의
통합은 물 건너가고 동서독 분단이 고착화되고 말았다. 문제는 동독 영토 한복판에 고립되어 있는 베
를린의 미국‧영국‧프랑스 관할구역이었다.
독일에 대한 연합국 측의 응징 의지는 가혹할 정도로 강력했다.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천만
명의 인명을 살상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대표적인 응징정책은 ‘모겐소 계획’이었다. 미국 재무부장
관 헨리 모겐소가 제안한 계획에 의하면, 독일에 공업 발전을 금지해서 독일을 영구히 농업국가로 만
들자는 것이었다. 모겐소는 독일인들이 하루 세 끼 수프만 먹는 유럽 최빈국으로 만들자는 구체적인
의견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너무 비인간적이라는 이유로 채택되지 못했다. 냉전체제가 심
화되자 미국은 오히려 독일을 부흥시켜 자유진영의 방패막이로 삼자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 결과 독
일에 ‘라인강의 기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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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6월 24일, 스탈린은 느닷없이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들어가는 철도‧육로‧수로 등을 완전히
봉쇄하여 서베를린 고사작전을 시작했다. 미국‧영국‧프랑스가 견디지 못하고 철수하면 공짜로 서베
를린을 차지하겠다는 얕은 술수였다. 스탈린의 기대와 달리 연합국 측에서는 당장 그날부터 전투기
의 엄호 아래 수송기 380대를 동원하여 미‧영‧불 주둔군뿐만 아니라 전 서베를린 시민들이 의식주에
불편을 겪지 않을 만큼 충분한 물량을 공수하기 시작했다. 항공 전투력이 절대 약세인 스탈린으로서
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치욕적인 결과였다.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은 채 서독과 서베를린 사이를
오가는 장엄한 공수행렬은 동독 주민들에게 오히려 열패감만 안겨주고 말았다. 얼마 동안 저러다 말
겠지 하던 스탈린의 기대도 물거품이 되어 연합국은 미국‧영국‧프랑스 외에 캐나다‧호주‧뉴질랜드‧남
아공의 조종사들까지 자원봉사에 나서 수송기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1949년 4월 16일 하루에만
수송기 1383대가 화물을 실어 날랐다. 스탈린은 스타일만 잔뜩 구긴 채 봉쇄조치 312일 만인 1949년
5월 12일 봉쇄를 해제했다.
이후 1950년대까지는 누구나 동서독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다. 전차와 지하철이 운행되었
기 때문에 서로 상대편 지역으로 출퇴근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독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하면
서 서독으로 출근한 동독 노동자들이 점점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소련은 충격을 받고 국경 아닌 국
경의 경비를 강화했지만, 베를린에서는 여전히 서쪽으로 넘어가는 주민이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젊
고 유능한 엔지니어‧교수‧의사‧변호사 등 엘리트 계층의 이탈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 이에 소력은
1961년 8월 베를린 시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43㎞의 콘크리트 장벽을 설치했다. 이어 동서독 간에
도 156㎞의 콘크리트 장벽을 설치했다. 이들 장벽이 설치된 이후에도 5천여 건의 탈출이 이뤄졌으며,
도중에 소련군의 총에 맞아 197명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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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이 격화되자 미국과 소련은 핵실험을 재개했고, 독일과 쿠바에서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는 위
기가 잇달아 발생했다. 소련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서베를린을 점령할 수 있었고, 그것은 곧 핵
전쟁을 포함한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터였다. 양측은 누가 먼저 공격하든 공멸할 수밖에 없는
핵폭탄의 위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핵단추를 누를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베
를린과 동서독 경계에 튼튼한 콘크리트 장벽을 설치한다는 건 침략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었다. 독일
인들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꼈지만 연합국 측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독일인들은 베를
린 장벽으로 인해 가족과 친척이 이산되고 많은 동베를린 청년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시간이 지나자
서베를린 시민들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 동베를린의 친척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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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소련의 압제에 눌려 있던 동구권 국가에서 자유화와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폴란드와 헝가
리에서 시작된 자유의 물결은 이내 전 동구권 국가로 번져나갔다. 동독 주민 1만 3천 명은 사전계획
에 따라 헝가리로 관광을 떠났다가 오스트리아로 탈출하기도 했다. 체코슬로바키아도 동독 주민들의
탈주를 도왔다. 1989년 11월 9일, 동베를린 공산당 책임자인 귄터 샤보브스키는 기자회견 도중 실수
로 ‘오늘부터 베를린의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발표해버렸다. 주민들이 몰려들자 군 지휘관은 폭동을
우려하여 체크포인트의 문을 활짝 열어버렸고, 이내 동서 양쪽에서 끌과 망치를 든 예술가들이 낙서
가 가득한 장벽 조각을 떼내어 관광객들에게 팔기 시작하면서 베를린장벽이 저절로 무너지는 역사적
인 장관을 이루었다. 1990년 동서독은 합의 하에 베를린장벽을 완전히 철거했으며, 10월 3일에는 동
독이 해산되고 독일이 통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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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동서 베를린 간의 통행을 감시하던 ‘체크포인트 찰리’의 한쪽 꾸껑에는 <베를린장벽박물관>이
서 있다. 처연했던 동서 냉전의 실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기념관이다. 그곳에 가면 베를린
장벽을 탈출하다가 죽을고비를 넘긴 사람들이 돌아가며 출근하여 경험담을 들려준다. 한국인들이 찾
아가면 한국인 자원봉사자가 나타나 박물관을 안내해주는데, 박물관 지하 전시장에서는 부정기적으
로 《북한 인권 관련 전시회》가 열린다. 북한에 있는 수용소의 끔찍한 실상을 알리는 전시회다. 세
계에서 유일하게 상굿도 남북분단의 장벽이 남아있는 나라, 빨갱이들이 장악하고 있는 대한민
국에서는 북한 인권을 거론조차 할 수 없어 멀리 독일까지 가서 북한의 인권 실상을 볼 수 있다는 얘
기다.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빨갱이들은 해안의 해군기지에 수상한 자가 나타났다가 도망쳐도 ‘대공
용의점이 없었다.’며 김정은의 심기부터 배려한다. 이미 사상적‧정치적으로는 적화통일이 된 셈이다.
이게 나라냐!
주경철 지음 「모험과 교류의 문명사」 소개 끝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