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ituary
지난 7월16일, 갑작스러운 부고가 들려왔다. 76살의 제인 버킨이 파리의 자택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마도 국내의 스크린에서 그녀를 발견한 것은 홍상수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10년 전의 짧은 카메오 장면에서도 그녀는 특유의 감성을 드러냈다. 자신이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어머니임을,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음을 여배우는 자랑했다. 세 남자의 아내, 세 아이의 어머니, 무엇보다 가수 겸 배우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제인 버킨의 지난 반세기를 되돌아본다.
1946년 2월14일 런던의 부르주아 가문에서 태어난 병약하고 추위를 잘 타던 아이는 훗날 프랑스에서 유명한 영국인 배우가 됐다. 데뷔 이후에 그녀가 참여한 영화는 무려 70여편에 이르렀지만 배우뿐만 아니라 가수로서도 그녀는 활발히 활동했다. 세르주 갱스부르와 함께한 노래 <Je t’aime… moi non plus>(1969)는 한 마디로 신화적인 커플의 출발점이었고, 단번에 그들은 유명해졌다. 지나치게 노골적인 이 곡의 분위기는 결과적으로 그들을 시대의 아이콘으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 오늘날 우리가 ‘제인’이라 부르는 대비와 균열의 이미지는 모두 당대에 형성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비록 박제된 형상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적 시크함의 대명사로 그녀는 일찍이 자리 잡았다.
그녀의 첫 영화 출연작은 <낵 앤 하우 투 겟 잇> (1965)이다. 소위 ‘스윙런던’이라 불리는 브리티시 스타일의 이 작품은 그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는데, 그저 단역에 불과했지만 제인 버킨은 이 영화를 통해 어린 나이에 결혼하게 된다. 상대는 음악을 담당한 존 배리였는데, 그는 대단한 작곡가였지만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1967년에 첫 딸이 태어날 즈음 그들은 헤어지는데, 그즈음 실질적인 영화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욕망>(1966)이 출시된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이 영화에 대해 훗날 다큐멘터리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1988)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20초간 벌거벗은 미니 스캔들’이라 불릴 만큼 파격적이었다고. 그리고 성공적인 국제 무대 데뷔 이후 1968년 5월에 그녀는 활동 영역을 프랑스로 이동한다. 피에르 그랭블라의 자전적인 드라마 <슬로건>(1969)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면서 파리로 떠나게 된 것이다.
영화 <슬로건>의 주인공은 가수 세르주 갱스부르였다. 그는 처음에 제인 버킨을 못마땅해했다. 수준에 맞지 않는 배우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프랑스어도 실격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작업하는 동안 그들은 공식 연인이 됐다. 함께 웃는 사진, 행복한 모습이 연일 소개되며 이들은 시대의 아이콘으로 부각되었다. 당시 브리지트 바르도와의 스캔들로 악명 높았던 세르주 갱스부르의 유명세에 제인 버킨의 신선한 이미지가 더해진 시너지 효과는 대단했다. 소위 새로운 사랑의 모델로 두 사람은 군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사이에 자크 드레이의 <수영장>(1969)이 크게 히트하면서 제인 버킨은 배우로 정착한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더라도 일종의 스타일 아이콘으로서 그녀는 상당한 이목을 끌었다. 세르주 갱스부르가 연출한 영화 <사랑해… 아니, 난>(1976)이 공개될 때까지 이들의 성공적인 행보는 이어졌다. 제인 버킨이 지닌 중성적이고도 섹슈얼한 매력은 사람들을 자극했고, 이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70년대 중반에 제인 버킨은 이전과는 다른 영화들에 도전한다. 클로드 지디가 연출하고 피에르 리샤르가 주연한 코미디영화들이다. 이들 작품에서 제인 버킨은 한마디로 경쾌하고 활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한때 대담하고 격렬하며, 무엇보다 우아함으로 무장되었던 섹슈얼한 여배우의 모습이 점차 바뀌어간다. 당시의 대표작으로 <피에르의 외출>(1974)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에 출연할 즈음 세르주 갱스부르는 술집인 ‘바’의 호칭을 따서 스스로의 예명을 ‘세르주 갱스바르’로 바꾸어 부르는데, 그들의 관계도 그 시기에 급변한다. 갱스부르는 알코올과 담배로 많은 말썽을 일으켰고, 그녀는 이별을 결심한다. 이후 그녀는 자크 두아용 감독과 곧바로 결혼하는데, 그렇게 셋째 루 두아용을 낳았다. 그렇지만 세르주 갱스부르와 완전히 연락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이들의 후견인이 되었고, 서로 다른 파트너와 살면서도 예술적인 영감을 공유했으며, 1991년 세르주 갱스부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녀는 그를 생각했다. 비교적 최근까지 이어진 콘서트 투어가 그와의 지속적인 교류를 상징한다.
1980년대 제인 버킨은 작가영화의 영역에 발을 들인다. 자크 두아용이 연출한 <라 파이렛> (1984)을 비롯해 누벨바그 작가들과 다수 작업했다. 아녜스 바르다, 장뤼크 고다르, 알랭 레네, 그리고 자크 리베트의 영화들이었다. 그 시기의 대표작으로 자크 리베트의 <지상의 사랑>(1984)과 <누드 모델>(1991)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영화들에서 그녀의 이미지는 이전과는 상반된다. 한없이 가볍고 즐겁게만 보였던 그녀의 얼굴에 연약하고도 우울한 정신의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그 얼굴에서 관객들은 고통을 숨기려는 내면을 찾아냈다. 진정한 배우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이즈음 그녀는 작품을 통해 진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결과가 그녀가 연출한 첫 번째 장편영화 <박싱즈>(2007)에 일부 투영되어 나타난다.
만일 제인 버킨의 삶에 영화가 예술이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매체가 그녀의 삶을 실질적으로 포괄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감독으로서, 배우로서 그리고 누군가의 뮤즈로서 그녀는 끊임없이 영화관에서 소환될 것이다. 퇴색되지 않을 멜랑콜리의 가벼운 색채를 기억한다. 영원한 콘트라스트가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감싼다. 제인 버킨의 장례식은 7월24일 월요일, 파리 1구의 교회에서 치러질 예정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배우의 평온하고 다정한 영면을 기도한다. 글 이지현(영화평론가) 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