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ㆍ 1 운동 (투쟁)이 지닌 거대한 의미는 그때까지 오래고 오랜 세월 동안 역사 속에서 주인이 아니라 객체였던 온 민중이 들고 일어난 혁명 성격을 띤 '나라 되찾기' 항거라는 사실입니다
삼일운동을 통해 대한제국이 원해서 일본과 병합한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악마성에 의해 강제로 합쳐진 것이 진실이라는 것이 전 세계에 알려졌지요 (을사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 이잖아요)
그렇다면 과연 3 ㆍ1 절 그날 진실은 무엇일까요 ? 사실 기독교 쪽에서는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방식을 생각했는데 천도교측과 만나 독립선언을 하는 것으로 결론을 봤지요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계 인사 15명 이승훈과 길선주를 비롯한 기독교계 16명 그리고 불교계에서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우리는 보통 이렇게 민족대표 33인 이라고 하죠
그런데 더 엄밀히 하자면 준비 과정에서 깊숙하게 관련된 천도교계 박인호와 노헌용 기독교 쪽에 함태영과 김세환 등도 있었어요 그들은 뒷일을 처리하기 위해 명단에서는 빠지게 된 것이죠 이들을 다 포함하면 48명 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죠
(참고로 김창숙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읽고 "지금 광복운동을 전개하는데 3교의 대표가 주동을 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ㆍㆍㆍ ㆍㆍㆍ 이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겠는가" 하며 통탄했다고 하네요 하긴 뭐 유교는 종교라기보단 사상에 더 가까우니까요)
거사 전날인 2월 28일 오후 다섯 시 서울 가회동 손병희 집에서 23명이 마지막 모임을 했는데 여기서, (손병희와 최린의 '신문조서' 등에 따르면)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면 동요된 시민들이 흥분을 하며 혹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하는 우려가 있어서 손병희 선생이 명월관 인사동 지점인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꿨다고 합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낮 12시 쯤부터 태화관에 모여들었고 수천 명에 달하는 시민과 학생들은 파고다 공원으로 운집했습니다 학생대표인 강기덕과 김문진 그리고 한국태 세 사람이 태화관으로 가서 민족대표들에게 파고다 공원으로 가자고 했으나 손병희가 "이런 일은 젊은이들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니 선진자들에게 맡기고 돌아가라" 고 했다고 최린의 "신문조서"에서 전하고 있죠
아무튼 태화관 안에서 있었던 상황은 학생들과 민족대표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좀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보면 이종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최린이 경무총감부에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고 이갑성이 김윤진을 보내 총독부에 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요
파고다 공원에서는 모여든 시민들과 학생들 사이에 정적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때 누군가가 연단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읽었다고 하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사람은 누군가에 대해서도 몇 개 설이 있고요) 그리고는 그칠 줄 모르는 만세소리가 좁은 공원을 뚫고 하늘로 땅으로 퍼져나갔고 거기에 모인 모든 군중은 공원에서 나와 시가행진을 한 것이 그날 현장 상황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죠
그날 서울 거리거리마다 수십 만에 달하는 인파가 모여 "대한 독립 만세 ! " 를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 백성들에게 크게 비난을 사던 명성황후가 일제 낭인들에게 살해되자 을미의병이 일어난 것처럼 고종도 왕위에 앉아있을 때는 백성들로부터 큰 불만을 샀지만 일제에 의해 독이 든 식혜를 마시고 독살을 당했다는 독살설이 퍼지며 그 죽음이 일본 제국주의에게 큰 타격을 주는 흐름으로 이어졌다는 건 역사 속 묘한 장면들로 남게되었죠
첫댓글 아직도 일제 좋아하고......
일제라면 사족을 못쓰는 인간들.......
깊이 반성해야..........ㅉ
너무 귀한 자료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