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열정과 도전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움직이는 영상을 선보인 지 100년이 되는 해,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은 <율리시즈의 시선>(1995)을 통해 그 역사를 반추하려 한다. 지난 100년간 온갖 분쟁과 내전의 대상이 되어왔던 발칸반도 전역은 최초의 무성영화를 찾는 감독 A의 시선과 맞물리며 그 역사적 생채기를 드러낸다. 이타카의 왕 율리시즈가 전쟁에 나갔다가 모험과 방황을 거쳐 고향에 돌아왔듯이, 영화 속 A는 그리스의 테살로니카를 시작으로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루마니아, 세르비아에서 사라예보에 이르는 먼 여정을 거치는 것이다.
일정한 거리를 점한 채 감독 A를 따르는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목적없이 전쟁을 일삼고, 살육을 자행하는 인간의 실책은 가감없이 전해진다. 그러나 정작 전화(戰禍)로 멍든 살벌한 도시를 보는 이의 뇌리에 각인하는 것은 사건과 사건 사이에 펼쳐진 빈 공간이다. A의 여정에 기꺼이 동참한 촬영감독 요르고스 아르바니티스의 카메라가 들어선 자리 또한 이곳이다. 냉정하리만큼 긴 호흡으로 찍어내어 여백이 되어버린 공간 안에서 관객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닌 성찰과 사유를 권유받는다.
1941년 그리스 태생의 요르고스 아르바니티스에게 카메라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세상이며 철학이었다. 9살 때 프랑스로 이주한 뒤 19세 되던 해 어시스턴트 카메라맨을 시작으로 촬영에 몸담은 이후 어느덧 그의 필모그래피를 형성한 작품 수만도 86여편에 이른다. 1966년 그리스영화 조지 스칼레나키스의 흑백 필름 <러브 사이클>로 신고식을 치른 아르바니티스는 판텔리스 불가리스의 <위대한 사랑 노래>(1973)나 미카엘 카코야니스의 <이피게니야>(1977), 줄스 다신의 <정열의 꿈>(1978) 등을 통해 70년대 그리스영화가 국제적인 위치를 점하는 데 일조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르바니티스를 수식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앙겔로풀로스와의 교류가 시작된 것도 이 때인데, 앙겔로풀로스의 데뷔작인 <범죄의 재구성>(1970)의 촬영이 그 계기이다. 그리스 최초의 독립영화로 불리는 이 작품은 5명의 스탭과 적은 예산으로 제작되었음에도, 아르바니티스 자신은 검증받지 못한 이들과의 작업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준다는 신조로 열정과 도전을 아끼지 않았으며, (1972), <유랑극단>(1975) 등을 통해 혁신적인 아르바니티스의 촬영은 점차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숨막히는 긴장감을 형성해낸다는 아르바니티스 특유의 촬영방식은 바로 정지된 카메라와 힘차고 역동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을 오가며 이루어낸 롱테이크에서 찾아진다. 죽음을 앞두고 32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지만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시텔 섬으로 여행을 떠나는 노인의 모습에서(<시테라 섬으로의 여행>), 히치하이커와 만남을 갖게 되는 쓸쓸한 여행자에게서(<양봉치는 사람들>), 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 남매가 겪게 되는 시련과 절망의 고통 속에서(<안개 속의 풍경>) 죽음을 앞둔 노작가가 밀입국한 꼬마와 함께 떠난 여행길에서 겪는 과거와 현재에서(<영원과 하루>) 물과 안개가 주조를 이룬 음산한 분위기를 빨아들인 카메라는 한치의 낭비도 허하지 않은 채 희망을 찾아 나선 이들의 삶을 관조적으로 그려낸다.
이처럼 80년대 들어 점차 원숙미를 드러낸 앙겔로풀로스와 아르바니티스의 협업은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으며, 유럽 최고의 작가들과의 작업이 이어진다. 최근에는 카트린 브레이야와 함께 여성의 성욕을 다룬 다소 충격적인 영화 <로망스>(1999)의 작업을 했는데, 흰색과 블루가 주조를 이루어 차갑고 서늘한 느낌을 주는 폴의 공간과 갈색톤으로 사랑에 빠진 마리의 공간을 분리시킴으로써 둘 사이의 심리상태를 극명하게 전달하는 등 촬영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놓지 않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되어 화제가 된 <내 누이에게>(2000)에서의 대담한 영상으로 또 한번 주목받는다.
지난 2000년 칸영화제에서 촬영감독 최초로 황금카메라상의 심사위원직을 맡기도 한 아르바니티스는 그 명예 때문이 아니라 많은 영화를 볼 수 있어 기뻐했다고 한다. 카메라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이미지를 만들어스낼 수 있는 기술적인 여건이 주어진 오늘에 그가 되돌아보는 것은 바로 이런 자세다. “무엇을 찍을 것인가, 어떤 이야기를 말할 것인가에 따라 영화는 달라진다. 충실한 이야기는 곧 스크린을 대하는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최고의 믿음 그 자체이다.” 이화정/ 자유기고가 zzaal@hanmail.net
촬영
<케드마>(Kedma, 2002) 아모스 기타이 감독
<내 누이에게>(A Ma Soeur!, 2000) 카트린 브레이야 감독
<리베르떼 올레옹>(Liberte-Oleron, 2000) 브루노 푸달리데 감독
<징후와 불안>(Signs & Wonders, 2000) 조나단 노시테르 감독
<로망스>(Romance, 1999) 카트린 브레이야 감독
<이노센트>(Innocent, 1998) 코스타 냇시스 감독
<삶의 여행>(Train de Vie, 1998) 라두 미하일레아누 감독
<영원과 하루>(Mia Aiwniothta Kai Mia Mera, 1998)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벤트>(Bent, 1997) 숀 마티아스 감독
<토탈 이클립스>(Total Eclipse, 1995) 아그네츠카 홀랜드 감독
<율리시즈의 시선>(To Vlemma Tou Odyssea, 1995)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다른 누군가의 미국>(Someone Else’s America, 1995) 고란 파스칼제빅 감독
<나비의 꿈>(Il Sogno Della Farfalla, 1994)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
<선피쉬>(Poisson-Lune, 1993) 버트란드 반 에펜테르 감독
<나는 당신을 생각한다>(Je pense a Vous, 1992) 장 피에르 다르덴 감독 외
<사랑과 슬픔의 여로>(Homo Faber, 1991) 폴커 슐렌도르프 감독
<황새의 멈추어선 걸음>(To Meteoro Vima Tou Pelargou, 1991)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1989) 장 자크 안드리안 감독
<안개 속의 풍경>(Topio Stin Omichli/Landscape in the Mist, 1988)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양봉업자>(O Melissokomos, 1986)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Taxidi Sta Kithira, 1984)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정열의 꿈>(A Dream of Passion, 1978) 줄스 다신 감독
<이피게니야>(Iphigenia, 1977) 미카엘 카코야니스 감독
<아가톤 공격>(Assault on Agathon, 1975) 라슬로 베네덱 감독
<유랑극단>(O Thiassos, 1975)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위대한 사랑 노래>(O Megalos Erotikos, 1973) 판텔리스 불가리스 감독
(Meres Tou 36, 1972)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범죄의 재구성>(Anaparastassi, 1970)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러브 사이클>(Dama spathi, 1966) 조지 스칼레나키스 감독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