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마비 퇴치 영웅
태양과 특허
8조로부터 자유로운 남자
코로나와 태양
거대한 태양을 벗어버린 여자
조너스 에드워드 소크(Jonas Edward Salk, 1914년 10월 28일~1995년 6월 23일)는 미국의 의학 연구자이자 바이러스학자이다.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뉴욕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 학위를 취득하고 마운트 시나이 병원의 의사가 되었다. 내 막냇동생이랑 윤이랑 같은 학교 출신이다. 윤은 지금 맨해튼에서 내과를 운영 중이다. 내가 코로나로 끌려가고 욕먹고 고난 당할 때 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 유일한 사람이다.
코로나에 걸린 순간, 세상의 모든 엑스맨의 칼날 같은 손가락들이 나를 향했다. 박해 당한다고 하자 인권유린이라고 싸워주었다. 윤은 멋진 여자이다. 뉴욕 어린양 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이민 온 많은 이들을 도와주었고 점심시간마다 책상 위에 엎드려 자던 흑인 여학생에게 "왜 점심시간마다 자는 거지?" 하고 깨워서 먹을 것을 사주기도 했던 용감한 여자이다. 본인도 어려운데 상대방이 무안하지 않게 햄버거를 사주었다.
육포를 씹어 먹으며 식사시간을 아껴 하루 16시간씩 공부한 독한 여자이다. 본인이 의사라 좋은 이유는 "봉사활동" 을 할 수 있어서라고 했다. 윤은 해마다 새로운 언어를 공부해서 5개국어인지 6개국어인지를 거침없이 구사한다. 환자들이 새벽부터 복도에서 "Doctor Yoon" 을 기다린다. 어르신 팬클럽을 가지고 있다.
엄마 순자 여사는 박막례 할머니보다 한참 언니이다. 센스 있고 재치 있고 솔직하고 거침없는 면에서 둘은 상당히 닮았다. 가족회의에서 조카들이 할머니를 유튜버로 만들어서 돈벌이에 이용하자는 폐륜 같은 안건을 제시했다. 코로나 숙주로 내 삶의 1할 정도를 갉아먹어서 기가 많이 죽었다. 나막신 장수와 부채 장수 자식을 둔 어머니라는 전례동화의 주인공 같기도 하다. 착한 두 아들을 둔 여인은 항상 불행했다. 비가 내리면 부채 장수 큰아들이 걱정되고 비가 그치고 반짝반짝 해가 뜨면 나막신을 파는 둘째 아들이 걱정된다고 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자 이웃 아줌마가 "해가 떠도 걱정이고 비가 와도 걱정이니 걱정도 팔 자구먼! 날이 화창하면 큰아들의 부채가 잘 팔려서 좋고 비가 오면 둘째 아들의 나막신이 잘 팔려서 좋다"라고 여기라는 생각의 전환을 알려준다. 그 후로 어머니는 행복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누구나 다 아는 뻔한 이야기이다.
엄마 순자 여사도 코로나로 망한 큰딸 때문에 항상 미안해한다. 막내딸은 코로나로 큰돈을 벌었으니 역으로 생각하면 될 텐데.. 큰딸이 저 바닥을 헤매고 있다.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다. 억지로 반성하려고 하니 화가 나고 우울했다. 무수히 많은 반성문을 썼으며 자기 연민과 혐오의 글만을 적어보냈다. 자아성찰을 하다가 면도 칼이나 껌 씹는 언니로 나를 변신시켰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경고 글이 생각난다. 정형외과에 갔는데 초로의 의사는 내가 코로나 확진자였다고 하자 갑자기 손을 닦고 소독약을 바르고 대소변 급한 어린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더니 그냥 가라고 했다. C 종합병원에서 퇴원할 때 세상의 안목이 두려워 더 이상 감염을 옮길 능력이 없다는 비싼 진단서(글자 몇 개 쓰인 종이 한 장이 2만 5천 원이나 한다. 솔직히 욕 나온다. 내 피 같은 돈!!)를 부적처럼 사 왔다.
자시(子時)에 회화나무 열매로 노란 물을 들인 괴황지(槐黃紙)를 꺼내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고 붉은 빤스에 비밀 주머니를 달고 공그르기 했어야 했다. 붉은 경면주사(鏡面朱砂)로 그려왔어야 했는데 내 치성이 하늘에 이르지 못했다. 진단서에 '직사각형 노란 종이에 붉은 글씨로 씐 것'으로 테를 둘렀어야 했다. 현세에 받은 응보(應報)로다!
나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한 것이었다. 이것 또한 " 업(業, karma)" 이로다. 대충 인쇄한 종이가 무슨 효용이 있을 것인지! 정형외과 의사가 파킨슨병에 걸린 환자처럼 손을 떨고 제발 돈 안 받을 테니 가라고 했다. 문전 박대 당했다. 야만의 한시대를 불탄 도시에서 살아남은 사람처럼 홀로 걸어 나왔다.
세상의 모든 통곡 소리를 가둔 호리병을 가슴에 담고 산다. 사 남매의 맏이라 슬프게도 철이 빨리 들었다. 힘들고 어렵다는 말을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쌀독에 쌀이 떨어져도 난 그냥 굶어 죽을 대책 없는 유형의 사람이다. 삼 년을 우울증, 조현병, 조울증, 공황장애로 싸우다 보니 몸과 마음이 다 망가졌다.
언제든 국회의사당 앞에서 대의명분을 위해 화염병을 들고 분신하라고 한다면 달려갈 것이다. 뱀파이어의 의상인 검은 망토 입고 옷자락 끝에 불이 피어오르는 인체 발화 퍼포먼스 하고 싶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난 이제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도 못 느낀다.
조나스는 1960년에 자신의 명예에 안주하지 않고 March of Dimes의 자금과 샌디에이고 시의 토지를 지원받아 세계에서 가장 시급한 의료문제를 해결하는 기초 연구를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소크 연구소를 설립했다. AIDS를 퇴치하는 연구를 하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건축가 루이스 칸과 협력하여 "과학의 기념비"이자 "피카소가 방문할 가치가 있는" 장소가 될 건물을 만들었다. 왜 세기의 화가 "피카소"일까? 소크와 피카소는 무슨 관계일까?
소크는 피카소를 버린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인 프랑수아즈 질로(1921년 ~2023년)의 남편이었다. 질로는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에서 철학, 법학 등을 공부했다. 그 유명한 스페인의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를 유일하게 차버린 당돌하고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당시 질로는 20대, 피카소는 60대였다. 당시 연인이었던 사진작가인 도라 마르와 옆 식탁에 앉아 있었는데 질로를 발견한 마성의 남자 피카소는 섹시하게 체리를 들고 다가갔다. 핏빛 체리와 검게 그은 구릿빛의 남성미를 뿜뿜발하는 그림 그리는 오빠를 누가 거부할 것인가!
질로가 화가라는 말을 듣고는 자신의 스튜디오에 그녀를 초대했으며, 두 사람 다 화가이기도 해서 미술로 친해졌고, 사랑에 빠졌다. 당시 피카소는 질로를 두고 "저렇게 아름답게 생긴 여자는 화가가 될 수 없다"라는 칭찬 같은 망언을 했다. 나도 그런 말 듣고 싶다. 질로는 닭 대신 꿩을 택한 현명한 여자였다. 피카소는 여자를 이용해서 영감을 얻는 자였다. 질로는 달랐다. 피카소를 버리고 멋지게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피카소라는 장막을 과감하게 벗어던진 여자다.
소크는 천연두에 이어 두 번째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수많은 제약회사들이 러브콜을 했다. 현 시세로 8조 정도의 돈을 그는 거부했다. TV 인터뷰에서 "특허는 인류에게 있습니다. 태양에 특허를 붙일 수 있을까요?"라는 멋진 말을 남겼다. 전 세계 어린이들이 소아마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 덕분에 100원도 안되는 돈으로 백신을 맞게 되었다.
<태양의 폭발과 코로나>
태양은 특허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코로나는 품고 있다. 코로나(라틴어: Corona)는 태양이나 다른 천구체의 빛나는 플라스마 대기이다. 우주 공간으로 수백만 킬로미터 뻗어나가며, 개기일식 때 쉽게 관측할 수 있으며, 또한 코로나그래프로도 관측할 수 있다. 코로나는 태양의 흑점이다. 내 가슴속, 흑점도 코로나이다. 내가 타면 사리는 안 나와도 흑점은 생길 것이다.
코로나의 흥미로운 면은 태양의 "표면"보다 거의 200배 정도 더 뜨겁다는 사실이다. 그리스어, 라틴어, 스페인어로 왕관을 뜻하는 단어다. 영어의 크라운(Crown), 독일어의 크로네(Krone) 등의 어원이다.
태양 상층부 대기를 코로나라 하는데, 태양 주변으로 뻗어나가는 형상이 태양신의 왕관을 연상시킨 듯하다. 왕이 새로이 등극해서 관을 쓰는 대관식을 영어로 coronation이라고 하는데, 역시 코로나에서 파생된 단어다.
질로가 소크를 처음 만난 건 1969년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소크 생물학 연구소’ 건축답사 때였다. 라 호야(La Jolla) 해안 언덕에 63년 개장한 연구소는 '연구소 건축의 전범'으로 꼽히는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Kahn)의 걸작이다. 한 해 전 이혼한 연구소장 소크가 일행을 안내했고, 질로의 “우아함과 지성”에 반해 만난 지 6개월 만에 청혼했다. 세기의 커플이 탄생했다.
질로는 소크의 소탈한 개성과 도덕적이고 훌륭한 인품에 호감을 느꼈지만, 결혼할 의사는 없다며 몇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 해 6개월 이상은 누구와 함께 살고 싶지 않습니다." 등등…. 소크는 질로에게 원하는 결혼의 조건을 적어달라 청했고, 그걸 본 뒤 즉석에서 “다 좋습니다. 내 뜻에도 완벽히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둘은 한 달 뒤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아름다운 커플은 1995년 소크가 숨질 때까지 함께했다.
만년의 소크가 "내가 아는 인간 중 가장 진화한 사람 중 한 명"이라 평했던 질로는 조건대로 뉴욕과 파리, 샌디에이고를 오가며 살았고, 소크 사후에도 연구소 연례 기금 모금 행사에 작품을 기증하고 명예 회장 등을 맡아 봉사했다.
질로는 화가로서도 성공을 했다. 자신이 이룬 것들이 단지 피카소와 함께 보낸 시간의 덕은 아니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로서 살기 위해 누구의 허락도 구한 적 없다." 타인의 명성에 기대어 살지 않는 삶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는 삶일 것이다.
그녀는 멋있다. 그리고 통쾌하다. 돈, 여자를 탐닉하던 늪 같은 남자 피카소의 첩이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새로운 자신만의 삶을 온전히 살다 갔다. 남자의 영향력을 받는 것보다 남자에게 많은 영향력을 주고 당차게 성공한 삶을 살다 갔다.
프랑수아즈 질로
“나는 죄수였던 적이 없다.
머문 것도 떠난 것도 모두 내 의지였다.”
“나는 내 사랑의 노예이지, 당신의 노예가 아니다” 난 간택당하는 삶보다 간택하는 사람이 좋다.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삶이다.
나도 간택당하기보다는 간택하는 삶을 살았다.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고민해 봐야겠다.
인간은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 업을 짓는 것도 자신이요. 업에서 벗어나는 것도 자신이다. 업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참회하는 밤,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서 서 보리(菩提·बोधि· bodhi), 즉 깨달음을 얻었지만 난 은행나무 아래서 은행 잔고의 비어감을 한탄했다. 영원히 철들지 않으리라! 다음 생애에도 난 해탈하지 못하고 헤매리라!
세상의 모든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사람에대한 바른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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