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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생충>의 존재론,
가난하거나 불행하거나 나빠진다는 것
서울공대지 2019 Autumn No.114
이수향 영화평론가, 서울대 국문과 강사.
2013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평론상 수상.
공저로 『1990년대 문화 키워드20』, 『영화광의 탄생』, 『영화와 관계』 등.
불편한 질문들
자, 당신은 서울의 요지에 수십 억대의 집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거주의 불안정성에 시달리고 있는가. 당신은 자신의 이름과 사회적 위치, 직업군의 전문성이 주는 경제적 기반으로 일상생활을 위한 단순 노동을 피고용인들에게 맡긴 채 시간절약에 힘쓰는가 아니면 서비스 집약의 육체노동에 복무해야만 겨우 생계가 유지되는가. 좀 더 단순하게 바꿔보자면 당신은 가진 자인가 못 가진 자인가. 이러한 속악한 질문은 단순하기 때문에 여러 맥락에서 빈틈을 가진다. 그렇지만 현대의 한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유효하게 제기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양자를 중산층 이상의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으로 나눈다면 우리들 각자는 어느 위치에 해당하게 될까. 올해 칸느 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대상 격인 황금종려상(Palme d'Or)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본 관객들이 느끼는 당황스러움 혹은 불편함은 이렇듯 각자의 위치에서 오는 관점의 차이에 따라 그 불편함이 향하는 방향의 차이를 드러낸다. 즉, 어느 인물에 감정이 이입되느냐는 관객들 각자가 가진 계층적 위치 혹은 정치사회적 입장과 공명하는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공연히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어 온 봉준호 감독이므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항 구도에서 후자의 편을 들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결론을 내린다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여러 겹의 섬세한 층위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가진 자’를 포악한 악당으로, ‘못 가진 자’를 선량하고 나약한 자들로 묘사하는 클리세를 반복하는 대신 인물의 캐릭터가 처한 상황과 태도를 좀 더 복잡다기한 양상으로 보여준다.
기생충 가족, 웃기거나 혐오스럽거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기택(송강호)네 가족은 전원 백수로 반 지하 방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살고 있는 처지이다. 어느 날 아들 기우(최우식)의 친구인 민혁(박서준)이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면서 수석 한 개와 고등학교 여학생을 가르치는 고액 과외 자리를 물려준다. 기우는 과외를 하기 위해 박사장(이선균)과 연교(조여정) 부부의 집에 가서 딸 다혜의 신임을 얻는다. 그리고는 아들 다송의 미술치료사로 여동생 기정(박소담)을, 운전기사로 아빠 기택을, 가정부로 엄마 충숙(장혜진)을 밀어 넣어 가족들 전원의 일자리를 해결하고 가족들은 기뻐한다. 그런데 원래 박사장네 일을 맡아오다가 쫓겨났던 가정부 문 광(이정은)이 갑자기 등장하게 되면서 박사장 부부의 집에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고 기택네 가족이 느꼈던 짧은 행복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가족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문제영화(Social Problem Film)이고 장르적으로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공식을 따르고 있으며 코미디가 가미된 영화적 색채도 띠고 있다. 미스터리한 구성을 제외한다면 일본 영화 <어느 가족>(원제; 만비키가족 万引き家族, 도둑 가족)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생충>이 칸느 영화제 본상 후보에 올라갔다는 소식을 듣고도 실상 국내 영화계에서는 수상에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비단, 작년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요란한 기대에 못 미치는 수상결과를 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간 유럽 감독들 중심으로 인정받아온 칸느에서 작년에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연속으로 아시아의 감독에게, 그것도 가족을 중심으로 한 사회물이라는 장르적 특징이 유사한 영화에 주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가족>이 국가에 등록되어 관리 받는 명단 밖에 존재하는 여러 인물들을 통해 일본이 당면한 복지의 사각지대라는 문제를 묻고 있다면, <기생충>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좀 더 예각화시키고 있다. 즉, ‘국가’라는 실체 없는 상대방 대신 세밀하게 나뉘는 세 무리의 가족들을 등장시켜서 이들의 갈등을 통해 계층적 구분과 영화의 구조적 짜임새, 그리고 미장센적인 특징까지를 모두 결합시켜 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기생충>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가진 자로 설정되는 박사장네 가족들이 최소한의 사회적 교양과 체면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사장은 자수성공한 스타트업 대표 정도의 포지션에서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의 기반을 만들어주며 아내와의 관계도 원만하고 자식들 특히 어린 아들 다송의 눈높이에 맞춰 놀아주고 아들을 위해 기획한 이벤트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가정적인 인물이다. 아내 연교 역시 속물근성이 있기는 하지만 영악하다기보다는 다소 순진하고 맹한 구석이 있는 인물로 악랄하게 하층 사람들을 괴롭히는 나쁜 사모님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아니다.
이에 반해 기택네 가족은 입에 욕을 달고 살고 박사장네 가족들을 속이기 위해 서류를 위조하고 거짓으로 경력을 꾸미며 자신들의 가난을 무기로 오히려 그러한 사기 행각을 당당하게 진행하면서 박사장의 집에 기생한다. 이렇듯 어리숙한 부자와 당당한 빈자의 도치된 태도는 이 영화의 코미디를 담당하는 중요한 요소이면서 영화 전반부에서 영화적 긴장을 이완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즉, 상층과 하층이라는 두 계층으로 진행되는 부분에서는 관객들로 하여금 불편하지 않은 선에서 적당한 정도의 위트를 빌려 양자에 대한 거리 두기가 가능해지는 부분인 것이다.
폭우로 드러난 진실 - 쏟아져 내린 가난
박사장네 집의 전 가정부인 문 광의 등장 이후로 급작스럽게 영화는 미스터리적 분위기로 반전된다. 전반부의 코미디 요소는 어딘가 찜찜한 이 하층 기생충 가족에 대해 그나마 동정의 여지를 주었지만, 문 광 가족의 등장으로 기택 가족도 자신들보다 더 하층의 가족을 착취하는 먹이 사슬의 연쇄적인 흐름 위쪽에 놓인다. 즉, 상하층의 단순한 도식은 상-중하-최하라는 계층의 분기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러한 반전의 배경에는 폭우가 있다. 영화 초반 궁핍함에 우울하던 기택네 가족은 박사장네 집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생각하자 행복감이 점점 고조되다가 다송의 생일 기념 캠핑으로 잠시 비워진 박사장네 집에서 몰래 난장판 술 파티를 벌이면서 기쁨이 최고조에 달한다. 그러나 이 가족의 행복은 폭우와 함께 끝이 난다. 폭우와 함께 문 광이 등장하며 지하실의 비밀이 드러나고, 비로 캠핑이 취소되어 박사장 가족이 예정보다 일찍 돌아오면서 상황이 엉망진창으로 꼬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거실탁자 밑에 바퀴벌레처럼 겨우 몸을 낮추고 숨어 있다가 박사장 부부가 잠이 들자 겨우 그 집을 도망쳐 나와 자신들의 집으로 향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제일 공을 들인 압도적인 미장센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매 순간 당당하고 유쾌하던 기택 가족이 패잔병처럼 어깨를 늘어뜨린 채 말도 없이 일렬로 서서 비를 맞으며 좁은 골목길을 지나 엄청난 계단을 내려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가서 결국 그들의 원래의 주거지인 반 지하 방으로 들어가는-하강의 무게 감이 화면을 짓누르는 장면들은 이들의 사회적 계층의 위치를 냉담하게 보여주는 영화적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방보다 높은 화장실과 그보다 높은 곳에 위치시킨 변기에서 폭우로 불어난 오수가 솟구쳐 오르는 장면은 이들 가족의 처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박사장네에게는 느닷없이 닥치는 불행한 상황들을 피할 수 있는 물적-경제적 기반이 있으므로 연교의 말처럼 미세먼지도 제거해주고 전화위복이 되게 해주는 폭우가 고맙다면, 기택네 가족에게 폭우는 보잘것없는 보금자리 마저 완전히 앗아가는 재앙의 결정체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봉준호 월드의 집합체
봉준호 감독은 전작들에서도 사회적 문제들 그 중에서도 빈부나 지역 격차에 따른 계층의 분리나 갈등 요소에 많은 관심을 보여왔다. 그의 첫 작품인 <플란다스의 개>가 해결되지 않는 미래에 우울해하던 고학력자의 열패감이 이상한 방식으로 발현되는 모습을 다뤘다면, <괴물>에서는 서울에 살지만 중산층의 요건에는 여러모로 도달하지 못한 가족들에게 닥친 재난을 그려낸다. 이 영화는 괴물이라는 대상을 향한 공포가 핵심이 아니라 없는 형편에도 극진한 한 가족의 구성원 지켜 내기라는 고군분투에 가깝다. <살인의 추억>은 80년대 군사 정권의 관제 등화 아래 숨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범인이라는 공포감을 도시와 농촌, 학력 등의 계층적 격차를, 갈등을 배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마더> 역시 모성이라는 이름이 가진 숭고함의 저변에 깔린 집착과 이기심의 어두운 면을 끄집어낸다. 이러한 영화들은 가장 ‘한국적인 설정’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의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조명했다. 이에 반해 외국의 자본과 기술력이 더해진 <설국열차>와 <옥자>에서는 계급에 따른 구별 짓기와 다국적 기업의 대량 육류 공급의 연쇄를 통해 본 거대 자본주의를 거론하며 좀 더 시야를 보편적인 문제로 확장했다. 그리고 이번 <기생충>은 그간의 영화들에서 보여준 여러 문제의식과 성과들을 총체적으로 결합해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설국열차>에서 계급의 분리-소수가 독점하는 ‘부’의 문제를 기차의 앞을 향한 질주라는 직렬 구조를 통해 알레고리적으로 보여줬다면, <기생충>은 이 문제의식을 최근의 한국적 상황에 맞춰 좀 더 현실화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기생충>에도 <플란다스의 개>의 윤주처럼 똑똑하지만 사회적 인정에 미달된 상태로 열패감을 느끼는 기우가 있고, <괴물>처럼 서로를 향한 애정만큼은 깊은 가족들이 있고, <마더>처럼 모성이 등장한다. 특히 모성의 측면이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교와 충숙이 자신의 아이들을 지키려 하는 것은 일반적인 모성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기이한 느낌의 유사 모성이 등장한다. 문 광과 그의 남편 기세(박명훈)의 관계가 그렇다. 사업 실패 후 쫓기다가 박사장네 집의 지하 비밀 공간에 숨어사는 기세는 이 영화에서 ‘폭로의 플롯’을 담당하는 히든 카드이다. 그는 이미 지하실이 주는 편리함에 안주하며 사회성을 잃은 채 살고 있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박사장에게 먹고 살게 해줘서 존경한다며 모스부호로 감사를 표하는 등 여러 모로 괴상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간의 부부의 일들을 플래시백 하는 장면에서 기세는 거의 백치 혹은 어린 아이와도 같은 말투와 행동을 보여주고 심지어 젖병을 물고 있는 장면까지도 등장한다. 문 광은 금치산자나 다름없는 남편을 먹여 살리고 그를 끝내 포기하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모성의 화신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감독의 전작과 연결되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생물학적 관계의 일반론적인 모성과는 달리 부부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최하층의 희망 없음과 현실감각의 무감함을 퇴행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충격효과를 준다고 볼 수 있다.
백일몽과 복수심 사이 어딘가
다송의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생일 파티 이벤트가 대살육극으로 끝나버리고 난 후 죽은 박사장이나 연교는 묻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을 했느냐고. 자신들은 선 밖의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그저 적당한 가격을 지불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엄청나게 극악스럽지 않은 이들 가족이 불행에 빠진 건 역설적으로 하층 사람들에게 틈을 허용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겉으로 드러난 친절과 교양 있는 말투 속에 가리고 있었던 속물적인 구별 짓기, 그리고 선을 넘어오면 안 된다는 우월감을 은연중에 ‘냄새’라는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는 인간의 존엄과 인간성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측면에서 그들 부부가 간과한 부분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박사장네의 숨은 의중을 눈치 챈 후 느낀 기택의 모멸감과 분노에 찬 적의는 어떠한 방식으로 되갚을 수 있을 것인가. 두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아니, 사람이라는 존재에게 계층이나 경제적 위치와 관련 없이 동일하게 부여된 것이 있다. 부유함은 대부분의 불행한 상황을 쉽게 해결해주는 것 같지만 목숨 자체는 누구라도 유일무이하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무참히 부서진 집과 쓰러진 기정, 그리고 죽어가는 기세를 밀어내는 박사장을 향한 권력적 열세를 전복시키기 위해서 기택에게는 그의 하나뿐인 목숨을 노리는 방법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살육의 카니발이 끝나고 난 후, 살아남은 아들이 에필로그처럼 써 내려간 편지의 실체는 무엇인가. “근본적인 대책이 생겼어요. 돈을 아주 많이 버는 거예요.” 혹은 “제가 그 집을 사면,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되요.”라고 말하는 기우의 의중은 무엇인가. 패배의 잔해로 근세처럼 절망에 안주해버린 기우의 백일몽인가 아니면 복수를 다짐하며 시스템 자체를 파괴하고 아버지를 구해오겠다고 결심하는 희망찬 전언인가. 어느 쪽의 결말을 택하느냐는 관람객의 몫일 것이다. 다만 글의 서두에 말한 대로 <기생충>을 보고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면 이는 감독이 의도한 감정에 추동된 것이다. 이는 박사장 가족/기택 가족/문 광 가족 중 어느 한 쪽도 비난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셋 중의 한 편에 온전히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교집합 상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서사를 따라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소동을 넘어서서 재앙에 가까운 것으로 심화되어 갈 때,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난 이후에도 과연 잘못은 누가 저지른 것이며, 이 영화는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것일까라는 질문이 계속 맴돌 때 이 영화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기생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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