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 오늘의 성인♡
================
성 니콜라오 1세(Nicholas I)
축일 11월 13일
로마(Rome)의 귀족 가문 출신인
성 니콜라우스(Nicolaus, 또는 니콜라오)는
로마의 사제로서 교황 세르기우스 2세
(Sergius II)를 도와 성청에서 일하였고,
레오 4세(Leo IV)의 부제, 베네딕투스 3세
(Benedictus III)의 고문관을 역임하였다.
그는 858년 4월 22일 선임 교황 베네딕투스를
계승하여 교황이 되었다. 그는 즉시 늘
문제시되어 왔던 결혼의 거룩함과 불가해소성을
역설하였고, 황제의 조카인 로테르 2세 국왕의
혼인이 불법이라 규탄하는 등 수많은
정치 문제에 말려들게 되었다.
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좌의 오랜 분쟁,
라벤나(Ravenna)의 요한 대주교의 문제,
랭스(Reims)의 힌크마르의 야심 등으로
그의 재임기간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는 매우 관대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므로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의 정의감은 높은 존경을 받게 하였다.
성 니콜라우스는 ‘대’ 교황이란 칭호를 받는
3명의 교황 중 한 분이다.
================================
성녀 막셀렌다(Maxellendis)
축일 11월 13일
성녀 막셀렌다는 프랑스 북부 캉브레(Cambrai)
근교 코드리의 귀족인 우몰린(Humolin)가의
딸로 태어났으므로 부친은 좋은 집안과
결혼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녀 막셀렌다는 결혼을 끝내 마다하였다.
이때 그의 부친은 결혼을 해도 하느님을
잘 섬길 수 있고, 또 그렇게 성공한 부부도
많음을 역설하자 그녀는 다음날 오전까지
결정짓겠다고 말하였다. 그 다음날 그녀는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배우자도 원치 않는다고
최후의 결심을 밝혔다.
그녀는 결혼식 준비를 서두르는 집을 몰래
빠져나와서 카토캄 브레시스 교외의 어느 수녀원에
피신하였으나, 곧 부모에게 잡혀간 뒤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녀는
또 몰래 도망치다가 부친이 보낸 사람들의
칼에 맞아 운명하였다. 그녀는 인근 성당에
안장되었으나, 강브레의 주교인 성 빈디치아노가
코드리 성당으로 성대히 이장하여 공경하였다.
그 후 그의 부친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여 개과천선하였다.
================================
성 미트리오(Mitrius)
축일 11월 13일
성 미트리우스(또는 미트리오)는 확실한
순교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1월 17일) 주교의
언급에 의하면 그는 그리스 출신으로
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
폭군 같은 주인의 노예였다. 그는 주인과
동료 노예들로부터 잔인하게 학대를 받았고,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참수되었다.
성 미트리우스는 엑상프로방스의 수호성인으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
성 아르카디우스(Arcadius),
성 파스카시우스(Paschasius),
성 프로부스(Probus),
성 에우티키아누스(Eutychianus)
성 바울릴로(Paulillus)
축일 11월 13일
로마 순교록에는 아프리카에서 순교한
에스파냐계 성인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들의 이름은 성 아르카디우스(Arcadius),
파스카시우스(Paschasius), 프로부스(Probus),
에우티키아누스(Eutychianus) 그리고
소년이었던 바울릴루스(또는 바울릴로)이다.
이들은 반달족의 침략 당시 아리우스파
(Arianism) 왕인 젠세릭에 의해 아프리카로
유배되어 잔인한 형벌을 받고 처형되었다.
성 아르카디우스는 기혼자로서 가족이
있었다고 한다.
================================
성 발렌티노(Valentine)
성 솔루토르(Solutor)
성 빅토르(Victor)
축일 11월 13일
성 발렌티누스(Valentinus, 또는 발렌티노)와
성 솔루토르(Solutor) 그리고 성 빅토르(Victor)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에 이탈리아의
라벤나(Ravenna)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아마도 11월 11일에 기념하는 성 발렌티누스와
동료 순교자들과 중복된 것으로 보인다.
일부 순교록은 그들 외에 다른 몇 명의 이름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
성 브리시오(Britius)
축일 11월 13일
성 브리티우스(또는 브리시오)는 프랑스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 성직회의
일원으로서 397년에 투르의 주교직을
승계한 분이다. 그는 원래 자만심이 강하고
야심이 가득한 성직자로서 성 마르티누스
(Martinus, 11월 17일)를 큰 공경에
빠뜨린 적이 있었다. 성 브리티우스의
이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성 마르티누스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였으므로, 그는
마침내 큰 회오의 감정을 품게 되었으며
자신의 무례한 행동에 대하여
성 마르티누스에게 용서를 청하였다.
397년에 그는 투르의 주교로 승품되었으나
예전의 나쁜 습관들이 되살아나서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여, 수차례에 걸쳐 그의
부도덕성과 방종으로 고발되기도 하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주교직에서 물러나야만 하였다.
그는 로마(Rome)로 가서 7년에 걸쳐
회개생활을 하였으며, 완전히 자신의
생활양식을 개선하여 아주 새 사람이 되었다.
그를 승계했던 투르의 주교가 운명하였을 때
그는 재차 투르의 주교가 되어 아주 겸손하고
거룩하게 교구를 다스렸다. 그래서 그의
임종 후부터 그는 위대한 성인으로
교구민들의 공경을 받았다.
================================
성 아보(Abbo)
축일 11월 13일
프랑스의 오를레앙(Orleans) 근교에서
태어난 성 아보는 파리(Paris)와
랭스(Reims) 그리고 오를레앙에서 수학한 후,
플뢰리-쉬르-루아르(Fleury-sur-Loire)의
수도원에 정착하였다. 986년경에 그는
영국 헌팅던셔(Huntingdonshire)의
램지(Ramsey) 소재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나, 자신의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2년 후 플뢰리로 귀향하였다. 그는
한 차례의 격렬한 선거를 통하여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이 선거는
게르베르(Gerbert)의 도움을 받아 진정될 때까지
오랫동안 파문을 일으켰다.
게르베르는 999년에 교황위에 올라
실베스테르 2세(Silvester II)가 되었다.
성 아보는 교황과 프랑스 국왕 사이의
중재자였는데, 주로 여러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중재하였으며,
가스코뉴(Gascogne)의 라 뢸르(La Reole)에서
수도자들의 분쟁을 평정하려다가 살해되었다.
그는 천문학, 수학 그리고 철학자로서 널리
알려졌고, 성 에드문두스(Edmundus, 11월 20일)의
전기를 썼으며 교회법전 선집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
성녀 아우구스티나(Augustina)
축일 11월 13일
성녀 아우구스티나는 1864년 3월 27일
이탈리아 리에티(Rieti)의 포차글리아
사비나(Pozzaglia Sabina)에서 리비아
피에트란토니(Livia Pietrantoni)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1886년 로마(Rome)의
바티칸 근교 성령 병원의 간호사가 된 그녀는
다음 해에 병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애덕 수녀회에 입회하여 아우구스티나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는 위독한 환자나
전염성이 강한 발진티푸스나 말라리아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결핵에 걸린 그녀는 결핵 병동에서 일하다가
그녀를 성폭행하려는 한 환자의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 성녀 아우구스티나는
1913년 11월 13일 자신을 살해한 이를
용서하면서 선종하였다.
아고스티나(Agostina)로도 불리는 그녀는
1999년 4월 1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
성 안토니노(Antoninus)
성 제비나(Zebinas),
성 게르마누스(Germanus)
성녀 엔나타(Ennatha)
축일 11월 13일
성 안토니누스(또는 안토니노),
성 제비나(Zebinas), 성 게르마누스(Germanus)와
성녀 엔나타(Ennatha)는 갈레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했는데, 그들은 황제 앞에서도
용감히 복음을 선포하였다.
성녀 엔나타는 다른 동료들이 참수되는 동안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
성 에우제니오(Eugene)
축일 11월 13일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 또는 에우제니오)는
에스파냐계 고트인(Goths)으로서 사라고사
(Zaragoza)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그 당시의 음악가이자 시인이었으나 교계 진출을
극히 꺼려하여 무덤 속에서 숨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하여
톨레도의 주교직에 올랐다. 그는 매우 훌륭한
음악가였다. 그는 그 당시의 빈약한 음악을
개선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또한 그는
자기 교구를 진정한 사랑으로 지도하였고,
자신이 물러날 때에는 성 일데폰수스
(Ildefonsus)에게 인계하여 교구가 크게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
성 퀸시아노(Quintian)
축일 11월 13일
성 퀸티아누스(Quinctianus, 또는 퀸시아노)는
아프리카 사람으로 아리우스파(Arianism)
반달족의 박해를 피해 갈리아(Gallia)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 남부
로데즈의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서고트족
(Visigoths)의 침략으로 오베르뉴(Auvergne)
지방으로 갔고, 그곳에서 성 에우프라시우스
(Euphrasius)를 만나 그를 승계하여 클레르몽
(Clermont)의 주교가 되었다.
================================
성 호모보노(Homobonus)
축일 11월 13일
성 호모보누스(또는 호모보노)는
세례를 받을 때부터 ‘호모보누스’, 즉
‘착한 사람’이란 예언적인 이름을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Lombardia)의
크레모나에서 어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성공적으로 부친의 사업을 이끌어 더욱
번창하게 만들었다. 그는 사업에서 버는
이익 대부분을 빈민구제에 사용하고,
가족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만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은 가족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당에 나갔고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았다. 이 때문에 그의
사업은 더욱 번창하였고, 따라서 그의
자선사업이 날로 빛을 발하게 되어 유명해졌다.
그는 1197년 11월 13일 크레모나의
성 에지디우스(Aegidius, 또는 Giles) 성당에서
미사 참례하던 중에 운명하였고,
1199년 1월 12일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Innocentius 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양복공과 천 짜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
성 디에고 (D. Didacus)
축일 : 11월 13일
세빌레 근교에서 태어난 디에고는 한때
운수자로 고적한 삶을 살다가, 프란치스꼬회의
평수사로 입회하였다. 그는 칸나리 섬으로
파견되어, 그곳의 수도원 문지기 수사로
일했는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뛰어난
사랑으로 큰일을 이룩하여 성덕이 탁월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배우지 못한 그가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된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한 번의 임기를 채우고
그만두었다. 그는 여생동안을 스페인의
각 수도원을 다니며 하찮은 일을 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그의 높은 성덕은 프란치스꼬회뿐만
아니라 온 교회를 비추었던 것이다.
================================
성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 S. Kostka)
축일 : 11월 13일
폴란드 로스트코보성에서 태어난
그는 폴란드 원로원의 아들이다.
그는 개인 교수로부터 교육을 받고,
14세 때에 비엔나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근면과 신심 그리고 고행으로
유명하였는데, 수차례에 걸쳐 환시를 보았다.
그는 마침내 예수회원이 되려고 하였으나
비엔나 관구장으로부터 반대를 받았다.
그는 베드로 가니시오와 함께 350마일을 걸어
달렌겐으로 가서, 다시 로마로 갔다.
그는 마침내 1567년에 예수회에 입회하니,
이때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그는 더욱
엄격한 고행을 하였고, 미사 중에 자주
탈혼하였으며, 거룩한 삶을 살다가,
예수회원으로 단지 9개월을 지낸 뒤 귀천하였다.
그는 폴란드의 수호성인이다. (1726년 시성)
================================
성녀 프란체스카 하비에르 카브리니
(St.Frances Xavier Cabrini)
축일:11월13일
농부인 아우구스띠노 카브리나와
스텔라 올디니의 13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 딸인 카브리니는 산 안젤로에서
1850년 7월 15일에 태어나 마리아 프란치스카란
세레명으로 영세하였다.
그녀는 학교 교사가 될 꿈을 꾸었으나,
18세에 고아가 되자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는 두 공동체로 부터 입회를 거부 당하였으나,
1874년에 몽시뇰 세라띠의 초청을 받고
곤란한 상태에 빠진 고아원 섭리의 집을
관장하게 되었다.
이 집의 창설자인 안토니아 톤디니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치자, 또디의 주교는 프란치스카로
하여금 새로운 회를 창립하도록 주선하였다.
그녀는 7명의 추종자와 함께 코드뇨의
프란치스꼬회 수도원으로 이주하여,
소녀들의 교육에 헌신하는 성심 선교 수녀회
(Missionary Sisters of the Sacred Heart)를
창설하였다.
이 수녀회가 1880년, 주교의 승인을 받은 즉시,
그루멜로, 밀라노 그리고 로마로 퍼져나갔다.
1889년, 프란치스카는 코리간 대주교의
초청으로 뉴욕으로 가서 이탈리아 이민들을
위하여 일을 시작하였고, 이로써 수녀회는
미합중국으로까지 확장되었다
(1892년, 뉴욕의 콜럼부스에 첫번째 병원 개설).
그 후, 중남미와 영국으로 진출하였으며,
회헌의 승인은 1907년에 성좌로부터 받았다.
1917년 12월 22일, 그녀가 시카고에서
운명할 즈음에는 50개 이상의 병원과 학교,
고아원, 수도원 등 괄목한 발전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1909년에 아메리카 시민이 되었고,
1946년에 비오 12세로부터 시성되므로써,
미국 시민으로는 첫번째 성인으로 공경받았다.
그녀는 1950년, 비오 교황에 의하여 이주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다(부산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