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님!!
오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미모님의 고운 마음까지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아! 미모님의 가슴에 80년의 봄이 그렇게 자리잡고 있었군요.
동시대인의 아픔을 같이 할 수 있음에 또 반가움입니다.
진정 '아름다운 봄'이 누구에게나 언제나 계속되기를....
오늘 사직 운동장 근처에서 모임이 있어 집을 나서니
봄볕이 좋아 느긋하게 걸어가며 야구팬들의 함성을 환청으로 들었습니다.
나에게는 야구 개막과 함께 설렘의 봄은 그렇게도 찾아 왔었는데....
했네요.
부산 사람들의 야구사랑도 퍽이나 특이한 면이 있습니다.
나도 예외일 수 없어 '롯데'팀의 누구하면 쭉 그 신상을 꿰던 일이
있었는데 요즘은 나이 탓인지. 컴퓨터 때문인지 그 열기가 수그러들었네요.
80년의 봄은 '베레모 공수부대의 트럭'으로 연결지어집니다.
긴 총을 들고 트럭 뒤켠에서 뛰어 내리는 모습....
군화발 소리....
그 무렵 우리네들은 공부는 그야말로 쥐꼬리만큼 했네요.
휴교령!! 계엄령!!
카더라 소식!!
70년도 말 부산의 분위기는 더 더욱 살벌했답니다.
매일 피어오르는 매캐한 최루탄과 보도브럭 파편 던지기
완전무장의 닭장차에서 쏟아져 나오던
방독면과 방망이로 무장한 전투경찰의 돌격
정신없이 흩어지던 학생들!
서면 가구거리의 상점으로 숨어들어 벌벌 떨던 기억과
숨겨주던 한마음의 시민들.
시간이 흐른 후에야 찾으러 갔던 가방과.....
부마사태...계엄령....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1212사태....
김재규....
삼삼오오 모여 <쉿! 전두환! >
다방 구석에 앉아 충격의 이름을 듣던 순간도 기억나고
그 때의 친구들은 지구촌 각지로 흩어져 제 생활에 바쁘고.....
그들의 아들 딸들이 그 시기 우리 나이라니.....
정부나 위층의 시나리오는 어땠는지?
진실게임의 진상도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시나리오에 맞게 또 역사는 흐르지 않는게 역사인가 봅니다.
정말 가슴 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였습니다.
박근혜 의원의 움직임도 한껏 호기심을 자극시키는군요.
지금 이시기에 와 생각하니
정말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는지....
진정한 역사관 가치관 정체성도 없이 부화뇌동의 시기는 아니였는지...
하여튼 그렇게 젊음을 바친 친구들은 역사의 희생양으로
실력에서 뒤쳐지고 컴맹세대로 명퇴의 압박을 받는 세대가 되어
계속 힘들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풍경방에 봄소식을 알리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군요. 봄은 그렇게 상아색의
목련과 함께 오지만 저의 봄은 어느때인가 부터 언제나 마음구석 한편은
한숨으로 아품으로 시작되었지요.
저는 그 유명한 80학번입니다...'5.18'의 세월이 지나면서 두개의 '멍에'같은
기억들로 벌써 그 스무번째를 넘는 봄을 맞이하고 있군요.
79년 겨울 대학입시시험을 치루고 아마 크리스마스가 거의되었을 무렵
서울의 명동 롯데백화점이 개장되었어요 기억하시는 분들 많으실꺼에요.
호텔 역시 세계정상급으로 이웃한 조선호텔에 적수로 등장하기도 하면서
주변건물로 당시 일본 오오사카나 토오쿄오의 그 어는 샤핑몰과 견줄수 있는
건물군이 들어섰던 것을 기억하실꺼에요.
당시 여고 3년생의 눈에는 매우 생소한 '문화아이템'을 가지고 들어섰었어요.
마치 어떤 여자고등학교의 화려한 고적대 유니폼을 입은것 같기도 하고 어떤
스포츠경기의 치어리더들같이 단장한 그 백화점 여점원들은 상아색과 골드칩으로
단장을 한 화려한 건물입구에 서서 들어오는 고객들 한명한명에게 90도 각도로
인사를 하면서 팡파레를 울리는 모습은 나름대로 아직도 '닫힌사회'였던 일반적
사회 구석구석에 '3차산업인 서비스업'의 새로운 시각의 자극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도 되고요..물론 장단점이 있었지만 어떻게보면 지나친 서비스산업의
강조와 이기적인 사회구조의 처음계단같은 생각을 버릴수없기도 해요..
다른 나머지 하나는
80년 3월이 되어 여느 봄과 같이 우리집에 또는 옆집에 자목련 백목련 트이면서
그런 봄이 시작되었답니다.. 단발머리가 채 자라지도 않았는데.. 지겨워하던 교복의
다림질하는 것이 훨씬 쉽다고 생각을하며 어렵게 골라입은 사복을 입고 강의실을
다니면서 켐퍼스를 익힐무렵, 다른과에 입학한 같은 여고에 다니던 친구의 얼굴이
자꾸 변해가는 것을 일부 마음속으로는 부정하면서 .. 받아들여야 했었어요..그
'5월'이 다가오면서 더욱 타들어가던 친구의 얼굴은 이미 고3때의 지친 그런 모습이
아니라 '다른 지친모습'임을 볼때마다 감지했어야 했었어요..
공직에 계시던 아버지의 잠못이루시는 모습을 조석으로 대하면서 어찌 그 친구들의
모습을 또한 오버랩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저 한명은 역시 비겁한 입장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검게 타들어가던 친구에게 제가 할수있었던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작은돈 큰돈, 돈을 구해서 주는 것이 모두였어요. 그들에게 따뜻하게
잠도 잘수 없었던 그들에게 혹시나 밥은 따뜻한것을 먹게하고 싶었던 보상심리였을지도 몰라요.
겨우 40여일 강의실을 들락날락 하다가 휴교령을 받은 '대망의 80학번'이었습니다.
얼마전 3.1독립기념식상에서 대중가수 양희은씨가 우리가 즐겨불렀던 곡을 흰저고리
검은치마입고 부르는 모습이 이곳에서도 방영되었어요.. 몇초 본것같지도 않았지만
금새 뿌옇게 변하는 80학번이었지요..
그렇게 80학번들의 봄은 시작되었습니다. 창경원의 '나체팅'이라고 해서
'나이트체리미팅'이라는 대학생이 되면 꼭 해야한다는 당시 유행이었던 봄
이벤트도 저희 대다수 80학번들에게는 실행할 수 없었던 이벤트였었지요..
흩어져있던 그 80학번들은 그 해 가을에 다시 켐퍼스로 모여들었지만 돌아오지않을
얼굴들은 그 해의 봄같이 잃었었어요..
가끔 요즈음도 친구들과 모이면 저희들의 그 '붉은봄'을, 저희가 이 세상의 마지막
봄을 보내면서까지도 잊지못할 것이라는 말을 하고는 합니다. 어떤의식이었던지..
어떤의지였던지.. 한 시대의 아픔이었고 아직까지도 느껴지는 과거를 아는 세대들은, 모르는 새로운 새대들에게 여러 루트를 통해서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않는 뚜렷함이
전해지기를 또한 기대해 보면서... 그래도 아름다운 '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댓글언제나님께 80년 봄은 잊혀지지 않겠군요. 비슷한 시기에 함께한 고민과 갈등의 시간들...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그때의 아픔들을 딛고 일어섰기에 현재 우리가 쓰러질 듯 하면서도 꿋꿋히 버티고 있는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괜히 숙연해지는 새벽입니다. 우리 모두 화이팅이요 ~~~
첫댓글 언제나님께 80년 봄은 잊혀지지 않겠군요. 비슷한 시기에 함께한 고민과 갈등의 시간들...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그때의 아픔들을 딛고 일어섰기에 현재 우리가 쓰러질 듯 하면서도 꿋꿋히 버티고 있는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괜히 숙연해지는 새벽입니다. 우리 모두 화이팅이요 ~~~
옥동자를 탄생시키려면 어머니의 많은 진통과 고통을 겪듯이 지난날들의 어려움과 아픔들이 지금의 좋은 삶을 얻게되었다고 생각해봅니다 아픈역사는 두번다시 반복되지 않길 기원합니다
영헤님의 그 "붉은 봄"에 이몸은 미국에서 그런데로 정확한 정보를 받고 지냈답니다. 그리고 미국 연수동료들에게 변명하느라 바빴답니다.
그 시기 전에, 떠나온 터라 신문이나,방송으로 ,,,모래시계 같은 드라마로,,당시를 멀리서 느꼈습니다,,,다시 있지않아야할 일로 여기며,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지나오신 여러분을 ,,자랑스레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