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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오대산 정념 스님이 들려주는 행복한 불교 이야기
제목으로 봐서는 정념 스님이 들려주는 불교와 관련한 재미나고 행복한 이야기일 거라 생각하게 되지만 그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오대산 기슭에 자리 잡은 월정사 주지를 오랫동안 역임한 정념 스님이 한국불교, 특히 강원도 불교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중생들이 살아갈 방편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을 자현 스님이 듣고 책으로 엮은 것이라고 한다. 책은 마치 그림책처럼 사진들이 많은데 그만큼 아름답게 꾸미려고 한 것일 것이다. 사진은 오대산과 월정사, 상원사와 관련된 것이 많은데, 책의 서평에서도 사진작가 하지권 선생에 대해서는 소개하지 않았으므로 여기서도 생략했다. 책은 그냥 재미로 보고 읽기에 딱 좋다. 책의 그림을 보고 또 읽으면서 남길 것은 아무래도 스님이 하신 말씀과 스님이 소개한 것들일 텐데, 그것을 남겨야 하는 이유는, 그래도 책 한 권을 읽었으면 뭔가 남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 때문이다.
정념 스님 말씀이 와닿기는 하겠으나, 길고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드는 데는 내가 불교에 심취하지 못했기도 하고, 또 한자로 된 고승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귀하고 고상한 말씀들을 추려서 여기 옮겨 보려고 하는데, 그러자면 자연히 많은 공부로 이루어진 법문과 선문답 같은 것이 될 것이겠고, 그것은 절에 갈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일주문이나 법당 문설주 마다에 걸려 있는 주련, 이런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사실 주련(柱聯=楹聯)은 법문이나 고승들의 주옥같은 글귀지만, 한자로 되어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다 이해하는 한글세대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한글만 사용해야 한다던 세대인 나로서도 마찬가지다. ‘천상천하 유아독존’만 해도 부처님께서 태어나자마자 말했다고 하는 그 말이 나는 잘 이해되지가 않는다.
월정사는 ‘청산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라고 하신 고려말의 나옹선사가 주석한 곳이다. 그는 20세에 출가하여 36세 되던 해 중국의 광제선사(廣濟禪寺) 주지가 되고, 1358년(공민왕7년)에 귀국해 오대산 북대 상두암에서 머물다 양주 회암사 주지가 되었으며, 1371년 왕사가 된 뒤, 동방제일도량 송광사 주지를 역임하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의 멘토기도 했던 무학대사를 비롯한 많은 문도들이 그의 문하였고, 현 불교 조계종도 바로 그의 법맥이다. 나옹선사는 「답매씨서(答妹氏書)」라는 게송을 남겼는데 이렇다.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 부처님 어디에 계시는가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 마음을 다잡아 간절히 잊지 않아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생각하고 생각하여 생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 모든 감각기관에서 아미타 부처님 자금색 광명을 뿜어내게 되리라.
오라비이자 큰스님이신 나옹선사 덕에 누이가 극락왕생할 것으로 믿고 수행을 게을리하자, 하루는 누이를 불러놓고 혼자서 공양을 드시고는 “누이도 배가 부르느냐?”고 묻고는 “수행은 내가 했는데, 어떻게 네가 극락에 가겠느냐?”고 하면서 지어준 게송이라고 한다. 아미타 부처님을 생각하고 생각해서 끝까지 이르게 되면, 그 사람이 곧 아미타 부처님과 같이 된다는 의미를 담은 게송이다.
오대산은 우리나라는 물론, 동방제일의 신령스런 산이라는 것은 조용헌 선생이 「영지순례」에서도 증명하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중국의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뵙고는 부처님 사리와 가사를 모셔와 경주 황룡사와 통도사에 모셨으나, 몽골의 침략으로 황룡사가 불타면서 오대산 중대와 통도사에만 남았었다.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가 사명대사를 시켜 나누어 모시게 하여, 지금의 5대 적멸보궁(통도사·중대·봉정암·법흥사·정암사)이 생긴 것이다. 명당이라는 오대산 중대는 유명한 이야기가 여럿 전하지만, 그중의 하나가 암행어사로 알려진 박문수(1691∼1736)가 불교를 싫어해 불교 말살정책을 제시하곤 했으나, 그가 중대에 와서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는 “승려들이 좋은 기와집에 살면서 편안히 공양받고 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최고의 명당자리에 부처님 사리를 모시고 있으니 부처님 제자인 승려들이 발복해서 잘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이후부터 그는 불교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오대산 상원사는 세조와 문수동자 전설이 전해질 뿐 아니라, 세조의 딸 의숙공주가 문수보살 복장에 넣은 유물이 발견되기도 해 더 유명해졌다. 이곳의 ‘문수보살이 1만 보살을 거느리고 항상 설법한다.’(名文殊師利 有一萬菩薩眷屬 常爲說法)고 한 것은 『삼국유사』에도 전한다. 오대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각인된 명산은 금강산일 텐데, 금강산은 1만 2천봉과 ‘8만 9암자 유점사 법당 뒤…’라는 「강원도 아리랑」에 전한다. 내가 생각하기로 우리나라 최고 명산이다 싶지만, 갈 수 없으니 안타깝다.
‘8만 9암자’는 8람(藍)의 큰 가람과 다수의 암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만큼 암자가 많다는 것이다. 금강산을 대표하는 절은 유점사·장안사·표훈사·신계사로 그중에 신계사만 금강산 여행에서 스쳐 지나갔을 뿐, 나머지는 아직 가 보지 못했다.
상원사에는 스님들이 참선하는 청량선원이 있고, 기둥에는 ‘문수하독재청량(文殊何獨在淸涼)’이라고 쓴 주련이 걸려 있다. ‘문수보살이 어찌 청량산에만 있겠는가?’라는 뜻인데, 청량은 맑고 밝은 오대산을 말하고, 이것은 현암 스님이 쓴 것으로, 어디에서나 수행·정진하면 문수보살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다. 조선의 3대 시인으로 알려진 매창(梅窓)이 8세 때 선운사에 오르다 보니 스님이 마당을 쓸고 있어서 ‘스님, 저 흰구름은 쓸지 마소’라고 한 시가 있는데, 선문에도 ‘청산원부동 백운자거래’(靑山元不動 白雲自去來)라는 말이 있다. ‘푸른 산은 늘 그대로 있는데, 흰 구름만 스스로 오갈 뿐이네…’라고 하여 구름의 본체와 작용을 대비시킨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원각도량하처 현금생사즉시(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時)’라는 법문이 있다. 이것도 ‘깨달음이 완성된 이상적인 도량은 어디 있느냐? 현재의 삶 속 생사가 곧 그때일 뿐이다.’라는 뜻으로 눈을 바로 해 깨닫고 보면 지금 이 자리와 이 순간, 여기에 행복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부처님을 ‘깨달은 자’또는 ‘눈뜬 자’라고 하는 것은 현재의 행복을 증득(證得) 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깨달음인 것이다.
육조 혜능은 『단경』에서 “과거를 생각하지 마라. 과거는 이미 지나가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미래를 생각함에 생각, 생각을 두루 밝게 하여 스스로 본래 성품을 보도록 하라.(莫思向前 已過不可得 常思於後 念念圓明 自見本性)”고 하였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돌아보면 흘러가는 구름 같다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다가올 미래를 위해 좋은 복을 쌓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실천이 문제다 싶기는 하다. 혜능은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이란 말도 했는데,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불교에서‘좋은 일도 없는 것만 못하다’고 한 것처럼, 생각해 보면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이것인 것만 같다.
달마대사는 이런 말을 했다.
심심심난가심(心心心難可尋) 마음 마음하지만, 그 마음 찾기 어렵구나.
관시편법계(寬時偏法界) 너그러울 때는 온 우주에 두루하지만,
착야불용침(窄也不用鍼) 작아지면 바늘조차 용납하지 못하는구나.
온 우주를 다 담고도 남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마음을 제대로 써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마음, 그것이 근본 자리이며, 기도의 분상(粉狀)이다. 적멸보궁 같은 고요한 본분으로 되돌아가면, 누구나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정념 스님은 말한다.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월정사를 중건하고, 현암 큰스님과 탄허 스님의 가풍을 진작시켜 법맥을 잇기 위해 노력한 만화 스님을 은사로 둔 정념 스님은 스승으로부터 게송의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또 그분은 신도들이 게송을 써 달라고 하면 다음과 같이 써 주었다고 한다.
필불망취과거법(必不忘取過去法) 언제나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역불탐착미래법(亦不貪着未來法) 또한 미래에도 탐착하지 말아라.
불어현재유소주(不於現在有所住) 현재에도 머무는 바가 없다면,
요달삼세실능출(了達三世悉能出) 삼세를 통찰하여 언제나 활달하리라.
『맹자』에 심물망물조장(心勿忘勿助長)이라는 말이 있다. ‘잊어버리지 않지만, 억지로 조장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살다 보면 늦은 듯해도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있고, 빠른 듯해도 도리어 뒤처지는 것도 있다. 언제나 느긋하게 여유를 잃지 않으면 참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서산대사는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억지로 끌어올려서 받아들이려고 해도 얻을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려서도 얻을 수 없다. 또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한 채, 깨달음을 기다려도 얻을 수 없다. (話頭不得擧起處承當 不得思量卜度 又不得將迷待悟)”라고 했다. 매사가 인연에 따라 순리대로 된다는 말이다.
福이 얼마나 좋으면 새해마다 ‘복 많이 받으세요’하고 인사를 한다. 복만큼 좋은 것도 없을 것이다. 『서경』「홍범」에서는 5복을 말한다. 壽(수-장수), 富(부-부귀), 康寧(강녕-건강과 평안), 攸好德(유호덕-덕을 좋아함), 考終命(고종명-잘살다 편안히 죽음)이 그것인데, 이(齒)가 건강한 것도 5복이라고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복은 잘 받고 잘 지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지만, 복은 말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생기는 것도 아니다. 심은 만큼 받는 것이다.
오대산을 좋아했던 나옹선사의 제자이기도 한 야운(野雲)스님은 자경문에서 ‘삼일수심 천재보(三日修心 千載寶)요, 백년탐물 일조진(百年貪物 一朝塵)’이라고 했다. ‘단 3일 동안에 닦은 수행의 마음은 천년의 보배이고, 백 년 동안 모은 재산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다.’는 말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경구는 오래전부터 나도 알고 있었다. ‘꽃은 열흘 붉지 못 한다.’는 것으로, 여기에 이어서 세불십년장(勢不十年長)이라고 했다. ‘권세는 십 년을 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송나라 때 시인 양만리(楊萬里)가 「월계(月桂)」라는 시에서 한 말이다. 여기 꽃은 야생장미를 의미한다는 것도 흥미롭다. 원문은 ‘지도화무십일홍 차화무일무춘풍(只道花無十日紅 此花無日無春風)’이다. ‘그저 뭇꽃은 피어야 열흘 넘기지 못하지만, 이 꽃은 정해진 기간도 없고, 봄바람도 필요 없다.’는 말이다. 변화 속에서 변화를 다스리되, 신기루 같은 허상을 좇지 말라는 것 같다.
불교 공부 하나, 석가모니를 25년간 모신 시자 아난존자는 석가모니의 4촌 동생이다. 그는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교단을 이끌 책임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 부처님께 여쭈었다. 아마도 아난존자는 가톨릭의 교황제 같은 교권 상속제를 염두에 두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모든 구성원이 주인일 뿐 누구도 ‘위에서 군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그 후로 불교는 구성원 전체의 화합과 스스로 책임지는 불교연맹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또 부처님은 열반을 앞두고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自燈明 法燈明 自歸依 法歸依)’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너희는 저마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만을 등불로 삼으며, 자신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할 뿐 이밖에 다른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곤 하는 명구이다.
도연맹의 〈잡시(雜詩)〉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성년부중래(盛年不重來) 왕성한 기질의 시절 다시 오지 않듯이
일일난제신(一日難再晨) 하루에 새벽은 두 번 오지 않네.
급시당면려(及時當勉勵) 일을 당해도 부지런히 살아야 하나니,
세월부대인(歲月否待人)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구나.
치열했던 청춘은 가고, 활짝 피우던 시절도 가고,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한번 붉었던 꽃과 단풍은 피우고 다시 본래의 자리인 뿌리로 돌아가는 나무처럼, 꽃처럼 우리 인생도 그와 같을 뿐이다.
‘산은 산 물은 물’성철스님이 회자시켜 친숙하지만, 이미 송대에 천원선사와 곽암선사가 말했다는 것은 심우도에서 보았다. 송대 야보 스님도 ‘산시산 수시수 불재하처(山是山 水是水 佛在何處)’라고 했는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부처님은 어느 곳에 계시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하루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서 가시가 돋는다)’라고 한 조선시대 아동서 『추구집(推句集)』에 나오는 이것을 안중근 의사가 쓴 휘호로 유명해져 마치 그가 한 말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하겠다. 누군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부처님은 어느 곳에 계시는가? 이렇게 묻는다면 ‘일엽낙지천하추(一葉落知天下秋)’라 대답할지 모른다. “한 잎 떨어지는 것을 보고 천하가 가을임을 알겠네.”라고 말이다.
선종의 제7조 남악 회양(南岳 懷讓 677~744)스님이 쓴 『전등록』이라는 어록집이 있다. 여기에는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소를 때려야 하는가?(打牛卽是 打車卽是)”라고 묻는 대목이 있다.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나는 몇 번이나 남을 칭찬했는가? 몇 번이나 남을 허물했는가?’를 생각한다면, 비방하는 마음을 버릴 수 있다. 비방하는 말은 어둠에 담겨 그대로 돌아온다. 칭찬하는 마음에는 광명이 일어나고 비방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가시덩굴만 엉킨다. 괴테는 1773년 『파우스트』의 집필을 시작해, 1831년에 완성했다. 장장 60년이 걸렸다. 작품을 통해 독일어를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왜 우리에게는 이런 영향력 있는 작품이, 선각자가 없을까 생각해 봐야 할 때인 것 같다.
중국 4대 미인 중에 왕소군(王昭君)이라고 있다. 그녀는 왕족이면서도 흉노족에게 시집을 가야했다. 그녀의 애달픈 한을 노래한 것이 많고, 심지어 낙안(落雁)이라 하여 ‘그녀의 미모를 보고 기러기가 떨어졌다.’고 까지했다. 기러기가 인간인 미녀를 알아볼 리 없지만, 슬픔을 미학으로 승화시킨 것일 것이다. 왕소군의 이 이야기를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虯)는 「왕소군의 원한(昭君怨)」이라고 시를 남겼는데 유명한 구절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이 그것이다. 오랑캐 땅이라고 해서 어찌 풀꽃이 없겠냐만 소군에게 그것은 봄일 수 없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봄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온다고 한 것이다. “적멸보궁의 따뜻함도 언제나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항상 한빛일 뿐입니다.”라고 정념 스님은 말씀하신다.
7조 회양의 스승이던 6조 혜능은 ‘하나의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앨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의 지혜가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앨 수 있다.(臂如一燈 能除千年闇 一智能滅萬年愚-비여일등 능제천년암 일지능멸만년우)’고 하셨고, 3조 승찬 스님은 『신심명』에서 ‘호리유차 천지현격(毫釐有差 天地懸隔)’이라고 하였는데, ‘털끝만 한 차이가 마침내 하늘과 땅처럼 벌어 진다.’는 의미이다. 『장자』의 「소요유」에서도 말한 것처럼 ‘아침나절에만 사는 버섯은 한 달을 알지 못하고,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통합할 수 있는 자리는 큰 뜻이 아니고서는 함께 말하기 힘들다.
공자가 사람의 일도 모르거늘 귀신의 일을 어찌 알겠느냐고 한 것처럼 부처님도 비슷한 말을 했다. 부처님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열반에 들어 윤회를 끊으면 삶도 죽음도 둘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우주의 끝과 같은 아득한 미래에 대해서는 무기(無記), 즉 판단 중지(Epoche)의 자세를 취했다. 그런 문제는 우리 삶에 있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만일 부처님께서 우주에 끝이 있다고 했다면, 그것을 누가 검증할 수 있을까? 결국 믿음의 영역일 뿐이고, 그것을 안다고 해도 우리가 달라질 것은 없다고 본 것이다. 『장자』도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무한히 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를 좇은 것은 어리석다.’고 하였듯이, 이는 부처님의 관점과 유사하다. 불교의 핵심은 반성과 실천을 통해서 나를 바꾸고 행복에 도달하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 판단 중지의 입장을 표명하신 것이다.
마지막에는 부처님의 4촌 동생 마하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자. 『잡아함경』에 있는 이야기다. 부처님 출가 후 석가족의 왕이 된 사촌동생 마하남은 겸손하면서 부처님 가르침을 받들고 스님들을 공경했다. 하지만 그도 나이가 드니 자신의 사후가 궁금했다. 그래서 4촌 형이기도 한 부처님께 “저는 죽어서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기울어진 나무가 베어지게 되면 기울어진 곳으로 쓰러지듯이, 선한 사람은 결코 나쁜 곳으로 가지 않는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마하남은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은 마하남의 실천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마하남이 기뻐한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올바른 삶에 자신이 있어서라는 것입니다.”정념 스님의 사족이다. 나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