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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을 보장하는 바울
행 27:21-26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행 27:21-26 / 여러 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여 기진맥진해 있을 때 바울이 선원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 처음부터 내 말을 듣고 그 `아름다운 항구'에서 떠나지 않았어야 하였소. 그랬더라면 여러분이 이렇게 상처입고 고통 겪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이제라도 기운을 내십시오. 배는 가라앉더라도 아무도 목숨을 잃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23) 어젯밤에 나를 이끄시며 또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24)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소. `무서워하지 말아라. 바울아, 너는 틀림없이 가이사 앞에서 재판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네 소원을 들으시고 너와 함께 배를 타고 가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해해 주실 것이다.' 25) 그러니 여러분, 이제 용기를 내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믿소.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그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오. 26) 우리는 반드시 어떤 섬에건 닿게 될 것이오.'
바울은 알렉산드리아호가 지중해에서 여러 날 동안 표류하고 있을 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죽지 않을 것과 한 섬에 도착하게 될 것이라며 위로하고 소망을 주었습니다.
좋을 뻔하였느니라(21) 수백 명이 타고 있는 알렉산드리아호는 유라굴로로 인하여 여러 날을 표류했으며, 그곳에 탄 사람들은 여러 날 동안 먹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소망을 잃어버린 채 죽음의 공포와 육체적 굶주림의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그들 가운데 서서 자신의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했더라면 좋을 뻔 했었다고 말했습니다. 큰 위기를 겪은 백부장 율리오를 비롯한 선장과 선주 그리고 승객들이 비로소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되는 것처럼 될 때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유라굴로 광풍으로 표류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말한 것은 그들을 책망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그들 자신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더 신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는 안심하라(22-26) 바울은 두려움과 공포로 몹시 지쳐 있는 그들에게 ‘이제는 안심하라’고 위로했습니다. 유라굴로 때문에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않을 것이며, 오직 배만 잃게 될 것이므로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지난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을 찾아와 하신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했고, 바울은 그 배에 탄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했습니다. ‘권하노니’, ‘안심하라’는 말은 당시 의학적인 용어로서 의사가 환자에게 지침을 주고 격려할 때 사용하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대로 될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지중해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라굴로 광풍으로 큰 위기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든지 말씀하십니다.
적용: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생각 중에 어느 것을 더 우선합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위 두 가지로 갈등을 겪었던 일들이 있었으면 서로 나누어 봅시다.
하루의 길 위에서 어느 것을 먼저 해야 할지 분별이 되지 않을 때,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설임만 길어질 때,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해서 삶에 평화가 없을 때, 가치관이 흔들리고 교묘한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기 힘들 때, 지혜를 부릅니다.
- 이해인 수녀님의 <지혜를 찾는 기쁨> 중에서-
< 설 교 >
난국생황의 그리스도인
행 27:20-26 / 이정익 목사
세상 근원에 대해서는 두가지의 이론이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론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진화론입니다. 이 두 이론은 아직도 서로 논쟁중입니다. 지금까지는 진화론이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창조론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세가지 인생관이 있습니다.
진화론적 인생관
이 진화론적 인생관은 인간은 우연하게 생긴 존재라고 생각하는 인생관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인식입니다. 이 이론은 인간이 단세포로부터 세포분열과 진화를 거쳐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원숭이가 진화하여 인간이 되었다는 이론입니다. 원숭이를 볼 때마다 인간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 원숭이가 발전해서 오늘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보면 인간은 참 씁쓸한 존재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원숭이를 볼 때마다 그 앞에 절을 해야 할 것입니다. 원숭이가 인간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화론에는 하나님의 섭리나 예정이나 창조론은 전무합니다. 쉽게 말하면 진화론적 인생관은 무책임한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인생관은 전생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지금의 내 인생이 만들어진다고 말합니다. 즉 인생은 돌고 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시간관은 원입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오늘의 내 인생은 전생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것이고 오늘의 부산물로 다음 세상에서의 내 인생이 또 만들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에는 내가 어떤 짐승으로 태어날지, 소로 태어날지 돼지로 태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물을 존중하고 물고기를 방생하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곁에 있는 소나 돼지가 이미 돌아가신 내 부모님이 환생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인생관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은 이보다 더 애매합니다. 진화론에는 철학도 사명도 의미도 없습니다. 나는 어쩌다 생겨난 어느 존재가 진화해서 되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은 더 이상 엄숙할 것도 없고 값이 있을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진화론이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대세를 이루어 왔습니다.
이신론적 인생관
이신론적 인생관은 나는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믿는 이론입니다. 나는 우연히 어느 단세포가 진화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누군가가 분명히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염라대왕일 수도 있고 옥황상제일 수도 있고 또 그것이 하나님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신론적 인생관입니다. 그런데 이 인생관은 그 누군가가 나를 만들어 놓고 그 후에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이신론은 진화론 보다는 조금 발전한 이론입니다. 나를 만든 분이 있다고 믿는 것까지는 진화론 보다는 분명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나를 만들어 놓고는 더 이상 나를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태어나게 해놓고 더 이상 내 인생에 대해서 책임도 지지 않고 관여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아이가 누군가에 의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 누군가가 그 아이를 낳아 놓고는 버려서 더 이상 그 인생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런 아이를 우리는 고아라고 부릅니다. 아이를 낳은 부모로서 참 무책임한 모습입니다. 그것이 이신론적 인생관입니다. 이 이신론의 이론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더 이상 내 존재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관여하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이신론적인 인생관입니다. 어떻게 보면 진화론적 인생관 보다 더 무책임한 인생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이신론적 인생관을 가지게 되면 이 세상을 책임 있게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자기 정체성이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고아가 외국에 입양되어 가서 그곳에서 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낳아준 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누군지도 모를뿐더러 나는 그분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분은 나와 함께 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그 분을 찾아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런 격입니다. 그래서 삶에 뚜렷한 정체성이 없습니다. 나는 단지 홀로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도 항상 혼란스러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외국에 입양된 아이들이 성장하면 반드시 자기의 뿌리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내 뿌리는 참 중요합니다. 내 뿌리, 내 근본이 분명하면 내 정체성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지식인들은 진화론이나 이신론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간섭이 싫은 것입니다.
창조론적 인생관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창조되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창조론적 인생관은 이것은 믿는 인생관입니다. 이것이 성서적 인생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 경륜에 따라 태어나고 존재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고로 나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나는 결코 우연히 존재하는 것도, 그냥 살아가는 것도, 조금씩 진화한 존재도 아닙니다. 더구나 전생의 부산물로 태어나 살아가는 존재도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조성하시고 사명을 주셔서 태어나게 하셨고 그로 인해 나는 그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엄숙한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곧 나라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그냥 내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중심이 실린, 하나님의 뜻이 실린 존재입니다. 그 점을 본문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로 압송되어 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죄지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받았고 죄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로 가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고 싶다고 청원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기에 로마에 상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배로 수송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배는 알렉산드리아 호라는 배였습니다. 당시 애굽에는 곡창지대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곡식을 많이 수송하였는데 알렉산드리아 호도 곡식을 싣고 로마로 수송하였습니다. 그 배에 죄수와 여행자를 포함하여 276명을 태우고 로마 백부장이 인솔하여 이동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배가 마침내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미항은 조그만 항구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겨울을 나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계절풍이 부는 때였기 때문에 항해를 하다가 계절풍을 만나면 파선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으로 그 위험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5절에서 바울은 3번이나 그 계절풍을 만나 고난을 겪었습니다. 심지어 1주야를 표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주는 거기서 65km를 더 가면 미항보다 큰 뵈닉스 항구가 있으니 거기 가서 겨울을 나자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항구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거기 가면 유락시설도 즐길 수 있고 수입을 더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주의 말을 듣고 출항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가니까 유리굴라 라는 계절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유리굴라라는 말은 광풍이란 말입니다. 즉 미친바람이란 뜻입니다. 배가 유리굴라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14절) 닻을 내렸지만 그 광풍에 배는 그냥 끌려 다니게 되었습니다.(17절) 배가 뒤집힐 것같이 위험한 상황에 놓이자 사공들은 배에 있는 짐을 바다에 다 풀어 버리고(18절) 배의 기구들까지 다 버리게 되었습니다.(19절) 심지어는 배에 실었던 밀까지도 바다에 버렸습니다.(38절) 그러나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구원의 여망마저 없게 되었습니다.(20절)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세월호도 돈을 벌려고 개조하여 짐을 두세배 더 싣고 사람을 두세배 더 태웠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뒤집힌 것입니다. 중국에서 뒤집힌 배도 똑같은 경우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떼돈을 벌 줄로 압니다. 그런데 돈은 그렇게 해서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번 돈까지 다 날려버리게 되지 않습니까?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주도 위험하지만 항해를 강행했습니다. 그것은 65km만 더 가면 편한 곳에서 지낼 수 있고 위락시설을 즐길 수 있으며 돈도 더 벌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 질서를 무시하고 바울의 조언을 무시하고 항해를 강행했습니다. 그 결과 배가 파선되고 장비, 물건, 하물들이 다 바다에 내 던져졌습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배에 실었던 짐을 다 바다에 던지고 모든 기구들 까지 다 던졌습니다. 그런데도 여러 날 동안 해와 달이 보이지도 않았고 구원의 여망이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먹지도 못하고 절망상태였습니다. 모두 초죽음 상태로 할 말을 잃고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런 때 빛나는 것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인의 용기입니다. 21절을 보면 그때 사도바울이 앞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일장 연설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들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 타격과 손해를 면하였을 것 아니요 그러나 내가 여러분들을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일 것이요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들을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들이여 안심하라 나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노라.” 얼마나 확신에 차 있는 모습입니까? 신앙이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길에 순풍이 불 때는 필요 없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 순풍만 있습니까? 살아가다가 유리굴라를 만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동안 우기던 진화론, 이신론, 무신론은 다 괴변이 되어버립니다. 오늘 기독교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사람들도 어느 날 유리굴라를 만나보십시오. 그땐 어떤 모습이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속담에는 사탄도 병들면 천사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스님이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찾아와 옆자리 성도를 심방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오려고 하는데 그 스님이 나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모두 죽을 지경이 되고 배가 파선해서 모두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그때 사도바울이 턱 나서서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시오. 간밤에 하나님이 나에게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하셨소. 여러분들도 한사람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소” 하고 말했습니다. 또한 33절에 보니까 바울이 “여러분들이여 걱정 말고 음식을 먹으십시오. 우리가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 되었은 즉 이제 먹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너희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게 하실 것이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떡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주니 사람들이 안심하고 먹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44절에 사람들이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마침내 어느 섬에 닿아 사람들이 다 육지에 상륙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삶에는 몇가지 사명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❶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가지 분명히 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진화론을 거쳐 존재하는 사람도 아니고 이신론처럼 무책임한 존재도 아니고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불러주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뜻이 있어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사를 부르실 때 할 일이 있어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를 부르실 때도 할 일이 있어서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를 부르실 때도, 모세를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도 내가 뭔가 할일이 있어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인생에는 이런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❷ 모든 부르심에는 구원성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도바울을 부르실 때에는 그에게는 100% 하나님의 구원계획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바울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다 할 일이 있어서 부르셨습니다. 그 일이 무슨 일이겠습니까? 그것이 구원성이라는 것입니다. 즉 영혼을 구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나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은 구원성 때문입니다. 즉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창조론에는 이런 분명한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지으셨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전도 목적 때문입니다. 구원성 때문입니다. 오늘 나를 불러 직분을 주신 것도 모두 구원성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 안에서 내가 할 일은 구원 문제입니다. 먼저는 내가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나로 인하여 세상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핵심이 구원입니다. 구원 때문에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고 구원 때문에 오신 예수가 죽어야 했으며 구원 때문에 죽었으나 부활하게 하셨고 구원 때문에 가신 예수를 다시 오시게 하실 것입니다.
❸ 택함 받은 자는 그 인생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그를 인도하셨고 어디든지 따라가시며 위험으로부터 건지고 책임지셨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히면 지진을 일으켜 옥문을 열어주셨고 물에 빠지면 건져주셨습니다. 독사에 물리면 여상하게 해주셨고 절망상태 빠지면 꿈에 계시를 통해서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 너희중 하나도 버림받지 않게 되리라”고 위로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여러분 인생을 인도하실 것을 믿으십니까? 그것이 모든 문제의 해답입니다. 문제는 내가 지금 이같은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입니다. 이 확신이 없으니까 매사에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어려우면 야단법석을 떱니다. 요즘 보십시오. 오늘 메르스라는 질병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요란을 떨고 호들갑을 떱니다. 왜 학교를 못가게 하고 2,900개 학교에 휴교령을 내립니까? 이것이 이렇게 할 일입니까? 하도 요란을 떠니까 어제 워싱턴 포스트 지에서는 먼저 빨리 학교 문부터 열라고, 왜 학교 휴교령을 내리냐고 보도했습니다. 또 메르스 때문에 한가해진 서울에 가서 즐길 것 다섯 가지를 제안했는데 첫째가 영화관에 가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줄을 서야 하는데 지금 가면 대접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산 케이블카에 구경 가라고 했습니다. 평소 중국 여행객들이 몰려서 줄을 서야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서울 북촌과 삼청동 관광도 즐기고 야구장도 가라고 했습니다. 엊그제 메르스 병을 치료받고 퇴원한 77세 할머니가 “나같은 노인도 치료받고 퇴원했다. 병에 걸려보니 감기 정도 수준이더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 어떤 상황,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때 우리의 취할 모습이라고 함께 떠들고 아우성 치고 숨고 야단하고 그럽니까? 그리스도인은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자신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믿음
이윤재 목사
메르스의 두려움이 아직도 여전한 가운데 이번 주 하나의 뉴스가 제 시선을 끌었습니다. 16년 동안 실종된 딸을 찾고 있는 송길용씨 이야기입니다(사진). 이 분은 잃어버린 딸 송혜희의 아버지입니다. 가끔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서울로 들어가면 서울 한남대교 북단부터 양재 나들목까지 프랑카드가 붙어 있습니다. “실종된 딸 송혜희 좀 찾아 주세요”(사진). 한 군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울 시내 곳곳에 붙어 있습니다. 프랑카드를 보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잃어버린 딸을 찾는 부모는 누구인가? 참 대단하다“. 했는 데 그 아버지가 송길용씨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뉴스를 탄 것은 그가 메르스에감염되어 확진판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일만에 완쾌되었다는 것입니다. 송길용씨는 뇌경색과 허리 통증으로 지난 20일에서 28일, 메르스 첫 환자가 발생한 평택성모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러다 고열 증세가 나타나 느닷없이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았고 ”39번 환자“로 평택굿모닝병원에 격리돼 치료를 받아왔습니다. 그가 얼마나 그 딸을 헤맸는 지금까지 무려 200만장의 전단지를 뿌리고, 현수막도 전국 곳곳에 4000여장이나 걸었습니다. 그와 함께 트럭에 버너와 라면을 싣고 전국을 누비던 아내는 우울증을 앓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송씨도 4년 전 현수막을 걸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고 최근 뇌경색으로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설상가상으로 메르스까지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약한 몸에 메르스가 걸렸는 데 그것을 이겨냈습니다. 어떻게 이겨냈을까?
저는 이번 메르스로 인해 전 국민이 위기속에 있지만 송길용씨를 통해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는 건강한 사람도 아닙니다. 이번에 사망한 분들의 대부분이 면역력이 약한 분들임을 생각할 때 그의 완쾌는 정상적인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에게 분명한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나는 딸을 찾아야 한다. 내가 죽기전에 반드시 딸을 찾아야 한다”. 이 믿음이 메르스를 이기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메르스 뿐 아니라 쉴새없이 위기가 닥쳐오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얼마나 많은 위기들이 몰려 옵니까? 위기는 왜 오며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에 그 위기를 만난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울과 그의 일행입니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고소를 당했고 그것을 바울이 시이저 황제에게 상소했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배를 탓는 데 배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여러분도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저도 오래전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밧모섬으로 가기 위해 저녁에 배를 탓는 데 밤중에 배가 까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러다 말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밤새 흔들립니다. 도저히 선실에 누어 있을 수 없어서 갑판으로 나왔는 데 시퍼런 파도가 배를 덮칠듯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이러다가 나도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년에 세월호에 탄 분들을 생각할 때 그래서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도 그런 공포를 느꼇을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을 가끔 풍랑으로 표현합니다만 인생에는 세 가지 풍랑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자초한 풍랑, 다른 사람 때문에 일어나는 풍랑, 그리고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풍랑, 그러나 어떤 경우든 풍랑은 무섭습니다.
바울은 배를 탄 것은 이스라엘 가이사랴였습니다. 가이사랴는 항구였고 당시 로마 총독부가 있었습니다. 그때 탄 사람은 바울과 죄수 276명, 그리고 로마의 백부장 율리오였습니다. 그들이 크레타섬에 까지 갈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크레타섬에서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기도하는 가운데 마침 겨울도 다가오고 해서 배가 크레타 섬에서 겨울을 나고 내년 봄에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항해에 관한한 바울은 비전문가였습니다. 뿐아니라 바울은 죄수였습니다. 비전문가인데다 죄수인 바울의 말을 누가 듣겠습니까? 그때 선장과 선주가 일어나 거기서 조금 더 가면 뵈닉스가 나오는 데 거기서 겨울을 나고 떠나자고 말하자 사람들이 선장의 말을 다 따랐습니다. 그리고 출발했는 데 이게 웬일입니까? 조용하던 바다에 풍랑이 일기 시작합니다. 유라굴라라는 유명한 풍랑이었습니다. 14절, 15절을 보시겠습니까? 행27:14-15, “얼마안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라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바울과 그 일행이 일생 일대의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도대체 이 위기는 어디서 왔고 어떻게 이겨냐야 합니까?
위기를 맞자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14절부터 20절을 보면 생생한 표현들이 나옵니다. “광풍이 크게 일어나더니”, “”쫓겨가다가“, ”간신히 거루를 잡아“, ”두려워 하여 그냥 쫓겨가더니“,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그리고 20절, 결론입니다. 행27: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 절망속에서 바울과 죄수 276명은 하루도 아니고 꼬박 14일을 고생했습니다.
왜 이런 고생을 한 것입니까? 기도하는 바울의 말보다 전문가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항해전문가도 아니고 배전문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중해의 겨울바다는 춥습니다. 그 추운 바다에서 바다가 얼면 항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곧 크레타섬에 도착할텐데 거기 미항이 있다. 거기서 겨울을 나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비전문가고 선장이 전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행27: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우리는 자주 놓치는 것이 이것입니다. 전문가가 언제나 문제 해결자인줄 압니다. 많은 사람이 지지하면 그것이 다 옳은지 압니다. 선장이 말하자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지하면 그것이 옳은지 압니다. 그러나 전문가의 지식보다 하나님의 한 마디가 언제나 옳습니다. 사람의 경험보다 기도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가 더 옳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지해도 하나님이 지지하지 않으면 그 의견은 잘못될 수 있습니다. 모세시대 가나안 정탐꾼중 10명은 가지 말자고 하고 2명만 가자고 했습니다. 만일 가지 말자는 사람이 많다고 가지 않았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까지 광야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지지하기 때문에 옳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까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삼성병원이 뚫렸습니다. 물론 삼성도 피해자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의술로도 막을 수 없는 질병이 있고 인간의 한계는 언제나 있습니다.
문제는 위기가 올 때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자, 풍랑이 치자 사람들이 하는 세 가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우왕좌왕, 둘째로 낙심, 그리고 마지막이 포기였습니다.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행27:17,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그러니까 속수무책,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 저리 떠밀려 갔습니다. 그야말로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니까 낙심하기 시작했습니다. 20절 다시 볼까요? 행27: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극단적인 위기가 닥치면 우리는 절망에 빠지고 모든 희망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버리는 것은 희망입니다. 그리고 희망을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때부터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18-19절입니다. 행27:18-19,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이런 상황에서 바울과 276명은 꼼짝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휘망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느냐?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를 하셨습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
하나님이 첫 번째로 하신 것은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밤에 바울에게 나타났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행27: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어떻습니까? “내 곁에 서서”란 말이 너무 좋지 않습니까? 고난가운데 곁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이 곁에만 있다면 풍랑이면 어떻고 폭풍이면 어떻습니까?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에게 세 번이나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전도라며 고난을 겪을 때 행18:9-10, “밤에 주께서 환상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 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공회에 붙잡혀 재판받을 때 행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나님이 바울에게 “두려워 말라”한 것은 그가 인생 풍랑가운데 있을 때라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일단 바울에게 한 것은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대책이 나오기 전에 먼저 필요한 것은 두려워 하지 않은 것입니다.
두려움의 문제는 두려움의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두려움 자체만 두려워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대부분의 두려움은 소리만 큰 공포탄인 경우가 많습니다. 두려운 감정은 있으나 두려움의 실체는 없습니다. 하나 하나 바나나 벗기듯 벗겨보면 실체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윈 맥마너스라는 목사님이 사람들이 갖는 두려움의 실체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의 40퍼센트는 실제 일어나지 않는답니다. 30퍼센트는 두려워 해봐야 소용없는 과거의 일이랍니다. 12퍼센트는 쓸데없는 두려움이고, 10퍼센트는 지극히 사소한 두려움이랍니다. 정말로 두려워할 만한 것은 8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한번 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100%니까 어렵지 8% 정도 해볼만 하지 않습니까? 실체없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체있는 믿음을 갖는 일입니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먹는 문제 때문에 두려워 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을 아십니까? 마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 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여기서 주님은 우리의 두려움의 문제는 두려워 할 실체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생기는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음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엄마, 아빠가 옆에 있는 데 두려워 할 아이가 있습니까? 세상을 창조하시고 소유한 주인이 있는 물질 때문에 두려워하는 분이 있습니까? 인간의 몸을 지으시고 고치시는 분이 있는 데 건강을 두려워 분이 있습니까? 영원한 천국을 믿는다면서 내일의 희망을 포기하고 사는 분이 있습니까? 두려움은 믿음없어서 생깁니다. 그래서 5세기 교부 어거스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두렵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어떤 사람이 꿈에 우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밧줄을 붑잡았습니다. 이렇게 내려다 보니 우물물이 시퍼렇게 깊습니다. 무섭고 두려운데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밧줄을 놓아라”. 어떻게 합니까? 밧줄을 놓으면 떨어지는 데. 그래도 “밧줄을 놓아라” 소리가 들려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놓았더니 뜻밖에 우물물은 깊지 않았습니다. 밧줄과 우물사이는 불과 30센티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물물이 깊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두려운 것입니다. 믿고 줄을 놓으면 30센티밖에 안 됩니다. 산산이 부서질 만큼 깊은 바닥이란 인생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 추락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밑바닥은 그렇게 깊지 않습니다. 이번 메르스도 그렇습니다. 메르스가 무섭다 무섭다 하지만 확률적으로 더 많이 죽는 것은 자동차 사고와 흡연입니다.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한 해 죽는 사람이 결핵이 약 2500명, 독감이 2500명, 자동차 사고가 약 4000명, 그리고 답배 흡연으로 죽는 사람이 3만명입니다.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것은 정작 다른 데 있는 것입니다. 메르스로 인해 죽은 생명들이 아깝다면 흡연으로 인해 죽은 생명은 얼마나 더 아깝습니까? 흡연으로 인해 죽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왜 메르스는 두려워합니까?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네가 할 일이 있다
위기속에 있는 바울에게 하나님이 하신 두 번째 일이 있습니다. 행27:24절입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이 주신 두 번째는 바울에게 사명을 확인시켜주는 일이었습니다. “바울, 네가 지금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고생하지만 너에게는 할 일이 있다. 내가 네가 위대한 계획을 갖고 있다. 네가 이 배에 탄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은 가이사를 만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네가 앞으로 해야 할 사명은 내가 만난 풍랑보다 훨씬 큰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바울에 대한 비전을 바울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고난보다 크게 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보다 더 큰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계획은 우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보다 훨씬 큽니다. 우리가 위기에 있을 때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삶의 목적보다 우리가 당하는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면 위기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위기를 당할 때 위기 자체만 보지 말고 그 위기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오신 컬럼비아 신학교의 브렌넨 브리드 교수는 미국에서 촉망받는 젊은 신학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월터 부르그만의 제자입니다. 월터 부르그만은 세계적인 구약학자입니다. 그가 쓴 글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제목은 “길 건너편에서”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하실지 알아냈다고 생각할 즈음 주님은 길 건너편에서 나타나 저희를 놀라게 하십니다. 약속으로 혹은 위협으로, 뒤에서 혹은 앞에서 주님은 저희에게 나타나십니다. 주님과 겨루려 할 때마다 주님은 저희를 이기십니다“(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 부르그만은 우리가 당하는 순간 순간의 위기가 하나닙이 우리에게 주신 신비한 계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위기가 우리에게 오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일도 하나님의 목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위기를 당하면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뜻이 있는가? 이 일은 하나님의 어떤 계획에서 나왔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23절을 보십시오. 행27: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여기에 “밤이란 말이 나옵니다. 왜 하필 하나님은 밤에 바울에게 나타났겠습니까? 밤은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의 소리가 그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입니다. 남들은 다 죽겠다고 소리칠 때 바울은 부릎꿇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하나님, 이 어두운 밤 바다를 보십니까? 276명이나 되는 이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이유없이 죽어야 합니까? 저는 무엇입니까? 저도 아무 뜻 없이 이 바다에서 죽어야 합니까? 하나님, 도와 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그의 곁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말씀했습니다. 행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고난은 언제나 살아 있는 기도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고난을 이기는 것입니다. 안드류 머레이가 쓴 <나를 버려야 예수가 산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머레이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려고 한다면 한 손으로는 그 사람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다른 것을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머레이의 이 말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 그냥 뛰어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 다 죽게 됩습니다. 뛰어들 때 무엇인가를 붑잡고 뛰어들어야 합니다. 기도는 한 손으로 세상을 향해 내밀고 다른 손으로는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는 만큼 내가 세상을 살릴 수 있습니다.
기도의 가장 큰 유익은 마술적으로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를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생각, 내 상식으로 위기를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의 눈으로 위기를 보게 됩니다. 문제 자체보다는 문제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뜻에 더 관심갖게 됩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우리가 왜 메르스가 생겼는가 하고 묻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메르스를 통해 우리에게 무슨 뜻이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메르스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면 메르스가 “기회”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메르스 때문에 우리가 낙심합니다. 기도하면 메르스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메르스가 우리를 괴롭힌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면 메르스가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메르스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면 메르스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메르스가 재앙인 줄 압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메르스는 이 민족을 향한 새로운 희망입니다. 렘29:11절 말씀과 같습니다. “여호아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이니라”.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오늘의 문제를 이깁니다. 기도하면 이깁니다.
안심하라. 잘 되리라
풍랑의 위기속에 바울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주신 세 번째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25절입니다. 행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네게 말씀하신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위기속에 있는 바울에게 사명을 말씀하신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바울에게 약속했습니다. “안심하라. 모든 일이 내가 말한대로 잘 되리라”. 이 구절은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위기를 당할 때 항상 붙잡아야 할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합니다. 한번 말씀하면 변개함이 없습니다.
환경을 붙잡는 사람이 있고 약속을 붙잡는 사람이 있습니다. 환경의 세계는 우리가 손으로 만지는 세계요 약속의 세계는 우리가 보는 하늘의 세계입니다. 믿음은 환경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약속을 붙잡습니다. 모세는 홍해바다의 환경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의 난공불락의 환경앞에서 그 성이 무너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언제나 환경보다 약속이 강합니다. 네 손가락을 가지고 태어난 희아 엄마는 희아가 뱃속에 있을 때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희아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을 더 크게 믿었습니다. 결국 희아는 다섯 손가락을 가진 정상아도 할 수 없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환경이 아니라 좋은 믿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성가중에 영국의 줄리안이 있습니다. 줄리안은 1342년 12월, 영국 노리치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시대는 아마도 인류 역사중 가장 나쁜 시대였습니다. 십자군 전쟁으로 민생이 파탄되고 흑사병으로 유럽의 3분의 1 인구가 죽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이 계속되었고 교황은 아비뇽에 유수당했습니다. 그위기의 시대에 쥴리안이 하니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너무 많은 고통과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 주시옵소서”. 그렇게 십수년을 기도했는 데 어느날 주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너는 나 하나로 만족하느냐?”. 줄리안이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주님이 이렇게 세 마디를 했습니다.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다. 모든 종류의 것은 다 잘 될 것이다.”
그 어려운 시대에도 주님이 “잘 될 것이라”고 말했다면 잘 안될 시대가 어디 있겠습니까? 전쟁으로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시대에도 “잘 될 것이다” 했다면, 풍랑속에서 고생하는 바울일행에게 “안심하라. 내 말한 대로 되리라” 했다면, 메르스로 인해 고난당하는 이 민족을 향햐서도 주님이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메르스는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위기속에서 고난받는 바울일행에게 하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읍시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과 우리 민족은 할 일이 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모든 일은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실패와 성공의 조건
박종순 목사
세계적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서재에는 전자기학의 시조라고 부르는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마이클 패러데이는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열두 살 때 그는 런던의 한 서점 점원으로 일하면서 책읽기를 시작했고, 특히 과학서적들을 좋아해 그 분야의 책들을 읽으며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당시 유명한 화학자였던 험프리 데이비의 강연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은 후 데이비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내용은 "선생님 밑에서 과학을 공부하며 일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소년의 편지를 받은 데이비는 친구와 의논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우선 먼저 그에게 빈 병 닦는 일을 시켜보게. 그런 일을 시시하게 여기고 못하겠다고 거절하는 사람이면 쓸모가 없는 걸세."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데이비는 편지를 보낸 소년에게 "그런 일을 해 보겠느냐"고 연락을 했고, 그날부터 그 소년은 빈 병 닦는 일을 최선을 다해 계속 했습니다. 이를 지켜본 데이비는 그를 조수로 채용했고, 그 소년은 전자기학의 세계적인 대부가 된 것입니다.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해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은 일을 소홀히 취급해 밀려나고, 쫓겨나고, 실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16:10에서 주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절망과 실패를 극복하고 희망과 성공에로 나가는 길이 무엇인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위기를 극복하는 비결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의 경우를 찾아봅시다.
로마행 알렉산드리아 호에는 276명이 승선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군인도 있었고, 무역상도 있었고, 여행객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풍랑을 만나 좌초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 상황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5절을 보면 "바람에 쫓겨갔다"고 했고, 17절을 보면 "그냥 쫓겨가더니"라고 했습니다. 바람에 밀려 손쓸 겨를도 없이, 대책도 없이, 밀리고 쫓겨갔다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일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고, 실패에 쫓기고, 고통과 질병에 쫓기는 인생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18절을 보면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라고 했습니다. 애썼다는 것은 풍랑을 이기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 망하지 않고 일어서기 위해 애썼다는 것입니다. 18절 하반절을 보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라고 했고, 19절을 보면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고 했습니다. 가라앉는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값비싼 무역상품들, 여행객들의 보따리들, 그리고 항해에 필요한 배의 기구들을 바다에 모조리 던져버렸습니다.
당시 세계 최대의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딪쳐 가라앉을 때 그 배 안에 있던 온갖 보화들, 사치품들, 그리고 저명인사들 모두 바다에 빠졌고, 그리고 죽었습니다. 타이타닉호의 경우는 배가 통채로 가라앉았기 때문에 버리고, 안버리고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겐 버릴 것이 있고, 버려선 안될 것들이 있습니다.
죄, 나쁜 습관, 옳지 못한 것,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 교회생활을 가로막는 것들, 이런 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버릴 수 없습니다. 예수는 버리면 안됩니다. 돈을 버리고, 수단을 버리고, 방법을 버리고, 지식을 버릴 수는 있어도 예수를 버리면 안됩니다.
14절 끝을 보면 "광풍이 대작하니"라고 했고, 18절을 보면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라고 했고, 20절을 보면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라고 했습니다. 큰 풍랑이 계속됐다는 것입니다.
일단 바다의 풍랑이 계속되면 일주일에서 열흘이상 그치지 않습니다. 파도 10∼20미터의 높이로 밀어닥치면 그 위세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호는 그다지 큰 배가 아닙니다. 큰 풍랑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인 배였습니다. 그래서 20절 끝을 보면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했습니다.
실패의 결정적 조건은 풍랑이었습니다. 풍랑 때문에 쫓겨가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했고, 짐도 기구도 바다에 버려야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쫓기며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39세 된 모회사의 중역이 퇴근 후 집에서 저녁식사 후 텔레비젼 뉴스를 보다가 갑자기 심장발작이 일어나 병원 응급실로 급송 됐습니다. 만성피로에 스트레스가 원인이었습니다. 그는 일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고, 업무에 시달리고, 사람들에게 시달리면서 피로가 누적된 데다가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폭발을 한 것입니다.
내가 돈을 관리해야지 돈이 나를 지배하면 오래 못 삽니다.
내가 시간을 관리해야지 시간에 쫓기다 보면 쓰러집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야지 사람들에게 시달리다 보면 삶이 피곤해 집니다.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한 비결을 찾아봅시다.
23절을 보면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라고 했고, 2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했고, 25절을 보면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1절을 보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실패와 위기를 극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대로 쫓겨가도 해결이 안됐고, 애쓰고 힘써도 안됐고, 짐과 기구를 다 버려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가 살려주겠다"는 그 말씀을 믿었을 때 살길이 열렸고, 위기가 물러갔습니다.
요한복음 6:16-21을 보면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다 풍랑 만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끼리 배를 노저어 바다를 건너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힘을 믿고, 10여리 정도를 풍랑과 싸우며 노저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풍랑은 더 거세어지고 힘은 지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물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이 한마디에 바다의 풍랑은 잔잔해 졌고 제자들의 절망이 희망으로,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전 미국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재소자들 중 96.3%는 어렸을 때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받은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범죄율이 가장 낮은 민족은 유대인들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극복하는 비결, 위기를 이기는 방법,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길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서로 교제하던 남녀가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사주궁합을 보았습니다. 결과는 하늘이 맺어준 천상배필이고, 찰떡 궁합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날부터 틈만 나면 찰떡을 사먹었습니다. 약혼식 때도 축하 케이크 대신 찰떡으로 케이크를 만들고 먹었습니다. 결혼식 때도 일부러 찰떡을 만들어 대접하고, 자기들도 먹었습니다. 신혼여행가서도, 신혼살림을 차리고 난 후에도 찰떡을 일부러 먹었습니다. 찰떡처럼 달라붙어 찰떡 궁합으로 살자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면서부터 부부싸움이 시작되었는데 초저녁에 시작한 싸움이 새벽까지 계속됩니다.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도 않은 채 싸웁니다. 쉬는 날이 되면 마주 바라보고 앉아 하루 종일 싸웁니다. 이유는 찰떡을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찰떡으로 찰떡궁합이 됩니까? 점쟁이나 관상쟁이가 찰떡궁합이라고 한다고 해서 부부가 행복해집니까? 성공, 행복, 평안히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7:44을 보면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고 했습니다.
성공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행복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그 길과, 방법과, 해결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시맨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그는 나이도 모르고, 시간도 모르고, 돈도 모르는 무공해 인간이었습니다. 출연료로 받은 돈을 버리거나 땔감으로 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부시맨의 주인공 「니카우」는 점점 생선회를 먹고, 담배를 피우고, 통장을 만드는 그래서 돈을 알고, 세상을 아는 사람이 돼버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경제적 성공이 그의 정신을 망쳐버린 것입니다.
성공할수록 자기관리를 바로 해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수록 그 돈을 바로 써야 합니다. 권세를 잡고 출세할수록 그 권력을 바로 행사해야 합니다. 실패했다가 성공하는 것보다, 성공했다가 실패하는 것이 더 비참하고 힘든 것입니다.
중국 전체 인구를 12억 7천으로 봅니다. 그중 중산층을 2억 5천만으로 봅니다. 미국 인구와 맞먹습니다. 연간소득 6천불이상을 9천만 명으로 봅니다. 중국은 지금 올림픽을 앞두고 경제적 급성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덕적 타락과 정신적 몰락입니다. 돈버는 일이라면 안 하는 짓이 없습니다. 성공을 잘못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네 경우는 더 심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철저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부활 승리로 개선가를 불렀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성공은 십자가로 이뤄집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바로 믿고, 신앙생활 똑바로 잘하면 성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아멘.
실패와 성공
고흥식 목사
과거 러시아의 수도인 페체르부르크에 아까끼에 비치라는 노인이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언제나 거침없이 아주 고급 외투를 입어 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옷을 입고 고급 사교 파티에 가서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동안 일을 해서 모은 80루블을 가지고 꿈에 그리던 그 외투를 샀습니다. 그가 그 평생의 목적을 이룬 날 그는 크게 기대하고 흥분이 됐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외투를 사 가지고 집에 오다가 그만 강도를 만나서 그 비싼 고급 외투를 강탈당했습니다. 그 노인은 매우 절망했습니다. 단순히 외투를 강탈당한 것이 아니라, 성공을 강탈당한 것이고, 행복을 강탈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 그는 시름시름 앓다가 속상한 인생이 되어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페체르부르크의 추운 겨울이 되면 이 거리에 노인의 유령의 비명 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들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고골리( kogoli)의 단편 소설「외투」라는 책의 이야기입니다. 이 노인의 목표는 고급 외투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어떤 사람은 열심히 돈을 벌어서 좀더 좋은 집이나 아파트에서 사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는 평생 아주 좋은 차를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출세에 총력을 기울이기도 합니다. 한국 사람은 우리 조상이 원님이었다든지, 참판이었다든지, 자신이 장관의 사촌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자리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가 그 자리에 무슨 기여를 했습니까? 그냥 자리 자체는 무의미합니다. 이처럼 소유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릭 프롬(Eric Fromm)이라는 심리학자는 “소유에 행복이 있지 않다. 행복은 존재에 있다. 행복은 바로 나라는 존재 실존에 있다.” 오늘 나의 존재 즉,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본문이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 있든지 그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기만 하면 그 사람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전류에 의해서 생기는 자기를 연구하는 것을 전자기학( 電磁氣學 electromagnetism) 이라고 합니다. 이 부문의 세계적 대가가 마이클 패러데이(Michel Faraday)입니다. 그는 12살 런던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과학 책을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는 당시 유명한 화학자인 힘프리 데이비의 강연을 듣고, 그의 밑에서 과학 공부하고 싶어서 편지를 썼습니다. 그 선생님은 빈 병을 닦는 일을 먼저 해보겠냐는 제안을 했고 그는 조수로 채용됐습니다. 그는 조수로 채용된 그날부터 얼굴에 한번도 상함이 없었고, 항상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성실하게 빈 병을 닦았고, 그것을 본 화학자는 자신의 지식을 그 제자에게 다 남겨줬습니다. 그래서 훗날 전자기학의 대가가 됐습니다.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을 소홀히 하면, 쫓겨나고 실패하게 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우리가 가정에서나 하나님의 성전에서 작은 일이 맡겨졌을 때 충성하는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작은 일에 충성하면 인정받고, 큰 일을 맡겨 주십니다. 본문의 말씀은 인생이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성공의 인생으로 사는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를 세 가지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이 세상은 풍랑 때문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바울이 마침내 로마로 가게 되는데, 지중해를 지나는 중에 무서운 태풍인 유라굴로를 만나게 됩니다.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14)”
이때 그들이 탄 배 알렉산드리아호에 276명이 있었는데 로마군인, 무역상, 여행자 등이 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순풍에 돚단 듯 갔지만 갑자기 태풍이 붑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더니(13)”
“갑자기 유라굴로 광풍이 대작하니(14)”
“바람에 밀려 쫓겨가다가(15)”
“그냥 쫓겨가더니(17)”
태풍에 밀려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쫓겨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의 모습은 세상 풍파 바람에 대책 없이 쫓겨가고 있습니다. 일에 쫓기고, 사건에 쫓기고, 사업실패와 가정실패로 쫓기고 있습니다. 갖가지 고통과 질병에 쫓기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심적 고통, 환경적 고통, 육체적인 고통으로 쫓기고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부터 이기려고 애써봅니다.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18)”
‘심히 애쓰다’는 것은 이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기 위해, 망하지 않기 위해, 일어서기 위해서 애썼다는 것입니다.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지만 속수무책입니다.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18)”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19)”
소중히 여겼던 물질도 버릴 날이 오고, 필요한 도구 모두를 던져 버릴 수밖에 없는 날이 올 때 인생의 참 실존을 깨닫게 됩니다. 평상시는 그렇게 될 줄 몰랐는데 이제 이 풍랑에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이 생명 하나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도 엄격히 보면 우리가 유지시킬 수 없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인생의 참 실존은 전능자이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912년 당시 세계 최대 호화 여객선이었던 타이타닉호에 탔던 513명이 사망했습니다. 빙산에 부딪혀서 가라앉을 때 그 배 안의 온갖 보화들, 값비싼 가구, 호화스런 장식은 물에 잠겼고, 저명인사도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타이타닉호가 통채로 꺾여 바다 속으로 잠기고 있는데 아무것도 건질 수가 없습니다. 침몰하기 전에 빙산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무전으로 6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배의 선장은 “이 배는 하나님께서도 가라앉게 못하신다”고 하면서 그 경고를 무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35분 뒤에 그 배는 침몰되기 시작했고, 결국 타락의 항해가 되고 말았습니다. 현대인의 모습도 죄와 탐욕의 바다를 거침없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닥치는 풍랑에 침몰하고 마는 것입니다.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20)”
이 세상을 살면서 풍랑 때문에 쫓겨가야 하고, 풍랑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하고, 풍랑 때문에 물질도 소중한 것도 다 버려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에서 인생의 모습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통해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아프리카를 분할해서 갖고 있던 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다이아몬드와 갖가지 금궤를 만들어서 본국으로 싣고 오던 그날, 런던항에서 불과 몇백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좌초하게 됩니다. 그 배안에 있던 사람들이 긴급구조로 항구로 구조를 요청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 죽었습니다. 그런데 빠져 죽게된 원인이 몸에 지니고 있었던 금궤 때문이었습니다. 그 무게 때문에 수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단잠은 살 수 없고, 책은 살 수 있지만 두뇌 지식은 살 수 없습니다. 음식은 살 수 있지만 식욕은 살 수 없고, 장식품은 살 수 있지만 아름다움은 살 수 없습니다. 약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고, 집은 살 수 있지만 행복한 가정은 살 수 없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는 살 수 있지만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돈과 명예 그리고 출세를 따라 가다가, 비참하게 비극적인 인생으로 끝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2. 믿음으로 이 세상을 승리로 살 수 있습니다(23-25).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위의 말씀대로 힘써도 안되고, 애써도 안되고, 물건과 기구를 다 버려도 안됩니다. 절망에 쫓겨가는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 내가 건져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살길이 열리고 위기가 물러갑니다.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 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요 6:16-21)“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는 중에 풍랑을 만난 사건입니다. 제자들의 노력과 경험이 무력했지만 물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이 “내니 두려워 말라 (It is I; Don't be afraid)"라고 한마디 하셨을 때 풍랑은 잔잔해졌고, 절망은 희망으로, 실패는 성공으로 바뀌었습니다.
미국 연방수사국 FBI가 조사한 내용을 보면 수감죄수 중 96.3%가 어릴 때 신앙 교육을 받지 못한 것으로 나왔습니다. 전세계에서 범죄율이 가장 낮은 나라가 유대인들인데 그 이유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실패 극복의 비결, 위기를 이기는 방법,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길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교제하던 남녀가 결혼을 앞두고 사주궁합 점을 봤습니다. 결과는 하늘이 맺어준 천상배필로 찰떡궁합이라고 했습니다. 그날부터 그들은 찰떡을 사먹었습니다. 결혼식도 찰떡을 만들어서 대접하고, 신혼여행 가서도 찰떡을 먹었습니다. 찰떡궁합으로 살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런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부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초저녁부터 시작해서 새벽까지 계속 싸웠습니다.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은 채 싸웠습니다. 쉬는 날이 되면 마주 앉아서 하루 종일 싸웠습니다. 점쟁이나, 관상쟁이가 찰떡궁합이라고 해서 행복한 부부가 될까요? 여러분 어디에서 참 행복과 성공이 보장됩니까?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44)”
행복과 평안, 성공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생의 길이 있고, 해결책이 있습니다. 세상물질을 따라가다 보면 비극적인 인생이 되고 맙니다.
부시맨 영화의 주인공은 재물도, 돈도, 시간도 모르는 무공해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출연료로 받은 돈으로 불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점점 세상물질을 알아갔습니다. 담배와 쾌락을 즐기게 됐고, 그의 정신은 망쳐버렸습니다. 행복했던 자아가 불안의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을 보고, 자기 생애를 망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할수록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수록 그 돈을 바로 써야 합니다. 그리고 출세할수록 그 위치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실패했다가 성공하는 것보다, 성공했다가 실패하는 것이 더 비참하고 힘든 고통입니다.
중국인의 13억의 인구 중 중산층이 2억 5천만입니다. 연간 6000불 이상의 사람이 9천명입니다.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정신적인 타락과 도덕적인 붕괴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돈 버는 일이라면 안 하는 것이 없습니다. 성공을 잘못 다룬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행 16:31)”
이 말씀을 통해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명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연쇄적으로 가족과 가정이 연쇄적인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뿐입니다.
미국 가는 길은 많이 있습니다. 배, 비행기 기타 다른 것을 통해서도 갈 수 있습니다. 직접 갈 수도 있고, 일본을 경유해서 갈 수도 있고, 제 3국을 거쳐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미국에 가려면 비자가 있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천국 가는 길, 구원받는 길,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 하나님의 자녀로 복받고, 사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뿐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를 사해 주시고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 후에는 생활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간증거리가 생겨나고, 중계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은혜 받은 사람으로 용어가 달라집니다. “할렐루야, 아멘, 은혜, 감사, 구원, 하나님의 역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또한 태도도 달라집니다. 겸손하고 부드러워지고, 평안해집니다. 가끔은 그 반대의 경우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직분이 있고, 교회에 다닌 지 오래 되도, 행동이 거칠고, 난폭한 성격이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형성이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가정이 평안해지고 행복해집니다. 이것은 떼돈을 벌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은혜 받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교회 다니면서도 은혜 받지 못하고 늘 걱정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퇴직금을 몽땅 주식에 투자해서 예배 시간에도 휴대폰을 켜 놓고, 주식을 들여다보며 올라가면 웃고, 내려가면 한숨을 쉽니다. 기도하려고 눈을 감으면, 주가표가 떠올라 “주여! 주식이 올라가게 하옵소서!”라고 외칩니다. 찬송을 부를 때도 “주님! 주식의 뜻을 이루소서!”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주식이 주인이고 주식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은 남편이 코스닥에 상장되고 돈을 벌면서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고, 아들, 딸은 청바지를 찢어 입고, 머리는 천연색으로 만들어서 가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인은 화병으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 집은 성공이 화근으로, 출세가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Belive in the Lord Jesus You will be saved you and your household!
현대 가정 위기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살고, 신앙 고백하면 가정에 기쁨과 행복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없는 국가는 지옥 같고, 반대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은 초막이라도 궁궐 같은 천국이 됩니다.
더 놓음으로의 인도
이정익 목사
하나님이 바울을 선택하셨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바울을 선택하셔서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여 양육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로 부르신 후에는 일일이 간섭하시고 동행하시고 방향을 지시하시며 인도하셨습니다. 선택받음은 은혜이고 축복이고 행운입니다. 단 택함 받은 사람은 간섭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내 자식은 부모가 간섭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도 간섭하십니다. 왜냐하면 더 넓은 세상으로, 더 높은 세계로, 더 깊은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마침내 로마로 갑니다. 더 넓은 세계로, 더 높은 세계로, 더 큰 사명을 펼칠 로마로 떠납니다. 그런데 로마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마침내 몇 단계를 거쳐서 로마로 갑니다.
죄수와 함께
1절을 보면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가기로 작정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로마로 가라고 계시하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전도하는 것을 최대의 꿈으로 비전으로 여겼습니다. 마침내 그 뜻이 실현되었습니다. 그래서 꿈에 그리던 로마로 갑니다. 그런데 로마로 가는 바울 일행이 페리호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호화여객선을 타고 간 것이 아니고 아주 초라하게 갑니다. 1절을 보면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백부장 율리오의 인솔로 갔다”고 했습니다. 이 배에는 모두 276명이 탔습니다. 그중에는 죄수들도 함께 했습니다. 이 죄수들은 이미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들로 로마로 가서 원형극장에서 짐승 떼와 싸워 밥이 되거나 찢겨져 죽을 눈요기 감이 되기 위해서 가는 죄수들입니다. 바울도 전도하다가 고발당했는데 로마로 가서 재판받겠다고 상소해서 지금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죄수신분쯤은 문제가 아닙니다. 로마로 가서 법정에 서서 전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를 보면 전도자들은 죄수의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오늘도 전도할 때 죄인 취급을 당합니다. 비웃습니다. 조롱합니다. 비난합니다. 그래서 선교지에서는 신분도 바꿉니다. 때로 수난도 당하고 봉변도 당합니다. 모두 예수 때문에 당하는 죄수 아닌 죄수처럼 해야 전도가 가능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피를 흘리고 순교도 당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초창기 복음이 들어왔을 때 모든 여성들은 숨죽이고 죄인 심정으로 교회에 나갔다. 그러면 집안에서 얼마나 죄인 다루듯이 취급했는지 모릅니다. 내쫓기도 하고 매를 가하기도 하고 욕을 먹기도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유교집안에서 장남이 예수 믿고 신학교 간다고 호적에서 파내지고 내쫓김을 받은 목사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난 후에 그 집안도 복음화가 되었습니다. 초창기에는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지금 죄수가 되어서라도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당시 로마로 가는 것은 죄수로 가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얼마든지 편안한 수단으로 로마에 갈 수 있도록 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구지 이 길을 택하게 하셨습니다.
파선
바울이 지금 로마에 가는 것은 순전히 전도하려는 목적뿐입니다. 그것도 성령의 계시를 받고 가는 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에게 순탄한 길을 주셔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은 바울에게 그렇게 해 주셔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지금 하나님을 위해서, 복음전파를 위해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은 넓고 큰 꿈을 안고 로마에 가서 전도할 비전을 가지고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험난했습니다. 바울이 탄 배가 로마로 가던 도중에 파선합니다. 14절을 보면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 유라굴라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20절에 “여러 날 동안 해도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 구원의 여망이 보이지 않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보름동안을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배가 표류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바울을 훈련하고 계십니다. 바울에게 아직도 훈련이 더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회심 후 눈코 뜰 새 없이 1차, 2차, 3차 전도여행 통해 온갖 어려움 다 경험했습니다. 행 14장을 보면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돌에 맞아 실신한 적이 있습니다. 행 16장을 보면 빌립보에서 귀신 내쫓았다고 고발되어 군중에게 매 맞아 죽을 뻔도 했습니다. 행 21장을 보면 바울을 죽이려고 훈련된 사람이 40명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거기다 굶주림과 헐벗음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 등 모진 훈련을 다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훈련이 더 필요했던 가 봅니다. 하나님은 모질게도 바울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것은 로마로 가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신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무엇이나 순탄한 것이 없습니다. 인생행로도 살펴보면 결코 평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아도 결코 평탄하지 않습니다. 형통을 구해도 소용없습니다. 아예 인생의 행로에는 형통이란 없습니다. 또 복음전파의 과정에도 평탄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모두 형통하고 평안하리라고 기대하면 안 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모든 일이 형통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 바울은 큰 뜻을 품고 꿈을 가지고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분임에도 지금 복음을 전하고자 가고 있는 그 길을 평탄케 하지 않고 죽음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 광풍이 유리굴라고 했습니다. 유리굴라 라는 말은 동풍과 북풍을 의미하는 합성어 입니다. 이 바람을 당시 사람들은 유리굴 이라고 불렀는데 우리 표현으로 말하자면 “광풍” 미친바람 즉 죽음의 바람입니다. 이 바람이 배를 뒤집어엎고 바울 일행을 보름동안 유례없는 고난의 길로 내 몰았습니다. 때로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오해할 때가 생깁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데 왜 평안하게 형통하게 안 해주나 하는 오해입니다. 요즘 기도도 조금하고 헌금도 조금하고 봉사도 조금했는데 하나님이 왜 안 알아주시는가 하고 샐쭉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시험 들기도 합니다. 그것이 오해입니다.
바울은 지금 성령께서 로마로 가라고 해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관광 가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의 가는 길에 형통을, 평안을, 순조로운 길을 마련해 주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파선 했어도 바울이 타면 형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이 보름동안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고 밤낮 해도 달도 보이지 않게 파선해서 사지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얼마나 혼비백산 했는지 20절을 보면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그때 겁이 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때로 이렇게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요즘 내가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데 어느 날 큰 병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의문이 발생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병을 주시는가, 왜 이런 실패를 주시고 고난을 주시는가” 그래서 의기소침하고 시험 들고 용기를 잃게 됩니다.
바울은 전도하는 과정에서 헐벗고 주리고 고난당하고 몸에 병까지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쳐달라고 기도했는데도 안 고쳐 주셨습니다. 오히려 그대로 좋으니 더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가는데 일주일이면 갈 곳인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40년 걸려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목사가 되면 되자마자 탁월한 언변을 주시고 초능력을 주시고 신유의 능력도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기대를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야합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려면 몇 가지 먼저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반드시 평안하고 호화롭고 형통하는 것만 좋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형통이 좋은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들을 이렇게 훈련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주 쉽게 평안하게 아스팔트길로 인도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이 로마로 전도하려 간다고 초수단, 초능력, 모든 과정을 무시하고 쉽게 보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바울이 교만해질 까봐 몸에 병을 주셨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에 가면 바울은 순교해야 합니다. 바울이 너무 쉽게 가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보름동안 바다의 캄캄함 속에서 헤매는 훈련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우습게 여기고 감상적으로 생각하고 동정심을 유발하여 움직이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값싼 은혜를 구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바울 하나님 만남
바울은 그때 파선해서 보름동안 모진 훈련을 받으면서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길은 분명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인데, 이 길은 주께서 분명 가라해서 가는 길인데 왜 이러시나 하고 의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다 바울이 마침내 그 해답을 얻었습니다. 22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니라, 네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젯밤에 내게 말씀하시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느니라, 그러니 너희는 안심하라.” 우리들이 대부분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신앙생활 시작할 때, 도중에 또 한 번 만나고 또 여러 번 만난 경험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번 만나는 그런 만남은 아닙니다. 여러 번 만나야 합니다. 기도 속에서, 찬양 속에서, 꿈속에서, 일상의 생활 속에서 여러분 순간 마다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때나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평상시에 만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평안할 때, 건강할 때, 잘 살고 있을 때 만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는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게 문제가 있습니다. 목이 마르지 않은 사람은 물을 찾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병원에서 미리 가서 진단받지 않습니다. 평안하고 건강하고 아무 일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오셔도 모릅니다. 문제가 내게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건강이 악화되면 꼼짝없이 병원에 갑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간절히 찾고 사모하면 하나님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그 간절히 찾고 사모하고 필요로 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이 넘어졌을 때이고, 아플 때이고, 배고플 때이고, 실패했을 때입니다. 그 때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절실하게 필요로 합니다. 만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니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로마로 가던 사람들이 보름동안 파선하여 굶고 잠 못 자고 사경을 헤맸으니 얼마나 절박한 순간입니까. 그때는 인간의 영감이, 지혜가, 감각이, 생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눈이 뜨이는 순간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바울에게 계시로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결코 다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너는 반드시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 그러니 그때 바울이 얼마나 자신감이 생겼겠습니까. 다메섹에서 나타나셨던 주님이 오늘 이 절박한 순간에 또 나타나셔서 안심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수들과 276명 앞에 서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권위 있게 진정을 시켰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얼마나 안심하고 소망을 가지게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바울은 그 순간 로마로 가는 길에 그 어떤 두려움도 가까이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자신감을 얻고 신앙의 높은 경지에 들어갔겠습니까. 살아가는데 고난, 풍파, 실패, 괴로움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 시간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이 신앙의 깊고 높은 경지를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신앙인에게는 그런 영적 경험들이 쌓여야 순도 높은 신앙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사업에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알아주었습니다. 부르는 곳이 많았습니다. 여기저기서 동창회장하라 단체장하라고 했습니다. 또 여기저기서 인터뷰도 요청했습니다. 그분은 장로였지만 장로직은 사치였고 액세서리였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잠간 예배드리고 이곳저곳으로 불려 다니고 가서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할 때는 내가 이렇게 해서 성공했다 하고 나를 강조했습니다. 그런 생활이 언제나 계속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인생의 길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부터 사업이 기우뚱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부도가 났습니다. 그러니까 그 많던 사람들이 다 떠나갔습니다. 혼자뿐이었습니다. 배신감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캄캄한 밤에 혼자 앉아 기도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밥을 굶어가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가 진짜로 멀리 계시던 그동안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고백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다 잃고 나니까 나를 만나 주시더라.” 하나님은 참 묘한 분이십니다.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다가오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파선 중 평안함
바울은 파선 중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그 와중에도 계시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밤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서 떨며 보낼 때 바울은 그 밤을 얼마나 환상 속에서 보냈겠습니까. 그래서 날이 밝자 바울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외쳤습니다. 22절을 보면 “여러분이여 이제는 안심하십시오, 당신들 한사람도 생명에는 아주 손상이 없을 것이요, 하나님의 천사가 어젯밤에 내게 말씀하시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소,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십시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소.”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멋은 이렇게 위기 때 발생합니다. 계시 받은 사람은 이렇게 멋이 있고 용기가 있고 평안함이 있고 자신감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멋입니다. 신앙 체험자는 이렇게 자신감이 주어집니다. 그때 주어지는 것이 평안인데 그 평안이 “에이레네” “영적 평안, 즉 죽음을 초월하는 평안”입니다. 그 평안은 영감, 계시,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주어지는 평안입니다. 신앙이 주는 이 평안은 내 운명, 내 목숨, 나 자신을 모두 하나님께 맡길 때 주어진 결과의 선물입니다.
바울은 드디어 로마로 갑니다. 바울 앞에는 이제 더 많은 고난이 기다릴 것입니다. 그 고난들을 다 이기려면 바다에서 파선한 경험이 주효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파선했을 때 주어졌던 평안이 수난당할 때마다 바울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전지훈련을 다시 한 번 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모질게 훈련하신 것은 그로 하여금 더 넓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의 여망이 없을 때
신성종 목사
인생을 살다보면 구원의 여망이 다 사라지는 절망적인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이런 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됩니다.
세상의 유명한 분들을 보면 일생에 몇 번 구원의 여망이 없는 위기에 처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공의 비결이었습니다.
오늘은 바울의 경우를 살펴보면서 그 해답을 찾아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구원의 여망이 없어지는 경우는?
(1) 20절 초두에 보면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할 때]에 구원의 여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오늘의 우리들에게 적용한다면 비전이 전혀 없을 때에 구원의 여망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러 날 동안 낮에도 해가 보이지 않았고, 밤에도 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비가 그칠 기미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수신호정도인데 다른 배들이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 말로 표현하면 전혀 비전이 없는 경우 구원의 여망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2) 20절 중반 절에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뭔가 문제가 해결 되어 가면 구원의 여망이 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문제가 그대로 있을 때에 구원의 여망이 없어집니다.
바람은 항상 불지를 않습니다. 불다 말다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경우는 바람이 계속해서 부는 것입니다. 도무지 바람이 그칠 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행은 절망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3) 저 개인의 체험으로는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함께 하실 때에는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는] 모든 것이 절망적이 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십자가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병정의 창이나 칼이나 심지어 십자가위에서의 뜨거운 햇볕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일생을 항상 동행하였던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침묵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십자가 위에 버리셨을 때 주님은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4) [믿음과 소망이 없을 때] 구원의 여망은 사라집니다.
저는 6.25때 아버지는 국민병으로 가시고, 13살 난 제가 가정을 이끌어 가야하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를 때 저는 정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믿음이라도 있었으면 참을 수도 있고, 천국의 소망이라도 있었으면 그런대로 참고 견딜 터인데 그런 소망도 제게는 없었습니다. 정말 자살하고 싶었습니다.
한번은 길을 잃고 돈은 떨어지고 얻어먹기는 해야겠고, 그래서 각설이 타령으로 밥을 구걸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도 오래 되어 잘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때 배운 것 한 절만 하겠습니다.
(예 화) “품바, 품바, 품바, 품바. 어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저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올해도 죽지 않고 또 왔네, 한 푼 줍시요”.
2. 구원의 여망이 없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우리가 처한 [위기의 원인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위기는 깨달음에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21절에 보면 바울은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고 지적했습니다.
바울의 말은 듣지 아니하고, 선주의 말만 듣고 떠난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었습니다. 행27:9절에 보면 바울이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저희를 권하였다고 했습니다.
물론 바울은 어부출신도 아니고, 일기예보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선주는 풍랑이 많은 계절인데도 불구하고, 돈 버는 것만 생각하고, 항해를 강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그 위험이 오는 것을 알았을까요? 그것은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지적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경험이나 지식만을 의지하지 말라. 그것이 바로 위기를 가져온다는 것을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의 지혜와 경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2) 절망 속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구원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22절에 보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고 오직 배뿐이니라”. 바울은 구원의 소망을 주면서 안심시켰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어떻게 바울은 그 위기의 정도를 알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예언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점장이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위기를 알았을까요?
바울이 이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23-24절에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들을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이 구원의 소망을 가진 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한 확신과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과 세 번째는 사명이 다 할 때 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3) 25절에서 우리는 바울의 확신의 근거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에 대한 절대적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5).
하나님은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우리가 흔히 언약의 책, 그래서 구약(옛 언약), 신약(새로운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이 언약은 축복을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언약은 주님의 재림의 언약을 제외하고는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점일획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루집니다. 믿습니까?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구원을 받게 되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1)먼저 우리를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부터 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사명은 감사입니다. 입으로 감사하고, 찬송으로 감사하고, 물질로 감사하고, 섬김으로 감사하고, 몸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감사는 구원받은 백성의 첫 번째 반응이요, 부르짖음입니다.
(2)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건망증을 많이 보는데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또 위기를 당하고, 또 위기를 당합니다.
(예 화)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시외버스 정거장에 큰 돌이 하나 서있고, 거기에는 [잊지 말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2차 대전 때 홀로코스트, 600만 살해사건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건망증은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의 시작입니다.
(3)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 야 합니다.
인간의 생명의 가치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에만 빛이 나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고 했습니다.
맺는 말
우리에게 때때로 구원의 여망이 없는 절망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야웨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이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입니다. 위기가 왔을 때, 구원의 여망이 없을 때 이 말씀을 굳게 잡고 승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양향모 목사
“인생은 풍랑이 이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삶이 언제나 평탄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시시때때로 순풍이 불기도 하고 광풍이 불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풍랑이 있는 바다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바다나 강의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처음으로 인간을 심판하시는 것도 이 비와 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가던 요나도 이 풍랑을 만나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앞을 가로막은 것도 홍해와 넘실거리는 요단강 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를 노아 방주와 같다고 말합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죄로 인한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 유유히 떠서 천국 항구까지 우리를 싣고 가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는 구원의 방주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 가게 하시면서 그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여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런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여러 교훈을 받습니다.
복음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서라도 많은 사람에게 전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이 복음을 듣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교훈을 받습니다. 세상이 어렵고 신앙생활이 힘들지만 복음을 믿는 믿음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구원받게 하는 너무 귀한 것임을 알게 합니다.
지난 시간에 바울 일행은 미항을 떠나 뵈닉스에 가려는 여정에서 유라굴라라고 하는 광풍을 만나서 배의 모든 짐을 다 버리고 배의 중요한 기물까지도 다 버렸지만 구원의 여망마저 보이지 않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다 죽게 된 사람들이 바울에게 목숨은 잃지 않고 다 구원을 받게 된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 본문 말씀에 바울이 그 배에 탄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바울이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오늘 설교 제목을 “여러분이여 안심하라”라고 정했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다가 보면 이런 광풍을 만나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진 절망적인 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에게 하신 “두려워 말라”라고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라고 하신 말씀도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이 어렵고 힘들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안심하라고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본문 21-22절에 “21.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진 후에 오랫동안 먹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니까 뭘 먹을 겨를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들 뱃멀미를 해서 먹을 수도 없었을 것이고 양식도 최소한의 것만 남기고 다 벼렸을 것이기 때문에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있을 때 바울이 일어나서 말합니다. 그때 배에 탄 사람들의 형편들을 상상해 보면 그들에게 일어서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납니다. 여기저기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선장 나오라고 해 책임자 나오라고 해 왜 우리를 이런 지경으로 만들었어 이러고 있지 말고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대책을 만들어 내라....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화풀이를 할 것인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담대하게 바울이 일어서서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먼저 그들의 잘못을 질책합니다. 그레데(미항이 있는 섬)에서 떠날 때 내 말을 듣고 떠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내 말을 듣지 않고 떠나서 이런 고생을 하게 되었다고 질책합니다.
안 그래도 지금 화가 나 있고 누구에게라도 화풀이하려고 그 대상을 찾고 있는데 바울이 일어나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으면서 꾸짖고 있습니다. 그냥 그런 잘못을 지적하지 말고 좋은 말만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마음에 상처가 되겠지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래야 잘못을 깨닫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도 무엇을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그냥 용서해주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그때마다 매를 들고 훈계를 하는 것은 잘못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고 고통스러운 일임을 아시기 때문에 그냥 사랑하는 마음으로 덮어주시고 용서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먼저 질책을 하시는 것은 우리가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럽더라고 꾸지람을 듣고 또 때로는 징계를 받음으로써 다시는 그런 잘못들을 저지르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에도 반드시 이런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회개가 없는 믿음이란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에 대한 회개가 있어야 다음부터는 바른 삶을 사는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는 안심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잘못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안심하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 비록 짐과 기구들은 다 포기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목숨만은 구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살다가 보면 잘못 판단하여서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길로 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길로 갔을 때 얼른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키면 되는데 끝까지 그 길을 고집하면 어려움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채찍을 들고 깨닫게 하십니다.
처음에 화물을 잃는 것처럼 가진 재물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배의 항해에 꼭 필요한 기물을 포기하는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건강을 잃게 되기도 합니다. 육신이 병들기도 하고 먹고 사는 문제까지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어려움을 당할 때 얼른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싸인을 보내주시고 기회를 주실 때 얼른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 신호를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잘못된 길로 갈 때 나중에는 구원의 소망마저 잃고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제가 초창기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닭 울음 소리를 듣고 사십니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설교 제목을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닭 울음소리를 듣게 해주셨습니다. 그 닭 울음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 닭 울음소리와 같이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호를 보내주십니다. 얼른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신호를 보지 못하고 계속 잘못된 길로 가면 더 큰 낭패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본문 23-24절에 “23.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배에 탄 사람들에게 이제는 안심하라고 한 것은 바울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여기에 대해서 무엇을 미리 알고 깨닫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바울도 안심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한 근거는 하나님께서 사지를 보내셔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소개한 것은 그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소개하기 위함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말이 확실한 말이고 나중에 확인하고 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 앞에서 복음을 증언하기 위함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이고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서 가이사 앞에 서야 하는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너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목숨도 구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세계만방에 전파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그 일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역사를 진행하시고 계십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셔서 그들을 사용하시고 그를 돕는 사람들에게 또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옛말에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실이 악하고 나쁜 사람과 함께 놀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악행을 보고 배우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좋은 일 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복을 받는다는 말일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 선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 즉 복음을 전파하려고 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 일에 쓰임 받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광성교회 성도님들에게 이런 복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최고로 알고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요즘 노회장이 되어서 벌써 여기저기 초청을 받습니다. 제가 부족하지만 노회장을 수락한 것은 기회만 있으면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오후에도 노회 교사연합회 헌신예배 설교를 합니다. 간사님이 설교 제목을 알려달라고 하기에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라는 제목을 알려주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 있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문자를 보내오기를 “제목 보고 교사들이 두려워 떨면서 듣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을 위로하고 힘을 실어 주어야 할 자린데 이런 본문을 보내줬으니 이런 말을 들을 만합니다.
설교주제는 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도를 비방 받게 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지어낸 말을 가지고 이득을 삼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거짓 선생이 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참된 교사들이 되라는 설교입니다.
우리는 이런 귀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귀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저와 우리 교회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아울러서 여러분이 물질적인 복도 받아서 이 귀한 일에 쓰임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일에 힘을 합할 때 여러분들도 영육 간에 복을 받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본문 25-26절에 “25.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순간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여서 모든 것을 잃고 이렇게 목숨마저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안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배에 탄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지켜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로마에까지 가서 가이사 앞에 서서 복음을 증언하여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도록 바울을 지켜주실 것이고 바울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목숨까지 건져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그 하나님의 믿기 때문이고 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이렇게 바다 가운데서 죽지 않고 한 섬에 걸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많은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성경은 온통 이런 약속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옛 언약을 기록한 책은 구약성경이고 새로운 언약을 기록한 책은 신약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통하여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의 약속대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우리도 의롭게 되고 부활하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새로운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이런 약속들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도 반드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잘못된 선택에 의해서 배를 타고 가다가 죽게 된 사람들에게 두려워 말고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반드시 한 섬에 이르게 될 것이며 그들의 생명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도 풍랑이 이는 험한 바다에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타고 가는 이 배는 구원선입니다. 아무리 태풍이 심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지켜주시고 천국까지 이르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담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을 기대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미래를 읽는 힘
강문호 목사
5분 후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역사를 변화시킬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1500년 후를 내다 보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급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 봄이라”(히 11;26)
바울은 수천년 후를 바라보았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내일을 바라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내일을 알기에 미리 미리 대처하면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동물들도 그리고 미물들도 내일을 보는 예지의 눈을 가졌습니다.
중국 스챤성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수십만마리 두꺼비들이 그 지역을 벗어나 이사 가는 장면이 목격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연현상이라고 방관하였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쥐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다람쥐가 새끼를 많이 낳으면 그 해에는 분명히 풍년이라는 것입니다. 동물들도 내일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은 몰라도 까치는 손님이 올 것을 압니다. 제비가 낮게 날면 비올 줄 알아야 합니다.
미래를 읽을 줄 알고 내일을 바라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내일 대비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읽는 힘의 별명이 있습니다.
초윤장산(礎潤張傘)이란 고사가 있습니다.
주춧돌 초(礎)자에 젖을 윤(潤), ‘초윤’ 즉 주춧이 젖어 있으면, 펼 장(張)자에 우산 산(傘), ‘장산’ 즉 우산을 펼치라는 뜻입니다. 주춧돌이 젖어 있다면 결국은 비가 올 징조입니다. 그러므로 미리 우산을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외출하려고 하는 데 주춧돌이 젖어 있으면 습기가 많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비가 올 징조이니까 우산을 준비하여 나가라는 것입니다.
조그만 징조를 가지고 내일을 바라보는 눈을 날카롭게 가지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조그만 정보를 가지고 뛰어난 분석력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한 발짝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미리미리 대비책을 강구하여야 합니다. 살아가다 보면 언제나 맑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바라보는 힘, 미래를 읽는 힘은 살아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입니다. 이런 힘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이를 우리는 통찰력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로마로 갈 때 배에서 14일 동안 풍랑으로 고통을 당할 때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망망 대해로 풍랑이 많은 겨울에 여행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바울은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미래를 읽는 힘이 있었습니다.
통찰력이 없으면 역사에서 퇴출당하게 됩니다. 시대에 뒤서게 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스위스 시계가 제일 좋은 것을 알았습니다. 1960년대 말까지 스위스는 세계 시계 산업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정밀 기계로 스위스는 최고였습니다. 스위스가 시계업계를 석권한 것은 백년 가까운 긴 기간동이었습니다. 스위스 시계를 따라 갈 나라가 없었습니다. 시계의 분침과 시침을 만든 것도 스위스였습니다. 방수시계를 세계에서 제일 먼저 만들었습니다. 자동태엽을 감는 시계도 세계 최초였습니다. 스위스는 더 좋은 시계를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투자하였습니다.
1970년 스위스는 세계 시계시장의 65%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익의 점유율은 8,90%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 후 10년 동안에 스위스 시계 산업은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80년 대 불과 10년 만에 스위스 시계 산업은 65% 점유율에서 10%로 떨어졌습니다. 이익률도 20%이하로 낮아졌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유는 꼭 하나 미래를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통찰력이 없었습니다.
스위스 시계업자들은 시계 산업이 기어, 베어링 같은 기계적 메커니즘에서 전자시계로 바뀌어 갈 것이라는 통찰력이 없었습니다. 세계는 점점 전자화되어 간다는 미래 지향적인 방향을 몰랐습니다.
반대로 시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가진 나라가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의 세이코사는 스위스 NEWCHATEL연구소에서 창안한 전자시계 아이디어를 헐값에 사들였습니다. 스위스 시계제조업자들이 쓸모없는 아이디어라고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 후인 1980년에 스위스 시계기능공 6만 2천명에서 5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스위스 같이 작은 나라에서는 끔찍한 재난이었습니다. 대신에 1968년 세계 시계 제조업 점유율 1%도 안 되던 일본이 세계시장의 33%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통찰력은 내일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바울의 통찰력은 바로 내일을 보는 정확한 눈이었고 적중하였습니다. 바울의 통찰력을 사람들이 무시하였기에 14일 동안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바울은 내일을 읽는 통찰력의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통찰력이 힘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보는 눈을 통찰력이라 부릅니다.
2. 이를 우리는 믿음이라 부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내일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내일은 믿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276명이 배를 타고 있었습니다. 14일 동안 심한 폭풍속에서 몹시 시달렸습니다. 생명의 위협속에 모두 초죽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 바울은 믿음으로 외쳤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내일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고 믿음으로 외칠 수 있습니다.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온 세상을 멸하시려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에서 산꼭대기에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지구 역사상 높은 산위에 배를 만든 사람은 노아 하나 뿐일 것입니다. 온 세상이 홍수로 덮일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깨서 그렇게 말씀하셨기에 그 말씀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일을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미국 캘리포니이 북쪽에 있는 미국의 신문왕 허스트 성 관광을 하여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신문사를 34개나 운영하였던 초인간이었습니다. 글자 그대로 신문왕이었습니다. 지금부터 10년 전에 15억 평을 샀습니다. 여름 피서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8년 동안 건설하였습니다. 여름 3-4 달 피서를 위하여 그렇게 많은 돈을 썼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서 불황이 닥쳐 오자 완성을 하지 못 하였습니다.
관광하는 데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부지런히 보아야 합니다. 수영장이 1천평입니다. 대리석과 금으로 된 타일이 즐비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각품, 미술품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집을 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 많은 돈을 사회 사업에 기부하였더라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 되었을 가요? 고아원, 양노원같은 복지 시설을 지었다면 수 천개를 설립하였습니다. 자기가 들어가 보지도 못 하는 큰 별장은 오늘날 시에서 운영하는 관광지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애석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을 이같이 수고하여도 헛 것입니다. 미래를 읽는 믿음의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알고 믿는 것이 미래는 보는 힘이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언젠가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믿습니다.
죽으면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것도 믿음으로 압니다.
그리고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는 것도 압니다.
하나님의 그의 크고 비밀한 일을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않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내일을 보는 힘입니다.
3. 이를 우리는 꿈이라 부릅니다.
바울은 꿈이 있었습니다. 바울 당시 세계적은 도시는 로마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였습니다.
바울을 로마에 복음을 심고 싶어하는 것이 당시 가장 큰 꿈이었습니다. 그러면 로마가 닦아 놓은 길로 온 세상에 복음이 퍼질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향한 꿈은 웅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꿈의 길, 로마로 향하고 있었기에 그의 발걸음은 항상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내일을 말할 수 있습니다. 꿈은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 모두를 구원시키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직 12 제자만 훈련시켜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꿈이 있는 사람은 내일을 말할 수 있습니다. 꿈을 말하는 것이 바로 내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가나안으로 부르시고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하나를 통하여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 가문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를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세 가지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땅의 꿈.
2. 민족의 꿈.
3. 메시야의 꿈.
그래서 아브라함은 늘 하나님이 주신 꿈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이 설교를 준비하게 된 동기는 피터 드래커가 쓴 <미래를 읽는 힘>이라는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드래커는 니체가 한 말을 빌려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탈피하지 않는 뱀은 죽는다.”
드래커는 늘 책을 저술하는 분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어 봅니다.
"선생님이 쓰신 책 중에서 가장 좋은 책은 어느 책인지 소개하여 주십시오.“ 이런 질문을 받고 나면 드래커는 거칩없이 대답합니다.
“다음에 나올 책이 가장 좋은 책입니다. 나는 늘 나를 극복하기 위하여 책을 씁니다.”
항상 꿈을 잃지 않는 것이 미래를 읽는 힘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드래커는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시간을 소비하는 존재다.”
그런데 어느 곳에 시간을 소비하느냐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꿈을 가지고 꿈을 향하여 시간을 소모하는 이에게는 미래를 읽는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꿈은 미래를 읽는 힘입니다.
4. 이를 우리는 영감이라 부릅니다.
바울에게 내일을 읽을 수 있는 힘을 준 것은 무엇보다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미래를 읽을 수 있는 힘을 주는 가장 큰 근원은 하나님의 영감입니다. 바울이 풍랑으로 초죽음이 되어 있는 276명 배 승객들에게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감의 말씀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옵니다.
무화과가 열매를 맺으면 여름입니다.
진달래가 피면 겨울이 지나간 것입니다.
감기가 짙으면 폐렴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미래를 읽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미래를 보는 힘을 우리는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1. 이를 우리는 통찰력이라고 부릅니다.
2. 이를 우리는 믿음이라 부릅니다.
3. 이를 우리는 꿈이라 부릅니다.
4. 이를 우리는 영감이라 부릅니다.
결론적인 이야기입니다.
미래를 보는 힘이 있어야 큰 사람이 됩니다. 내일을 바라보며 전진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어느 곳에서든지 핸드폰이 걸려 오면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시끄러운 곳에 있을 때 전화가 오면 전화기를 들고 조용한 곳으로 재빨리 피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뙜어. 소음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왔어. 이제는 잘 들려.”
그리고 대화를 시작합니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음성이 잘 들리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새벽 미명이면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그 곳에 바로 겟세마네입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유럽에 복음이 들어가지 않았을 때 바울이 제일 먼저 복음을 가지고 유럽의 첫 성 빌립보로 갔습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있습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조용한 곳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강가로 나갔습니다. 그 곳에서 모여있던 여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때 루디아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유럽 최초의 교회 빌립보 교회가 생겼습니다.
미래를 보는 힘은 역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생깁니다.
■ 어느 여인이 갑자기 경직성 분열증 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은 몸이 굳어져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 하고 꼼짝 못 하는 병입니다. 머리를 돌릴 수도 없습니다. 손발을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가만히 한 시간 두 시간 움직이지 않아도 조금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몸이 굳어졌습니다. 절망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옵소서! 이런 상태에서 인생의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내일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 되게 하옵소서.” 그에게 주님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기도중에 조각하는 이나 그림을 그리는 이들에게 모델이 되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조각가나 미술가가 원하는 모습으로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최고로 인기있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여기 저기 불려 다니기에 분주하였습니다. 자기를 모델로 수많은 작품들이 나왔습니다. 보람이었습니다. 약점을 강점으로 만들며 미래를 열어 갔습니다.
미래를 읽는 힘은 역시 주님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멋진 미래를 열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떤 남자가 점쟁이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손금을 보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손금을 보던 점쟁이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픔을 당하고 비참해 질 것입니다. 30세가 될 때까지는 가난할 것입니다.”
실망한 남자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30세 후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
점쟁이가 대답하였습니다.
“그 때는 가난과 아픔에 아주 익숙하여져 있을 것입니다.”
점쟁이의 미래를 보는 눈은 절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내일을 통하여 축복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바울은 절망한 사람들에게 미래를 읽는 힘을 준 사도였습니다.
바울의 통찰력이 그런 힘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믿음은 미래를 믿게 하였습니다.
바울의 꿈이 미래를 열어 주었습니다.
바울이 받은 영감이 내일을 열어 주며 276명에게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1-26)
두려워 말라
정필도 목사
사도 바울은 비록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명단에 들지는 않았으나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13권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든지 그가 머무는 곳마다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만일 그때 한국에도 사도 바울이 왔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생기고 교회가 세워졌을까 생각만 해도 무척 아쉽습니다. 교회사에 있어서 그는 참으로 위대한 사도였기에 오늘날도 사도 바울과 같은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반드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어하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바로 로마입니다. 그 당시 전세계를 다스리는 가이사 황제가 있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사도 바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죄로 유대인들이 그를 고소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바울이 탄 배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습니다. 광풍으로 인해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계속되므로 구원의 여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배에 승선한 276명의 선원들과 승객들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배에 탄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 22~25)』고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과연 이 말씀대로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관광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니요, 개인적으로 돈을 벌러 가는 것도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으로 가는 길인데 웬 풍랑입니까?
우리의 생각으로는 편안히 로마까지 가도록 풍랑도 잔잔히 하실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를 맞추어 유라굴로라는 큰 광풍을 불게 하셨습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이 광풍으로 인해 배와 물건들을 모두 다 잃어버리고 죽도록 고생을 했지만, 이 사건을 통하여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위대한 사도 바울이 전하는 구원의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수지 맞은 일입니까. 참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오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구약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요나 선지자가 탄 배가 심한 풍랑으로 인해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배에 탄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고생을 많이 하고 물질의 손해를 보았지만 풍랑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풍랑이 결과적으로 하늘의 축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큰 풍랑을 만난 배와 같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도무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모든 상황이 암담할 뿐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 사업이 잘 안되고 부도가 속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낙심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너무 속이 상하고 화가 나서 성질이 사나워지고 포악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큰 풍랑 중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잘 모르던 사람이 큰 풍랑으로 인해 강권적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그 풍랑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큰 풍랑 중에 회개하게 되고 부르짖어 기도하다가 큰 은혜를 받게 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면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큰 풍랑이 일수록 더욱 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더욱 잘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반드시 풍랑이 축복으로 바뀌게 될 줄 믿습니다.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불란서의 나폴레옹이 유럽을 휩쓸고 갈 때에 그의 장군 한 사람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의 한 국경 도시인 펠드리히를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도시의 주변 고지에는 수많은 불란서 군대가 진을 치고 쳐들어 갈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이에 펠리히드 시는 비상 시의회를 소집하고 불란서 군에게 미리 항복을 해서 피해를 방지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모든 시민들로부터 존경받는 교회의 사제가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부활절이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우리의 힘을 의지한다면 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예정대로 교회의 종을 치고 예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나머지 일은 하나님께 맡깁시다.”
시의회에서 그의 발언을 모두 찬성했습니다. 불란서 군대가 공격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교회에서는 기쁨에 찬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힘차게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들은 불란서 군인들은 밤사이에 오스트리아의 많은 지원부대가 도착한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하여 불란서 군대는 작전을 변경하여 오스트리아의 펠드리히 공격을 취소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그 결과 이 도시는 불란서 군대와 싸워보지도 않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1.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절대로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그 사람에게 묶이게 되고, 어떤 일을 두려워하면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그와 비슷한 일만 생겨도 두려움이 앞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결국 사단에게 묶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실패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일을 망칩니다.
여호수아 1장을 보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독일의 유명한 시인 괴테는 “인생을 실패하게 하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공포심이요, 또 다른 하나는 교만한 마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큰 풍랑 중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대했습니다. 평안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롬 10:17).
본문 24절을 보면 주님께서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담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아무 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민감치 못해서 그렇지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사야 41:10~13을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허무한 것같이 되리니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주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집안에 써 붙여 놓으세요. 확신이 들 때까지 읽고 또 읽으십시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 믿습니다.
2.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사단이 주는 생각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왠지 망할 것 같고, 죽을 것 같은 손해볼 것 같고, 꼭 암에 걸릴 것 같은 이런 부정적인 암시를 말합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일을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게 됩니다. 매사에 소극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고 자연히 되는 일이 없습니다. 괜히 사람들이 날 해칠 것 같고 속일 것 같고 내 욕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암시가 자꾸 떠오르면 사람을 경계하게 되고 미워하게 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격을 하게 되어 대인관계가 모두 파괴됩니다. 자연히 사람들과 관계가 좋지 않게 되고 원수가 됩니다. 결국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2절 이하를 보면, 이들이 겨우 발견한 섬에 도착하려 할 때에 배 안에 있는 죄수들이 몽땅 헤엄을 쳐서 도망할까봐 염려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군사들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는 생각으로 못하게 명했습니다.
군사들의 이런 생각이 바로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하마터면 엄청난 비극을 가져올 뻔했습니다. 매사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우울증에도 잘 걸리고 때로는 자살에 이르기도 합니다. 결국 비극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가이드 포스트>라는 잡지에 64세의 알렉산더 플루무어라는 사람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과거에 그는 아주 건강하여 병에 걸릴 걱정이나 근심이 없는 씩씩한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일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의사가 전립선암인 것 같다며 다시 정밀검사를 해보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심각하다고 얘기한 것도 아니고 아직 정밀검사도 하지 않았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마치 자신이 곧 죽게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그의 아버지도 그와 비슷한 나이에 전립선암에 걸려서 두 달만에 돌아가셨고, 그의 삼촌, 사촌, 집안 식구들이 줄줄이 암으로 죽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가 된 것 같았습니다.
그는 걱정과 근심으로 인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매일 하던 운동도 하지 않고, 사업도 다 정리하고 교회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와 가깝게 지내는 동생이 찾아와 “형님, 형님이 나보다 믿음이 더 좋은 줄 알았는데, 씩씩하고 자신 있게 살던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일로 그렇게 한꺼번에 망가집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힘없이 “그건 다 암에 걸리기 전의 일이야, 지금은 암에 걸렸기 때문에 모든 것이 끝난 거라구.”라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그는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미리부터 죽을 걱정만 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도전적인 자세로 병과 싸워 이겨보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항복하면 그 병에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의사의 말을 듣고 보니 그동안의 자신의 행동이 무척 한심해 보였습니다. ‘그렇지, 내가 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는가’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에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두려움은 물러갈지어다.” 하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 후 식사도 맛있게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며 다시 정상적인 활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급격히 줄었던 체중도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았더니 주치의가 기적이라고 하면서 상태가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 계속 지금처럼 생활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가서 기도하며 열심히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해보았더니 암이 온데간데 없이 다 사라졌으니 다시는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놀라운 통보를 받았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미리 겁을 먹고 죽는 시늉부터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낙심부터 하는 사람은 스스로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결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백해무익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게 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한다 해도 절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한 시골 청년이 캔자스 시티에 들어왔습니다. 출판사와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자기가 그린 만화를 실어달라고 부탁했으나 단 한 군데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힘이 쭉 빠진 그는 마침 주일이 되어 아무 생각없이 길거리에 가장 잘 보이는 교회로 찾아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조금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담임목사님이 이 청년을 보고 전후 사정을 들은 후에 교회 창고에서라도 자겠으면 일을 구할 때까지 묵으면서 교회 일을 해달라며 “결코 용기를 잃지 말게, 하나님이 자네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게”라고 격려했습니다.
교회 창고는 쥐들이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않고 먹을 것을 쥐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러자 점차 쥐들이 도망가지 않고 그의 눈치를 보면서도 먹이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쥐들의 습성을 자세히 그것도 가까이서 관찰하던 중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형상화했습니다. 그리하여 세계를 사로잡은 우리와 친근하고 얄밉고 귀여운 미키 마우스가 탄생한 것입니다. 한때 먹을 것도 없고 잘 곳도 없어 교회 창고에서 쥐들과 생활했던 이 청년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월터 디즈니입니다.
3.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주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큰 풍랑을 만난 분이 계십니까? 풍랑만 보지 마시고 말씀 한마디로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주님만 바라보면 살길이 열립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 앞에 아무리 큰 풍랑이 몰려온다고 해도 그 풍랑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풍랑이 거셀수록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그 풍랑이 오히려 큰 축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