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빌립보의 간수는 그 말을 어떻게 이해했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무엇을 믿었는가? 우리는 막연히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에 그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예수 믿는 것을 마치 절에 다니는 것처럼 교회 다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닌다고 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교인이라고 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신자라고 하며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삶을 닮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그분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안에는 여러 레벨의 신자들이 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한밤중에 일어난 사건 때문에 큰 감동을 입어 이렇게 외쳤다.
(행 16: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사도 바울은 지체함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빌립보 간수가 얻기를 고대했던 구원은 단순히 어떤 재난이나 위급한 상황의 문제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는 심한 매질을 당해서 깊은 토굴에 들어 온 바울과 그의 일행이 토굴 안에서 깊은 밤중에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걸 보고 깊은 감동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감옥에 갇힌 그들은 자유하고 그 감옥을 지키는 자신은 오히려 결박된 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깊은 밤에 천사의 방문으로 옥문이 열리고 족쇄들이 풀어져서 죄수들이 다 달아난 줄 알았는데 여전히 매인 것들이 다 벗겨졌는데도 도망가지 않은 것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외치고 말았다.
결국 선교사 일행은 진정으로 죄인이 아니었고 자기 자신이 죄인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걸 인식한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한 것처럼 죄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죄로부터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는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대속적 구원 곧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신 그분의 희생을 믿는다는 것이다.
구원에는 세 가지 국면이 있다. 첫째 죄의 정죄 곧 우리의 모든 죄로 인해 유죄의 선고를 받은 우리가 무죄 방면이 되는 구원이다.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속량하신 은혜로만 가능하기에 우리는 그분의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희생을 믿어야 한다. 두 번째 국면은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이다. 용서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도 그분처럼 사는 성화 된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 국면이다. 만일 누군가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믿어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죄 된 생활을 계속한다면 그의 구원은 죽은 믿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 번째는 죄악의 환경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죄악의 환경에 살면서 유혹과 시험을 받지만 언젠가는 더 이상 그런 유혹과 시험을 받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우리를 이 죄악 세상에서 데려가심으로 사단 마귀가 없는 온전한 세상에서 살게 하실 때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세 가지를 다 믿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주로 첫 번째, 곧 죄의 정죄로부터의 구원을 지칭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영역을 잘 이해함으로 예수 믿는 의미를 잘 알고 폭넓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많은 사람으로 주를 힘입어 사는 비결을 깨닫게 하시고 단지 교인이 아닌 신자 더 나아가서 제자 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